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시스템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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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칸은 로페즈에게 받은 300만 크레트와 조직의 금고를 털어서 마련한 돈으로 건물 하나를 매입했다. 그 위치는 수도 올림푸스 UN의 가장 바깥에 있는 80번 거주지역이다. 주변 건물의 높이는 평균 30층 정도로 낮은 편이다.
그래도 산업지역인 토로스 구역에 비하면 이곳은 확실히 대도시의 일부로 느껴진다.
늦은 밤. 자이칸은 로노와 부하들을 사무실에 모아놓고 이야기했다.
“이제부턴 작업장이 아니라 사업장을 만들자고.”
이에 로노가 물었다.
“합법적으로 말씀이십니까?”
“이곳은 토로스 구역과 달라. 우리가 늘 해왔던 그런 부류의 일은 힘들어.”
그는 로노와 부하들을 쭉 둘러보았다. 한 구역을 장악했던 레드샤크의 인원수가 이제는 본인을 포함해 일곱 명으로 줄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간단한 심부름부터 시작하자. 약혼자 연기를 해달라거나, 이별이나 만남의 상황을 조성해달라거나, 사기꾼을 조사하거나 가족을 미행하며 보호하거나. 그 정도로 시작하자고. 그렇게 돈을 모아서 사업장을 하나씩 만드는 거야. 레드샤크라는 조직명은 버리고.”
그때 어느 부하가 질문을 툭 내뱉었다.
“형님. 거기에 로페즈 씨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 겁니까?”
“그분은 우리를 충분히 도와주셨어. 다들 기억하잖아?”
그의 주장에 모두가 동의했다.
“내게···. 아니, 우리에게 300만 크레트와 비싼 승용차를 내어주면서 말씀하셨지. 일손이 필요하면 연락하겠다고.”
그동안 자이칸은 로페즈가 했던 말을 진지하게 곱씹었다.
“그분도 결국 높이 올라가시는 동안, 우리 같은 일손이 필요하시다는 거야. 그분은 밝은 곳에서, 우리는 어두운 곳에서. 그런 관계가 된 거지.”
“그 후로 다른 연락은 없었습니까?”
“없었어. 그렇다고 이쪽에서 먼저 연락하기에도 좀 모양이 빠져. 화이트홀과 정당 하나를 무너뜨린 사람한테 내가 무슨 주제로 연락을 하겠냐.”
“그럼 어떡합니까? 그냥 저희 일이나 하고 있으면 되는 겁니까?”
“일단은 안전하게 대기한다. 우리가 감빵에라도 들어가면 꼬이잖아. 최대한 조용히, 조용히 있다가 그분이 우릴 부르시면 그때 가는 거야.”
자이칸의 뜻은 부하들의 귀에 그렇게 들렸다.
“···로페즈 씨 밑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그게 정답이다.”
그렇게 대답하는 자이칸의 표정에서는 약간의 두려움이 보인다. 자존심이 상했다거나 꺼림칙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너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그래도 한때 조직에서 기술자나 하던 양반 밑으로 너희 형님이 들어가자고 하니까, 와닿지 않겠지.”
로노는 말했다.
“형님과 그분은 동등한 관계였습니다. 그때 주차장에서의 태도도···. 여전히 동등한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굳이 밑으로 들어가는 입장을 취하시겠다는 겁니까?”
자이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우리는 동등하지 않았어. 나보다 한참 위에 있던 사람이야. 지금은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사람이 되었고.”
아무도 자이칸의 주장에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화성 전체가 발칵 뒤집힌 모습을. 뉴스에서나 보던 권력자들이 로페즈 앞에서 쩔쩔매다가 꼭두각시로 전락해버리는 모습을. 그는 혼자서 여섯 작업자와 세 용병을 시체로 만들어버렸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기술로써 말이다.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사람이야. 같은 편이지만 두려울 정도로. ···어차피 이런 세상, 우리 같은 사냥개 족속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그러니 앞으로 따를 형님을, 주인을 잘 골라야겠지.”
그는 토로스 구역에서 약쟁이 같은 몰골로 무기나 만들던 사람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럴 그릇이 아니었다. 그런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아 기어이 하늘로 솟은 사람이다.
“거인이 만들어준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어두운 일을 한다. 그게 정답이야.”
***
페이치 회장이 사망하고 두 달이 지났다. 뜨겁게 타오르던 군중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잦아들었다.
한편, 계속 화이트홀을 감시하던 트랜센던서는 명령대로 로페즈에게 알려왔다.
- 화이트홀 내부 분쟁은 해결되었으나 기존 페이치의 우호 세력이 리탄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화이트홀은 덩치가 큰 만큼 한 번에 정리되지 않았다. 그동안 화이트홀과 손을 잡았던 통합공화당과 연계된 기업 및 개인들이 반발하는 것이다.
