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대 인공지능 키우기-36화 (36/183)

< 6.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5) >

***

로페즈는 현조의 집에 방문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관계도를 중심으로 주요 사건들을 정리해놨습니다.”

현조의 작업실 벽에는 행성대통령과 연계된 자료들이 여러 인물에 얽혀 거미줄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글자는 모두 현조가 직접 펜으로 썼으며, 사건을 정리한 기사나 자료 같은 것은 모두 종이로 인쇄하여 붙여놨다.

“구속하실 수 있겠어요?”

“로페즈 님께서 제공해주신 영상과 로그들은 충분히 근거로써 활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뭔가 일이 터지기 전에는 상부에 건의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현조 검사님은 감찰부라고 하셨죠?”

“네. 그게 이름만 감찰부입니다. 제가 먼저 움직이면 반드시 윗선 개입이 있을 겁니다. 그랬다간 준비한 것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갑니다.”

수직적인 체계의 꼭대기가 행성대통령의 편이다. 그러니 꼭대기가 아닌 현조가 행성대통령에게 불이익이 되는 움직임을 보이면, 시작하기도 전부터 짓밟힐 게 뻔하다는 뜻이다.

“방송의 힘을 빌려서 단번에 터뜨려야겠네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런 상황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일단 터뜨리기만 하면 된다. 감찰부의 부장검사인 현조가 치밀하게 준비한 자료들은 발뺌할 수 없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 부분은 제가 해결할게요. 검사님은 제가 먼저 터뜨리면 그때 움직여주세요.”

“방송국이나 기자들 쪽으로 아는 분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이번 일은 방송국이나 기자의 힘을 빌리기 힘들다. 리탄이나 클레릭을 통해서 그런 쪽의 도움을 받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보도하자고 미리 알렸다간 어떤 식으로든 행성대통령에게 들통날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방송국과 기자의 입장에서는 이번 내용의 막대한 리스크를 감당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검사님은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12월 1일쯤으로 생각해주세요. 아마 그때쯤이면 일이 터질 겁니다.”

방송국의 도움은 필요 없다.

아레스 시스템에 접속한 시점에서, 화성 네트워크 장악 프로젝트를 완료한 시점에서, 이미 대부분의 작업이 끝났으니까.

***

길고도 길었다.

화이트홀의 페이치 회장을 타고 올라가니 진정한 흑막은 이 행성의 통수권자이자 통치권자. 행성대통령이었다.

행성대통령은 트랜센던서 개발을 지시하여 다음 대선과 화성의 완전한 지배를 꿈꿨겠지만, 계획대로 되게 하지 않으리라.

그가 앉은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대통령이지, 군주가 아니다.

이제 그는 민주주의 행성에서 왕좌를 만든 죗값을 치르리라.

- 관리자님. 금일 12월 1일부로 선거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로페즈는 시작하기에 앞서 호기심에 물었다.

“후보자 중에 진짜 PP로서 어울리는 사람이 있긴 한 거야? 내 눈엔 매년 그놈이 그놈 같아.”

- 후보자를 정리해드리겠습니다.

트랜센던서는 대표실의 컴퓨터 화면으로 순차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 기호 1번. 에두스 비숍 필리스버그. 재선에 나온 현 행성대통령은 전 통합공화당 출신이며, 대외적으로 안정적인 외교를 내세워···

“그 쓰레기 새끼는 관심 없어.”

- 기호 2번. 하메네스 클레릭. 26번 산업지역의 지역대표이며 자유지구당 소속 2선 의원으로 공천을 받았습니다. 그는 부패 없는 정의로운 사회를 목표로 현 정권을 고발함과 동시에 시민에 의한 의사결정 시스템을 작성하겠다는 핵심 공약을 걸었습니다.

“다음.”

- 기호 3번. 벤트 빈 솔레이카. 15번 거주지역의 지역대표이며 화성연대당 소속 3선 의원으로 공천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올림푸스 UN의 궤도에 올림푸스 콜로니를 건설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핵심 공약을 걸었습니다.

“다음.”

- 기호 4번. 코발터 카나비악. 4번 산업지역의 지역대표이며 시민연합당 소속 2선 의원으로 공천을 받았습니다. 그는 노후화된 산업지역을 전면적으로 통폐합하여 대기업과 연계해 화성의 수출 흑자를 확대하겠다는 핵심 공약을 걸었습니다.

“···.”

