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새로운 삶 (5) >
***
트랜센던서는 로페즈에게 보고했다.
- 로노와 다섯 전 조직원은 화성으로 돌아가는 함선에 탑승했습니다. 그들이 착용했던 충격흡수 복면은 공항 화장실에서 불태워 처분했습니다.
하이게이트 회장의 딸, 에리카 애니아나를 습격했던 여섯 괴한은 로노를 포함한 작업 계열 사원들이었다. 그들이 썼던 복면은 강한 주먹질의 충격을 잘 흡수하는 고분자 소재였다. 로페즈가 자회사 공장에서 프린터로 만든 것이다.
그들이 도주에 사용한 승합차는 주차장에서 남의 차를 해킹하여 썼다. 적당히 골목에 버려두었으니 차주가 알아서 찾아갈 것이다. 해킹 흔적은 전혀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보험사에선 원인불명의 오작동 정도로 처리하리라.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상황극이었다.
***
에리카 애틀라탄 회장과 에리카 애니아나는 일정대로 거래처와 미팅을 끝낸 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관광명소를 방문했다.
금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꼭대기 라운지였다. 위로는 우주가 있으며, 아래로는 짙은 구름 위로 깔린 도심이 한눈에 보이는 전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애니아나. 저 구름 좀 봐라. 저게 다 금성의 주요 수출품이다.”
“응···.”
“금성에 차고 넘치는 이산화탄소는 아주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자원이지. 주로 온실효과가 필요한 행성에서 테라포밍 용도로 사용되고, 때로는 화학분해를 통해 탄소와 산소를 추출하는 원재료로도 요긴하게 쓰인다.”
“응···.”
“그래서 미래에 금성의 기압이 적정 수준까지 낮아졌을 때는 이렇게 구름 위의 도시가 아니라···.”
애니아나는 아까부터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아빠 말이 안 들리나 보구나.”
“응? 아, 아니···.”
“이 넓은 라운지에서 그렇게 기를 쓰고 찾으면 떠난 사람이 돌아오나?”
“그래도···.”
“듣자 하니 화성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지. 어딘가의 대표라고 했고···. 나중에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뭣하면 화성으로 돌아가자마자 아빠가 찾아주리?”
그녀는 잔뜩 주눅이 들어서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됐어. 어차피 나한테 관심도 없는 것 같··· 았는데···?”
보였다.
시선을 창밖으로 던진 순간, 유리에 흐릿하게 비친 실루엣이 보였다. 딱 그 키에 그 옷차림에 그 얼굴을 한 남자가 뒤에서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차, 찾았어···!”
“응? 뭐라고?”
“찾았다고! 그 사람!”
애니아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이번에도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사라지려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가까스로 찾아냈다. 그의 옆에는 경호원인지 비서인지 모를 남자도 함께 있었다. 찾던 사람이 확실하다.
그녀는 그대로 말을 걸었다.
“저기요···!”
***
라운지에 올라온 로페즈는 자이칸과 함께 적당한 위치에 섰다.
- 목표 대상이 접근했습니다.
“저기요···!”
에리카 애니아나. 26세. 애틀라탄 회장이 애지중지하는 딸. 하이게이트의 생산계열사 대표. 그녀가 평소에 즐기는 매체는 상류층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로맨스 드라마나 영화.
그러한 정보들이 로페즈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스스로 머리에 정보를 입력한 채, 그녀를 돌아보며 적절한 반응을 보여준다.
“네? 어···? 혹시···.”
“오늘 주차장에서 뵀었죠? 옆에 계신 분도···.”
자이칸은 눈치 좋게 준비했던 대사를 꺼냈다.
“대표님. 어차피 다음 일정도 없으신데 저는 이만 자리를 비켜드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애니아나에게 로페즈의 다음 일정이 없다는 것을 넌지시 알린 것이다. 로페즈는 자이칸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의 반응을 관찰했다.
