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시스템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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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건물은 올림푸스의 12번 사무지역 세타우리 구역에 마련됐다. 상대적으로 도시 중심에 위치한 빌딩을 사려면 최소한 억 단위의 자산이 필요하다. 때문에 로페즈는 120층짜리 빌딩의 41층을 빌렸다. 보증금 1500만 크레트에 월세로 100만 크레트다. 신식 건물이라 전기세와 수도세는 당연히 없다.
회사의 모든 자본금을 개인소지금으로 충당했다. 따라서 이 회사는 비공개 주식만 발행하여 로페즈가 온전히 소유한 상태다. 폐쇄적인 주식회사라고 할 수 있겠다.
만약 클릭 한 번으로 복사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해야 하는 실존상품을 판매하려 했다면 로페즈의 개인소지금으로 부족했으리라.
“생각보다 넓잖아?”
쓸 수 있는 사무실은 총 네 곳이다. 화장실과 휴게실, 비품실도 있다. 각 공간을 널찍한 복도가 가르고 있으며 전면 유리창도 아낌없이 달려있다.
- 계좌 잔액은 1806만8910크레트입니다.
페낙스 3차 스카이 아파트의 8600호를 샀을 때 이후로 오랜만에 큰 지출을 했다.
“벽이랑 문으로 공간은 나뉘어있는데, 가구가 하나도 없네.”
사람도 없고 가구도 없으니 공간이 전체적으로 휑하다.
“적당히 업무를 볼 수 있도록 꾸며줘. 내 돈이랑 내 휴머노이드로 비품실이랑 휴게실도 적합하게 채우고, 사무실 하나는 서버실로 써야겠어.”
- 초기공간조성으로 예상하는 직원수는 몇 명입니까?
“일단 열 명 정도로 꾸미자. 아, 그래도 컴퓨터랑 의자는 비싸도 되니까 최대한 좋은 거로 해줘.”
- ···공간조성을 위한 물품 목록을 작성했습니다. 합산된 비용은 520만7250크레트입니다. 목록을 확인하시겠습니까?
“보자.”
목록을 보자고 한 로페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허공을 보았다. 이윽고 그의 눈에만 보이는 텍스트와 이미지가 허공에 떠올랐다. 전부 이 공간을 일할 수 있는 곳으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컴퓨터랑 서버 장비가 꽤 비싸네.”
- 성능을 한 단계 낮춘 목록으로 재작성하시겠습니까?
“아니야. 그대로 결제해.”
- 이 주소로 물건을 주문했습니다. 노동을 위한 휴머노이드 세 기를 이곳으로 부르시겠습니까?
“그래. 내가 그 무거운 걸 옮길 수는 없잖아.”
-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관리자님의 계좌 잔액은 1286만1660크레트입니다.
석 달 전까지만 해도 5800만 크레트가 있었다. 이제는 그 액수가 거의 4분의 1로 급감했다.
‘다시 벌면 돼. 얼마든지 할 수 있어.’
트랜센던서의 능력으로 돈을 버는 방법은 이전보다 훨씬 무궁무진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잔뜩 돈을 쓸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역시 주식이나 가상화폐다.
당장 명령만 내린다면 그야말로 떼돈을 벌 수 있다.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으니, 가진 자들의 전쟁터인 주식시장에서도 무작정 패배하진 않으리라.
가상화폐도 마찬가지다. 주식보다 훨씬 예측하기 힘든 가상화폐 시장에서는 모든 분석과 계산이 무용지물이다. 정보라는 무기가 없는 사람에겐 사실상 운으로 들어가는 도박판이나 다름없다지만, 트랜센던서의 능력이 있다면 돌발변수를 조성할 수 있다.
어느 곳이든 지금의 트랜센던서가 있다면 떼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눈에 띄지. 내 잠재적인 적군을 늘려서 좋을 것 없다. ···내가 이득을 거머쥐는 만큼 타인이 인생에 손해를 보는 구조도 싫고.’
자신이 트랜센던서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임으로써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것을 빼앗는 건 거부감이 든다. 그런 투자로 돈과 기회를 잃어서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다고들 하니, 압도적인 비대칭 전력을 가진 로페즈로선 양심의 가책이 있었다.
그리고 애당초 돈 걱정은 예전에 사라졌다. 어차피 나중에 화이트홀의 지분 20%로 엄청난 배당금이 들어올 예정이다. 따라서 굳이 사업을 하는 이유는 오로지 사업을 함으로써 손에 넣게 되는 힘이 목적이다.
로페즈는 목적을 상기하며 사무실을 꾸몄다. 정확히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트랜센던서를 통해 휴머노이드를 조작하는 일뿐이지만.
그가 직접 손을 댄 곳은 서버실이다. 집 컴퓨터에 설치했던 서버를 이쪽 장비로 옮겨서 홈페이지를 정상화했다.
***
무거운 컴퓨터나 책상을 가뿐히 짊어진 휴머노이드 세 기가 빌딩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30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더니 평범한 회사원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이 탑승했다.
남자는 휴머노이드를 눈여겨보았다.
“이거 X프로텍트 모델인데요? X166이었나?”
