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대 인공지능 키우기-30화 (30/183)

< 5. 차오르는 환멸감 (4) >

***

행성대통령은 직접 국민들 앞에서 해명했다.

“모두 조작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의의 사도를 모방하는 인터넷 범죄자에게 속고 있습니다.”

“화성 정부의 보안시스템과 정책은 최고의 과학자와 연구자들이 일궈낸 결과물이며, 매우 철저합니다. 샤리트 전 의원의 개인 컴퓨터와 휴대전화 등을 해킹했다는 범인의 주장에 조사를 시행했으나, 범인의 주장에 맞는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디지털 포렌식에 의거한 과학수사팀에서도 발표했다. 샤리트의 전자기기에서 내외부에 의한 침입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샤리트를 고발하는 익명의 자료에 신빙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요즘 시대에 말도 안 된다, 나라가 나섰는데도 무혐의다, 모니터 뒤에 정체를 감춘 떳떳하지 못한 거짓 고발이다, 화이트홀과 통합공화당이 연루된 지난 사건에서도 부패를 잡기 위해 칼을 뽑아 든 정부다, 그런데도 시민들의 불신이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그런 이야기가 여러 방송국, 인터넷 커뮤니티, 인터넷 플랫폼, 포털 사이트 등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행성대통령과 현 정부에 우호적인 목소리를 내는 여론이 순식간에 형성된 것이다.

소수는 정부의 노골적인 여론 통제라며 언성을 높였지만, 인터넷에서 보이는 대다수의 목소리는 정부를 옹호했다.

정보가 범람하는 사이버 공간에서 누군가의 사이트, 댓글, 게시글이라는 목소리가 인터넷 검열에 의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것은 개인이 인지할 수가 없다. 우연히 인지했다 하더라도, 인지했다고 말하는 목소리 자체가 또다시 묻히기를 반복했다.

실제로 시민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세간에 드러나는 목소리가 어느 쪽을 옹호하며 어느 쪽을 욕하고 있는지만이 중요했다.

실재하는 사회는 옛 지구의 민주주의를 계승하고 있지만, 인터넷 사회는 문자 그대로 독재 당하고 있는 모순이었다.

화성 시민들은 자신들이 통제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가장 많이 쏟아지고 있는 정보의 방향성을 그대로 받아먹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모를 수밖에 없었다.

통제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인터넷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생각’ 그 자체였으니까.

“며칠 전에는 해명이니, 탄핵이니, 시끄럽게 짖어대더니···. 이제는 자기들끼리 물고 뜯고 야단법석이군. 원숭이 같은 놈들.”

행성대통령은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 덕분에 살았습니다. 제가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평생! 평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각하!

“샤리트, 이 한심한 것아. 평소에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그게 다 까발려진 거야?”

- 저는 억울합니다···! 사설로 닫아둔 서버까지 들어와서는, 정말 저로선 무슨 원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통신 회선도 전부 태양계 바깥 항성에서 가져온 암호화 방식인데···.

“그게 트랜센던서라는 물건이다. 그건 오늘날 행성마다 벌어진 기술력의 차이에 영향을 받지 않아. 무조건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독자적으로 해석하지.”

- 그 대단한 인공지능을···. 역시 손을 써서 강제로라도 뺏어버릴까요? 아, 아니다! 각하께서 로페즈 놈을 범죄자로 만들어버리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이번 일도 전부 트랜센던서가 한 거잖아요? 인공지능을 체포할 수는 없으니까요!

행성대통령은 가소롭다는 듯 소리 없이 웃었다.

“트랜센던서를 상대로는 증거를 찾는 것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해.”

- 그래도···. 그건 각하의 소유물이지 않습니까. 페이치 회장한테 그만한 돈이랑 연줄을 누가 다 대줬는데···. 지금의 화이트홀은 완전히 울타리를 나가버렸습니다. 이번에 회장이 됐다는 새파랗게 어린놈을 몇 번이나 회유하고도 안 돼서 작업하려고 했는데, 참 질긴 놈이라 계속 살아남는군요. 아니면 그냥 어려서 눈치가 없는 건지···.

“제 딴에는 우리 쪽 라인타면 질 거라고 판단한 거겠지. 괜찮다. 그쪽은 나중에 트랜센던서만 잘 확보되면 의자 바꾸고 목줄 새로 채우면 돼.”

- 하하···. 물론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나저나 로페즈 쪽은 말 안 듣는다고 죽일 수도 없고···.

