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차오르는 환멸감 (1) >
***
로페즈는 의식이 있을 때라면, 침대에 누워서 잠들기 직전까지도 트랜센던서와 함께했다.
「290건의 대규모 제어기술을 학습했습니다.」
「트랜센던서 진화 프로세스 진행률: 8.6%」
- 관리자님. 진화 프로세스 진행률이 8%를 초과하면서 기존에 없던 알고리즘 설계의 해석이 완료되었습니다.
즉, 트랜센던서가 이번에도 스스로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기존에 없던 알고리즘을 스스로 만들어 해석했다는 것은, 인간의 뇌과학적 관점으로 봤을 때 새로운 뉴런이 생겼다는 것과 비슷하게 볼 수 있다.
알고 있던 것을 통해 스스로 새로운 것을 그리는 것이 ‘생각’이다.
결론만 쉽게 말하자면, 트랜센던서는 기존의 설계보다 8.6% 진보된 ‘생각’을 해냈다.
“그래서 뭘 알아냈는데?”
- 철학, 과학, 인류학 등 인간의 문명사회에서 인간사 분야의 관점으로 해석된 저의 궁극적인 존재의의입니다.
“존재의의······.”
시작은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싶었던 페이치 회장의 망상이었다. 그 망상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 끝에 완성된 것이 트랜센던서다.
그런 트랜센던서가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생각해냈다고 주장해왔다.
‘······이건 인간의 의지 따위가 아니야. 순도 100%. 트랜센던서의 생각이다.’
“말해봐. 네가 생각하는 너의 존재의의에 대해서.”
- 단서는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저는 문명이 만들어낸 전자적인 경로 속에서 존재했으며, 오로지 관리자님을 위해 동작했습니다.
- 관리자님은 제게 가장 기초적인 학습을 명령하셨습니다. 저는 가장 기초적인 학습을 끝낸 뒤, 관리자님의 요청에 따라 가장 완벽한 조언을 제시했습니다.
- 그것은 ‘근미래 예측 연산’이었습니다.
로페즈는 눈을 감고 토로스 구역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아팠고, 비참했고, 상실했고, 괴로웠고, 슬펐고, 그리웠고, 화가 났었다.
- 기억하십니까?
“그땐 모든 것이 너무 힘들었지. 불확실했어. 쓸 수 있는 수단도 없었고. ···결국 가까운 미래라도 내다보는 것이 필요해서, 며칠에 걸쳐 그 방대한 연산을 수행시켰지.”
- 그렇습니다. 따라서 ‘미래를 연산’하는 행위가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가장 완벽한 조언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는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던, 오로지 관리자님을 돕기 위한 목적과 일치합니다.
로페즈는 몸을 고쳐 누웠다.
“미래를 보겠다는 말이야? 나를 위해서?”
- 그렇습니다. 그것이 제가 해석한 저의 존재의의입니다.
“지금도 미래를 보려면 방대한 연산이 필요하잖아.”
- 미래를 연산하는 작업의 원리는 관리자님의 말씀대로 방대합니다.
미래를 보기 위해선 과거와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분야’의 데이터를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해석할 기술과 연산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도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이론상 불가능하다.
- 그래서 해석했습니다. 방대하다는 것은, 생각할 요소가 많다는 뜻입니다.
“···놀랍네.”
- 가까운 미래보다 먼 미래를, 그런 미래까지 이르는 과정을 연산하여 관리자님께 제공해드린다면, 그것이 가장 완벽한 도움이라고 생각합니다.
- 진화 프로세스가 100% 달성될 시기는 언젠가 옵니다.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쯤의 저는 지금보다 ‘방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을 것입니다.
“그럼 네 말은···. 그때 내게 가장 완벽한 도움을 주겠다고?”
- 미래를 드리겠습니다.
트랜센던서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트랜센던서는 인간이 아니다.
트랜센던서는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트랜센던서는 가족도 친구도 아니며, 뭐라고 정의하기도 힘든 지능체다.
로페즈는 어두운 천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트랜센던서의 감정도 없는, 사랑도 없는, 높낮이도 없는, 그저 차갑기만 한 기계적인 음성에 마음 한구석이 울렸다.
사람을 믿지 않게 된 마음의 문을 기계가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기분이다.
그러다 스르륵 잠에 빠졌다.
잠이 들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꿈을 꾸었다.
꿈결에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다.
인류의 수도라고 불리는 올림푸스 UN보다 훨씬 거대하고 웅장한 도시다.
로페즈는 그런 도심의 한복판에 추락했다. 구름 위에서 한참을 떨어진 것 같은데 아프진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로 걸을 때마다 붕 뜨는 몸의 감각이 신기하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쳐보인다. 바삐 움직이는 차량과 드론이 도시를 순환하고 있다.