- 기호 5번. 알 카즈네 베르도. 백색정치당 소속 2선 의원으로 공천을 받았습니다. 그는 화성의 대학교와 중소기업 사이에 원활한 교육지원프로그램을 만들어 화성의 인재를 조기에 발굴하겠다는 핵심 공약을 걸었습니다.

“기호 6번부터 9번까지는 무소속이지?”

- 그렇습니다.

올바른 사람이 당선되어야 한다.

문제는 진짜 올바른 사람이 누구인지 대다수의 일반인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현 행성대통령이 올바른 사람이었다면 지금까지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들도 없었으리라. 누군가 죽지도 않았을 것이고 로페즈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클레릭 의원이 당선되겠지···. 지지율도 높고 이미지도 좋으니까.”

클레릭이 행성대통령이 된다면 개인적으론 좋다. 이미 그의 약점이라면 수도 없이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내 입장에선 그게 최고겠지만···. 사람들의 입장에선 또 머리만 바뀌는 게 아닌가.’

그랬다간 자신이 그렇게 미워하던 부패 세력과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건 아닐까. 어쩌다보니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반대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 근미래 예측 연산을 실행하시겠습니까?

“그건 학습에 지장을 주니까 안 쓰기로 했잖아. 그리고 이런 복잡한 구도에선 더 쓰기 힘들어. 하루마다 미래가 달라질지도 모르니까.”

다시 절실하게 느끼는 거지만,

올바른 사람이 당선되어야 한다.

‘나라면 제일 좋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지···.’

‘그리고 투표율을 조작해서 그 사람이 당선되게 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개인의 판단으로 당선된 자가 ‘올바른 사람’이라고 한들, 과연 ‘올바른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결국 사람들이 선택할 일이겠지···.’

거기까지는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누군가를 뽑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이니까.

***

12월 2일.

예상대로 허블대학교 졸업축제에 후보자들이 저마다 한 번씩 순회하는 중이다. 오후 2시가 되어선 클레릭이, 오후 2시 30분이 되어선 현 행성대통령이 허블대학교에 들어갔다. 이제 둘은 서로 가까운 장소에서 선거 운동을 펼치고 있다.

로페즈는 안전하게 대표실에서 모든 상황을 주시했다.

- 현장에 투입된 경호 휴머노이드 스무 기에 수면가스가 장착되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혼란을 일으킨 후 클레릭을 작업하겠다는 건가.’

- 원격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발신지를 추적하겠습니다.

로페즈는 클레릭의 실시간 영상을 보며 전화를 걸었다. 영상 속에서 연설을 마친 클레릭은 급히 트럭의 뒤로 이동했다.

“의원님. 인원을 통제하는 경호 휴머노이드들 사이에 수면가스를 장착한 것들이 있어요.”

- 이런! 정말 말씀대로 악랄한 놈들이군요!

“가스가 터지면 모두가 잠들고, 카메라 시야가 흐릿해지겠죠. 그 사이에 작업자를 써서 클레릭 의원님을 해치려는 의도 같아요.”

- 예, 예. 일단 당해주라고 하셨죠?

“수면가스에 원격 명령이 들어가면 저는 그걸 추적해서 증거로 삼을 겁니다. 그리고 작업자가 다가오면 제가 별도로 투입한 로보버그로 제압할 테니 안심하세요. 그래도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의원님 트럭에 숨어있는 자이칸 씨가 나설 겁니다. 아시겠죠?”

- 그럼요. 제가 언제 우리 대표님 의심한 적이나 있었습니까. 하하. 오늘 입은 은혜는 제가 PP가 되고 착실히! 갚아나가도록 하죠!

“네. 서둘러 끊을게요.”

이어서 트랜센던서가 알려왔다.

- 관리자님. 현장에 총기 소지자가 식별되었습니다. 대학생들 사이에 숨어있습니다.

화면 속에 빨간 네모로 잡힌 한 명이 총기 소지자였다.

“···일단 대기해.”

같은 순간, 클레릭은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여러분! 제가 만약 당선된다면, 이 화성의 투명한 정치와 투명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몸소 앞장서겠습니다. 밝게 자라나는 젊은 새싹들이 있는 이 행성을! 젊은 여러분이 장차 스스로 입을 열어 좋은 행성이라고 자랑할 수 있게끔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무리를 형성한 대학생들 사이에 하얀 마스크를 쓴 남자가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온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로잡을 것이며, 잘못된 사람이 있다면 법치국가의 정의를 구현하겠습니다!”