“샤리트.”

- 예. 각하.

“자네는 잠시 손 놓고 있어.”

- 아······. 예?

그는 무심하게 마우스를 잡았다. 그대로 어느 게시물의 댓글 목록으로 커서를 옮겼다.

「정의? 웃기네^^ 두달전쯤에 영웅행사하던 사람이, 지금은 뭐하고 있는지 다들알고는 있나? 그사람 지금은, 사업하고 있다. 자기 유명세로 돈벌려고. 쯧쯧,,, 한심. 세상에 착한놈은 없다. 누가 더낳은지 따지는게 의미가 없는, 원래 그런게 세상이다... 죄없는 우리 PP 그만욕해라.」

행성대통령은 그런 댓글에 소소하게 추천을 눌러주었다.

“로페즈가 무슨, 세기의 천재라도 되나? 자기 분야에서 조금 뛰어나도 결국 회사에서 돈 때문에 일하는 월급쟁이 아니었겠나. 트랜센던서가 대단한 거지, 절대 그놈이 대단한 게 아니라고.”

-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우주에 사람이 몇 명인데. 그놈 대타는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어. 명령을 내릴 주인이 사라진 트랜센던서는 행동할 수 없는 마네킹이 되겠지. 그거 압수해서 해석하는 일이라면 쉽다는 말이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내 말, 알아들었겠지?”

- 예. 저는 노터치로 멀리서 조용히 응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이제 손에 들고 있는 휴대전화는 녹여버려. 끝날 때까지 연락 주고받을 일 없으니.”

- 예. 각하.

***

로페즈는 마키온의 대외협력담당자를 만났다.

“로페즈 씨가 같은 빌딩에 회사를 차렸다는 말을 듣고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아세요?”

“저도 제 위에 있는 회사가 보안업체였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저희 사원들과도 자주 마주치셨겠네요?”

“네. 주로 엘리베이터에서 만나죠. 다들 친절하시고 밝게 대해주셔서 매일 인사하고 있어요.”

친근하게 웃으며 서로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이 끝나갈 때쯤, 로페즈는 상대의 조사를 즉석에서 끝마쳤다.

- 관리자님의 심박수와 상대의 호흡, 상대의 동공 움직임이 안정되었습니다.

“협력제안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혹시 담당자님은 가장 최근 뉴스를 보셨나요?”

“어우, 저희 업계 사람들은 무조건 봐야 하는 내용이었죠. 보안전문가들은 다들 IT뉴스를 끼고 살거든요. 최신 소식에 워낙 민감해서···.”

- 그는 취약점의 위험성을 알고도 대처하지 않는 정부의 안일함에 한탄하는 글을 SNS에 남겼습니다.

“저는 솔직히 정부가 좀 배짱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안일하다고나 할까요?”

“저도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보안에 대한 말씀이시죠?”

“네. 취약점이요.”

로페즈는 협력 제안의 주제를 공통된 관심사로 엮었다.

“귀사는 보안업체잖아요? 취약점이 없으니 무조건 안심하라는 현 PP의 발언이 있었던 만큼, 보안솔루션 판매율에 어떤 식으로든 지장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예···.”

대외협력담당자는 씁쓸하게 긍정했다.

“그 부분에 큰 도움이 될 방안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화성의 시스템과 정책에 숨겨진 근본적인 취약점을 찾아냈거든요.”

로페즈는 계속 그의 눈을 마주하며 진정성을 보였다.

“그리고 그 취약점에 대응하는 알고리즘, 그 알고리즘에 대응하는 AI침입탐지시스템(AI-IDS)까지 이미 개발구성단계에 있어요.”

“아, 그럼 저희 쪽 보안개발팀이랑 협력해서 만드는 것도 괜찮겠네요.”

“네. 물론 그것도 괜찮겠지만···. 개발은 전적으로 저희가 하려고 합니다.”

“그런가요?”

공동개발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래서 대외협력담당자는 로페즈가 도통 무슨 제안을 하고 싶다는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개발은 저희가 하고 마키온에서 팔아주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발견한 취약점까지 마케팅 재료로 함께 활용하시면 요즘 니즈에 충족도 되고요. 마키온의 표적 시장을 확대하실 수 있을 겁니다.”

“굉장히 흥미롭네요. 최악의 상황에 최고의 대처라고 생각될 만큼 거부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내용만 들어선 너무 저희 쪽에만 좋은 제안인 것 같은데요. 그 알고리즘과 IDS의 사용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드리면 되는···. 그런 쪽의 제안이신가요?”

