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대 인공지능 키우기-29화 (29/183)

< 5. 차오르는 환멸감 (3) >

***

“경력자 정도의 급여로 만족하신다는 말씀이세요? 해커로 계셨을 때보다 훨씬 적은 수익일 텐데요.”

“평생 놀고먹을 돈은 계좌에 쌓여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로페즈 대표님 밑에서 일하고 싶다는 건 돈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요?”

“트랜센던서 프로젝트를 직접 이끄시고 끝내 성공하시고···. 모든 것을 잃고도 반격까지 해내신, 대표님이라는 사람의 능력과 트랜센던서라는 걸작에 감명받았습니다. 늘 다른 사람의 일만 해왔던 제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을 찾았다는 느낌입니다.”

그런 흐름으로 프녹스를 트랜센던서의 학습 보조인으로 영입했다. 물론 그의 공식적인 직책은 보안책임자라는 것으로 했다.

「트랜센던서 진화 프로세스 진행률: 9.2%」

관련 분야의 최고 실력자가 나서서 트랜센던서의 학습을 보조해주니 진화 프로세스가 크게 진전되었다.

연이은 면접을 끝마친 로페즈는 서버실에 들어왔다. 프녹스는 서버실 구석에 마련된 컴퓨터 앞에 앉아서, 로페즈가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쉼 없이 손가락을 놀리고 있다.

“저, 프녹스 씨.”

“···.”

직장상사가 들어왔음에도 일에 열중하여 주변을 확인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는 진심으로 이 일에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프녹스 씨?”

프녹스는 로페즈가 바로 뒤까지 와서야 반응했다.

“아···! 네?! 무슨 일이시죠?”

“아니요. 그냥···. 잘되고 있는지 보려고요. 하하.”

“대표님. 이건 인류 역사에 공헌할 걸작입니다. 인공지능이지만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믿을 수준입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걸 만드신 건지···. 너무 경이로워서 계속 붙어있고 싶습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프녹스 씨가 일하지 않을 때도 트랜센던서는 일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뭔가 아쉽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자꾸만 떠올라서 계속 봐주고 싶습니다. 혹시 오늘 야근해도 될까요? 추가수당은 없어도 괜찮습니다.”

의욕이 과하다.

“초과근무에 추가수당을 안 주면 범죄죠. 앞으로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세요.”

“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프녹스 씨가 회사에 남아서 일하시는데 제가 먼저 퇴근할 수는 없잖아요. 아무튼 야근은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안 됩니다.”

프녹스는 로페즈의 방침에 감동이라도 받은 것 같은 눈치지만, 로페즈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난 아직 당신을 신뢰하고 있지 않아.’

자신이 회사에서 자리를 비웠을 때 프녹스가 트랜센던서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트랜센던서가 모르게 어떤 작업을 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그래도 프녹스라면 모른다. 그야말로 실존하는 현대 해커가 아닌가.

“내일부터 직원들이 출근할 거예요.”

“예.”

“누구든 서버실 출입은 제한하시고, 프녹스 씨가 자기소개하실 때 본인이 매우 엄격한 보안책임자라는 것을 꼭 어필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정장을 입으실 필요는 없어요. 적당히 편한 복장으로 오셔도 돼요.”

“그럼 대표님은 왜 매일 정장을···. 그런 복장이 편하신 건가요?”

“저는 대표하는 사람이니까 늘 입고 있는 거예요.”

그대로 서버실에서 나온 로페즈는 대표실로 들어왔다. 적당히 꾸민 대표실의 책상 위에는 흑요석으로 코팅한 명패가 놓여있다.

「옵시디아몬」

「대표 로페즈」

그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괜히 탁상거울을 보았다. 어떤 게 대표로서 어울리는 표정인지 고민해본다. 사원이 들어왔을 때 어떤 자세가 어울릴지 상상하며 다리를 꼬아보기도 한다.

