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Prolog. 결실을 품고 도주하다 (4) >
***
오전 9시 12분.
낙후된 산업지역의 아침 공기에 녹슨 냄새가 감돈다. 로페즈는 노인이 일러준 사거리에서 멈췄다.
바퀴 달린 화물차량과 차체 낮은 구식의 승용차가 한적한 도로를 대충 채우고 있다. 로페즈는 반중력 장치나 홀로그램 기술 하나 적용되지 않은 녹슨 표지판을 길잡이 삼아 걸었다.
가면 갈수록 건물들의 높이가 낮아진다. 점차 문명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거리에는 딱 봐도 지역의 양아치나 폭력배로 보이는 자들이 무리를 짓고 있다.
고개를 잔뜩 숙인 로페즈는 절뚝이며 위협적인 사람들의 앞을 지났다. 혹여나 있을지도 모르는 카메라에 얼굴이나 걸음걸이가 노출되지 않도록, 세간의 눈을 피하려는 시궁쥐처럼 움직였다.
이윽고 연립주택 단지가 나왔다. 오래된 건물을 블록마다 차곡차곡 이어놓은 모습이 마치 이곳의 사람들을 찬란한 문명사회로부터 격리해놓은 것 같다.
그 찬란한 문명사회의 그림자가 이 남자의 몸에 오수를 뒤집어씌운 걸까. 로페즈는 자신도 이곳 사람들과 처지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통감했다.
그는 그나마 가장 멀쩡해 보이는 연립주택 앞에 섰다. 도심에서 휴대전화나 인터넷으로 계약할 수 있는 방식과 달리, 이곳에서는 주택 앞에 설치된 자판기 같은 기계로 계약하는 방식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거야?’
그는 페인트가 벗겨진 계약기의 화면을 눌러보았다. 그러나 까만 화면에 불이 들어오질 않는다.
“그거 망가졌어요.”
한 중년 남성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허름한 청바지에 러닝셔츠만 걸친 남성에게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남성은 그 흔한 체중조절 약품도 복용하지 않았는지 체형이 흉하게 뚱뚱했다. 심지어 지저분한 턱수염까지 있다.
“내가 여기 주인인데, 어디서 오셨어요?”
“방을 하나 구하려고 합니다. 계약은 어디서···”
“됐고.”
그는 로페즈에게 휴대전화부터 들이밀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낼래요? 아니면 하루에 한 번씩 낼래요?”
이 자리에서 결제하겠다는 뜻이다.
그간 로페즈는 의심이 많아졌다.
“···이 건물 주인 맞으세요?”
“이 동네 사람이 아닌가? 쓸데없는 걸 묻고 있어. 아니면 어쩔 건데?”
무례한 사람이었다. 도심에서의 비상식이 이곳에서는 상식이었다. 로페즈는 일단 카드를 꺼내며 물었다.
“···얼마죠? 월세로 하겠습니다.”
“보증금 15만, 매달 3만.”
“방 크기가 어떻게 되죠? 아, 아니, 일단 좀 들어가서 확인해보고 결제할게요.”
“썅, 귀찮게. 여긴 그런 거 없어요.”
“그럼···. 안에 뭐가 있는지만 좀 알려주시면 계약하겠습니다.”
남성은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름진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싱크대랑 화장실 있고 컴퓨터도 한 대 있어요. 내 눈썰미로 보아하니 사업망하고 이쪽으로 온 것 같은데, 이 근방에 여기보다 좋은 데는 없을걸? 무려 컴퓨터가 있잖아. 컴퓨터가.”
‘20만 1200크레트에서 18만 크레트를 지출하게 된다···. 사기꾼이면 끝장이야.’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례한 태도에 로페즈는 계속 망설였다. 이곳의 모든 것이 낯설어서 조금만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썅, 그냥 따라와요. 방 보여줄 테니까.”
***
성인 다섯 명이 누우면 꽉 차는 방이다. 겨우 비밀번호 따위로 잠금 되는 도어록, 한 사람이 서 있기에도 비좁은 화장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작은 싱크대, 냉장고, 고물 같은 컴퓨터, 노란 테이프를 벽지처럼 붙여놓은 작은 창.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다고···?’
공간도 없고 욕실도 없고 침실도 옷장도 없다. 그가 평소에 당연하게 누렸던 모든 것들이 결핍된 장소다. 이런 곳에서 가축처럼 살았다간 정말 폐소공포증이라도 걸릴 것 같다.
「오프라인 카드」
「2만 1200크레트」
거기에 아슬아슬한 잔액까지.
정말 하루아침에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근사한 고층 아파트에서 고급 승용차를 끌고 출근하던 자신이, 대다수의 직장인이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5800만 크레트라는 거금을 계좌에 쌓아뒀던 자신이, 대기업의 연구팀으로서 매우 중요한 비밀프로젝트를 이끌었던 팀장이,
지금은 보기 흉하게 머리칼이 빠진 몰골로,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왼쪽 눈은 실명인 도망자가 거울 너머로 이쪽을 초라하게 쳐다보고 있다. 거울 속의 그것이 현재 자신의 모습이었다.