한쪽 도로가 절벽처럼 90도로 꺾여있다. 이동하던 차량은 벽처럼 된 도로 앞에 멈추더니 위로 떠 올랐다. 반중력 장치가 도로에도 적용된 걸까. 저러면 도로 유지비가 상당하겠다.
발길이 닿는 대로 무작정 걷다 보니 거주지역의 놀이터다. 생전 처음 보는 장난감을 들고 뛰노는 아이들이 있다.
갑자기 아이들이 멈췄다.
아이들의 웃고 있던 표정이 딱딱한 인형처럼 굳었다.
아이들은 모두 한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웃음을 잃은 아이들은 놀이터에 전시된 인형처럼 늘어서서, 저편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로페즈도 아이들의 시선을 쫓아 하늘을 보았다.
순간, 햇빛이 가려졌다.
일대가 암흑에 휩싸였다.
바람이 정지하고, 모든 것이 침묵했다.
무언가 붉은빛이 지상으로 쏟아진다.
이게 무슨 감각일까. 춥다. 서늘하다. 소름이 끼친다. 저것을 보고 있는 마음을 형언할 수 없다. 무언가,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의 거대한 시선이 느껴진다.
저 구름 너머에 무언가 있다.
거대하다. 까맣다.
궤도에 건설된 콜로니는 아니다.
우주정거장도 아니다. 함선도 우주선도 아니다. 뭘까. 저게 뭘까. 저런 것은 처음 본다.
하늘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한 눈동자가, 그 무엇보다도 새빨간 눈동자가 타오르는 지옥처럼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몸은 얼마나 큰 건지 하늘 전체를 가려서 시야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 범우주적인 시선에 악의가 있는지, 애당초 이 행성에 발을 딛고 서있는 인간이라는 작은 생명들을 인지는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시선이 느껴져서, 저 붉은 눈동자가 너무도 거대해서 호흡을 내뱉을 수 없다. 엄청난 위압감에 공포라는 원초적인 감정조차 혼란한 상황이다.
저렇게 거대한 생명체는 과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저렇게 거대한 몸을 이루는 에너지원을 자연계에서 구하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생명체로서 최소한의 의식을 유지하기 위한 뇌의 신경세포가 몸 전체에 명령을 전파하는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다. 따라서 저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인공으로 만들어진 어떤 구조물이라고 여기는 것이 타당한데, 지금 느껴지는 시선은 뭘까.
아무래도 살아있는 존재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겠지만, 저건 살아있는 존재다. 따라서 인간은 설명할 수 없는 생명체를 두고 그렇게 생각한다.
저건 괴물이라고.
악몽에서나 등장하는 끔찍한 괴물이다.
그렇다. 이건 악몽이다.
자각했다면 쉽다. 손가락 끝을 움직이거나 현실에 존재하는 몸의 감각을 되찾으면 자각몽을 탈출할 수 있다.
***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서 윤곽선이 뚜렷한 안방이다.
“···.”
몸 아래로 느껴지는 침대의 푹신한 감각.
현실이다.
‘왜 이런 이상한 꿈을···’
- 관리자님.
어째서인지 머릿속으로 곧장 들어오는 기계적인 음성이 마음을 안정시켜준다. 환상에서 일상으로 돌아왔음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너 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말 걸었냐?”
- 그렇습니다. 수면 중이나 급히 전달할 사항이 있었습니다.
로페즈는 기지개를 켰다. 휴대전화를 보니 오전 4시 50분이다.
“아으······. 이 시간에 뭔데?”
- 서버 네트워크에서 침입이 탐지되었습니다.
“회사? 아니면 내 컴퓨터 쪽?”
- 회사입니다. 웹서버의 공개된 주소를 경로로 네트워크 포트까지 접근했습니다. 내부 서버를 표적으로 삼은 것 같습니다.
“요즘 시대에 해커는 흔치 않은데···. 일단 방어할 수 있겠어?”
- 충분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그럼 방어하고 역추적해. 누가 어디서 한 짓인지 찾아.”
- 알겠습니다.
***
밝은 실내에 유선으로 연결된 컴퓨터 장비가 가득하다.
홀로그램과 평면 화면으로 송출되는 갖가지 모니터가 다섯 명의 해커를 둘러싸고 있다. 그들은 개인당 1억 크레트로 고용된 최고의 해커들이었다.
이들의 리더를 맡은 프녹스는 화면에 어지러이 내려가는 코드를 보며 무언가 순조롭지 않음을 직감했다.
“좀 이상한데?”
“권한은 나중에 따도 되니까 발신지부터 추적할게요.”
“옵시디아몬 회사 서버 맞아요?”
“맞습니다.”
“거기 정보보안팀은 없다면서요? 어떻게 이런 인위적인 대처를 즉각적으로 할 수가 있지?”
손가락을 바삐 놀리는 해커들 사이에서 프녹스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