‘방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나?
- 성공입니다. 관리자님.
이어서 애틀라탄 회장이 그녀의 옆에 등장했다.
“이분들이셔?”
“응. 날 구해주신 분들.”
“정말 큰 신세를 졌습니다. 저는 이 아이의 아버지 되는······.”
로페즈에게 다가가려던 애틀라탄은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이에 로페즈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예상된 반응이다.
“로, 로페즈 대표···?”
“네? 제 이름은 어떻게···?”
“아···. 이것 참···.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나요.”
그대로 만남이 성사되었다. 자이칸은 라운지를 구경하러 갔다. 그리고 애니아나, 애틀라탄, 로페즈는 라운지에 있는 카페에 앉았다.
“진짜 놀랐습니다. 제 딸을 구해주신 은인분께서 옵시디아몬의 대표이신 분이었다니. 로페즈 대표님은 어쩐 일로 금성까지 오셨는지요?”
“시장분석 겸 휴양 겸, 새로운 거래처도 찾을 겸 왔습니다. 저도 금성에 오자마자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몰랐네요. 어느 행성이나 작업자들이 있는 건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입니다.”
로페즈는 애틀라탄 회장의 근심에 공감해주었다.
“허허. 저도 딸과 함께 비즈니스와 휴양 차원으로 왔는데 말이죠. 경호원을 달고 다니라고 평소에 그렇게 주의를 줬건만···.”
애니아나는 빨대를 문 채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것 같다.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아무 말 없이 힐끗힐끗 로페즈만 곁눈질하고 있다.
“따님을 걱정하시는 마음, 정말 진심으로 이해합니다. 저도 그런 일을 참 많이 겪었으니까요. 아무래도 회장님이시다 보니까 더 피곤하실 것 같습니다.”
“피곤하죠. 피곤합니다. 이렇게 같은 고충을 갖고 계신 화성분을 이런 외지에서 만나니 참으로 반갑군요.”
“네. 하하···. 저도 정말 반갑습니다.”
애틀라탄은 자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거야 원, 오늘 입은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제가 너무 감사해서 그냥은 못 넘어가겠는데.”
로페즈는 선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괜찮습니다. 제가 아니라 누구더라도 그런 상황을 목격했다면 그렇게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과연 그럴까요. 요즘 사람들은 폭력에 익숙하질 않아서 직접 나서길 꺼리죠. 반면에 우리 로페즈 대표님은 젊으신데도 굉장한 결단력과 행동력이 있으신 분이에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골든체인이다. 트랜센던서의 정보 수집에 차질이 생겼다면 추리를 통해 근접한 해답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 추리라는 것은 오로지 인간인 로페즈의 몫이다.
‘내가 그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다 알고 있어. ···알고 있으면서 은혜를 갚고 싶다는 말까지 꺼냈으니···. 이 일을 계기로 나와 건설적인 관계를 형성하려는 마음은 일단 있어 보인다.’
‘하지만 하이게이트 회장인 애틀라탄은 골든체인의 구성원이다. 그렇다면 골든체인에서 나를 적대하자는 내부 방침은 없었다는 건가.’
들어갈 길이 보인다.
“결단력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죠. 저는 그동안 늘 죽거나 살거나였으니까요. 이렇게 이 자리에서 회장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되게 멋있으세요.”
애니아나가 뜬금없는 칭찬을 해왔다. 동시에 애틀라탄의 표정을 살펴보니 이런 딸의 반응이 딱히 싫다는 것 같지만은 않다.
“감사합니다. 뭔가 마음이 뿌듯해지네요.”
곧이어 애틀라탄이 불쑥 제안했다.
“이렇게 된 것도 참 좋은 인연인데, 나중에 더 진지한 자리를 가져볼까요?”
