< 19. 극한의 이득 (2) >
***
순백의 피부. 금빛의 단발머리. 화성의 여성 평균보다 조금 큰 키. 미소 짓고 있지만 어딘가 살벌한 표정. 미인이지만 절대 착하게 생겼다고는 표현할 수 없는 얼굴. 상대를 현혹하려는 의도인지 살짝 드러낸 풍만한 윗가슴. 군데군데 하얀 살갗을 노출시키는, 주홍빛과 금빛이 섞인 개량 드레스.
금괴를 장난감 블록 다루듯 쓴 건지 배후의 책상에 피라미드처럼 쌓인 금괴들.
“재밌네요. 로페즈 씨.”
이 자리에서 그녀와의 대화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칼싸움을 하는 기분이다.
***
옵시디아몬의 별동연구소.
로페즈는 별동연구소의 연구자들과 함께 이동식 모듈화 콜로니의 테라포밍 유용성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고 있다.
“보통은 개척자 함대를 보내서 장시간에 걸쳐 행성을 테라포밍한 다음에 사람을 들이죠. 만약 유토피아를 이동시켜서 쓴다면···. 유토피아가 지금보다 훨씬, 훨씬 크게 확장된 다음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네. 그리고 개척자의 능력에 따라서 선택되는 행성의 가짓수도 천차만별이고요. 저희가 대규모 정찰선을 은하계 곳곳으로 뿌리는 게 아니라면 적합한 항성계를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예요.”
“그래서 필요한 게 은하계 지도인데 가진 입장에선 부르는 게 값이죠.”
로페즈는 묻는다.
“은하계로 지도를 만드는 회사도 있어요?”
“예. 있습니다. 항성계를 하나하나 직접 살펴보면서 지도를 제작하는 곳이 태양계 바깥 국가에 많습니다. 이쪽 태양계에서 관측할 수 있는 영역은 대부분 정리가 됐으니까요. 별이 어디에 있냐가 아니라 그 별을 중심으로 어떤 환경이 되어있느냐를 아는 거예요.”
“제일 중요한 건 중력입니다. 중력이 있어야 기체를 둘 수 있습니다. 중력이 약하면 핵에 무거운 원소를 넣는 수고로 엄청나게 돈이 깨집니다. 거대기업 수준의 자본이 없다면 감당할 수가 없겠죠.”
“중력이 너무 강해도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핵에 있는 무거운 원소를 퍼 올려야 합니다.”
“반면에 자기장은 크게 중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요즘엔 인공위성으로 싸게 커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이토가 돌아왔습니다. 다이토의 체내 트랜센던서도 서버에 통합되었습니다.」
로페즈는 적당한 타이밍에 일어선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듣고 있었네요.”
“아, 다시 올라가십니까?”
연구원들이 하나둘씩 로페즈를 따라 일어선다.
“더 쉬셔도 됩니다. 자유롭게 하세요. 저는 반드시 일정에 맞춰서 움직여야 하는 몸이라···. 하하. 5일 뒤에 공개될 만능 항체, 아주 기대하고 있다고 샌디 씨께 전해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살펴 올라가십시오. 회장님.”
3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그리고 때는 찾아온다.
***
로페즈는 회장실에 올라왔다.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일을 마주할 차례다.
“루비코에서 세타랑 만나고 왔어?”
- 그렇습니다. 세타의 인물 정보를 보시겠습니까?
“나만 보이게 띄워봐.”
어떤 여성의 사진과 함께 텍스트가 보인다.
「이름: 빈센트 세를린(Vincent Serlyn)」
「나이: 72세 (신체는 23세)」
「성별: 여성」
「장로회에서 세타라는 인물의 정체는 거대기업 미르니의 총수였습니다.」
로페즈는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미르니···? 진짜 미르니의 총수라고?”
- 미르니는 지금으로부터 49년 전, 목성 연합정부의 2550년에 기념적으로 설립된 심우주자원관리기관이었습니다. 당시 미르니는 공기업이었으며 말단의 현장직이었던 세를린은 사업 수완을 인정받아···
“그 사람 배경은 여러 책에서 언급되는 이야기야.”
지금의 태양계에서 가장 대단한 인물을 손에 꼽으라고 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올 사람이다.
- 현재 미르니는 기체자원, 광물자원, 자원제련 및 가공, 국가 간 자원무역 등을 주요 사업으로 삼고 있는 비공식 시가총액 860조의 거대기업입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읽은 책에서는 750조로 추정된다고 했는데···.”
진짜 거인이 나타났다.
“그 사람이 장로회의 ‘세타’라고?”
- 그렇습니다.
“미르니의 총수가 나한테 악감정을 갖고 있잖아.”
- 그렇습니다.
“어렵네···.”
- 다이토와 세를린의 접선 영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로페즈는 다이토가 그녀를 만나서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 확인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의 한마디 한마디를 음미하듯 살펴보았다.
결론은, 다이토가 세를린에게 이간질을 했다.
그녀의 플래닛 웨폰 투자를 망친 것은 옵시디아몬의 로페즈가 범인이라고. 안 그래도 ‘제타’라는 인물의 전쟁 계획과 가이우스를 망친 로페즈가 세타에겐 눈엣가시로 보였던 것이다.
