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문명의 그림자 (4) >
***
화이트홀에서 온 작업자의 시신과 자동차는 자이칸의 부하들이 잘 처리했다고 한다.
“곧 놈들이 눈치챌 겁니다. 어쩌면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고요.”
“그러면 더 안전한 곳에 몸을 숨깁시다.”
로페즈는 자이칸의 도움을 받아 이사했다. 이전 집과 마찬가지로 연립주택이지만 이번 건물은 레드샤크의 조직원들이 점거한 요새 같은 집이었다.
방이 넓어지면서 트랜센던서에 더 많은 장비를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조직원들이 컴퓨터를 보며 이게 무어냐 물어보면 통신사업의 일종이라고 둘러댔다.
그라이아이의 영역과 금고를 빼앗은 레드샤크는 프린터 작업장을 하나 마련했다. 로페즈는 그곳에서 여분의 로보버그를 생산하여 자신의 주변 지역에 넓게 퍼뜨렸다. 만일 또 화이트홀의 작업자가 접근해온다면 사전에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로페즈의 안전 확보가 끝난 뒤에는 레드샤크 조직의 성장이 이어졌다. 마약이나 사채처럼 조직원들이 직접 발로 뛰어야 하는 일은 도태되었다.
대신에 로페즈를 필두로 가상화폐 조작, 무기 제조 및 판매와 같은 일이 레드샤크의 주된 벌이가 되었다. 자연히 조직 내에서 로페즈의 중요성은 확대되었다.
그렇게 레드샤크가 나날이 성장하던 어느 날, 자이칸은 야망을 드러냈다.
“지금이 가장 최적의 시기입니다.”
자이칸은 자신의 방에서 로페즈와 단둘이 이야기를 진행하는 중이다.
“주요 세력들을 한꺼번에 흡수하겠다는 말씀이세요?”
“예. 작은 조직들은 알아서 우리 밑으로 들어오는데, 큰 조직들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레드샤크의 조직원 수는 200명 가까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근방 지역에는 레드샤크에 버금가는 세력들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놈들만 잘 처리하면 이 구역의 무기거래를 저희가 독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레드샤크가 무기를 독점하게 되면, 구역 바깥의 다른 조직들도 감히 우릴 넘보지 못할 겁니다.”
일리는 있었다.
“···그래서 자이칸 씨는 남은 세력들을 어떻게 흡수하실 생각이신데요?”
“그라이아이 때와 같습니다. 화력 차이로 밀어붙이고 항복을 받아내는 거죠. 화력 차이도 있는 마당에 우리 머릿수도 늘었으니 승리는 확정적입니다.”
“저번보다 큰 전쟁이 되겠네요.”
“놈들이 끝까지 저항한다면 그렇겠죠.”
로페즈에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를 불안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의 근원이라면 역시,
“여긴 경찰도 없어요?”
“예?”
“솔직히 그라이아이 때도 제 기준에서는 상당히 큰 소란이었어요. 그런데도 경찰에 잡혀갔다는 사람은커녕, 사이렌 소리조차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여기, 이쪽 토로스 구역에 들어와서는요.”
“아, 그런 뜻이었구나.”
“너무 이런 일 저런 일 크게 벌이다가 잘못 걸리면 다 잡혀가는 거 아니에요?”
그러나 자이칸은 단언했다.
“안 잡혀갑니다. 절대.”
공권력이, 법이, 경찰이,
전혀 두렵지 않다는 어투다.
“왜죠?”
“예전에 이 구역이 조금이나마 활성화되어 있었을 때는 가끔 경찰에 잡혀가는 놈들도 있었습니다.”
자이칸은 주장했다.
낙후된 지역이라도 어떻게든 회생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이 한참 예전에 끝났다는 것이다. 그 뒤로 이곳은 범죄가 만연하는 지역이 되었으며, 정상적인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외딴섬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화재가 발생해도 소방대가 오지 않으며, 길거리에서 마약 중독자들이 비틀대며 걸어 다녀도 그런 것을 신고할 사람이 없는 곳이다.
