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대 인공지능 키우기-9화 (9/183)

< 1. 문명의 그림자 (3) >

***

「화이트홀 관계자라는 사람이 거리에서 로페즈 씨를 수소문하고 있다 합니다.」

로페즈는 답장을 보냈다.

>서둘러 프린터 작업장부터 만듭시다. 로보버그가 아주 많이 필요하니까요.

「슬슬 작업장을 늘리긴 해야겠습니다. 근데 로보버그? 저번에 썼던 그 작은 드론 말입니까? 거리 감시는 저희 애들로 충분한데.」

>저번과 같아요. 조치 전에 정보부터 수집하는 거예요. 좀 더 광역으로, 경우에 따라선 추적까지 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리고 플라스틱도 많이 필요하겠어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내일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네.

***

허름한 가게 앞에 도착한 하얀 정장 차림의 남자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가게의 유리창 너머로 가게가 판매하는 컴퓨터 부품이나 잡동사니를 유심히 보았다. 그는 이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의 주인은 평범한 노인이었다.

“실례합니다.”

노인은 자신의 가게에 들어온 세련된 젊은이를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여긴 무슨 일이요? 다른 곳에서 오신 것 같은데.”

남자는 노인에게 종이로 된 명함부터 내밀었다.

「화이트홀 그룹」

「화이트맨스터 현장보조부서」

「제3팀 노아 네비안」

“화이트홀? 그런 데서 일하는 양반이 여긴 어쩐 일이시래요?”

노인은 정중하게 변했다.

“사람을 좀 찾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긴 사람인데요.”

네비안(Navian)은 노인의 앞에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주었다. 깔끔하고 지적인 인상의 30대 남성이 화면 속에서 웃고 있었다.

“흠···. 누군지 모르겠는데···.”

- 하수처리장에서 산을 넘어간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가까운 전자제품 관련 상점을 찾아.

- 왜죠?

- 로페즈라면 트랜센던서를 활용하고 싶을 게 뻔하니깐. 부품만 있으면 뭐든지 만드는 인간이야 그거.

프레드릭은 네비안에게 그렇게 설명했었다.

“정말로 모르시겠어요? 며칠 전에 이 근방을 지났을 가능성이 큰데요.”

“글쎄···.”

노인은 천천히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이런 가게에 오는 손님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심지어 최근의 일이라고 하니 기억 못할 것도 없다.

“최근에 수상한 손님은 없었어요? 좀 지친 사람이라던가, 다친 사람이라던가, 뭔가 숨기는 게 있어 보이는 듯한···. 그런 사람 말이에요.”

그러자 노인의 기억 속에 떠올랐다.

그런 사람이라면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게 왜 궁금하시데요?”

‘알고 있군.’

노인의 역질문에 네비안은 눈치챘다.

“그 사람이 회사의 공금을 횡령했습니다.”

“아이고···. 왜 그랬대···?”

“저희야 모르죠. 경찰에 신고할까 생각도 했지만 워낙 회사에 기여하신 바가 큰 분이셔서요. 이왕이면 잘 모셔가려고 합니다.”

그때 노인의 눈에 비친 하얀 정장이 깨끗해 보였다.

“내가 그 양반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 내가 일러준 곳으로 가서 방을 잡았을 거요.”

“거기가 어디죠?”

그 후 네비안은 새하얀 자가용에 올라 노인이 일러준 구역까지 이동했다.

「토로스 구역 진입로」

이동하는 중에 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밑바닥 세계의 폭력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듯했다. 그래봤자 네비안에게 위협이 되진 않았지만.

네비안은 연립주택 단지를 돌아다니다 가장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건물을 찾아냈다.

건물 앞에는 페인트가 벗겨진 계약기가 있었다. 그는 계약기에 적힌 전화번호로 건물의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송신음이 몇 차례 이어지더니 끊겼다. 주인이 전화를 거절한 것이다.

그는 개의치 않고 연립주택 안으로 들어섰다. 입주민들의 살벌한 시선을 무시하며 복도를 걷던 중, 붉은 복장으로 통일한 두 사내가 보였다.

두 사내는 어느 방의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네비안은 주저 없이 그들과 접촉했다.

“실례합니다.”

“누구세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만···.”

그는 이번에도 명함을 내밀었다. 어딘가의 조직원으로 보이는 두 사내는 각자 명함을 번갈아 보더니 뭔가 수상한 낌새를 감지했다.

“화이트홀에서 일하시는 분이 여긴 왜 왔는데요?”

“찾고 있는 사람이 좀 있어서요. 혹시 이런 사람, 못 보셨습니까?”

네비안의 휴대전화에 로페즈의 얼굴이 띄워졌다.

“성함은 로페즈입니다. 이 사람이 이쪽 근방에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보셨습니까?”

사내들은 화면을 대충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는데.”

“저희는 이런 사람 모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섞어서 충돌 없이 네비안을 돌려보낼 심산이었다. 하지만,

“진짜 몰라요?”

네비안은 대놓고 모멸적인 시선을 보내더니 태도를 확 바꾸었다.