세를린은 자기가 알아서 로페즈를 밟아버리겠다고 했다.
그렇게 결정된 후에 다이토와 세를린은 개인적인 이야기도 했다. 대충 앞으로 잘해보자는 이야기였는데, 한 가지 귀에 걸리는 내용이 있었다.
“다이토가 ‘공작의 정점’이라는 건 무슨 뜻이지?”
- 공작. 어떤 목적을 위하여 미리 일을 꾸미는 것입니다.
다이토와 공작이라는 단어 사이에 연결성이 보인다.
“다이토는 콜렉퍼레이션이라는 스파이 세력을 태양계 전체에 퍼뜨려놨어. 화성만 빼고.”
- 그렇습니다.
“그래서 공작의 정점이라는 것 같아. 장로회의 구성원들은 저마다 어느 분야의 정점에 오른 거야.”
- 합리적인 추측입니다.
“그럼 세를린 총수는 자원의 정점···? 뭐 그런 포지션이겠지. 그런데 세를린 총수는 세타잖아. 장로회에서 세타가 몇 번째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제타, 에타, 세타(빈센트 세를린), 요타, 카파, 람다(엔리코 다이토)」
- 11명의 구성원 중 8번째입니다.
“8번째 인물이 그런 사람이면···. 그 위로는 도대체 얼마나 괴물들이라는 거야?”
- 관리자님의 사고를 빌리자면 카르민펙토스 재단을 움직였던 감마는 생명공학의 정점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뭐 인공지능이나 신기술의 정점으로 고려되고 있다는 건가?”
-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 관리자님. 장로회의 구성원들이 개인마다 관리자님의 능력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장로회를 적대하는 것은 관리자님께 절대로 좋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은 집어치우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자신은 장로회를 이길 수 있는가?
못 이긴다.
자신은 장로회에 대해 전부 알고 있는가?
모른다.
자신은 장로회의 8번째 구성원인 빈센트 세를린 총수를 이길 수 있는가?
절대로 못 이긴다.
혼자서 다 격파하고 오르는 것에 한계가 있다.
“줄을 타야겠어.”
- 잘 선택하셨습니다. 제타, 세타, 카파, 람다. 이렇게 네 인물이 관리자님께 좋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장차 관리자님께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요소는 전무하게 됩니다.
- 지금부터 계획을 구성하시겠습니까?
“죽을 각오로 머리를 굴려보자.”
무대는 우주다. 상대는 미르니의 총수다.
뭔가 미리 예측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갖가지 상황을 예상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미리 결정한다. 한 가지 사건에서 시작되는 결과가 새로운 사건이 되고 그렇게 이어진 수많은 사고의 줄기가 거미줄이자 시뮬레이션이 된다.
이 일을 트랜센던서가 했을 때는 연산능력이라고 하며, 로페즈가 했을 때는 상상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상이든 시뮬레이션이든, 인공지능인 트랜센던서와 인간인 로페즈가 생각하는 것에 별반 차이는 없었다.
***
옵시디아몬의 함선이 목성으로 향하고 있다.
“보기만 해도 위압적이네.”
목성의 크기는 태양과 다른 느낌이다. 태양이 너무 커서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목성은 시야에 다 들어오는 크기라서 느낌이 확실하다.
저곳에서 가로로 움직이는 거대한 줄무늬들 속에서 고압의 정전기가 일으키는 우주 번개와 초속 수백 미터 이상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고 한다.
목성의 무인 위성인 이오가 이루는 공전궤도보다 가까이 접근하면 엄청난 방사선에 피폭되어 인간은 물론이고 전자 장비까지 망가져버린다.
공전궤도의 긴반지름이 약 67만㎞인 유로파 위성에도 적지 않은 양의 방사선이 내리쬐고 있으나, 돔을 덮으면 인간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은 된다고 한다.
유로파는 지구의 달보다 조금 작은 크기에 달과 비슷한 질량으로, 테라포밍에 적합한 위성이 아니다.
그래서 유로파에 형성된 도시들은 두꺼운 표면층에 살짝 파묻힌 뚜껑들처럼 생겼다.
목성 연합정부, 위성국가의 수도인 가니메데는 테라포밍에 성공했다.
가니메데 위성은 목성에서 평균 백만㎞ 떨어진 공전궤도를 이루고 있어 방사선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크기는 위성치곤 큰 편이며 질량 역시 위성치곤 큰 편이라 어떻게든 테라포밍에 성공한 것이다.
가니메데 위성국가는 태양계에서 가장 큰 수상도시와 군사력을 갖추고 있다. 가니메데의 수상도시는 거의 대륙을 이룰 정도로 커서 우주에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편이다.
- 미르니의 총수, 빈센트 세를린에 대하여 모든 정보를 검색했습니다. 그녀는 아군, 적군, 윗사람,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극명한 인물입니다. 실제 나이가 72세지만 신체 나이는 23세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 비결에 대해선 비밀이라고 합니다.