동시에, 후보자를 경호하는 정부 휴머노이드 열 기가 인원을 통제하는 척하며 클레릭의 트럭 근처로 모여든다.

“제가 내세운 공약은 여러분과 하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지켜보겠습니다! 이 하메네스 클레릭! 화성에서 태어나 화성에서 삶을 보낸, 화성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고개 숙여 부탁드립니다. 절 믿어주십시오! 여러분의 소중한 한 표를 제게 맡겨주십시오!”

화이트홀을 고발한 건으로 이미지가 좋아진 클레릭은 대학생들의 솔직한 박수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저는 기호 2번! 하메네스 클레릭입니다!”

···그리고 그의 연설은 아무 사건 없이 무사히 종료되었다.

***

고급 승용차의 뒷좌석에 오른 클레릭은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선거 트럭에서 나온 자이칸도 그와 멀찍이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왜 그러십니까?”

조수석의 보좌관도 그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이야기가 달라서.”

“네?”

“일단 밥이나 먹자.”

그러자 운전수가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네 옆에 앉은 보좌관이 그런 것도 안 알려줬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젊은 놈이 기본이 안 돼서···. 눈치가 있어야지. 어디 적당하게 사람들 많은 먹거리 골목으로 가. 서민 음식이나 입에 대보자.”

차량이 출발한 후, 클레릭은 뒤로 멀어지는 허블대학교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 교활한 놈이 내 뒤통수라도 치려는 건가···.”

“아, 혹시 로페즈 님을 말씀하시는···?”

“조용히 해봐. 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클레릭은 일단 로페즈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의원님.

“하하하. 이거, 아무 일도 없이 끝났는데요?”

로페즈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탄했다. 당황한 기색을 일절 찾아볼 수 없다.

- PP 쪽에서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아요. 휴머노이드랑 작업자가 의원님께 조금씩 접근하더니 연설 마지막엔 전부 떠나버렸어요.

‘좀 그럴듯한 변명을 준비하지.’

“아, 그랬던 거군요. 이거 어찌합니까? 증거를 추가로 확보하려는 계획이셨을 텐데.”

- 아직 선거는 끝나지 않았어요. 경계 늦추지 마시고, 가시는 장소마다 시간과 함께 제게 보고하세요.

클레릭은 휴대전화를 음소거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허, 재밌네. 아직도 자기가 갑인 줄 알아.”

“곧 그 관계가 역전되시겠네요. 축하드립니다.”

보좌관의 호응을 끝으로 다시 음소거를 해제했다.

“물론 보고해드려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로페즈 님이 명령하시는 일인데.”

- ···.

“아무튼 저는 행성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몸이라 좀 바쁘군요. 다음 장소와 시간이 결정되면 문자 드리죠.”

- 저는 분명히 경고했어요. 끊습니다.

“예. 하하. 알겠습니다.”

클레릭은 유리창을 거울로 삼아 머리칼을 정돈했다. 그러던 도중, 운전수의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살짝 삐져나온 하얀색 천이 눈에 들어왔다.

“보좌관.”

“예. 의원님.”

“얘는 신입이야? 옷매무새도 똑바로 정돈할 줄 모르는 놈이네, 이거.”

“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운전수입니다.”

“어이, 신입.”

“예.”

“바지에 뭘 이렇게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

클레릭은 운전수의 바지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하얀색 천을 뽑아보았다.

“······천으로 된 마스크는 왜 가지고 다니나? 요즘 젊은 애들 패션이야?”

“아···. 그 마스크는···. 도중에 처분하기가 어려워서요.”

“뭔 헛소리야? 그냥 대충 버리면···”

그 순간, 클레릭의 심장이 철렁했다.

머리가 생각하기 이전에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그 정도로 갑작스레 깨달은 위기감이 그의 등줄기로 식은땀을 흐르게 했다.

“보좌관. 얘 이름이 뭐야?”

“네? 그건 저도 잘···. 오늘 선거 운동 중에 급히 일손으로 들어온 친구라서요···.”

클레릭은 흐트러지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신입. 너···. 이름이 뭐야?”

그대로 대답을 기다리는 몇 초가 몇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직후, 운전수는 오른손으로 접이식 칼을 꺼내어 옆에 있던 보좌관의 왼쪽 눈을 꿰뚫어버렸다.

< 6.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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