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새로운 삶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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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9년 1월 26일.
옵시디아몬의 대표 로페즈는 인공지능 모듈의 새로운 거래처를 찾기 위해 금성으로 출장한다.
- 새로운 거래처를 찾기 위함이라는 명분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사원들이 납득하고 있어?”
- 그렇습니다. 그들은 현재 사무실에서 관리자님의 출장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좋아. 당분간 그쪽은 프녹스 씨에게 맡겨두면 되겠지.”
올림푸스 UN의 중심에는 약 27㎞ 높이의 올림푸스 화산이 있다. 화산의 측면으로 건설된 여러 비행장과 착륙장은 화성 시민들이 우주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는 우주 교통의 중심지다.
로페즈는 화이트홀의 함선에 올랐다. 그의 좌석은 금성까지 왕복으로 95만 크레트를 지출해야 하는 프리미엄 비즈니스석이다.
-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금성 베네레지오 착륙장까지 여러분을 모시고 갈 함장, 히반 안단테입니다. 오늘도 저희 화이트플라이를 이용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 이 함선은 화이트플라이 착륙장에서 출발하여 시속 약 5억 킬로미터, 약 0.5광속으로 가속할 예정입니다. 목적지인 금성까지의 소요시간은 이륙으로부터 5시간 30분이 소요되어 현지시각으로 오전 11시 40분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 항로상 경로가 곡선으로 꺾일 것으로 예상되니, 공간 왜곡 지점과 태양 고궤도를 통과하는 중에는 기체가 다소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해당 구간을 통과할 때에는 승무원들의 안내에 적극 협조해주시길 바랍니다. 또한 기체가 가속을 끝내기 전까지는 안전을 위해 좌석 이탈을 자제해주시길 바랍니다.
- 여러분의 안전한 여행을 책임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빛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오늘날 함선과 우주선은 엔진이 낼 수 있는 최대 속력까지 가속한 후, 중력으로 앞뒤 공간을 왜곡해서 빛보다 느린 속도로, 빛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래서 우주를 누비는 함선 및 우주선은 이동 시간의 대부분을 가속과 감속에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이러한 기술은, 특히나 중력을 다루는 기술은 인류 문명을 진보시키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으면서도 자세한 원리나 과정이 공개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원리나 과정이 공개되어있지 않은 기술은 다른 항성계나 행성으로부터 영구적으로 대여하여 쓰고 있다. 어느 곳에서 기술을 수입했는지도 오랜 세월 유지되어온 비밀이다.
구석기 인류가 불을 다룰 줄 알면서도, 연소의 원리는 모르고 쓰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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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은 거대한 반중력 장치로 부양하는 접시 모양의 도시들로 국가를 형성했다.
금성의 적도에서 북반구 도시와 남반구 도시의 중심지 역할을 해주는 가장 큰 도시가 바로 '베네레지오'다. 다른 말로는 금성의 수도라고 부른다.
도시의 밑으로는 짙은 구름층이 깔려있다. 도시를 뒤덮은 돔 형태의 투명한 천장은 약간 푸른색이다.
그런 도심 속에서 한 여성이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아니요. 할인율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는 게 맞다고 봐요.”
어딘가와 통화 중인 그녀는 겉보기에 상당한 미인이면서 사회적인 능력까지 갖춘 것으로 보인다.
“금성에도 하이퍼루프를 설치하면 교통이 편리해지겠죠. 지금은 접시처럼 생긴 도시가 다리로만 연결되어 있잖아요? 공중 교통량이 많다는 문제도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승용차로 걸어가던 중에 멈칫했다.
“네···. 금성에 왔어요. 제가 휴가 중이라서요. 오늘하고 내일은 일정에 빈자리가 없네요. 알아보고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승용차에 흐르는 광택 너머로 사람의 움직임이 비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핸드백 속으로 천천히 손을 집어넣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에리카 애니아나 씨 맞으십니까?”
“···.”
애니아나는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괴한 여섯 명이 어느새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협조해주시죠. 그 핸드백 안에서 총 꺼내시면 다칩니다.”
“아니 저한테 왜···”
콰악!
측면에 있던 괴한이 그녀의 핸드백을 빼앗아버렸다. 스스로 몸을 지킬 수단을 잃어버리는 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갑시다.”
“꺄악···!”
이어서 앞에 있던 괴한이 애니아나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려 했지만 도구도 없이 남자 여섯 명을 상대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살려!!! 읍···!”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더니 괴한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더는 방법이 없다. 이대로 납치당할 것이다.
애니아나의 눈가에서 겁에 질린 눈물이 떨어지려던 그 순간이었다.
“저것들 뭐야?! 괜찮으세요?!”
지하주차장의 입구에서 조명을 등진 남자 두 명이 등장했다.
“읍···! 으읍···!”
애니아나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표현했다. 이에 응답하듯, 정장을 입은 두 남자가 재빠르게 달려왔다.
먼저 달려온 남자는 큰 키에 어딘가 사납게 생긴 인물이었다. 그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복면의 괴한들은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자이칸 씨! 그쪽 부탁드립니다!”
“예! 대표님!”
그리고 다른 한 남자는 그녀의 양팔을 구속하던 두 괴한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려주었다. 먼저 온 남자처럼 주먹이 매섭진 않았지만, 그의 움직임 또한 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매우 빨랐다.
“에이, 씨발! 빠지자!”
끝내 여섯 괴한은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이리와 이 새끼들아!”
“됐습니다! 자이칸 씨. 그만 하세요.”
“저것들 그냥 보내줘도 됩니까?”
