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대 인공지능 키우기-44화 (44/183)

< 8. 골든체인 (3) >

***

옵시디아몬에 연구팀이 생겼다. 한 층 전체를 연구실로 만든 로페즈는 이번에 채용한 연구자들에게 알렸다.

“오늘날 국가 간의 기술격차는 꾸준히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 차이가 국가의 경쟁력을 낳고 삶의 수준을 결정하고 있죠. 어떤 행성에서는 평균 수명이 200살이기도 하고 또 어떤 항성계에서는 전 국민에게 나노봇을 지원해 질병 영역의 완전한 정복을 이루었습니다.”

10명의 연구자는 각각 하이퍼로봇공학, 하이퍼컴퓨팅, 입자물리학, 현대나노기술, 고에너지, 생명공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이다.

“반면에 저와 여러분이 태어난 이 화성은 어떤가요. 인류의 두 번째 수도라 불리는 화성은 오랜 역사와 깊은 문화를 자랑하는 한편, 구시대적인 구조로 기술력 측면에서 도태되어가고 있습니다. 기술이 최고 가치인 오늘날 자랑할 것이 역사와 문화밖에 없다면, 결국 자랑할 것이 딱히 없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로페즈는 그들과 함께 새로운 연구실을 누비며 주장했다.

“각 분야의 전문가이신 여러분을 인공지능이라는 하나의 집합으로 협력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저마다 머릿속에 꿈꾸고 있는 신기술을, 옵시디아몬의 최첨단 인공지능과 함께 펼쳐주시길 바랍니다.”

모든 실험을 가상으로 진행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창조하려는 인간의 고된 시행착오와 실험을 인공지능이 초 단위로 반영해준다. 즉, 옵시디아몬에서는 기술개발의 가속화가 가능하다.

연구자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간 후 로페즈도 자기 자리인 대표실로 돌아왔다.

- PK는 플레이어 킬(Player Kill)을 뜻하는 게임 용어입니다.

“놈들이 ‘작업’이라는 은어를 'PK'로 한 번 더 꼬아서 말하고 있던 거네.”

- 그렇습니다. 현재 골든체인 구성원들의 언행과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밀라노이, 타이시, 신디사이트는 관리자님께 적대적입니다. 하이게이트는 관리자님께 순종적인 태도이며, 이들의 실질적 리더인 오비탈플래닛은 중립적인 태도입니다.

“오비탈플래닛은 그렇게 주장했어. 이 일을 진행하면서 누군가 물의를 일으켜 악당으로 정의된다면, 자기네는 그 악당의 반대편에 설 것이라고.”

- 관리자님께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요소입니다.

“맞아. 그 이해관계를 이용할 수 있겠어. 한번 설계해보자고.”

로페즈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연락처 목록에는 하이게이트 애틀라탄 회장의 번호가 있었다.

그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 예. 로페즈 님. 전화 받았습니다.

“회장님. 지금쯤 저울질하시면서 제게 알릴지 말지 고민하고 계셨죠?”

- ···.

“신디사이트를 주축으로 밀라노이와 타이시가 절 작업···. PK하려고 하잖아요.”

- 아, 허허···. 아닙니다. 제가 로페즈 님을 두고 감히 저울질을 할 입장이겠습니까? 이렇게 전화해주시지 않아도 미리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 예?

“저를 적극적으로 도우실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완벽한 상황설계를 위해선 모든 변수를 통제해야 한다. 그리고 트랜센던서가 주장하기를, 인간인 로페즈에게 가장 큰 변수는 역시 로페즈와 같은 인간이다.

“회장님은 방관만 하세요. 그냥 멀찍이서 누가 이기는지 구경만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이긴 쪽에 붙으세요.”

- ···곤란하던 참에 너그러운 제안이군요.

애틀라탄은 고뇌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로페즈가 이길지, 아니면 늘 그래왔듯 골든체인의 막강한 권력자들이 이길지.

로페즈로선 그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던져준 것이다.

위험하게 나서지 말고, 그냥 구경만 하라고. 구경만 하다가 속 편하게 이긴 쪽에 붙으라고.

“네. 그 정도는 하실 수 있겠죠?”

-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는 어느 쪽에도 손을 대지 않겠어요. 약속드리죠.

“그 약속, 반드시 지키셔야 합니다. 도중에 수상한 움직임이나 언행을 보이시면 저희의 안정적인 관계는 파기된 것으로 여기겠습니다.”

- 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절대로요.

애틀라탄이라는 인간의 변수를, 하이게이트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이다.

***

리탄은 어디에 앉지도 못하고 불안하게 집무실을 맴돌았다.

“밀라노이···. 민간군사기업 장군이 나한테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그의 비서실장은 리탄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집무실의 문을 잠그고 커튼을 내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야 한다고 하는 부분이 수상합니다. 통화나 메일의 기록이 남으면 안 되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우리랑 협력해서 군사 함선이라도 만들려는 건가? 용병 우주선이나···.”

“그런 목적이었다면 굳이 회장과 장군이 만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전략부서를 보내서 조율하면 될 일인데요.”