“리탄이 불리해?”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행성대통령이 페이치의 우호 세력을 적대하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리탄이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그럼 됐어. 걔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야.”
사회적 위치가 있는 리탄과 클레릭을 방패로 세웠다. 로페즈는 그 뒤에서 조용히 힘을 키우기로 했다.
“보고해.”
- 2598년 11월 1일 보고드립니다.
벽면에 올림푸스 UN이라는 대도시의 지도가 나타났다. 로페즈가 있는 페낙스 3차 스카이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통신검열원이 있다.
통신검열원에서 시작된 붉은 선이 마치 전염병 번지듯 주변 지역에 퍼져있다.
- 화성 네트워크 장악 프로젝트는 36% 완료되었습니다. 정부 기관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포함해 인터넷 관련기기를 유동적인 비트 바이러스 및 휘발성 웜으로 감염시켰습니다. 지도에 붉은 영역으로 표시된 지역에서는 언제든지 백도어를 활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어서 벽면에는 로페즈의 신체, 로보버그, 휴머노이드, 휴대전화가 나타났다.
- 다음은 프린터 작업물 보고입니다. 의료기술을 휴머노이드에 내장하여 시술을 완료했습니다. 관리자님의 인공 좌안과 삽입된 음향 입력장치를 교체했습니다.
화면에 로페즈의 왼쪽 눈알이 확대되면서 기능적인 부분설명을 도왔다.
- 관리자님은 가시광선 영역 외 X선, 자외선, 적외선, 일부 극초단파를 관측하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시야의 확대 기능 또한 추가했습니다. 관리자님의 좌안은 기술적인 한계로 최대 가시거리 17㎞, 최대 시력 22.5로 개조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달팽이관 옆에 삽입된 장치가 화면에 나타났다.
- 또한 공기 중의 진동을 감지하여 더욱 먼 곳의 작은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되셨습니다.
‘완전히 개조인이네. 근력만 없을 뿐이지.’
- 관리자님의 혈액 순환계에 주입할 나노봇은 프린터의 기술적 한계로 실패했습니다.
“어쩔 수 없지. 그런 건 가정에서 프린터로 만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 마지막으로 사업 현황입니다.
이번엔 로페즈 학습기의 매출이 보기 좋은 숫자로 정리되었다.
- 지난 한 달간 매출 데이터입니다.
「30일 무료 상품 - 4803회」
「30일 유료 상품 - 1591회」
「1년 유료 상품 - 117회」
「1년 유료 상품(자동갱신) - 55회」
「다운로드 횟수 총합: 6566회」
「수익: 3,428,000크레트」
「순수익: 3,153,760크레트」
“화성의 잠재고객을 고려했을 때 예상하는 최대 수익이 몇이라고 했지?”
- 인공지능 관련 업계종사자의 시장을 계산하여 최대 다운로스 횟수를 알아본 결과, 한 달 최대 5만 회까지 판매가 가능합니다.
“겨우 그것밖에 안 돼? 화성 인구가 110억인데.”
- 방금 제시한 수치는 명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시장규모만 고려한 것입니다.
인공지능을 가지고 놀 어린아이, 호기심에 인공지능을 쓰는 사람들, 인공지능에 관련된 꿈을 가진 청년들.
꼭 관련 업계종사자가 아니더라도 로페즈 학습기를 구매할 사람은 많다.
따라서 시장규모를 정확히 계산하는 것은 트랜센던서라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럼 앞으로 최대 5만 회가 아니라 최소 5만 회라고 여기자.”
- 알겠습니다.
“누적 고객까지 합치면 시장 파이의 5분의 1 정도를 먹었네.”
예상대로 홈페이지에 게시한 메일을 통해 연락을 보내오는 사람이나 업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협력 제안, 특허 판매 제안, 고용 제안, 스타트업 인수합병 제안 등 가지각색이었다.
당장은 그런 메일들에 모두 거절 의사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아마 기존의 시장을 차지하던 관련자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일 것이다.
“이쯤에서 법인으로 회사를 차려야겠어.”
8%의 세율도 부담스럽고, 누군가를 회사 대 회사로 만나려면 역시 자신만의 회사를 차려야 한다.
그리고 화성 내에서만 판매되는 로페즈 학습기를 화성 외부, 태양계의 곳곳에 판매하려면 법인이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이 사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직원의 존재가 확실해야 한다. 물론 트랜센던서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할 수는 있겠지만, 트랜센던서는 학습에 열중해야 한다.
“법적인 허가나 절차 통과가 요구되는데, 따로 사람 쓰지 않아도 네가 알아서 할 수 있지?”
- 표준화된 일련의 처리 과정은 간단합니다.