‘맨날 컴퓨터 코드만 보던 내가 대표라니···.’

어쨌든 자리에 앉았으니 일할 차례다.

“트랜센던서. 화성 네트워크 장악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고 있어? 아직도 70%에서 막힌 채야?”

그러자 컴퓨터 화면에 올림푸스 UN의 지도가 띄워졌다. 통신검열원에서 시작된 붉은 선과 반점 영역이 이제는 도시의 절반 이상을 물들인 상태다.

- 화성 네트워크 장악 프로젝트는 81%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일전에 막힌 경로는 우회로를 찾아 침투에 성공했습니다. 정부에 의해 관리되는 고등급 보안영역이 아니라면 대부분 침입 경로를 탐색하실 수 있습니다.

“플로리다 진 샤리트라고 했지. 해킹 작업을 주도한 그 인간, 약점은 찾아냈어?”

- 유죄를 선고받고 복역 중인 전 통합공화당 의원들과 유착관계가 있었습니다. 차량 블랙박스, 개인 휴대전화 녹음파일, 개인 컴퓨터의 암호화 문서파일을 복사해뒀습니다.

“유착관계라면 뭘 말하는 건데?”

- 중소기업을 향한 투자압력, 자녀의 대학교 입시청탁, 부동산 사기, 성접대, 성매매 및 불법 유흥업소 관리, 주가조작, 마약흡입과 진단서 위조 등입니다.

“평범하네. 그 인간은 어떻게 안 잡혀가고···”

순간, 로페즈는 그런 걸 듣고 ‘평범’하다는 감상을 느끼는 현실에 이질감을 느꼈다.

“······.”

- 의혹 자체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플로리다 진 샤리트는 사법부의 수사망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그 수사를 진행한 건 PP잖아?”

- 그렇습니다. 현 행성대통령은 통합공화당의 해체 및 대대적 수사를 지시하고 직접 지휘했습니다.

“어지간히 이쁨받는 의원이었나 보네. 거기 당 대표도 감옥에 들어가 있는데.”

- 샤리트는 1번 거주지역의 지역대표, 3선 의원이었습니다.

샤리트는 당이 무너져도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이라는 것이다.

***

일리노이 리탄은 자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인상을 구겼다.

“어휴! 이 의리 넘치는 개새끼들. 소각로에 처넣고 처넣어도! 주둥이에 돈을 처넣고 처넣어도! 끝도 없이 쳐 나타나네, 씨발!”

격하게 반응하는 그와 달리 비서실장은 매우 차분했다.

“그래도 잘 대처하고 계십니다. 회장님.”

“그러냐? 회장님 소리 들으니까 좀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내 아버지가 생전에 이렇게 발이 넓었어?”

“예. 거의 다 정리하셨습니다. 이제 전 회장과 계약을 맺은 에너지업체 연합과 건설적인 방향으로 재계약만 마무리하시면···”

삐이이익! 삐이이익!

리탄의 휴대전화 벨소리였다.

그는 책상 서랍을 하나씩 다 열어보기 시작했다. 서랍 하나를 열 때마다 화면이 꺼진 휴대전화가 대여섯 개씩 딸려 나왔다.

삐이이익! 삐이이익!

“벨소리는 또 왜 이렇게 좆같이 해놨어?”

“그건 제 소관이 아닌데요.”

“너 매번 말대꾸하지 말라고! 해고당하고 싶어?!”

“죄송합니다.”

리탄은 가장 밑에 있는 서랍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휴대전화를 하나 찾아냈다.

“죄송하면 회사생활 끝나냐? 여보세요?!”

- 접니다. 회장 되신 거 축하드려요.

신경질적으로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통화에 응했던 리탄은 죽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 오늘은 태도가 평소보다 더 거치시네요. 본인 휴대전화 벨소리는 본인이 설정하셨으면서 왜 비서실장님한테 뭐라고 하세요?

