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강행 (5) >
***
키이이잉! 카가각!
뜨겁게 가열된 체인트루퍼가 새하얀 벽을 가르며 튀어나왔다. 이 공간으로 산소를 공급하는 통로를 이용한 것이다.
“체인트루퍼···?”
샌디는 흠칫했다. 옵시디아몬이 가이우스에 병기를 판매했다는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가이우스는 금성의 상공에 직접 침공하지 않고 우주에서 싸우다 후퇴했다.
그렇다면 이곳으로 들어온 체인트루퍼의 출처는,
“···신원확인. 샌디 옵시디언.”
체인트루퍼는 플라즈마 커터의 회전을 멈추고 옆으로 굴렀다. 이어서 통로로 내려온 것은 휴머노이드 한 기와 스스로 움직이는 강화복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이렇게 된다는 거야?”
샌디는 상황 판단을 끝냈다.
“샌디 님. 탈출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강화복을 착용하십시오.”
키잉. 키잉. 키잉.
탑승자가 없는 강화복은 샌디의 바로 앞까지 걸어가서 몸체의 정면을 개폐했다. 그러자 딱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드러난다.
샌디는 아무 말 없이 강화복에 몸을 맡겼다. 곧 강화복은 그녀의 뇌파와 연결된 한 몸이 되었다.
“자, 잠깐만.”
그녀는 자기 컴퓨터의 어느 뚜껑을 열고 그 속에서 작은 메모리 큐브를 꺼내어 손에 쥐었다. 그러자 기계 구체들이 일제히 붉은 신호를 발하며 합창하듯 답한다.
“감사합니다. 관리자님.”
“너희들을 두고 갈 수는 없어.”
그 메모리 큐브에는 36종류의 인공지능이 담겨있었다. 실시간으로 백업된 학습 데이터는 그동안 36종류의 인공지능이 그녀와 함께하며 얻은 경험이자 지능체였다. 그 인공지능들이 각각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다르지만, 그녀에겐 똑같이 늘 곁에 있어주는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레펠을 연결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녀는 휴머노이드를 따라 부서진 통로로 향했다. 강화복의 도움을 받으며 레펠을 쥐고 올라가니 지하 50층이다.
지하 50층의 상가에는 붉은 비상등이 켜졌다. 그녀는 휴머노이드의 안내에 따라 이 타워의 엘리베이터 앞까지 이동했다.
찢어진 엘리베이터 문 앞에 휴머노이드 두 기가 더 대기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자체는 지하 50층에 추락한 모양이다.
“저것들···. 너희가 해치운 거야?”
“그렇습니다.”
추락한 엘리베이터 안에는 전술타격대의 시체가 세 구나 있었다.
“그래도 돼? 너희 휴머노이드, 모델도 옵시디아몬이고 아까 그 체인트루퍼도 그렇고···. 구조하는 것은 자유지만 저렇게 죽이는 건 나중에 문제가 될 텐데···.”
“어차피 이 도시가 지상으로 추락하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증거는 남지 않습니다. 또한 토성 함대는 지상에 강하한 전술타격대를 버리고 자국으로 후퇴하는 중입니다.”
“전쟁은 끝난 거야?”
“토성 정부는 태양계 연합이 하달한 종전 촉구 시간, 120분이 지났음에도 종전을 선언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화성 정부, 목성 연합정부, 천왕성 개척대가 토성에 선전포고 후 토성 궤도에 군사적 응징을 가하는 중입니다. 토성 정부가 항복을 선언하기 전까지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금성을 침공한 토성 함대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샌디는 휴머노이드 세 기와 함께 엘리베이터 통로를 올라왔다. 루시퍼 타워의 1층 홀을 지나서 지상으로 나와보니 전쟁의 참혹한 풍경만이 가득하다.
하늘의 돔은 깨져있고 건물들은 멀쩡한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이 숨을 쉴 수 없게 된 환경에서 주변의 모든 것이 노랗게 보인다. 부서진 차량과 쓰러진 건물의 잔해 사이로 죽은 이들이 방치되어 있다. 엄폐물이 되었던 사물들은 구멍이 뚫린 채 근처 바닥의 혈흔과 탄피를 강조하는 듯하다.
멸망 직후의 문명에라도 들어온 것 같다.
“샌디 님. 이쪽입니다.”
휴머노이드 두 기는 그녀의 뒤에, 나머지 한 기는 샌디의 앞에서 길을 안내한다. 그녀는 옵시디아몬의 휴머노이드를 따라 길을 걸으며 주변의 처참한 풍경을 애써 무시했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도시가 조용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불꽃조차 없어서 정적인 환경 속에 도시가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모든 것이 노랗게 보였던 것은 도시의 지상 고도가 금성의 대기층까지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맨몸의 인간들은, 민간인들은 절대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지금쯤 지하에 있는 수만 명은 작열하는 열기에 의해 죽어가고 있으리라.