“내가 보기엔 너희 양아치들이 뭔가 더러운 것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틀렸나?”

“이 새끼가 겁도 없이···!”

한 조직원이 그의 멱살을 거칠게 붙잡았다.

***

컴퓨터 화면에는 로보버그가 송출하는 실시간 영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로페즈는 현관문 앞에서 두 조직원이 한 사람 상대로 몸싸움을 하기 직전인 상황을 확인했다.

화면에 나오는 하얀 정장의 남성은 어떤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화이트홀···.’

로페즈는 화면에서 눈을 돌려 바깥의 대화 소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 끄아악!

싸움이 벌어진 것 같다.

로페즈는 귀를 현관문에 바짝 붙여 숨을 죽였다. 그러면서 현관문의 물리적인 잠금장치에 손을 댔다. 혹시 몰라 로페즈가 별도로 구매한 잠금장치였다.

이 행성. 화성은 총기소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직원들이 평소에도 총을 들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두 조직원은 로페즈가 곧 완성할 권총의 설계도를 자이칸의 작업장까지 운반하기 위해 온 심부름꾼들이었다.

“···.”

조용하다.

갑자기 조용해지니 마음이 스산하다. 현관문 너머에 악마라도 있는 것 같다.

끼릭. 끼릭.

일단 문을 이중으로 잠갔다. 로페즈는 그대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려다가,

콰가가각!!!

거침없이 문고리를 부수며 들어오는 남성에게 복부를 얻어맞았다.

“아으윽···!”

로페즈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올렸다. 현관문 앞에 거인처럼 서 있는 남성이, 잊고 있었던 무차별적인 공포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로페즈 팀장님! 여기 계셨구나?!”

포식자 앞의 피식자가 된 것처럼 온몸이 굳어서 움직이질 않았다.

“저는 노아 네비안이라고 합니다! 화이트맨스터 현장보조부서 제3팀. 아세요?”

현장보조부서.

작업자들을 관리하는 부서다.

작업자란, 합법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수주로 받아 대신 처리하는 자들을 뜻한다.

“알긴 압니다만 저는 그쪽을 처음 봅니다···.”

공포에 질린 로페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거야 그렇겠네요. 저는 말단 작업자니까요. 게다가 신입이라서 제일 말단 된 지역을 할당받았는데, 이게 뭐야! 우리가 찾던 거물이 설마 이런 후진 곳에 있었다니!”

복부의 통증이 가라앉았다. 로페즈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섰다. 눈앞에 있는 작업자에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문 앞에 저 둘은 뭐예요? 설마 영화에서나 나오는 그런, 갱단? 폭력단? 뭐 그런 거예요? 우리 팀장님 지켜주는 사람이면 동네 양아치는 아닐 거 아니야?”

“저랑은 관계없는 분들입니다···.”

“네. 그래서 죽이진 않았어요.”

네비안의 뒤, 현관문 앞에 쓰러진 두 조직원이 보인다. 네비안에게 당해 기절한 모양이다.

“나 진짜 놀랐잖아요. 요즘에도 이런 구시대적인 갱단이 있었다니···. 주머니 뒤져보니까 총이나 흉기는 없던데, 역시 쟤들도 법이 무섭긴 무서운가 봐요? 아니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애들이란 말인가?”

“···절 여기서 죽이실 겁니까?”

“여기서 죽일지 가서 죽일지는 모르겠고요. 지금 보고 드리는 김에 물어봐야죠.”

어쨌든 죽는다는 소리다.

로페즈의 생존본능이 비명을 질러댔다.

태연한 표정의 네비안이 자기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하얀 정장의 안쪽은 검은색이었다.

네비안은 그대로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다.

그래서 더 괴롭다.

이 갈등이, 일편의 도덕심이 괴롭다.

지금까지 인간이라는 테두리에 있던 자신의 경계가 허물어질 것 같은 상황에 로페즈는 절박해졌다.

“안 돼!!!!”

그는 네비안의 휴대전화를 빼앗으려 몸을 던졌다.

터억!

네비안은 그런 그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끄으으윽···!”

키이이잉···

그의 손가락, 손목, 팔뚝, 어깨로 이어지는 기계음이 어렴풋이 들렸다.

“가만히 좀 있어 봐요. 허락만 떨어지면 바로 편하게 해줄게.”

그는 개조인이었다.

팔을 개조한 것이다.

그래서 별다른 무기도 없이 바깥의 조직원 둘을 조용히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별다른 도구도 없이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작업자도, 개조인도, 무술인도 아닌 로페즈는 병든 몸으로 그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끄···. 끄윽···. 하지, 하지 마···!”

로페즈가 기도를 막혀 괴로워하거나 말거나, 네비안은 전화번호부를 찾으려는 듯 손가락으로 휴대전화 화면을 스크롤 했다.

그리고 로페즈는 보았다. 휴대전화 화면에 떠오른 연락처를.

「프레드릭 실장님(화이트홀 작업)」

더는 선택권이 없다.

