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적과 친구는 모두 타인이다 (3) >
***
- 내 아버지를 죽이려고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어느 쪽이나 극단적인 방법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사람 목숨을 없애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건가. 어쨌든 일리노이 리탄도 정상인은 아니다.
페낙스 3차 스카이의 층수는 330층이다. 그 높이는 1140미터로 구름이 만들어지는 대류권의 하단까지 닿는다. 옥상에는 소형 궤도 전용기나 대형 드론의 착륙장과 격납고가 있으며, 착륙장의 100미터 아래에 최고급 레스토랑들이 자리 잡은 구획이 있다.
“로페즈 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고속 엘리베이터로 326층에 도착한 로페즈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웨이터를 만났다.
웨이터는 민머리에 수염도 없고 눈썹이 매우 짧은 남자다. 한마디로, 목 위에 털이 거의 없다. 나이는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며 키가 상당히 크다. 피부색은 유색인종 8에 무색인종 2 정도로 보인다. 특히 옛 지구의 아프리카계 유전자가 많이 섞인 것 같다. 그래서 이곳의 새하얀 실내환경에 맞추어 존재감이 대비되어 보이는 느낌이다.
로페즈는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그는 이 건물에서 살고 있지만, 이런 높이에 있는 최고급 레스토랑이 사치스럽다고 여겨 한 번도 이곳에 방문해본 적이 없다.
보석 박힌 샹들리에와 원목의 바닥재, 새하얀 암석으로 조각된 기둥과 벽이 공간을 이루고 있다. 곳곳에 원형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으나 손님은 한 명도 없다.
로페즈는 웨이터를 따라 창가 쪽 자리로 이동하는 중에 물었다.
“손님이 왜 이렇게 없죠?”
“일리노이 리탄 님께서 본점의 한 층 전체를 빌리셨습니다.”
“어째서요?”
“다른 사람들에게 이 만남을 비밀로 하고 싶다는 요청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쪽 경로의 카메라와 손님 출입을 제한하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모순이라고.
“비밀로 하고 싶은 만남을 웨이터님께선 알고 계시네요.”
그러자 앞서 걷던 웨이터가 잠시 뒤로 돌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와 이 본점에서 20년을 넘게 일한 프로들은 입이 잠겨있습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여러 높으신 분들의 관계나 사적인 이야기를 알고 있으나, 어디 가서 발설하진 않습니다. 그러니 로페즈 님께서도 절 없는 사람으로 취급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매우 정중한 태도였다.
“예···. 일단은 알겠습니다.”
“저쪽 가림막 너머의 창가 자리에 일리노이 리탄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문은 코스 요리로 먼저 해두셨고, 추가 주문은 버튼을 통해 받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쯤에서 실례하겠습니다. 상호 유익한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황금빛 십자수가 박힌 붉은 비단이 가림막 역할을 하고 있다. 로페즈는 세로로 갈라진 가림막을 통과한 직후 리탄을 만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자리에 앉아있던 리탄이 일어나 악수를 건네왔다. 살짝 큰 키에 제법 잘생긴 미형의 외모다.
“인사치레는 관둡시다. 저희 사이에.”
로페즈는 그의 악수를 거절하고 그대로 자기 자리에 앉았다. 초면에 굉장히 무례한 태도였지만, 리탄은 전혀 개의치 않고 미소를 띠었다.
“그 연구소 일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리탄 씨. 저는 4일 전에도 죽을 뻔했습니다.”
“···그래요?”
“개조인 킬러가 집에 숨어들어서 제게 총을 쐈습니다.”
“하하. 그놈들 참···. 사람 못살게 구는군요.”
“그전에는 도로에서 화이트맨스터의 작업팀이 절 미행했고요. 그전에는 토로스 구역의 집에 작업자가 찾아와 제 목을 졸랐습니다. 또 그전에는 하수도의 오수에 빠진 채 총에 맞아 죽을 뻔했고요. 또 그전에는 화학약품이 기도에 들어가 익사할 뻔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수도에서 도망치는 동안 프레드릭 실장에게 죽을 뻔했고, 휴머노이드에게 죽을 뻔했습니다.”