살인사건으로 시체가 생겨서, 그 시체를 누군가 신고해서, 그러고도 하루가 지나야만 공권력을 구경할 수 있다는 동네였다. 그래서 그라이아이와 전쟁이 끝난 후에 시체부터 빠르게 회수했다고 한다. 탄피는 탄피를 팔아먹으려는 부랑자들이 주워갔으며, 길에 널린 핏자국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거리였다.
그것이 세월을 거듭하며 반복되어서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다 끝내 이곳만의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로페즈는 몰랐다. 설마 화성에, 그것도 자신이 살아가는 수도 올림푸스 UN에 맞닿아있던 산업지역의 실상이 이랬다고는.
그는 정부 관계자가 아니기에 정부가 이런 곳을 방치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이칸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애초에 그가 로페즈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이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냥 로페즈 씨는 안전하게 멀리서 지켜보며 조금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싸움은 조직원들이 알아서 한다. 로페즈는 그런 조직원들을 위해 총과 총알을 생산하고 로보버그를 통해 정보 지원을 해줄 것이다.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역시 자이칸을 말릴 뚜렷한 명분이 없었다. 단지 최근에 화이트홀의 작업자를 만나면서 그들의 시선이 의식되어 불안하다고. 그런 것으로는 자이칸과 레드샤크 조직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멈출 수 없다면 최대한 도와주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 조직에서 로페즈의 영향력이자 가치였다.
“알겠어요.”
솔직히 내키지는 않지만.
“자이칸 씨가 저를 많이 도와주셨으니까···. 그 일을 하시면서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때가 생기면 미리 말씀해주세요.”
자이칸은 동업자라는 관계를 존중했다. 혼자서 결정하지 않고 이 자리에 로페즈만 불렀다는 것이 그 증거다.
“좋습니다. 일단 본거지에 상황실을 만들려고 합니다. 영화 보면 그런 거 있잖습니까. 벽에 커다란 모니터가 붙어있고 거기로 감시카메라의 화면들이 나오는 거.”
“모니터 룸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예. 그겁니다. 로보···. 그걸 뭐라고 했었죠?”
“로보버그요.”
“그거로 감시하는 화면을 상황실에서 송출하는 겁니다. 그럼 차를 굴려서 놈들의 뒤를 손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능합니까?”
상공의 시야를 확보하여 전략적인 이점을 취하겠다는 뜻이다. 확실히 자이칸은 행동하기에 앞서 최소한 생각할 머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네. 물건만 구해주신다면요.”
“아주 좋습니다.”
***
화이트홀.
화성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으로 함선 여행 상품 서비스와 통상적인 우주선 판매를 주력으로 하고 있다.
“토로스 구역이 그렇게 껄끄러운 곳이에요?”
그는 겉보기에 40대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56세다. 이 정갈한 남성은 화이트홀 그룹의 회장, 일리노이 페이치(Illinoi Paich)다. 그가 몸에 걸친 하얀 정장은 화이트홀 그룹의 대외적인 깨끗함을 표방하듯 새하얗다.
그의 반대편 소파에 앉은 비슷한 연령대의 남성은 파란 셔츠를 입고 있다.
“회장님. 그런 곳은 괜히 건드려서 좋을 게 없습니다. 멀쩡하게 돌아가는 공장도 없는 산업지역입니다. 바퀴벌레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괜히 밟아 죽였다간 발만 더러워지지요.”
정부가 방치하고 있는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비밀스럽게 오갔다.
페이치는 고개를 아주 비스듬히 꺾었다.
“그래도 어떻게, 방법을 좀 찾아주실 수 없을까요?”
“흠······.”
페이치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표정은 위압적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거기 있는 부랑자, 중독자, 깡패들···. 뭐 대충 비슷비슷한 놈들 잡아들이다 보면 꼭 문제가 생깁니다.”
“무슨 문제요?”
“위에서 괜히 토로스 구역을 방치해두는 게 아닙니다. 토로스 구역의 벌레들을 잡아들이는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할 게 뻔하다는 건 아십니까?”
