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Prolog. 결실을 품고 도주하다 (2) >
***
화이트홀의 비밀연구소는 화성의 수도, 올림푸스 UN이라는 대도시의 지하에 건설되었다. 공사 중인 빌딩의 지하로 이어지는 승강기가 이 연구소의 유일한 출입구다.
그 출입구를 제외하고 나갈 수 있는 길이라면 역시 하수도다.
로페즈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지만 우리가 하수도로 도망칠 수 있다는 것도 이미 상정하고 있겠지.’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다. 아직 하수도가 봉쇄되지 않았기를 바라며 유일한 희망을 붙잡을 수밖에.
“하수도로 빠져나가자.”
서버실 밖에서는 여전히 총성이 울리고 있다. 비명과 절규, 기계가 인간을 살해하는 폭력의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지, 지금요? 지금 나가요···?”
“팀장님, 그냥 투항하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살려줄지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저것들 들어오자마자 총 쏘는 거 안 보여요?”
“살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다른 직원들의 목숨을 총알받이로 삼아서, 그나마 가까운 팀원들이라도 살리고 싶다는 것이 그의 본심이었다.
로페즈는 서버실의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문틈으로 보이는 현장이 참혹하다. 정전으로 암흑이 된 실내를 총구의 불빛이 밝히고, 불빛이 보일 때마다 누군가 무참히 죽어가고 있다.
상대는 휴머노이드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겠다는 발상은 무의미하다. 조금이라도 산 사람이 남아있는 지금, 녀석들의 목표물이 분산되어있을 때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결단은 빠르게 내려야 한다.
로페즈는 즉시 앞장섰다. 떨리는 손으로 서버실의 문을 열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뛰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팀원들과 서버실의 밖에 있던 팀원들도 본능적으로 그를 따라 뛰었다.
드르르르르륵!!!!!
움직임을 포착한 휴머노이드 무리가 총격을 가했다. 그 기계들의 정확한 명중률이 무자비했다. 기민하게 엄폐물의 뒤로 이동하지 못한 팀원들은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목숨이 한 번에 끊기지 못한 팀원들은 울부짖었다.
“끄아아악!!”
“아파···! 아파아아아···!”
“살려주세요! 다, 다리를 맞았어요!!”
로페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뛰었다. 반면에 메리는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3년을 함께한 얼굴들이 피로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만 것이다.
“팀장님···! 조세프가 넘어졌어요···!”
“그래, 넘어졌어!”
버려야 한다.
로페즈는 메리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다른 팀원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이 엄폐물 뒤에 숨어있는 동안, 쓰러진 자들은 목표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메리는 로페즈의 손을 뿌리치고 말았다.
그녀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상황을 부정하려고 작게 가로젓는 고개가 안쓰럽다.
“그냥 두고 가는 거예요···? 저렇게···?”
로페즈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짧게 말했다.
“뛰어···!”
무엇이 옳은 결정인지 논리적으로 설득할 시간 따위 없다. 명령조로 몸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다시 로페즈가 뛰었고, 다른 팀원들도 뛰었다. 배후에서 총탄이 날아든다. 어둠이 드리워진 앞쪽의 시야가 총구의 불빛으로 점멸했다. 누군가 뒤에서 죽는 소리를 냈고, 인체와 바닥이 충돌하는 소리가 계속 뒤쪽에서 들려왔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요동친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빠르게 달려본 적이 없었다. 살면서 그 어떤 순간보다도 이렇게까지 필사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쾅!
지하로 향하는 문을 거칠게 열었다.
퉁퉁퉁퉁퉁!
그들은 철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들의 뒤를 휴머노이드가 쫓았다.
“으아악!”
가장 뒤에 있던 팀원이 계단을 굴렀다. 근처의 팀원들이 그의 손을 붙잡아 올렸지만,
“아윽···!”
그의 발목이 비스듬히 꺾여있었다.
캉! 캉! 캉!
휴머노이드가 내는 인공의 발걸음 소리다. 저것들이 위에서 엄청난 속도로 내려오고 있다.
가장 앞에 있던 로페즈가 강압적으로 소리쳤다.
“뛰라고!!!”
멈칫했던 팀원들이 다시 움직였다. 정든 동료가 곧 죽을 위기지만, 너무 무서웠다. 누구든지 일단은 살고 싶었다. 그런 상황에 로페즈 팀장의 명령은 앞뒤 따질 것 없이 절대적이다.
“미안합니다···.”
“그러지 마···!”
“빨리, 빨리 가야 해···.”
“같이 가, 같이 가자고 제발!!!”
그들은 낙오된 팀원의 손을 뿌리쳤다.
허공을 향해 뻗어있는 그의 손이 계단의 난간을 붙잡았다. 억지로 일어나려 하지만 균형을 잡을 수가 없다.