로페즈는 바로 승낙하진 않았다. 자신감이 없는 척, 부담스럽다는 표정을 만들어 보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하···. 제가 어떻게 감히 하이게이트 회장님과 그런 자리를···. 저는 괜찮습니다. 은혜를 입혔다고 생각할 정도로 크게 대단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자 애니아나가 애틀라탄에게 애달픈 시선을 보낸다. 애틀라탄이 자기 딸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어쨌든지는 모르겠지만.
“어이쿠, 그러지 마시고. 뭐, 은혜를 갚겠다는 말이 틀린 건 아닌데요. 그것과는 별개로 제가 대표님의 옵시디아몬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어서 그런 부분도 있답니다.”
“아, 그런가요?”
“본인이 제일 잘 아시겠지만, 모든 평가 지표가 좋잖아요? 매출은 물론이고 채용사이트에서 일자리 환경 평가나 대표님 평판까지···. 어디 하나 모난 곳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 완벽한 경영을 하고 계세요.”
“과분한 칭찬입니다. 저는 아직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방금 ‘아직’이라고 하셨군요.”
“하하···.”
“그냥 자기가 대단하지 않다고 하는 것과 ‘아직’ 대단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예요. 더 좋은 결과와 높은 위치를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죠. 뭐든 무의식의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대기업 회장의 사고방식이었다.
그제야 로페즈는 씨익 웃어주면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자 애틀라탄도 얼굴에 웃음이 만개해서 입을 열었다.
“어때요? 제 개인연락처, 받아보시겠어요?”
로페즈는 테이블 위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받겠습니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기회를 주셨는데 바보처럼 끝까지 거부할 순 없죠.”
그렇게 번호를 교환한 뒤,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에 애니아나가 말을 걸어왔다.
“저는 하이게이트의 생산계열사를 맡고 있어요.”
“아, 네.”
“소형 드론에도 옵시디아몬 인공지능 모듈을 내장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교통이란 게 언제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 모르는 법이잖아요?”
“그렇죠. 온갖 상황에 바로 대응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필수라고 들었어요.”
“네. 그래서 소형 드론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서 외부의 인공지능 허브에 의존하고 있어요. 그런데 인공지능을 아예 부품으로 내장해버린다면···. 인터넷 연결이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안정성을 강조할 수 있게 되겠죠.”
서론은 길었지만 결국 그녀도 개인연락처를 교환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거래처를 찾으러 금성에 온 게 정답이었네요. 애니아나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셨으면 해요. 제가 뒤에 호칭을 잘 못외워서···.”
“애니아나 씨도 절 이름으로 불러주신다면 그렇게 하죠. 하하.”
“네. 로페즈 씨. 나중에 일정 조율해서 연락드릴게요. 오늘은 정말 감사했어요. 진짜 감사합니다.”
로페즈는 애니아나와도 개인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리고 세 발자국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애틀라탄은 넌지시 로페즈를 떠보았다.
“허허···. 다음에 화성에서 봅시다. 개인적으로.”
“네. 회장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로페즈는 뒤로 돌아서자마자 웃는 표정을 싹 지워버렸다.
‘그래.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겠지.’
만남은 평화적이었다. 로페즈가 평화적인 만남이 되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다음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 애틀라탄, 애니아나의 개인 휴대전화를 감염시켰습니다.
누군가 로페즈의 이러한 행동을 알아차린다면 나쁜 놈이라고 욕할 것이다.
하지만 로페즈에게 이미 선악의 기준과 도덕적 사고의 경계는 흐려진 지 오래다. 이제 그에겐 오로지 이해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마치 트랜센던서처럼.
- 관리자님. 두 사람의 개인 휴대전화에서도 골든체인과 관련된 단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로페즈는 아주 작게 혼잣말을 했다.
“네가 못 찾았어도 괜찮아. 내가 직접 찾아서 다 알아낼 거니까.”
하루 뒤, 그는 화성으로 돌아가는 함선에 올랐다. 새로운 거래처와 새로운 라인을 손에 넣은 채.
< 7. 새로운 삶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