당황한 리탄은 휴대전화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여, 여기 카메라나 도청기 있어?”

비서실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시죠?”

“그럼 그, 최근에 이상한 프로그램 다운받은 적 있어? 바이러스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잖아. 응? 야동이라던가 그런 파일에···.”

“아니요. 요즘 시대에 무슨 바이러스를 걱정하고 계시나요.”

“아니야. 너, 너처럼 한창때인 여자들이 막, 영화 같은 로맨스 같은 포르노 같은 거 보잖아. 진짜 아무것도 다운받은 거 없어? 진짜로?”

“회장님. 그거 까딱하면 성희롱이에요.”

“그건 미안. 그런데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지? 이 인간은 진짜 귀신인가···.”

- 리탄 씨. 제가 말하고 있습니다.

“아, 예, 예! 듣고 있습니다.”

리탄은 완전히 저자세였다. 로페즈가 앞에 있지도 않은데 애꿎은 비서실장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대고 있다.

- 방송국 사람들이랑 연결점 있으시죠?

“예? 저요?”

- 너요.

“어······. 하하. 그게 연결점이라고 표현하시면 어떻게 대답해드려야 하지? 일단 연락처는 있는데 최근에 여러 불미스러운 일들이 겹치면서 연락이 뜸해진···. 좀 서먹하고 어색해진 관계있잖아요? 약간 중학교 동창 같은 느낌이랄까···”

- 알겠습니다. 제가 그쪽 컴퓨터로 파일 하나 보내드릴 테니까, 직접 받아적으세요.

“하하하···. 이것 참···. 왜 자꾸 괴롭히고 그러세요? 하하···.”

- 진짜 괴로운 게 뭔지 알려줄까요?

“아···. 무섭게 왜 그러세요.”

- 싫으면 받아적으세요.

“넵! 잠시만요!”

리탄은 부자연스럽게 입으로만 웃으며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하하···. 말씀하시죠.”

- 플로리다 진 샤리트의 범죄 행적들을 고발합니다.

“···네?”

- 받아적으라고.

“넵···.”

- 저는 정의로운 목적으로 해커를 하고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자유입니다만, 제가 입수한 파일은 더러운 진실 그 자체입니다. 때는 두 달 전, 통합공화당 의원들이 대거 잡혀가는 와중에 아무런 의혹도 없이 조용히 넘어간 3선 의원이 신경 쓰였습니다.

조용히 로페즈가 시키는 대로 모든 내용을 받아적은 리탄은 울상이 되어서 욕도 내뱉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서실장은 여전히 무덤덤하다.

“회장님.”

“왜.”

“로페즈 님께서 회장님께 무슨 명령이라도 내리셨습니까?”

“씨발···.”

“기업 내외부가 정리되고 있는 중요한 때입니다. 회장님 일정에 차질은 없도록 해야 합니다만, 혹시 로페즈 님께서 일방적인 선약이라도 통보하신 건지요?”

“아니. 그건 아니고···.”

리탄은 책상에 얼굴을 문지르며 한탄했다.

“이 미친놈이 또 일을 벌이고 있어······.”

***

뉴스는 나오지 않았지만 기사는 나왔다. 몇 방송국 기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낸 기사들이었다.

기사 내용은 전 통합공화당 의원이며 1번 거주지역 전 지역대표인 플로리다 진 샤리트에 대한 익명 고발이었다. 해커인 사람이 주관적인 추측으로 샤리트의 컴퓨터를 두 달간 노려 해킹했으며, 이를 통해 알아낸 정보를 세상에 공개해 정의로운 집행을 돕겠다는 내용이었다.

기사 내용의 신빙성과는 별개로 자극적인 제목이 조회수의 첫 파도를 일으켰다. 이어서 화성이 발칵 뒤집혔던 지난 사건이 재조명되어 파장은 커져만 갔다.

슬슬 꺼져가던 논란의 불씨에 다시금 바람을 불어넣고 기름까지 쏟아부은 격이다.