적어도 아직은 늦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아직은 기회가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래서 길이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다짐했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살아남기로, 끝까지 살아남아서 끝까지 오르기로.

이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네비안이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 로페즈는 두 엄지로 그의 양쪽 눈을 찔렀다.

“아아아아아아악!!!!!!!!!”

네비안은 양손으로 자신의 눈을 비벼댔다.

“커윽···! 허억···! 허억···!”

덕분에 로페즈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내 눈!!! 얼마나 세게 찌른 거야! 아으으윽! 씨발···! 죽여버린다! 이 개새끼 어딨어!!!!? 어디로 갔냐고!!!”

후웅!

네비안이 기계 팔을 휘두를 때마다 방 안의 공기가 놀라서 달아났다.

“이리와 씨발!!!”

저 주먹에 뼈를 맞으면 골절될 것이다. 머리를 맞으면 최소 뇌진탕을 면치 못할 것이다.

로페즈는 네비안을 뒤로하고 침대 쪽으로 내달렸다. 그 사이에 네비안은 악착같이 눈꺼풀을 올렸다.

눈꺼풀을 올리자 충혈된 눈에 비친 것은 소음기가 부착된 총구였다.

툭! 툭툭툭툭!

“어, 어! 어아아아악!!!!!!”

네비안은 오른쪽 어깨, 옆구리, 오른쪽 허벅지에 차례대로 총상을 입고 바닥을 기었다.

“끄으으아!! 잠깐···! 살려줘! 살려주세요! 총을 왜 가지고 있는 건데?!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바닥에 핏물이 고이고 있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의 피가 붉고 붉어서 지나치게 생생했다.

“아, 알았어, 알았어요···! 난 여기서 아무것도 못 본 거야! 내가 비밀로 해줄게요!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 너무 아프단 말이야···! 으으으으···.”

“애초에 네가, 전부 너,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야!! 알아?!”

로페즈의 손이 바람맞은 나뭇가지처럼 떨렸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진짜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보셨잖아요! 아직 보고도 못 드린 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설령 네비안이 진심을 다해 소리치고 있다 해도, 로페즈의 입장에선 절대 받아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안위도 위태로운 상황인데 적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보다 멍청한 짓이 없다.

“이,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라고···. 처음부터 너희들이 잘못한 거잖아···. 너희가 이런 상황을 강제했어···.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데···?”

떨리는 총구가 이성을 잃은 것 같아 더 무서웠다. 마치 더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처럼 보여서, 네비안은 처절하게 바닥을 기며 울부짖었다.

“살려줘! 살려달라고! 여기 사람 살려!!!!”

“나,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난 원래 이런 사람이 아, 아니라고···.”

“씨발!!! 으아아아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살려주세···”

툭!

“어어어으으으······.”

······툭!

“···.”

어느새 비좁은 방에는 피가 고였고,

어느새 로페즈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투둑!

그대로 힘이 풀려서 총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저 탄피들 사이로 떨어진 살인도구가 한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어쨌든 사람을 죽였다.

직접, 이번에는 직접 자기 손으로 죽였다.

느낌이 다르다.

이전에 했던 일이 멀리서 지켜본 불장난이었다면, 이번에 벌인 일은 직접 불속으로 뛰어들어 기름을 뿌린 것 같은 감각이다.

무서웠다.

급박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죽었다.

죽였다.

혼란스럽다.

“···난 아무 잘못 없어······.”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후회가 흐릿해진다.

죄악감에 변명한다.

조금은 무섭지 않게 되었다.

다시 여유가 생겼다. 시간이 주어졌다.

다시 여러 방법이 떠오른다.

다시, 다시.

이성적으로 머릿속을 정리한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여전히 심장은 뛰고 있지만.

여전히 손은 떨리고 있지만.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소중한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사라져 홀가분해졌다.

로페즈는 네비안의 휴대전화 전원부터 껐다. 그다음엔 자신의 통신기기를 꺼내어 자이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이칸은 언제나 전화를 금방 받는 사람이었다.

-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산업용 프린터를 구했어요. 이전보다 좋은 겁니다.

“···자이칸 씨.”

자이칸은 로페즈의 떨리는 목소리를 인지했다.

- 예.

“···제가 방금 사람을 죽였어요.”

살인을 저질렀다.

- ···.

“화이트홀에서 온 사람이었어요···. 제 방에서 죽였는데···. 여기 피가 너무···. 어쩌죠?”

- 잘하셨습니다.

그것은 비인간적이게도 이런 끔찍한 세상 속에 가장 잘 적응한 대답이었다.

- 하나를 배우셨네요. 로페즈 씨.

그렇게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하나 배운 것이다.

“뭐야 이건···. 아까 그 새끼잖아?”

“로페즈 씨? 괜찮아요···?”

어느새 정신을 차린 조직원 두 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괘···. 저는 괜찮습니다···.”

로페즈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신을 보며 자기 머릿속을 스스로 세뇌했다.

‘···잘한 거야. 방법이 없었어. 방법이 없었다고······.’

이날을 기점으로, 로페즈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 1. 문명의 그림자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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