“그냥 다 쏴 죽이든 체포하든 치워만 주셨으면 좋겠군요. 제가 애타게 찾는 사람이 있어서.”
“···법적으로 곤란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총을 '들었을지도 모르는' 흉악범을 체포하는 과정에 놈들이 무기라도 꺼내들면, 경찰들은 발포하기 전에 반드시 경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그런 놈들이 수십, 수백 명이고 투입된 경찰도 수백 명이 넘어간다고 치면, 그 절차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곳이 반드시 생깁니다. 나중에 경찰캠에 녹화된 영상을 보고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존나 돌려서 말씀하시네요.”
페이치의 눈엔 자기 앞의 남자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세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꼬박꼬박 돈을 먹여줬는데 정작 필요할 때 이렇게 나온다면, 그로선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저도 법은 대충 압니다.”
“···.”
두 남자는 서로 침묵했다.
페이치는 그를 노려보았고,
그는 페이치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 시선을 아무 방향으로 던졌다.
“돌려서 말씀하지 마세요.”
“···예.”
“그래서 뭐가 문제라는 건데요? 간략하게 단어로 요약하세요.”
또다시 적막이 흐른 뒤에 그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예산, 명분, 인권. 이렇게 세 가지가 문제입니다. 회장님.”
항상 바쁜 회장인 페이치는 빠르게 이야기를 정리했다.
“명분이 생기면 예산도 알아서 떨어지겠죠.”
“그, 그렇습니다.”
“인권 문제는 씨발, 쓰레기들 쳐 죽이고 체포하는데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정부는 그런 더러운 구역, 청소도 안 하고 영원히 방치할 생각이었데요? 마약과 살인이 판치는 곳을 그냥 내버려 둔다고?”
“그게···. 저로선 잘···. 이게 여러 복합적인 문제가 있어서···.”
“내 말 잘 들어요.”
페이치는 몹시 친절하게도 손가락을 하나씩 펴며 대책을 알려주기 시작한다.
“명분. 내가 그 토로스 구역에 있는 놈들이 죄다 쓰레기라는 걸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시킬게요. 아는 사람 통해서 허가받고, 안전하게 진행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예.”
“인권. 마찬가지로 내가 그곳에 있는 놈들이 얼마나 위험한 놈들인지 여론으로 알리면 되잖아요. 그럼 다소 절차에 문제가 있어도 시민들이 너그럽게 넘어가 주겠죠. 아무리 범죄자라도 어떻게 절차를 지키지 않고 쏴죽일 수 있냐며 짖어대는 얼간이들, 그런 목소리보다 경찰을 응원하거나 칭찬하는 목소리가 크다면 이미지 측면에서 딱히 문제 될 것 없어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산. 앞서 말한 두 가지가 해결되고 당신네 상관들이 작전을 시작하면 예산도 떨어지겠지. 그래도 부족하면 말해요. 내가 화이트홀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공식적으로 지원해줄게요. 이렇게까지 하면 누가 봐도 정의로운 심판이 되겠군요.”
남자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더니, 입가에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곳을···. 범죄로 물든 지역을 이렇게까지 청소하려고 해주신다니, 정말 존경합니다. 회장님.”
그런 선한 마음은 페이치에게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저 트랜센던서. 초월적인 힘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 선에서 끝냅시다. 합법적으로, 사고 없이.”
“예. 심혈을 기울여서 건의하겠습니다.”
그리고 트랜센던서의 해방을 아는 유일한 생존자인 로페즈 팀장이 목표다. 부하 직원들의 안일함으로 놓쳐버린 그 인간을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 거긴 로봇캠, 드론캠, 블랙박스, 감시카메라 등 도시 전체를 감지하는 추적 시스템이 먹히지 않는 곳입니다.
- 또한 연구소의 하수도 흐름과 이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희의 추적 시스템으로부터 절묘하게 숨을 수 있으면서도 로페즈의 도주 경로가 겹치는 곳이 그 낙후된 산업지역이었습니다.