씻기 위해 옷을 벗어보니 화상 흉터가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병원에서 정상적인 치료를 받지 못한 탓이다.
시각이 통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으으으···. 으으···. 으으으으···.”
그는 비좁은 화장실에서 녹슨 샤워기로 물을 맞았다. 씻겨 내려가는 물줄기에 혼자만의 눈물을 섞어 보냈다.
***
「트랜센던서 버전 알파 1.0」
「학습을 위한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로페즈는 비좁은 방의 컴퓨터에 트랜센던서를 연결했다.
‘돈이 필요하다.’
유령 카드에 남은 2만 1200크레트로는 이번 달을 무사히 넘길 수 없다.
당장 트랜센던서라는 인공지능은 인공지능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하찮은 수준이다. 아직 가르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로페즈가 트랜센던서를 위해 쓸 수 있는 장비는 눈앞에 있는 구식 컴퓨터뿐이다. 따라서 주어진 자원(컴퓨터 자원)과 시간(한 달)을 가장 적합한 곳에 투자해야 한다.
‘법적인 경로를 생략하고, 이 방에서 나가지 않고, 최대한 단기간에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법···.’
‘주식···?’
하지만 오늘날의 주식은 가진 자들의 놀음판이다. 그들은 막대한 자본, 자신만의 팀, 주식 전용 인공지능의 보조를 받으며 주식시장에서 돈의 전쟁을 벌인다.
‘트랜센던서를 최고의 주식 인공지능으로 만들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걸린다. 어중간한 수준으로는 100크레트도 벌지 못할 것이다. 인공지능이 주식시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데이터와 천문학적인 연산능력이 필요하다.
‘···내 계좌의 돈을 빼 올까.’
온라인 계좌에는 5800만 크레트가 있다. 집과 자동차를 마련하고 얼마 안 남은 돈이지만, 사실 객관적으로 그 정도 금액이면 거금이다. 그 돈이라면 잘 아끼고 투자해서 평생을 먹고살 자신이 있다.
하지만 계좌의 자금 흐름을 화이트홀에 추적당할 가능성이 있다.
‘추적을 피하려면 은행시스템에 침투해야겠지···. 사라진 돈을 더미로 씌우고···.’
불가능하다.
없는 돈을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간 화성 전체가 뒤집힐 것이다. 그리고 은행시스템은 인터넷에서 쉽게 학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은행시스템을 학습하기 위해선 은행시스템에 침투할 수 있는 기술부터 학습해야 한다. 선행 작업도 길고 뒷감당도 안 된다.
로페즈는 반쪽짜리 시야로 모니터를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문득 떠올렸다.
‘가상화폐.’
수학적으로 엮어낸 데이터 묶음에 가치를 매긴 가상의 자본.
화성에서만 해도 매일 수백의 가상화폐가 사라지고 재탄생한다. 사실상 특정 가상화폐의 가치를 ‘작전’ 없이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장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없다면 변수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식으로 곱셈의 수익을 낼 수 있다면, 가상화폐로는 덧셈의 수익을 낼 수 있다.’
리스크 없이 명확한 수익을 낼 방법.
그것은 바로 채굴이다.
당연하게도, 로페즈는 자기 발가락 앞에 있는 컴퓨터 본체를 한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이딴 고물로 채굴했다간 수십 년은 걸리겠지.’
하지만 이것보다 안전한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특별한 계정도 계좌도 없이, 큰 데이터나 긴 선행 작업도 없이, 사실상 추적조차 불가능한 돈을 안전하게 벌 수 있는 방법이라면 역시 가상화폐 채굴뿐이다. 그래서 고민하고 또 고민한 결과, 가까스로 해답이 나왔다.
‘좀비 컴퓨터, 분산 컴퓨팅이다.’
이제부터 그러기 위한 사전 작업을 시작한다. 그의 손가락이 딱딱한 키보드 위를 현란하게 뛰어다녔다.
격리된 세계에서 잠자고 있던 트랜센던서를 온라인으로 전환할 것이다.
「트랜센던서 버전 알파 1.0」
「인터넷에 연결되었습니다.」
경로를 지정한다. 표적 데이터를 지정한다. 키워드를 정해주고 필요한 데이터만 걸러낸다.
착! 착!
그가 엔터를 칠 때마다 트랜센던서는 오류 없이 명령을 잘 받아먹었다.
「학습을 위한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웹브라우저 경로를 확인했습니다.」
「웹브라우저 엔진을 교체했습니다.」
「IPv6를 32회 우회했습니다.」
「악성코드 유형을 학습했습니다.」
「인터넷 방어 시스템을 학습했습니다.」
「네트워크 리피터를 학습했습니다.」
「212건의 공개된 보안기술을 학습했습니다.」
「6건의 공개된 집단연산기술을 학습했습니다.」
「2건의 공개된 경로검색기술을 학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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