“그 착잡한 심경. 이해합니다.”
‘이해는 무슨.’
“정말 제 입장을 이해해주고 계신다면, 알아주시죠. 저는 살려고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통화 중에 말씀하셨던, 트랜센던서를 훔쳤다는 말도 제게는 울화가 치미는 표현이고요.”
“아, 예. 일전의 실언은 사과드리죠.”
- 미안해하는 감정은 표정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단, 악의도 없습니다. 표정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거나, 감정이 없는 사람이거나, 관리자님께 미안한 감정도 악의도 없는 사람입니다.
로페즈는 리탄과 만나기 전에 트랜센던서와 이야기를 해두었다. 상대의 어조나 표정을 실시간으로 읽어서 알려달라고.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정보가 나온 것 같으면 바로 찾아서 알려달라고.
‘정보의 우위가 협상의 우위를 점한다.’
“로페즈 씨. 우리 일단 뭐라도 좀 먹을까요?”
리탄은 그러면서 자기 앞에 놓인 종 모양의 뚜껑을 열었다. 이에 로페즈도 자기 앞의 뚜껑을 열었다.
“최고급 배양육 시설에서 소의 유전자와 돼지의 유전자를 합쳐 만든 스테이크에요. 돼지의 질감과 소의 감칠맛을 동시에 즐길 수 있죠. 스테이크 옆에 있는 브로콜리는 사실 브로콜리가 아니라 녹차 분자를 베이스로 얼린 입가심용 소스죠. 홀스래디쉬처럼 곁들이시면 돼요.”
이어서 리탄이 버튼을 누르자 아까 전의 웨이터가 들어와 와인잔을 채웠다.
“가니메데의 콜로니에서 직수입한 니콜라스 파브리 데 페이레 2400입니다.”
“대단하네. 여기 자주 와야겠어?”
웨이터를 향한 리탄의 말투에서 권위적인 태도가 엿보인다.
“좋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 나누시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와인의 색이 피처럼 진하게 검붉다. 향은 로페즈가 생전 처음 맡아보는 냄새라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
“이쪽 층을 다 빌렸고 입단속도 잘해놨으니, 우리가 여기서 만났다는 사실을 알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커튼도 저렇게 다 닫아놨으니 누가 촬영할 일도 없고···. 저 깜둥이 녀석이 말씀드렸나 모르겠네.”
“저 웨이터 하시는 분이랑 평소에 알던 사이에요?”
“네? 아니요?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하셨지?”
- 약간의 적개심이 나타났으나, 금방 사라졌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별생각 없이 내뱉어봤습니다.”
로페즈는 미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어봤지만 다른 고급 스테이크와 차이를 잘 모르겠다. 가니메데의 콜로니에서 수입했다는 와인은 너무 생소한 느낌에 맛있는 건지 맛없는 건지도 모르겠고, 신기한 향기는 그다지 감흥이 없다.
“뭐, 이렇게나 폐쇄적인 환경에서 누가 누구를 죽이든 알아차릴 사람은 별로 없겠네요.”
“하하하. 아직도 절 의심하시네요. 죽일 거였으면 진작에 죽였죠. 얼마나 방법이 많아요? 방금 드신 와인에 독을 타도 되고, 애초에 들어왔을 때부터 총으로 갈기면 끝인 것을. 그렇게 생각해보면 요즘 세상엔 작업 수단이 참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그쪽 아버지, 페이치 회장은 어떻게 작업하실 생각이시죠?”
그의 물음에 리탄은 비싼 와인을 음미도 하지 않고 한 번에 마셔 없앴다.
“로페즈 씨. 제가 140세 시대에 언제 회사 물려받겠어요? 알츠하이머 예방약, 주름 개선약 먹으면서, 내장의 절반을 기계로 갈아치운 할아버지나 돼서 받을까요?”
“화이트홀 페이치 회장이 56살이었죠.”
“제가 지금 28살이에요. 30대 되기 전에는 물려받을 생각이죠.”
“140세 시대에 28살이면 충분히 젊으신데요. 왜 굳이 30대 되시기 전에 회사를 차지하려고 그러세요?”