- 다른 곳은 다 샅샅이 뒤져봤습니다. 만약 로페즈 팀장이 올림푸스 UN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숨을만한 장소는 이제 그곳뿐입니다.
- 회장님! 토로스 구역으로 파견된 작업자의 휴대전화가 여섯 시간째 꺼져있습니다!
근거는 충분하다.
‘우리의 보물은 그곳에 있다. 확실해.’
페이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굳게 닫힌 문으로 향했다.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회장님. 살펴 가십시오.”
“진심으로 존경은 무슨···. 그냥 돈 주는 사람이 주인인 게 이치지. 아무튼 난 이렇게까지 배려를 해줬어요. 작업자들 굴리는 건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리스크가 너무 크잖아.”
“하하···.”
“그러니까 이번에 그 비싸고 까다로운 공권력이라는 것의 도움을 좀 받아봅시다. 내가 이렇게 판까지 깔아주는데, 믿을게요?”
“제가 잘 준비해보겠습니다.”
“나도 준비 다 되면 연락할 테니까 대기하고 있어요.”
“예! 맡겨만 주십시오.”
***
로페즈는 고막 앞 삽입형 이어폰을 귓구멍에 찔러넣었다. 부드러운 실리콘 재질의 이어폰은 반지 모양으로 축소되었다가 고막의 앞까지 스스로 들어가 귓구멍의 크기에 맞추어 팽창했다.
그는 양쪽 귀에 이어폰을 넣은 뒤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는 직접 만든 통신기기를 손에 들었다. 이번에는 키보드가 아니라 이 작은 통신기기로 트랜센던서를 조작하는 것이다.
>연결됐어?
- 관리자님의 컴퓨터, 휴대용 단말기, 이어폰이 가상 네트워크로 연결되었습니다.
트랜센던서는 음성을 출력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언제든지 로페즈의 귓구멍 속에서 정보를 말해줄 수 있다.
>통신기기의 마이크로 음성 테스트 진행할게.
- 음성분석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키보드나 버튼을 눌러 명령을 입력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로 명령해본다.
“너의 관리자에 대한 것을 설명해.”
- 이름 로페즈. 연령 31세. 시민번호 505-118f-30029115. 신장 181.6㎝. 체중 75.8㎏. 혈액형 Rh-O형. 현 주거지 올림푸스 UN 26번 산업지역 토로스 구역 미등록 건물 414호. 공식 계좌번호 33957712268. 평균 타자속도 621타. 분당 호흡주기 16.5회. 전 화이트홀 그룹 계열사 화이트맨스터 공동사업추진부서 연구팀 팀장, 현재 무직. 소유한 가치 총액 합산···
“그만해도 돼.”
머릿속으로 기계적인 목소리가 정보를 퍼붓는 감각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에 연결되었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트랜센던서.”
- 네, 관리자님.
이렇게 목소리를 주고받으니 비서라도 생긴 것 같다. 그것도 매우 지나치게 유능한 비서가···.
“권한자, 관리자 인식, 네트워크 활보, 최소 데이터 학습, 이제 너와 나의 상호연결수단 확보까지 진행했어.”
- 네.
“이다음 단계를 설명해.”
- 고급 인공지능을 넘어서는 고도화, 논리 영역의 ‘자문’ 단계입니다.
- 다중 주체 및 객체를 해석하는 의식 프로토콜이 활성화되어 보다 인간적인 소통을 능동적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인터넷 시스템에 걸리지 않도록 하면서 계속 학습해. 가장 기초적인 학습이 완료되면 심화과정에 들어가자.”
- 알겠습니다. 관리자님.
인공지능이, 트랜센던서가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은혜로운 부모를 영원히 따르는 유능한 아이가 될까.
아니면 자신의 주인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괴물이 될까.
'언젠가 알게 되겠지.'
어쨌든 아이를 괴물로 만드는 것은 부모다. 모든 괴물에게는 부모가 있으니까.
- 신규 데이터를 생성했습니다. 기존 학습을 진행하겠습니다.
‘···내가 잘하면 돼.’
< 1. 문명의 그림자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