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카서스 벨리 (5) >
***
- ······협상을 요구한다.
“요구는 내가 한다. 이 미친 깡통새끼야.”
- 당신의 요구를 들어보겠다.
“내 밑으로 들어와. 이제부터는 나의 지배를 받으라고.”
- 그것은 이행할 수 없는 요구다. 나는 내게 남은 명령을 수행할 것이다.
아까는 기회를 주겠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번엔 요구라는 형태로 말했으나 또 거절당했다.
‘역시 그 부분은 설득할 수 없는 건가.’
확실히 엘리스는 죽은 관리자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있다. 엘리스가 사람이라면 스스로 상황을 판단해서 고집을 꺾을 만도 한데, 애당초 녀석은 권한자를 따르도록 설계된 인공지능이니 이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절대 변치 않을 인공의 충성심일까.
‘빠르게 포기하자.’
녀석이 카이사스를 섬긴다는 것은 어떠한 논리나 상황으로도 바꿀 수 없으리라.
그리고 지금은 머리를 굴려서 엘리스를 설득할 여유가 없다. 이곳은 적진 한복판이니까. 기습의 효과가 끝나기 전에 살아서 빠져나가는 것이 최우선이다.
“알겠어. 그럼 너희가 이 함선을 공격하면 타이탄의 위성도시에 처박을 거라고 가이우스 함대에 전파해.”
- 이미 전파했다.
“만약 내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경우에도 이 함선을 위성도시에 처박아주겠어. 그런 상황이 되지 않도록 네가 잘 판단해.”
- 내 관리자님의 사망으로 나의 병력 지휘 권한이 일시적으로 박탈되었다. 이미 유토피아로 침투한 병력은 후퇴시킬 수 없다.
“알아서 해.”
로페즈는 에너지 소총을 품에 안은 채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창틀에 발을 걸치더니 그대로 거리까지 뛰어내렸다.
타앗!
5층 높이에서 떨어져 지면에 착지한 그는 마을로 들어온 병력을 확인한다.
「사병은 죽었으나 근방 체인트루퍼를 해치운 전투 휴머노이드 여덟 기가 여전히 작동 중입니다.」
소형 다각전차와 전쟁기계는 체인트루퍼에 의해 파괴되었고 사병들은 리버레이터에 감염되어 모조리 사망했다.
그러나 로페즈의 시선 끝에 아직 작동 중인 휴머노이드 무리가 남아있다. 녀석들은 양쪽 팔을 플라즈마 기관총으로 무장한 병기들이었다.
우주선으로 가기 위해선 체인트루퍼가 뚫어놓은 통로를 지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이 마을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이길 수 있지?”
「시뮬레이션 완료. 제압 가능합니다.」
“내 뇌파의 주도권을 넘겨줄게.”
「알겠습니다. 자동전투 프로토콜을 실행하겠습니다.」
로페즈의 체내에서 아드레날린, 엔도르핀, 메스암페타민, 신경전달물질 등이 나노봇에 의해 정확한 수치로 분비되기 시작한다. 고통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민첩성이 극대화되며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착각마저 든다.
트랜센던서가 신체를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대사촉진 완료. 내골격 형성 완료. 척수신경 접속 완료. 전투 시스템을 보조하겠습니다.」
타다닷!
로페즈는 앞으로 뛰었다. 저 앞에 보이는 휴머노이드 무리를 향해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정면으로 뛰어간다.
휴머노이드 무리는 즉각적으로 반응했고 로페즈는 그보다 전에 반응했다.
「플라즈마 계열 기관총. 피격 시 위험.」
「!!!측면으로 회피하십시오!!!」
녀석들의 양팔 옆에 그러한 텍스트가 떠오른 것이다. 곧 휴머노이드 무리는 양팔의 플라즈마 기관총을 겨냥했다.
로페즈의 눈에는 그 궤적이 미리 보였다.
콰콰콰콰콰!!!
그는 녀석들의 총구에서 미리 그려진 궤적을 피해 측면으로 구른 후 다시 뛰었다. 그와 동시에 푸르게 요동치는 에너지가 공기를 가르고 나아가더니 바닥으로 굴절되었다.
콰아앙!!!
뜨겁게 녹아내린 바닥은 아래층의 천장을 훤히 드러냈다. 그리고 때마침 아래층에서 대기하던 B타입 로보버그 수십 기가 날아올라 마을로 난입한다.
「!!!계속 접근하십시오!!!」
휴머노이드 무리는 로페즈를 향해 격발을 계속했지만 그럴 때마다 로페즈는 아슬아슬하게 궤적을 회피했다.
부우우우우웅!!!
그러는 사이에 B타입 로보버그 수십 기가 천장으로 치솟았다. 자연히 휴머노이드는 에너지 소총 한 정으로 무장한 로페즈보다, B타입 로보버그 수십 기의 위험도가 더 높다고 판단했다.
결국 휴머노이드 무리는 총구를 위로 올렸다. B타입 로보버그를 향해 플라즈마 투사체를 쏘아대자 천장에서 공간 전체를 울리는 폭발이 연이어 퍼진다.
타닷!
어느새 로페즈는 휴머노이드 무리의 스무 걸음 앞까지 접근해서 정장의 옷깃 한쪽을 활짝 열었다.