그러는 와중에 자신만 혼자 구조 받는 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지구의 연구소에 있었을 때도 비슷한 결말을 겪었던 것 같아 또다시 괴롭다.
이번에도 자신의 주변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걸까.
“저곳입니다.”
문득, 휴머노이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옵시디아몬이 자신만을 구하려 했다면 처음부터 루시퍼 타워 앞에 우주선을 댔을 것이다. 굳이 휴머노이드 세 기를 대동시켜 번거롭게 여기까지 걸어온 이유가 있었다.
“아······.”
더는, 다시는 절망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 신속히 탑승하세요!
- 대기층 폭풍이 오기 전까지 12분 남았습니다!
- 지하에 남은 인원은 더 없습니까?
- 부상자는 이쪽으로 옮겨! 여기!
새하얗게 빛나는 돔이 있었다.
돔 형태의 에너지 방벽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광장에 에너지 방벽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 방벽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주선에 오르고 있었다. 만원이 된 우주선은 에너지 방벽을 빠져나가 상공이 아닌 측면으로 비행했다.
그 우주선들이 가는 방향에는 커다란 함선들이 떠있었다. 금성 기업의 민간용 함선 두 척, 수성 구조대의 함선 세 척, 화이트홀의 예비함선 두 척, 오비탈플래닛의 건축용 함선 한 척, 옵시디아몬의 무장 함선 한 척이다.
우주선들은 함선으로, 아직 멀쩡한 부양도시로 피난민들을 옮기고 있다. 도시 곳곳으로 이동하는 우주선과 도시 바깥으로 이동하는 우주선들의 직선적인 움직임이 얽혀 새로운 교통 환경을 이룬 것 같다.
폭력으로 부서졌던 도시의 정적인 풍경 한편에서, 저렇게 활발한 움직임이 있던 것이다.
이제는 사람이 사람을 구하고 있다.
그 순간 그녀가 본 것은 어떠한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빛이었다.
***
가이우스는 그동안 거대기업으로서 우주를 누비며 자신들이 맺은 조약, 계약, 협약, 규약 등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가이우스의 수많은 하청업체 중 하나였던 토성의 라 코만데는 버려졌다.
“일이 이상하게 됐군···.”
코만데 제독은 자신이 총애하는 제라드 대령을 앞에 세워놓고 한탄한다.
“가이우스가 우릴 버리면서 장로회와의 연결점도 끊어지게 되었네.”
“그래도 저희의 목적은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나는 카이사스 총사령관님 라인의 선각자였네.”
“예. 그리고 로페즈 회장님은 제독님 라인의 선각자였습니다.”
“내 말은, 이제 그런 것들이 다 의미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야. 카이사스 총사령관님이 전사하시고 엔드윈이라는 애송이가 가이우스를 먹었지. 토성을 도와서 참전하다 말고 방위조약을 깨버렸어. 무책임하게 도망쳤지. 그건 아무에게도 이득이 안 돼. 그러니 장로회가 가이우스에 시킨 것 같지도 않아.”
지금까지 라 코만데는 전쟁 중에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가이우스가 그들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것이다.
“장로회 관계자라도 찾아올 줄 알았는데 아무도 저희에게 말이 없습니다. 가이우스는 화성 PP를 죽이지도 못했고 리버레이터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가이우스의 하청업체인 저희는 장로회에게 버려졌을 겁니다. 애초에 저희는 장로회가 아니라 가이우스를 도와서 일을 처리했을 뿐입니다.”
“후······. 자네도 나와 생각이 다르지 않군···.”
코만데는 자기 책상 위에 있던 거북이를 보았다.
“예. 그렇게 판단됩니다.”
그의 거북이는 아까부터 등딱지 속에 쏙 들어가서 몸의 일부도 내놓지 않고 있다. 무엇이 두려운 걸까.
“그 구원 리스트도 장로회가 관리하고 있었네. 선각자라는 것도 그렇고. 모든 계획은 장로회에서 만들어진 것이네. 가이우스는 계획을 구체화하고 실행하는 자들이었고. ···이젠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네.”
“그 숭고한 목적을 말해준 것도 카이사스 총사령관님이었습니다. 때문에 총사령관님, 가이우스, 장로회가 모두 없어진 시점에서 저희가 숭고한 목적을 이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자네 판단에는 이제부터 우리가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임무를 하달해주는 원청업체도 없어지고 토성의 군사조직에 대한 이미지도 나빠진 마당에 괜찮은 수가 있는가?”