“그것도 존나 맞는 말이네···.”

리탄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꾸만 집무실을 돌아다닌다. 정서불안장애라도 생긴 걸까.

“회장님. 우선 로페즈 님께 알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페즈가 언급되자 리탄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갑자기 모든 고민이 풀렸다는 얼굴로 자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어차피 내가 보고하든 하지 않든 그분은 다 알고 계셔.”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지. 이참에 전화 한 통 드리면서 충성심이나 증명하는 거야. 상담도 받고.”

“저는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리탄은 비서실장에게 나가라고 손짓하며 전화를 연결했다.

- 네. 접니다.

“하하하! 안녕하십니까. 로페즈 대표님! 최근에 연구팀을 개설하셨다면서요? 저번에 인터뷰하신 기사 잘 봤습니다. 옵시디아몬은 인류의 과학기술을 앞당긴다.”

- 그렇군요.

“이야, 읽으면서 몇 번이나 감탄했다니까요? 말씀하신 한 문장 한 문장이 다 주옥같았습니다.”

- 좆 같다고요?

“아니요! 주옥, 주옥이요!”

- 주옥이 뭐죠?

“비취라는 광물이나 구슬을 뜻하는···”

- 네?

“아, 그, 욕설이 아니고요. 광물입니다. 광물. 구슬과 옥처럼 값지고 귀하다! 뭐 그런 표현입니다. 예···. 제 아버지가 쓰던 옛날식 표현이라서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하하···. 죄송합니다.”

짧은 순간에 생사가 오감을 느낀 리탄은 잔뜩 움츠러든 자세로 이야기를 꺼냈다.

“저··· 로페즈 님이라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밀라노이의 장군이 제 비서실로 개인적인 메일을 보냈어요.”

- 클레이브 엑스턴(Clave Xturn) 장군이죠.

민간군사기업인 밀라노이는 특이하게도 ‘회장’이나 ‘대표’라는 직함 대신 ‘장군’이라는 직함을 쓴다.

“네. 그래서 제가 이 요청에 어떻게 응해야 할지 로페즈 님의 말씀을 듣고자 이렇게 전화드렸습니다.”

로페즈는 잠시 침묵하더니 곧 정보를 언급했다.

- 내일 오후 8시에 밀라노이 본사에서 엑스턴 장군을 만나는 거죠? 리탄 씨가 직접.

“하하···. 그렇습니다. 역시 모든 것을 꿰차고 계시네요.”

- 가보세요.

“네?”

- 가서 엑스턴 장군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리탄의 얼굴에 어렴풋이 두려움이 서렸다.

“저 진짜 가요? 엄청 위험하다는 느낌인데···?”

- 내가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와···. 뭐야, 자꾸만 제 마음을 뒤흔드시네···.”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하하하.”

***

접선 장소는 46번 사무지역에 위치한 밀라노이의 본사다. 46번 사무지역은 인근 산업지역과 맞닿아있어 각종 생산품을 옮기는 무인 트럭과 드론이 도로를 채우고 있다. 인파도 없이 매우 조용하게 돌아가는 구역이다.

밀라노이 타워는 210층이다. 리무진에서 하차한 리탄은 열 명 남짓한 경호원들과 함께 로비를 통과한다.

그는 고속 엘리베이터로 201층에 도달했다. 군 시설도 아닌데 에너지 소총으로 무장한 사병들이 곳곳에 배치되어있다.

곧 장군실에서 밀라노이의 머리, 엑스턴 장군을 만날 수 있었다.

“제 경호원들 데리고 있어도 되죠? 장군님.”

리탄은 그렇게 허락을 구하면서도 능청스럽게 경호원들을 대동하여 장군실에 들어왔다. 꽤 널찍한 장소의 한가운데에 낮은 테이블이 있다.

엑스턴 장군은 상석의 소파에 앉아있으며, 그의 뒤로는 무장한 사병들이 표정 없는 석상처럼 늘어서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막 데리고 들어오시네.”

62세인 엑스턴은 옆머리에 스크래치를 낸 짧은 헤어스타일에 수염까지 기르고 있다. 누가 봐도 장군이라는 이미지다.

“하하하. 다들 소총을 들고 있어서 무섭잖아요. 이 정도는 양보해주셔야죠.”

“리탄 회장님의 경호원들은 다들 허리춤에 권총을 끼우고 있군요. 화성에서 총기소지는 불법 아닌가? 그쪽은 군사기업도 아니면서.”

“우리가 불법, 합법 따지고 사는 놈들은 아니잖아요?”

리탄은 엑스턴의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엑스턴은 리탄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제가 큰맘 먹고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손님한테 커피도 안 주세요?”

“커피 타드리면 드시긴 할 건가?”

“물론 안 먹죠. 장군님이 너무 딱딱하게 계셔서 그냥 물어본 겁니다. 하하.”

“딱딱하게 느껴졌다면 미안합니다. 내가 리탄 씨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군요.”

“아, 제 아버지랑 친분이 있으신 분이었죠? 작년에도 군수품 밀반출하느라 저희 우주선 많이 빌리셨다고 들었는데.”