- 이전처럼 기사의 노출도를 조작하려는 움직임은 탐지되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저번에도 그것 때문에 PP나 화이트홀이 호되게 욕먹었으니까. 이번엔 대중들이 눈을 크게 뜨고 있을 거야.”

언론 조작이 통하지 않는 시민사회에 한 발짝 가까워진 걸까. 다른 사건이 터져서 기사가 쏟아지거나 뉴스가 나와도 시민들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돌려지지 않았다. 그대로 해명을 촉구하는 목소리만 높아졌다.

‘불은 붙였다. 그 불길이 위로 번지기 전에 어떻게 나오시나 볼까.’

***

행성대통령은 기어이 뉴스로까지 보도된 고발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그가 앉은 자리는 상석이다. 가운데가 비어있는 타원형의 테이블에 일정한 간격마다 국내안보부의 산하 기관장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기관장들 뒤로는 각각 두 명의 보좌관이 앉아있어 총 24명이 행성대통령의 앞에 있다.

국내안보부의 산하 기관장들은 저마다 서로에게 말을 내던지고 있다. 그 모습이 덜떨어진 코미디라도 보는 것 같아 우습다.

“해커라니, 말도 안 됩니다. 그런 능력을 갖춘 해커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찾아보고 말씀하시죠. 샤리트 전 의원은 각하의 지시에 따라 사이버 요원을 모집한 가까운 선례가 있어요.”

“전부 조작된 게 분명합니다! 샤리트는 그런 걸 당해줄 사람이 아니에요!”

“애당초 각하께서 샤리트 전 의원에게 지시를 내리신 목적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이 사회에 막대한 혼란을 일으키는 사이버 테러범의 언론 조작극을 막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제가 봤을 때 이건 자유지구당의 수작입니다. 다음 대선까지 한 달 남짓한 지금, 경쟁 여당을 무너뜨리고 각하의 이미지까지 실추시켜 자기네들이 이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음모입니다!”

“더는 당해줘선 안 됩니다. 당장 수사를 강행해서···”

“수사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안 그래도 이번 수사망에 각하의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법부를 움직여봤자 지지율만 박살 날 겁니다.”

“그럼 그쪽이 다른 대안을 제시해보시던지요.”

“이쯤에서 꼬리를 한 번 더 자르는 게 맞습니다. 각하. 샤리트는 포기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행성대통령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다들 생각을 해보세요. 생각을. 로페즈랑 자유지구당 놈들이 샤리트 정도로 끝낼 것 같아요?”

눈앞의 무능한 고위관료들은 당장의 불을 끄기에만 급급했다. 그런 이들 사이에서 행성대통령은 그나마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샤리트 타고 들어와서 나까지 치려는 속셈이야···. 이걸 져주고 넘어가면 다음에 더 큰 타격이 올 거라고요.”

“그, 그럼 어떤 대안을 준비해야···”

행성대통령은 비장하게 입을 뗐다.

“이런 조잡한 방식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줘야죠.”

일단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독을 품었다. 다음 대선을 위해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도발해오니 어금니가 아프도록 턱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

행성의 꼭대기 자리에 올라서 늘 조심하고 자제했다. 늘 남에게 시키고 꼬리를 잘라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가 도를 넘었다. 조금 건드렸더니 꼬리를 타고 머리까지 넘보려 한다.

‘내가 이 나라야. 내가 곧 법이라고.’

결국 행성대통령은 직접 자신만의 독니를 꺼내기로 했다.

‘조국을 적대하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알려주마···.’

“각하? 방법이라 하심은···.”

“이 모든 일의 원흉···”

순간, 모든 이들이 침묵했다.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사람의 표정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표정이란, 살갗으로 스며들어 심장까지 옥죄는 ‘살의’였다.

“···로페즈를 죽일 것이다.”

< 5. 차오르는 환멸감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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