‘그냥 할 수 있다고 말하면 되지.’
“그럼 부탁할게.”
로페즈는 안방으로 들어와 창밖을 보았다.
내려다보면 도심이 있다.
정면을 보면 높은 건물들이 있다.
위를 보면 훨씬 높은 건물들이 있다.
아주 위를 보면 구름 너머의 콜로니나 정거장, 함선 따위가 보인다.
아래에도 정면에도 위에도, 위의 위에도.
어느 위치에나 그 위치에 있을 사람들이 있다.
- 사업체 명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트랜센던서의 물음에 로페즈는 깊이 고민했다.
화이트홀(White hole).
블랙홀의 반대현상을 일으키는 천체로서 오로지 이론상으로 존재한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달리, 블랙홀이 빨아들인 것을 내뿜는 화이트홀은 지난 역사 동안 단 하나도 관측되지 않았다. 이론상 블랙홀보다 관측하기 쉬운 천체임에도 말이다. 또한 기존의 블랙홀이 빨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닌, 제트라는 강력한 플라즈마 가스를 분출한다는 사실이 실험으로 증명되면서 화이트홀 이론은 완전히 힘을 잃었다.
화성에서 대기업인 화이트홀은 천문학적인 의미보다 이름의 색깔이 내포하는 ‘깨끗함과 광명함’을 상징했었다.
화이트홀 이론은 힘을 잃었으며, 대기업 화이트홀 그룹은 이름의 정체성을 잃었다.
‘내 회사의 이름···.’
문득, 안방구석에 놓인 스탠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 색은 하얀색의 완전히 반대색인 검정으로, 흑요석 장식이 박혀있다.
흑요석(Obsidian).
특유의 광택과 빛깔 덕분에 준보석으로 분류된다. 자연에서 화산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화산 유리다. 인류가 금속을 쓰지 못했던 시절, 흑요석은 무기의 재료로 쓰였다.
오늘날 흑요석은 주로 공예품으로 쓰이지만, 여전히 무기의 재료로도 사용된다. 흑요석은 최대 0.5나노미터까지 연마가 가능하다. 판타지나 게임 등에서 나오는, 장갑차를 두부처럼 자르는 단분자 커터에 가장 가까운 소재라는 것이다.
어두운색이지만 광택이 흘러 빛난다. 인류의 역사와 계속 함께한 흑요석은 문명의 진보와 함께 쓰임새가 진화했다. 때로는 적을 죽이는 날카로운 무기로, 때로는 아름다운 공예품으로, 때로는 신무기의 재료로.
그러한 이유가 있어서 로페즈는 개인적으로 다이아몬드보다 흑요석을 좋아했다.
만약 흑요석이 가공에 의해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해질 수도 있었다면, 인간은 흑요석에 지금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매겼을 것이다.
“옵시디아몬(Obsidiamon).”
- 사전에 정의되지 않는 단어입니다. 정확한 글자를 알려주시겠습니까?
“흑요석과 금강석의 철자에 겹치는 부분을 이용한 거야.”
흑요석. 옵시디언. ‘Obsidia’n.
금강석. 다이아몬드. ‘Diamon’d.
옵시디아몬. 'Obsidiamon'
그리고 트랜센던서에게 굳이 설명하지 않은 마지막 ‘mon’은 정상과 논리를 벗어난, 이상하게 생긴 생명체나 물체를 뜻하는 ‘괴물(Monster)’을 내포한다.
그 ‘괴물’이란, ‘트랜센던서’를 뜻한다.
따라서 흑요석, 금강석이다.
타인에게 알리지 않을 마지막 속뜻은 괴물이다.
‘마음에 들어.’
- 상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검은색 바탕에 다이아몬드가 뾰족한 것으로 행성을 붙잡고 있는 모습. 행성은 어두운 보라색으로 철창처럼.”
로페즈의 애매모호한 설명에 트랜센던서는 즉시 수백 가지 상표를 조합해서 제시했다.
“특허는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제도일 텐데. 검색해서 패턴이 50%라도 겹치는 게 있으면 빼버려.”
그러자 수백 가지 상표가 수십 가지로 줄어들었다. 기업이 범람하고 있는 현대에서 상표도 마찬가지로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로페즈는 트랜센던서가 제시한 수십 가지 상표를 하나씩 살펴본 끝에 하나를 골랐다.
“이걸로 하자.”
- 알겠습니다. 주소지는 페낙스 3차 스카이 8600호. 자택으로 하시겠습니까?
“아니. 회사로 쓸 건물도 하나 골라야겠어.”
이후 사흘이 지난 시점에서 모든 절차를 통과했다. 마침내 자기 회사를 차렸다.
장차 인류 역사에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거대기업이자 항성국가인 옵시디아몬이 탄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