리탄은 신이 나서 말했다.
“30살 전에 결혼할 생각이거든요. 그러니 결혼 상대로는 최고로 맛있는 여자를 꼬셔야죠. 화이트홀의 젊은 회장! 내가 생각해도 멋진데, 여자 눈엔 얼마나 멋있겠어요? 제가 들이대면 바로 임신시켜달라고 할걸요?”
‘미친 새끼.’
“멋진 생각이네요.”
“우리 좀 통하는 게 있네. 로페즈 씨는 뭐 가족한테 빼앗기고 있는 거 없어요? 가족끼리 경쟁이라던가.”
“제 조사라면 실컷 하셨잖아요?”
“하하. 그럼요. 그래도 직접 말로 듣는 거랑은 다르잖아요.”
로페즈가 아버지라고 부르기에도 뭐한 그놈은 어렸을 때 바람나서 집을 나갔다. 가난에 찌들어 어머니 혼자서 자기를 키웠는데, 대학교 졸업하기 전날 사망했다. 알고 보니 어머니에겐 뇌암이 있었고, 그동안 몰래 병원에 다니면서 약으로 연명한 것이다. 아들이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무리해서 버텼던 것이다. 어머니는 결국 치료할 돈이 없어서 아들뿐인 세상과 이별했다.
‘이 인간에게 친근한 척 과거사까지 말할 필요성은 없다.’
리탄에게 말해봤자 흙수저의 안타까운 삶에서 많이 출세했다는, 그 노력이 대단하다는 칭찬 아닌 칭찬이나 늘어놓을 것이다.
식사가 끝난 뒤 디저트가 나왔다. 금박지 입힌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띄운 커피다.
“로페즈 씨. 저는 페이치 회장을 작업할 생각이에요.”
“그래도 그쪽 아버지 아니에요? 괜찮겠어요?”
“여섯 살 때부터 존나 멋진 황금 골프채로 처맞으면서 자랐어요. 그러면서 배운 게 있죠.”
“뭔데요?”
“윗놈은 아랫놈을 때려도 된다는 것. 그리고 아랫놈은 윗놈을 눕히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맞는 놈이 된다는 것이에요. 다 아버지한테 배운 거, 아버지한테 그대로 돌려드리는 겁니다. 훌륭한 효도잖아요?”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께서는 슬퍼하시지 않겠어요?”
“어머니요? 저는 제 어머니가 누군지도 몰라요. 여자만 몇 명이고 형제만 몇 명인지, 하하하! 난봉꾼 새끼에요 그거.”
그래도 로페즈에겐 리탄이나 페이치나 똑같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형제가 많긴 하지만, 어쨌든 제가 장남이죠. 제 지분, 제가 오를 계단은 제가 알아서 확보할 테니, 로페즈 씨는 트랜센던서의 힘을 빌려주세요. 아, 참고로 저는 그 트랜센던서에 일절 관심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아버지 눕힐 때까지만 힘을 빌리자는 겁니다.”
사회적 위치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 이 만남을, 트랜센던서라는 비대칭 전력이 성사시킨 것이다.
“제가 리탄 씨에게 어떤 방식으로 힘을 빌려드리면 될지 들어나 봅시다.”
“트랜센던서와 로페즈 씨의 그 구성력으로, 페이치 회장을 사회적으로 매장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자살로 위장해서 잘 처리할게요.”
“페이치 회장을 자살로 작업하기에 개연성 있는 상황을 조성하라는 뜻인가요?”
리탄은 손뼉을 탁 치며 로페즈에게 손가락을 향했다.
“바로 그거죠!”
“알겠어요. 저도 제게 이런 짓을 한 페이치 회장에겐 적지 않은 악감정이 있으니까요. 거부감은 없네요.”
“좋아요! 그럼 그렇게···”
“대신 이쪽 조건을 몇 가지 들어주셔야겠습니다.”
리탄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밀어 올렸다. 늘 갑이었던 자신에게 조건을 제시하는 을을 처음 본 것이다.
그만큼 트랜센던서의 가치가 비대칭 전력이라는 뜻이겠다.
“말씀해보세요. 그 조건.”