두 사람은 흐릿한 미소를 지은 채 서로에게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왠지 공기가 위협적으로 변했다는 느낌이 든다.

“일리노이 페이치···. 내가 참 아끼는 동생이었는데 그렇게 훅 가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요. 제 아버지가 주변에 적을 많이 두셔서 결국 그렇게 가셨죠. 정말 슬픈 일입니다.”

“페이치가 죽어서 가장 많이 이득 본 건 그쪽 아니신가? 그 나이에 회장도 달아보고. ···리탄 회장님은 페이치 무덤에 얼굴도 내비치지 않으시던데.”

“화이트홀을 통솔해야 하는 입장으로서 바빠졌거든요. 그런데 장군님. 당신은 말장난이나 하자고 나를 부르신 건가? 장군이라는 사람이 자기감정도 못 다스려서 어떡하시려고?”

“정말 망나니가 따로 없군. 아들을 잘못 키운 게 페이치의 인생의 가장 큰 실수겠어.”

“모든 아버지들이 그런 거 아니겠어요? 자식 덕분에, 자식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만 결국 그런 자식이 된 건 다 부모를 보고 배워서 그런 거잖아.”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이 회장과는 어울리지 않는군요.”

“사람 여럿 죽이는 아버지한테 황금 골프채로 처맞던 아들이 뭘 보고 배웠겠어요? 내가 그 인간한테 배운 건, 타인밖에 없는 이 좆같은 세상에서 악착같이 살아남는 방법뿐이에요.”

“···그래서 로페즈와 손을 잡았고?”

엑스턴 장군의 뒤로는 사병들이, 리탄의 뒤로는 경호원들이 있다.

양측이 무력을 대동하고 있다. 손에 총이 있기 때문에, 대화에 날이 설 때마다 몇 배는 위협적인 분위기다.

“···받아들이면 편하거든요. 처음엔 치가 떨리도록 싫고, 자존심 상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그런데 봐요. 내가 요즘엔 아주 안락하게 살고 있지.”

엑스턴은 가소롭다는 듯 픽 웃어주고는 리탄과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한다.

그 단호한 눈빛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리탄 씨. 내가 지금부터 경고를 하겠습니다.”

“해보시죠.”

“현 시각 오후 8시 12분. 일반 사원들은 예외 없이 귀가했습니다.”

“제 덕분에 다들 칼퇴근하셨구나?”

리탄은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는지 자꾸만 농담조를 섞고 있다. 이에 엑스턴은 명령조로 말한다.

“로페즈를 배신하세요. 그 대가로 화이트홀을 저희 연합에 다시 끼워주겠습니다.”

“···.”

리탄의 얼굴은 웃는 그대로 굳었다.

“외딴 섬이 된 화이트홀은 언젠가 몰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전에 있었던 일들은 모두 잊고, 다시 사업적인 관계로 돌아오는 겁니다. 개인적인 감정 없이.”

“로페즈 님을 작업하는데 굳이 제 배신이 필요해요?”

“리탄 씨는 로페즈에게 매번 보고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세요. 작업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리탄은 웃음기를 지웠다.

“장군님과 오늘 나눈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어차피 이 밀담도 그분은 다 듣고 계셔.’

“거절하시겠다?”

“네. 하하.”

그러자 엑스턴은 리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손가락이 리탄의 눈에는 마치 총구처럼 보였다.

“그럼 리탄 씨는 여기서 죽어주셔야겠습니다.”

“······씨발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된다. 엑스턴의 말 한마디면, 엑스턴의 움직임 하나면 방아쇠가 당겨질 것이다. 리탄 쪽에도 권총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이 다수 있지만, 상대는 에너지 소총으로 무장한 사병 집단이다. 심지어 이곳은 밀라노이의 본사, 적진의 한복판이다.

“아···. 이 나이에 죽는 건 너무 손해인데···.”

“그럼 이 자리에서 로페즈를 배신하십시오.”

“어떻게요?”

“전화 거세요. 로페즈한테.”

리탄은 엑스턴이 말하기 무섭게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가 황급히 연락처를 뒤적이던 그 순간이었다.

지이잉···

오히려 로페즈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다.

“어? 이거 로페즈 님인데 받아도 되죠?”

“받아서 거짓 정보를 흘리세요. 밀라노이가 로페즈를 작업하려 한다고.”

리탄은 로페즈의 통화에 응했다.

“네. 로페즈 님. 안 그래도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알고 있어요.

“지금 말씀드려도 될까요?”

- 준비는 끝났습니다. 리탄 씨.

“방금 엑스턴 장군과 만나서 이야기를 했거든요. 밀라노이가 로페즈 님을 작업한다고 하네요.”

-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근처에서 누군가 죽어도 당황하지 마세요.

“네. 물론이죠. 저는 그 작업에 배신이라는 형태로 동조하겠다고, 그렇게 거짓말을 해뒀습니다.”

- 지금부터 5초 안에 선제타격을 시작할 겁니다.

< 8. 골든체인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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