“그런 것 같네요.”
“건물에 누가 새로 들어왔나 보군요.”
“모르셨어요?”
“뭐를요?”
“이번에 41층으로 오신 분이요.”
“왜요? 유명인이라도 왔데요?”
“유명인···. 까지는 아니겠지만 다들 아실걸요? 로페즈 씨라고···.”
여자의 말에 다른 두 명이 당혹감에 휩싸였다.
“로페즈?! 뉴스에서 떠들썩했던 사람이잖아요? 그 토로스 구역에서 인질을 구하고, 화이트홀 뒤집어버렸던···.”
“네?! 진짜 그분이 41층에 들어오셨다고요?! 왜요?”
“그분이 이번에 프로그램을 개발하셔서···”
그때 엘리베이터가 41층에서 멈췄다.
세 회사원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바로 보인 사람이 뉴스 속의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41층에서 휴머노이드 세 기가 내린 후, 이어서 로페즈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들어오게 된 로페즈입니다. 위층 분들이시죠?”
남자는 가까스로 미소를 만들었다.
“아, 네! 하하···. 로페즈 씨 맞으시죠? 저번에 좋은 일 하셨던···.”
“좋은 일이라고 포장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종종 마주칠 것 같은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로페즈가 손을 내밀자, 남자는 순간적으로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멈칫했다. 때마침 옆에 있던 여자가 로페즈의 손을 덥석 잡으며 악수에 응했다.
로페즈는 그녀의 손아귀에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가 있음을 느꼈다.
“팬이에요!”
“네, 네?”
“로페즈 님! 저 진짜 이런 식으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정신을 차린 남자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41층에 들어오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엘리베이터는 위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깐 한숨 돌리려고 옥상에 가는 길입니다.”
“아하.”
아직도 악수라는 형태로 로페즈의 손을 잡고 있는 여자는 소심하게 말했다.
“그···. 옥상에서도 조심하세요···. 저격수라던가···.”
로페즈는 선한 인상으로 화답했다.
“24시간 뭐든지 조심하고 있으니까요.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다들 같은 곳에서 일하시는 동료분들이신가요?”
로페즈와 만남 직후 계속 말이 없던 다른 여자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저희는 개인과 집단에 보안솔루션을 제공하는 인터넷보안업체에요. 이 건물 42층부터 110층까지 사용하고 있고요. 42층 아래로는 전부 학원이나 식당이라서···. 건물 내에서 정장 입은 사람들은 대개 저희 회사 사람들이라고 여기셔도 될 것 같네요.”
“아···. 규모가 상당하네요. 저는 이번에 ‘옵시디아몬’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차렸습니다. 아직 직원은 대표인 저밖에 없고, 범용화 인공지능 소스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보안솔루션이라고 하셨으니 나중에 협력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
건물 내의 사람들은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그들은 로페즈를 능력 있는 사람, 현실에서 영웅적인 면모를 지닌 사람, 정의로운 행동을 보여준 사람 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옥상에 오른 로페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 에어패킷을 송수신할 단말기를 찾았습니다. 관리자님 기준으로 남쪽입니다.
각종 안테나가 한 곳에 세워진 철제 구조물에 붙어있다. 로페즈는 그 구조물을 곁눈질하며 도시 전경을 보려는 듯, 옥상의 난간에 팔을 걸쳤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내보았다.
- 접속 완료. 빌딩 네트워크 및 주변 경로를 장악했습니다.
- 확인 결과, 옥상에는 감시카메라가 없었습니다.
“그럼 연기할 필요도 없겠네.”
로페즈는 방금 장악한 철제 구조물을 대놓고 보며 말했다.
“이 빌딩의 절반을 차지한 보안업체. 간략하게 뭐라고 설명했지? 주목할 부분이 있었는데.”
- 마키온(Machion). 재작년, 2596년에 설립된 보안업체로 네트워크 영역의 보안솔루션을 제공합니다. 기업이나 단체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도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으로 전문적인 보안솔루션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다는 점을 전략으로 삼았습니다. 재작년 성장률 288%, 작년 성장률 170%, 올해 11월 기준 성장률 77%입니다.
“저조해지고 있네.”
- 나날이 발전하는 정부의 인터넷 보안정책이 원인입니다. 마키온은 고객들에게 보안솔루션의 필요성을 강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보안정책이 믿을만한 게 아니라는 걸 모든 사람이 알면 대박 날 텐데. ···아니면 최소한 자기들이라도 정부의 보안정책의 허점을 알고서 그걸 어필할 수 있게 되거나.”
- 논리상 그렇습니다.
아까는 우연히 만났지만 앞으로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게 될 것이다. 로페즈는 그런 계산 하에 임기응변으로 말을 던져뒀었다.
그쪽은 보안업체, 이쪽은 인공지능이니 나중에 협력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방금의 만남으로 로페즈에 대한 이야기는 마키온 내에서 빠르게 퍼질 것이다.
‘화성 인터넷의 취약점을 트랜센던서보다 잘 분석하는 존재가 있기는 할까···.’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인식으로 취약점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런 인식조차 보안의 취약점이 될 수 있다는 걸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로페즈의 머릿속에는 그들을 어떤 식으로 도와야 할지가 뚜렷하게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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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녹스(Fnox)는 사이버 세계에서 악명높은 인물이다.