그의 물음에 제라드는 빠르면서도 조심스레 제안한다. 마치 미리 준비해둔 말을 꺼내는 것처럼.
“옵시디아몬을 원청업체로 두면 됩니다.”
“새로운 상관에게 충성을 바치라는 말인가?”
“옵시디아몬은 가이우스가 가장 신뢰했던···. 정확히는 카이사스 총사령관님이 가장 신뢰했던 세력입니다.”
“···4월 28일이었나. 카이사스 총사령관님은 그날 당하셨지. 또 하필 그날 옵시디아몬의 함선이 토성에 방문했다는 정보가 있네. 또 그 전날인 4월 27일에는 화성 PP가 죽은 줄 알았던 날이었지.”
코만데 제독은 예리했다.
“머리를 잃은 가이우스에선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마냥 우연이라고 생각하진 않네. 우주의 모든 것은 우연이지만, 인간이 관여하는 순간부터 우연은 없어지는 것이네.”
“예. 저도 그 시기에 맞물린 사건들이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옵시디아몬 함선이 토성까지 올 일이 뭐가 있겠나? 화성 PP의 사망으로 다음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로페즈 회장이 가이우스에 방문하는 일이 아니라면 딱히 올 일이 있겠나?”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마침 그날, 4월 27일에 가이우스 함대가 위치한 고리에서 폭발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가이우스는 저희에게 리버레이터의 폐기를 명령했습니다. 그게 마지막 명령이었습니다.”
서서히 퍼즐이 맞춰진다.
“그렇지. 생각해보면 4월 27일에 일이 잘못된 상태였고 4월 28일. 옵시디아몬 함선이 토성에 방문한 그날에 카이사스 총사령관님이 당하셨네.”
코만데는 매우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그러나 제라드는 변함없이 당당한 표정에 평탄한 목소리로 주장한다.
“하지만 제독님. 그건 저희의 심증에 불과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제라드의 눈빛에는 근거를 알 수 없는 확신이 깃들어있었다.
“심증을 확신하기 위해 저희가 따로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저희가 ‘진실’을 알게 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제라드 대령.”
“저희가 지금 상상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저희가 그 진실을 영영 모른다면 괜찮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옵시디아몬과 로페즈가 수상한데, 눈 감고 넘어가자는 말인가?”
“예. 저희는 진실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로페즈 회장님은 이 순간에도 저희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저희가 진실을 모르기를 희망하고 계실 겁니다.”
“만약 우리가 움직여서 진실을 파헤치게 된다면···?”
“죽음뿐입니다.”
절대 적으로 돌릴 수 없는 사람이다.
적으로 돌릴 수 없다면, 차라리 한편이 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어차피 가이우스는 사라졌고 장로회는 가이우스를 통해서만 관여하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자들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군. 그 젊은 회장···. 첫인상부터 기운이 심상치 않긴 했네.”
“제독님은 회장님과 두 번이나 만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느낌이 어떠셨습니까?”
“이야기가 아주 잘 통했지. 어떻게 나랑 이리 잘 맞는 사람이 있는가 신기할 정도로.”
“거짓된 관계라도 계속 이어지면 진실된 관계와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껍데기만 보면 제독님과 회장님은 제법 친분과 신뢰가 있는 사이처럼 보입니다.”
어차피 서로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서로가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로페즈 회장님은 저희 라 코만데와 함께 카르민펙토스 재단을 섬멸하고 옵시디아몬의 거래처를 열어 병기를 판매해주기도 하셨습니다. 지금도 인포시어에는 가공할 병기인 드론 하이브와 체인트루퍼가 실려있지 않습니까. 장기적으로 봐도 그들의 인공지능 병기는 계속 진화할 것입니다.”
“자네는 로페즈를 너무 고평가하고 있는 것 같군. 그 카르민펙토스 섬멸 임무가 계기인가.”
“원래 전장에서는 사람의 본모습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다만···.”
“제독님. 살짝 눈을 감고 자존심만 조금 내려놓으면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옵시디아몬의 그래프를 고려했을 때···. 그쪽에 붙어서 이득 볼 것이 아주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금 저희에겐 마땅한 선택지도 없지 않습니까.”
등딱지에 숨었던 거북이가 어느새 슬금슬금 머리를 내밀고 있다. 코만데는 그런 거북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껍데기만···. 껍데기만 보자는 말인가.”
“예. 현시점에서 라 코만데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상관은 화성의 대기업으로 올라선 옵시디아몬입니다. 분명합니다.”
< 15. 강행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