“그럴 기술을 갖춘 장로회 구성원이 있는 거겠지.”
생명공학의 정점으로 추정되는 감마의 능력이 그 비결일까.
- 또한 이름에 대한 특이사항이 있는데, 빈센트는 옛 지구의 남성 이름으로 ‘정복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를린이 미르니의 총수가 된 후 자신이 직접 개명한 이름입니다.
“빈센트 총수님이라고 불러야겠네.”
그녀는 오비탈플래닛의 어스틴 회장을 통해 로페즈에게 연락을 취했다. 로페즈에게 아무런 목적도 의도도 알려주지 않은 채, 관심이 있으면 일단 오라고 한 것이다.
‘무작정 쳐들어오는 식으로는 하지 않았어. 적어도 앞뒤 분간은 하는 사람이라는 거다.’
로페즈가 미르니의 총수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은 옵시디아몬에 알려두었다. 이번 만남으로 로페즈가 살해당한다면 그 사실도 태양계 전역에 퍼져나갈 수 있도록 조치해두었다.
보통 상대가 아니기에, 그녀도 로페즈가 안전장치를 걸어두었다는 것을 짐작은 하고 있으리라.
- 관리자님. 미르니의 함선 앞에 도착했습니다.
미르니의 함선이 가니메데의 정지궤도에 떠있다. 옵시디아몬의 함선이 같은 정지궤도로 진입하여 미르니에 접근을 마쳤다.
이어서 로페즈가 탑승한 우주선이 미르니의 함선으로 들어선다.
***
“반갑습니다. 빈센트 총수님.”
“반가워요.”
장로회의 8번째 인물. 세타라는 별명. 거대기업 미르니의 총수. 빈센트 세를린을 만났다.
“관심이 있으면 오라고 하시길래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뭔가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 같네요.”
“그러는 로페즈 씨도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은데. 좀 복잡한 일이 있었잖아요?”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정말 호화스러운 공간이다. 바닥재의 무늬에 에메랄드를 쓰는 방식은 생전 처음 본다.
「그녀를 상대로 전자적 침투 경로를 찾는 작업은 지양하겠습니다.」
세를린은 다리를 꼬며 한쪽 손에 얼굴을 비스듬히 바쳤다. 여유가 느껴진다.
“이걸 어떻게 할까···. 그냥 저부터 이야기할까요?”
“먼저 저를 불러주신 총수님께서 시작해 주시는 게 순서상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를 염탐하셨죠?”
바로 본색을 드러내려는 생각인가. 아니면 탐색전인가. 그녀가 방금 내뱉은 ‘저희’란 무엇을 뜻하는가. 장로회인가 미르니인가. ‘염탐’이란 뭔가 좋지 않은 느낌으로 들린다. 굳이 염탐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부터가 당장 상대를 밀어붙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세를린의 말에 끌려가면 안 된다. 아직은 탐색전 단계다. 의미심장한 발언은 오갔으나 제대로 꺼낸 본제는 하나도 없다.
“염탐이라는 말씀은···. 저와 제 회사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조사라고 할까요.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조사했는지를 여쭤보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로페즈 씨는 제가 투자한 플래닛 웨폰을 구해주셨더라고요.”
“예. 프로키온 항성계의 바빌로니아 왜소행성이었죠.”
“거기가 아주 씹창이 났어요. 옵시디아몬이 그 분열포를 날려버리겠다고 가한 함포사격 때문에요. 옵시디아몬의 하청업체‘였던’ 라 코만데의 인포시어가 추락하기도 했고요. 그전에는 크라켄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잡것들이 시설의 인원들을 살해했다고 하네요.”
“그 사건이라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여기까지 왔어요?”
“아무래도 제가 아는 것과 총수님께서 아시는 것에 차이가 있겠네요. 오해라고 설명드리면 믿어주실 겁니까?”
“그냥, 제가 보기에 로페즈 씨는 장로회를 상당히 미워하시는 것 같은데요.”
“···.”
벌써 장로회가 언급되었다.
더는 탐색전을 할 생각이 없다는 뜻일까.
“···총수님은 사람을 너무 쉽게 믿으시는 것 같습니다.”
“장로회. 알고 있었죠?”
“네. 압니다.”
“언제부터요?”
“지금 심문이라도 하십니까?”
“그럼 고문이라도 할까요?”
“할 수는 있습니까?”
“못할 것 같아요?”
“지금 당장은 못하겠죠.”
“후훗.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허세 반, 진심 반입니다.”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인데요.”
“하지만 제가 일개 개인도 아니고···. 미르니의 빈센트 총수님이라면 섣불리 행동하진 않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
세를린은 잠시 입을 닫았다. 그녀는 흐릿한 눈웃음이 담긴 시선만 보내고 있다.
긴장감에 심장이 뛴다. 하지만 이제 로페즈에게 있어서 긴장감과 머릿속의 생각은 별개의 것으로 작동한다.
‘인지했나? 내가 뒤도 없이 당신 앞에 나타난 게 아니라고.’
「그녀는 관리자님의 마지막 발언을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재밌네요. 로페즈 씨.”
< 19. 극한의 이득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