로페즈는 단호하게 요구했다.
“첫째, 지금 타르시스 북쪽 교도소에 있는 자이칸 씨를 빼주세요.”
“자이칸? 그 약쟁이 조폭이요?”
“네. 조폭인지 갱단인지 모르겠지만···.”
“알겠어요. 그거 담당 형사랑 검사랑 교도소장 전부 우리 쪽 사람이니까. 슬쩍 시키는 건 일도 아니죠.”
“둘째, 이 일이 끝나고 화이트홀을 장악하시면, 앞으로 제게서 손때세요.”
“그건 오히려 이쪽에서 제안하고 싶은 거예요. 예. 이 일이 해결되면 서로 아는 체도 하지 말자고요.”
“셋째, 화이트홀의 지분을 일부 넘기세요.”
“그건 너무 욕심부리시는 거 아닌가?”
“차후 안전장치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리탄 씨를 대기업 화이트홀의 회장으로 앉힐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는 협력입니다. 이 작은 조건이 싫으시면 관두고요.”
“아, 알았어요. 그 정도야 뭐. 안전장치라면 5% 정도로 되죠?”
로페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조건을 꺼냈다.
“넷째.”
“넷째도 있어요? 이거 완전 도둑놈 심보잖아?”
“페이치 회장이 작업한 우리 연구팀 직원들. 진상을 세상에 밝히세요. 그들의 실종 상태를 해제하고 올바른 장례식이라도 거칠 수 있게 해주세요.”
계속 웃는 상이었던 리탄은 그 대목에서 얼굴을 구겼다.
“그건 화이트홀 이미지에 타격이 가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안 되겠군요.”
“저도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양보 못 합니다.”
“아, 진짜 그건 안 된다니까요? 주식이 폭락해요 이 사람아. 대주주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그리고 트랜센던서나 그 비밀프로젝트를 세상에 밝히면 로페즈 씨한테도 손해인데요.”
- 리탄은 진심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트랜센던서가 그렇게 조언하자, 로페즈는 보란 듯이 리탄처럼 얼굴을 구겼다가 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귀로 들리는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하······. 알겠어요. 그럼 다른 쪽으로 양보해드리죠. 화이트홀의 지분을 달라는 조건을 빼겠습니다.”
“···.”
“어차피 더 늙기 전에 회장직에 관심 있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생각해보세요. 그 일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시기를 앞당기면 되잖아요. 리탄 씨는 일단 페이치 회장을 사회적으로 매장해달라고 하셨잖아요?”
“예, 뭐.”
“3년간 지하의 비밀연구소에서 일한 연구원들,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회장이 홧김에 몰살했다. ···그런 식으로 가자고요.”
그러면 페이치 회장을 사회적으로 매장할 수 있다. 동시에 트랜센던서의 비밀도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죽은 팀원들의 행방도 밝힐 수 있다.
리탄은 마지못해 수긍했다.
“좋아요. 전부 아버지가 잘못한 거로 잘 처리하면 되겠지. 이제 조건은 없죠? 진짜 더는 못 들어줍니다.”
“네. 이게 답니다. 우선 자이칸 씨를 빼주시고,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제가 그 연구소에서 있었던 일을 세상에 밝히겠습니다.”
리탄은 로페즈의 당당한 태도가 벅찼는지 실실 웃어댔다.
“그렇게 페이치 회장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리탄 씨가 자살로 작업하시고, 연구소 일을 제가 말씀드린 그대로 거짓 해명하세요. 그 후 제게서 손을 떼시면 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로페즈는 ‘손을 떼시면 됩니다.’라고 말하면서 리탄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하하···. 휴! 좋습니다. 로페즈 씨!”
“네.”
“우리 서로 힘내서 이기자고요.”
“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두 사람이 서로 악수하는 가운데, 트랜센던서가 물었다.
- 분석 결과, 이 협상 과정에서 리탄의 거짓은 탐지되지 않았습니다. 관리자님께서는 이 협상을 신뢰하고 계십니까?
로페즈는 리탄과 웃으며 악수하는 와중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 3. 적과 친구는 모두 타인이다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