그런 와중에도 메리는 자신의 생존보다 정이 우선이었는지 망설였다.
“메리···. 제발, 제발 도와줘···.”
이미 다른 팀원들은 한 층 아래로 내려간 참이다.
“나, 나는 연구원이 되려고 청춘을 다 바쳤어···. 근데 이렇게, 여, 여기서 죽으면···. 너무 하잖아. 안 그래? 메리···.”
메리는 마지못해 몇 계단을 올라 그에게 손을 뻗었고,
쿵!!!!
그의 뒤로 휴머노이드가 착지했다.
“···.”
녀석이 계단의 난간을 뛰어넘은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는 눈동자에 붉은 경고등을 띄우고 있다. 그야말로 살인병기다.
“메리···. 미, 미안···. 내가 붙잡아서···.”
메리는 휴머노이드의 눈동자 뒤에서 화면을 보고 있을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우리한테 왜 이러시는···!”
드르르르르르륵!!!!
인공지능을 개발하던 그들은 인공지능에 의해 세상 속에서 지워졌다. 기계는 그들을 살해했으며, 세간 사람들은 이를 실종이라고 설명했다.
***
연이은 충격에 다리 관절이 어긋날 것 같다. 계단을 뛰어내려온 끝에 하수도로 이어지는 일직선의 통로까지 도달했다.
하수도로 이어지는 새까만 통로가 야수의 목구멍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통로가, 더 깊은 지하로 이어지는 사다리가 유일한 탈출구였다.
“흑···. 흑···.”
한 팀원은 아까부터 휴대전화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다고 이미 꺼진 휴대전화가 다시 켜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전자기펄스라도 터뜨린 걸까요? 요즘 시대에 정전, 휴대전화까지 안 되고···.”
“우리를 이 시설에 묻어버리려는 속셈이에요···!”
로페즈는 아무 말 없이 사다리를 내려갔다. 급박한 상황에 말보다 행동이 우선이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팀원은 로페즈를 포함해 네 명이다.
사다리를 내려왔다. 그들은 마침내 하수도의 작은 철문을 열었다. 깊은 지하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가는 통로가 전부 새까만 구멍처럼 보인다. 코를 찌르는 화학약품 냄새가 기관지를 박박 씻어서 녹여버리는 것 같다. 터널처럼 뚫린 통로 양쪽으로 이어진 길 가운데에 오수가 흐르고 있다.
“맞네. 전자기펄스 비스무리 한 거 터뜨렸네.”
“지하여도 도심 한복판인데 그런 걸 썼을까요?”
“그러니까 전자기펄스 비스무리 한 거라는 말씀이죠.”
예리한 눈매의 팀원이 화학 처리된 오수 위를 가리켰다. 항시 하수도를 점검하는 거미 같은 드론이 오류를 나타내는 경고등을 깜박이며 오수 위를 부유하고 있던 것이다. 휴머노이드를 제외하고는 이 지하에 멀쩡한 기계가 하나도 없는 듯하다.
로페즈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작은 메모리 칩이 만져진다.
‘회로가 망가졌거나 데이터가 소실됐으면 어쩌지···.’
불행 중 다행히도 그건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전자기펄스라···. 좀 특수한 기술을 썼겠네요. 트랜센던서가 고장 날 위험도 있었을 테니까···.”
“빌어먹을···. 진짜 쓰레기 같은 놈들···.”
“어디로 나가죠? 나가서는 어떡하고요?”
“경찰에 신고합시다.”
“경찰이 말을 들어줄까요? 그래도 대기업 화이트홀인데···. 윗선으로 압력이 들어가면···.”
“쉿.”
침묵을 유지하며 하수도를 나아가던 중, 금속과 콘크리트가 맞닿는 살벌한 울림이 모퉁이에서 들려왔다. 정말 어렴풋이 작게 들렸지만, 극도의 긴장감 속에 청각은 극대화되었다.
그것은 분명 기계적인 관절이 움직이며 규칙적으로 걷는 소리였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온통 어두워서 옆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너무 조용해서 심장 소리가 새어나갈 것 같다. 침을 삼키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점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얼어붙었던 다리가 움직인다. 가장 앞에 있던 로페즈가 뒷걸음질 치자, 하나둘씩 발소리를 죽여 물러났다.
“······.”
구슬처럼 맺힌 식은땀이 턱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적막이 깨졌다.
키잉! 키잉! 키잉!
살인병기들이 명확하게 이쪽으로 오는 소리. 그것도 달려오는 소리. 로페즈와 연구팀은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이윽고 모퉁이에서 휴머노이드 두 기가 얼굴을 내비쳤다.
드르르르륵!!!!
그들의 등으로 총격이 쇄도했다. 한 방향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통로 속에 엄폐물은 없다. 총격의 사선으로 도망칠 공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