“여기 여성분만 두고 어떻게 쫓아가요? 일단은 경찰에 신고해주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괴한들은 지하주차장에 있던 승합차에 우르르 올라타더니 잽싸게 사라져버렸다.
사나운 인상의 남자는 입구 쪽으로 걸어가며 경찰에 전화를 거는 듯하다.
‘개조인···. 경호원···?’
그리고 그녀의 앞에 선 남자는 위에 세워두었던 방탄 승용차를 원격으로 호출하며 물었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아···.”
그야말로 백마 탄 왕자님. 아니, 방탄 승용차를 탄 대표님이었다.
애니아나는 애서 눈물을 훔치고는 넙죽 고개를 숙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나쁜 놈들···. 경찰에 신고했으니까 당분간 나타나진 않을 거예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스타일도 깔끔하고 굉장히 선하게 생긴 남자다. 그런 인상 때문일까, 좀 전까지 심하게 두려웠던 마음이 금방 안정을 되찾아가는 것 같다.
‘그래도 아까 싸울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그가 바로 옆에서 주먹을 휘둘렀을 때는 무서웠다. 무서웠지만, 어딘가 멋있어 보였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주차장 밖으로 나가시는 길인가요?”
“네.”
애니아나는 휴대전화로 차에 시동을 걸어보였다.
“다행이네요. 그럼···. 몸조심하세요.”
그는 이대로 떠나려는 모양이다. 무심한 듯 고개를 돌린 채 등을 보이고 있다.
“잠시만요···!”
애니아나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소매를 붙잡고 말았다.
“네?”
“···아.”
다시금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의 소매를 붙잡은 자기 손이 저절로 도망쳤다.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그러니까···. 그, 커피라도 한잔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하지만 그는 미인의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셔도···”
“그, 그래도···. 아, 혹시 금성에 사시는 분인가요?”
“아니요. 저는 일 때문에 화성에서 왔습니다.”
“아하···.”
“아무튼, 저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 이만···.”
그도 화성에서 온 남자였다.
애니아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서 미소가 만개하려는 얼굴을 가까스로 통제했다.
“혹시 성함이···”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이미 멀찍이서 방탄 승용차의 문을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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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애틀라탄(Erica Atlatan).
올해로 55세인 그는 화성의 대기업, 하이게이트 그룹의 회장이다. 그에겐 올해 26세가 된 딸이 하나 있었다.
“이 녀석아! 아빠가 누누이 말했지! 어디든 혼자 다니지 말라고!”
“그래서 내가 싫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아빠한테 감시당하는 것 같단 말이야!”
“아빠는 우리 딸을 감시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보호하려고 하는 거지. 이것 봐. 아빠 눈길이 닿지 않으니까 금방 오늘 같은 사고가 났지. 아빠가 하는 말이 틀렸나?”
“···.”
두 사람은 금성의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텔 라운지에 있다.
“그래도···. 나는 모처럼 여행도 즐기려고 한 건데···. 여기에도 그런 놈들이 있는 줄은 몰랐지···.”
“애니아나. 넌 아빠 따라서 비즈니스 겸, 여행이라는 명목이야. 나쁜 놈들은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던 상관하지 않는다고.”
“응···.”
“갑갑하다. 내 약점 잡으려는 것들이 한두 놈이어야지···. 어찌 됐건 다음부터는 아빠 말대로 꼭 경호원 붙이고 다녀. 알겠어? 마지막 경고야.”
“네···. 알겠어요······.”
애니아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널 구해준 사람이 누구냐? 그런 고마우신 분들께는 사례를 좀 드려야겠는데.”
“모르겠어.”
의외의 대답이었다.
“모른다니, 번호도 안 받았어?”
“응. 그땐 나도 너무 정신이 없어서···.”
“이름은?”
“미안. 그것도 몰라.”
애틀라탄 회장은 속이 답답했는지 냉수 한 컵을 단번에 비워버렸다.
안 그래도 오늘 아버지의 속을 타게 한 애니아나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아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름을 여쭤보기 전에 가버리셨어···.”
“그렇게 금방 가버렸으면 우리 딸한테 수작 부리려는 놈은 아니었나 보네.”
“따지고 보면 수작은 내가 부리려고 했지···.”
“뭐, 뭐라···? 어떤 놈이야?!”
“방탄 승용차를 타시는 분이었는데, 화성 모델이었어. 차 번호판은 43406. 그 사람도 화성에서 왔다고 했어. 어딘가의 대표인 사람 같아. 옆에 경호원인지 비서인지 엄청 무섭게 생긴 사람도 붙이고 있었어.”
“···다른 건?”
“까만 명품 정장에 까만 셔츠. 보라색 넥타이에 나이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엄청 착하게 생겼는데, 엄청 잘생겼어. 아니, 분위기가 있다고 해야 하나···?”
“그 정도 성공한 사람이 잘생기기까지 했으면 유명인일 수도 있잖아?”
“아빠도 알잖아. 나 뉴스 안 보는 거.”
애틀라탄은 탄식했다.
“···내가 명색이 하이게이트 회장인데. 내 큰딸이 뉴스도 안 보고 산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 다 놀라겠다, 이 녀석아.”
***
“트랜센던서.”
- 네. 관리자님.
로페즈는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물었다.
“잘 되고 있어?”
트랜센던서는 답한다.
- 두 사람의 다음 일정을 확인했습니다.
좋은 인상, 좋은 계기, 우연을 가장한 도움.
사전 작업은 끝마쳤다.
“내가 어디로 가면 돼?”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날 차례다.
< 7. 새로운 삶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