「네트워크 속의 폭군」
프녹스라는 자의 성별이 무엇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어느 항성의 어느 행성에 사는지, 알고 있는 자는 극히 드물다.
실물의 프녹스는 생각보다 평범하게 생겼다. 정돈하지 않은 다소 긴 머리칼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얼굴도 몸도 행동도 굉장히 정상적인 남자였다.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보인다. 입고 있는 옷은 간편한 스웨트셔츠에 청바지다.
그는 체격이 큰 사내들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이동해서 정차된 리무진에 탑승했다.
“아, 갑자기 왜 이러시지? 제가 관심 없다고 했잖아요. 의원··· 아니, 사장님.”
“자네한테 좋은 말로 제안했을 때 들었어야지. 이번에도 거절하면 제안이 아니라 명령으로 바뀔 걸세.”
그가 사장이라고 부른 노인은 해체된 통합공화당의 의원이었다. 정치인의 타이틀을 잃어버린 지금은 단순히 중견기업의 경영권을 일부 거머쥔 사장이겠지만.
“어디 이유나 들어봅시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미 무너진 당인데 위에서 시키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설마 단순한 복수심이라던가, 그런 건 아닐 거잖아요.”
“나를 뭐로 보고! 이건 개인적인 감정으로 행하려는 일이 아니네! 어디까지나 대의를 위해서야!”
“제가 그 ‘대의’라는 단어를 진짜 무서워하는데요. 특히 연세 지극하신, 정치권에서 정장 입은 할아버지들이 꺼내는 ‘대의’라면 더욱이요.”
“이 나라의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오더야···.”
“예?”
“흠. 아무튼, 이번에도 거절할 셈인가? 자네 계속 그러다간 정말 교도소나 어디 나쁜 곳에 끌려갈지도 모르네. 돈 주고 제안할 때 냉큼 받아들이게. 어서!”
“아이씨! 얼마나 줄 건데요?!”
노인은 프녹스의 코앞에 검지를 펴 보였다.
“1억.”
“···억? 그거 받아먹어도 되는 돈이에요? 소화하다가 죽는 거 아니야···?”
“괜찮다. 내가 일러줬잖아. 꼭대기에서 내려온 오더라고. 그 돈도 꼭대기에서 내려온 깨끗한 돈이야.”
어마어마한 액수에 경악을 금치 못한 프녹스는 두려워하면서도 내심 기대하며 물었다.
“그만한 돈이면···. 제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줘야 하죠?”
“자네의 별명이 네트워크 속의 폭군이 아닌가. 최근에 화성 밖의 우주 곳곳을 누비며 혼란을 야기했다고 들었네. 평소랑 똑같이 하면 돼.”
“제가 하는 일이 단순한 줄 아시네. 그러니까 대체 뭘 해달라는 건데요?”
“···자네는 스스로 네트워크를 활보하는 인공지능이 존재한다고 하면 믿겠나?”
프녹스는 헛기침을 하더니 억지로 웃어보였다.
“무슨···. 옛날 SF영화라도 보셨어요? 인공지능이 막··· 인류를 멸망시키고, 일자리 다 없애고, 걔들이 늘 인간보다 월등해서 다 해 먹는 그런 거?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시무시한 상상력이었죠. 아하하···!”
“농담이 아니야. 제발 진지하게 듣게.”
“···.”
“프로그램, 소프트웨어, 프로세스, 일련의 데이터···. 뭐라고 정의하기 힘든 인공지능이야. 여태껏 세상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거든. 아마 지금쯤이면 네트워크, 인터넷, 어쩌면 더 ‘진화’해서 공기 중의 전파로까지 세상을 활보하고 있을 걸세. 우리는 그걸 트랜센던서라고 하지.”
‘진화···? 트랜센던서···?’
“그 인공지능을 그물망에 포획하듯, 오프라인 서버에 가두어 세상과 격리해버리는 것이 자네가 해줄 일이야.”
뭔가 엄청난 작업을 직감한 프녹스는 긴장감에 입을 닫았다.
“자네 말고도 우리 선에서 알아낼 수 있는 최고의 해커들을 수소문하고 있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최고의 해커에겐 해커 동료가 있다고들 하지 않나?”
프녹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총력전으로 가자는 말씀이죠? 무조건 전력을 다해서.”
“그래. 누구든 실력에 상응하는 보수는 주지. 최대한 준비해보게. 이쪽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야.”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 생긴 것 같다. 일생에 두 번 다시는 없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최고의 해커인 그에게 이보다 기대되는 일은 달리 없다.
“이거야 원···. 사람이 아닌 것을 잡겠다고 드림팀이라도 꾸려야겠네요. 하하”
“드디어 이해했군. 할 수 있겠나? 1억이야. 1억.”
프녹스는 멋쩍게 웃으며 태도를 바꿨다.
“알았어요. 그까짓 인공지능 잡는 건 일도 아니죠. 제가 드림팀을 준비해보겠습니다.”
< 4. 시스템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