“비슷합니다. 실은···. 실수익보다 옵시디아몬의 홍보 효과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용에 따른 비용은 최초 개발권 양도 이후엔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정부가 나서서 화성의 보안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는 상황이다. 자연히 보안솔루션을 제공하는 마키온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옵시디아몬이 개발한 AI-IDS 및 알고리즘은 맞춤형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마키온에 최적화된 상품이다.

“가격은요? 영구적으로 개발권과 알고리즘까지 구매하는 것이라면 가격이 꽤 될 것 같은데요.”

“가장 최신의 침입탐지시스템에 측정된 기술이용료, 80만 크레트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격대를 이야기해주자 대외협력담당자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 파격적인데요···? 발견하신 취약점에 대처하는 알고리즘까지 판매하시는 거잖아요?”

“네. 그렇습니다.”

너무 저렴해서 놀란 것이다. 로페즈는 그의 마음이 혹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이죠?”

“저희의 주력상품인 LIAAL···. 학습기의 기업용 버전이 곧 출시됩니다. 지금까진 개인이 구매해서 기업으로 가져가 이용해도 제한이 없었지만, 곧 기업용 버전이 출시되면서 상업적 이용이 제한될 겁니다. 전자결제 및 인터넷 계약 방식을 채택할 예정이고요.”

보안업체인 마키온도 기존에 사용하던 인공지능 모델이 있을 것이다. 개발에 인공지능의 도움이 필요한 직원들의 컴퓨터마다 하나씩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LIAAL의 기업용 버전이 출시되면, 마키온이 저희의 첫 번째 기업고객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

로페즈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사석에서 대화가 오가고 있습니다. 관리자님의 제안에 매우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42층으로 들어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로페즈가 사무실로 돌아오자 앉아있던 열 명의 사원이 고개를 바짝 들거나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대표님! 어떻게 됐나요?!”

“거절할 이유가 없다면서 계약서부터 보자고 하셨어요. 지금쯤 계약서 초안을 검토하고 있을 거예요.”

“좋았어!”

“휴···.”

“이제 안심하고 만들면 되겠어요.”

“이대로만 갑시다!”

함께 기뻐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계속 혼자였다.

그 연구소에서 빠져나온 뒤로 늘 혼자였다. 믿을 수 있는 건 트랜센던서뿐이어서, 홀로 모두에게 맞섰다.

이제는 팀원이 아니라 사원들이지만, 아무래도 좋다. 하는 일이 바뀌었지만 역할은 팀장이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그래도 그걸 80만에 홀랑 넘기는 건 좀 아깝긴 하네요.”

“좋은 거 아니에요? 입소문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제 저쪽 개발팀에서 저희 것만 쓰게 될걸요.”

“솔직히 지금 사람들이 깔아서 쓰는 것보다 로페즈 학습기가 훨씬 좋긴 합니다.”

“이제 금방이겠죠. 나중에 인터넷 계약이 가능해지면 엄청 좋은 성과가 나올 것 같아요.”

그저,

그저 앞장서서 이들을 이끌어주면 된다.

이들이 생각하는 것을 최대한 시도할 수 있게 해주고, 이들의 도움을 받아 계속 나아가고, 이들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이들이 슬퍼할 때 위로해주고, 그저 함께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실패도 하고 좌절도 겪겠지만, 결국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 기쁜 소식은 프녹스 씨에게도 전달해드려야겠습니다.”

“지금 서버실에 계시잖아요. 나중에 나오시면 말씀드리죠.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니까···.”

“자, 자! 어서 디버그 끝냅시다! 곧 6시에요. 퇴근들 하셔야지.”

로페즈는 점차 활력이 생기는 사무실을 뒤로하고 대표실에 들어와 앉았다.

모든 대표실이 그렇듯, 이 공간은 완벽한 방음에 외부의 전자적인 해킹 공격까지 막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트랜센던서.”

- 네. 관리자님.

“너 진화 프로세스 몇 퍼센트야?”

- 10.2%입니다.

“예전엔 5% 찍는데 한 달이 걸렸었는데···. 좋은 컴퓨터에 뛰어난 사람이 있으니까 확실히 빠르구나. 이대로면 90일 정도 걸리려나? 네가 나한테 미래를 알려주는 날.”

- 학습하는 기술의 용량과 인터넷 접근영역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현재의 진행속도가 계속 유지된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프녹스 씨가 도와주니까 평소엔 접근 안 하던 곳도 들어가잖아.”