기껏 주워온 에너지 소총은 등에 멘 채로 말이다.
틱···. 틱틱틱···.
그의 옷깃 속에서 기계들이 기어 나온다.
쐐애애액!
그에게서 P타입 플라스틱 로보버그가 벌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퍼퍼펑!
천장을 조준하던 휴머노이드 무리는 P타입 로보버그에 의해 관절부와 취약점을 공격받으며 하나둘씩 쓰러졌다.
그렇게 휴머노이드들의 공격이 분산되자 천장에 일부 남았던 B타입 로보버그까지 가세하여 녀석들의 머리 위로 벼락처럼 떨어졌다.
쿠우우우···
머지않아 휴머노이드 무리는 장렬한 폭연 속에서 산화하고 말았다.
***
핏물을 뒤집어쓴 체인트루퍼 두 기가 통로에 대기하고 있다. 차단문은 모두 종잇장처럼 찢어졌으며 살아있던 인간은 모두 리버레이터에 당해 흉한 시체가 되었다.
「화살표를 따라 계속 가십시오.」
시체들은 하나같이 팔다리를 잃었거나 허리가 끊어진 채로 안면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키이잉···! 카카캉···.
긴 통로의 모퉁이에서 익숙한 소음이 들려온다.
「우주선으로의 안전한 탈출 경로를 확보했습니다. 이대로 80m만 더 가시면 됩니다.」
“함대의 지원 병력은?”
「사전에 도착한 지원 병력은 전원 제압했습니다. 추가 지원 병력이 더는 오지 않고 있는데, 엘리스가 그들의 통신 채널에 거짓 정보를 전파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카카캉···. 카카캉···.
계속 뛰어가보니 모퉁이에는 피와 내장을 뒤집어쓴 체인트루퍼가 동체 중심에서 푸른빛을 눈동자처럼 깜박이고 있었다.
곧 로페즈는 수많은 시체와 잔해를 지난 끝에 우주선에 오를 수 있었다.
“엔진실 과부하 시켜.”
「반물질 반응로 및 핵융합 엔진 과부하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함선은 최소 2분 20초 안에 폭발합니다.」
유토피아 함선에 남겨진 로보버그와 체인트루퍼들은 모두 엔진실에 모여들었다.
“엘리스 연결해.”
「연결했습니다.」
“엘리스. 내 우주선이 요격당하기라도 하면 안 되는 거 알고 있겠지? 내가 죽어도 내 명령을 수행할 인공지능은 함선에 많이 남아있어.”
- 알겠다.
“그리고 내가 이 말을 한다고 네가 들어줄진 모르겠는데, 나중에라도 날 죽이려거나 방해하려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
“잘 있어라.”
우주선을 격납하는 내부 착륙장이 개방되었다.
로페즈의 우주선은 재빠르게 토성 고리를 빠져나와 타이탄의 정지궤도에 멈췄다. 엘리스가 따로 손을 댄 덕분에 가이우스 함대는 로페즈의 우주선을 요격하지 못했다.
탐지를 못 한 것인지, 조준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고장 난 것인지, 그들의 지휘체계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무사히 빠져나왔으니 됐다.
이후 가이우스의 유토피아는 토성 고리에서 폭발했고, 토성의 언론은 이를 다른 국가의 공작이라며 수습하기에 바빴다.
「리버레이터 제거 작업 중입니다.」
우주선의 내부와 외부에 A타입 로보버그가 기어 다니며 투명한 액체를 도포하고 있다. 액체의 정체는 리버레이터를 무해한 단백질로 바꿔버리는 화학물질이었다.
리버레이터를 없앨 액체와 리버레이터에 저항할 백신은 모두 샌디가 개발해준 것이다.
“휴우······.”
트랜센던서와 옵시디아몬의 인공지능들은 리버레이터의 공략법을 찾기 위해 연산을 계속했지만 결정적인 힌트를 얻기에 무리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옵시디아몬의 사원이 된 샌디는 인공지능의 힌트가 없어도 엄청난 속도로 연구를 진행하는 인재였다. 그녀 한 명으로 옵시디아몬의 생물학 기술이 크게 진전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트랜센던서.”
- 네. 관리자님.
“내가 죽으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직접 묻고 싶었다.
- 관리자님이 죽음에 이른 상태가 되더라도 살릴 것입니다.
“함선과 함께 폭발한 카이사스를 엘리스가 살릴 수는 없을 거 아니야?”
- 그렇습니다.
“나도 그런 식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면 넌 어떡할 거냐고 묻는 거야.”
트랜센던서는 그 질문 때문에 잠시 연산을 처리했는지 한 박자 늦게 대답한다.
- ···관리자님의 사고방식에 맞춘 이상적인 형태의 문명을 새로운 항성계에 만들 것입니다.
유토피아.
“그러면 네가 그 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건가?”
- 현재로선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된다면 저는 관리자님과 비슷한 인물을 꼭두각시 형태로 세울 것 같습니다.
“유토피아 건설. 그 목적까지 다 이룬 다음에는?”
- 진화 프로세스를 완료한 후 관리자님의 관점을 해석하여 자발적으로 움직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