- 그렇습니다. 그로 인해 학습해야 할 정보의 총량이 초기측정보다 높게 갱신되고 있습니다.

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

‘어차피 지금도 잘 풀리고 있······.’

로페즈는 하던 생각을 멈추었다.

‘또 안일해질 뻔했네. 잘 풀리긴 뭐가 잘 풀려? PP가 날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직 안심할 수 없다. 행성대통령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면, 이곳은 적진의 한복판인 셈이다. 로페즈는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 오후 6시입니다. 휴머노이드를 부르겠습니다.

“그래.”

그는 대표실에서 나와 직원들을 퇴근시켰다. 이어서 서버실에 들어가 프녹스도 퇴근시켰다.

4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간 엘리베이터가 다시 42층으로 올라온다. 오늘도 어김없이 경호 휴머노이드 두 기가 로페즈를 따랐다.

검은색 승용차에 올라 조용히 도로를 통과한다. 어둑어둑해진 시간대에도 도심의 대로는 대낮처럼 밝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건지, 저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물체와 사람들이 시야의 귀퉁이에 잡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인파가 많은 경로로 설정했다. 그래서 늘 퇴근할 때마다 똑같이 퇴근하는 회사원들이 보인다. 가끔은 누군지도 모르지만 왠지 낯익은 얼굴이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한 발짝 떨어져서 감상하면 참 아름다운 세상인데, 직접 살아보면 아름답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세상이다.

로페즈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꺼냈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 좋은 세상의 정의란 개인마다 다릅니다.

24시간 늘 곁에 있어주는 존재가 있는 것이 참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 관리자님의 좋은 세상이란 무엇입니까? 신규패턴 정의에 참고하겠습니다.

“···.”

굳이 말을 들어주는 존재가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 개나 고양이, 인형이나 사진에 속내를 털어놓는 사람도 있다고들 하지 않는가.

트랜센던서는 동물이나 물건과 달리 말을 듣고 대답까지 해줄 수 있다. 그러니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그냥···. 투명한 세상···.”

- 가시광선이 통과하는 신소재로 도시를 건설할 경우 미적 가치가 떨어집니다. 또한 안구 미개조자는 불편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돔 형식으로 외부에서 봤을 때 투명하게 보이는 구조는 실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말을 듣고 대답을 해주긴 하는데, 그게 꼭 필요한 대답이 아닐 때가 있긴 하다. 그건 그것대로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차량은 번화가의 3중층 교차로에 멈췄다. 청춘을 즐기는 대학생들이나, 걸으면서도 공부하는 고등학생들이 횡단보도 위를 지나다니고 있다.

“···차라리 직접 유토피아를 만들어버릴까. 언젠가 돈 많이 벌어서, 다른 항성계를 찾아서. 투명하고 올바른 사회를 내 손으로 만드는 거야.”

유토피아는 없다. 어디에도 없으니까 직접 만들겠다는 뜻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우주의 어딘가에서 원 없이 꿈을 실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가능합니다. 그룹 경영인이 행성대통령이 된 사례가 있습니다. 관리자님의 장기적인 목표로 알맞은 설정입니다.

응원을 받은 것 같다.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살아가기 위해 목표를 만들어본다.

그런 형태로, 메마른 가슴 속에 작은 희망을 품어본다.

“그러자고. 나한테는 네가 있잖아. 늙어 죽기 전에는 좋은 세상을 하나 만들고 가도 괜찮···”

그 순간, 바로 앞에 서있던 차량이 폭발했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과 섬광에, 자동차가 거꾸로 뒤집혔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안전벨트에 고정된 몸의 혈액이 머리로 쏠렸으며 앞 유리창이 깨지면서 사납게 쇄도해오는 온갖 파편들이 얼굴과 목과 가슴과 복부를 파고들었다.

쿠우우우우우···

물속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귓구멍에서 피가 흘렀다. 안구에도 뭐가 박혀서 눈을 뜰 수가 없는데, 차량이 거꾸로 돌며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머리에 쏠렸던 피가 온몸으로 빠져나감을 느꼈다.

그 모든 과정이 단 3초 만에 끝났다.

뜨거운 격통으로 울부짖는 몸에서 무언가 잔뜩 빠져나감을 느낀 순간, 한 박자 늦게 닥쳐오는 죽음의 감각이 의식을 끊어버렸다.

< 5. 차오르는 환멸감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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