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97화 (완결) (197/1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97회 <완결>

의심의 눈초리로 자기를 째려보는 김용호를 김연숙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데?”

“누나, 설마 다른 생각으로 그려달라는 건 아니지? 예를 들어 차액 남기고 판다든지....”

흠칫 한 김연숙이 즉시 빽 소리 질렀다.

“야, 너 술 마셨냐? 왜 정신 나간 소리 하고 그래?”

“어이쿠, 귀청 떨어지겠네. 아니면 됐지 왜 소릴 지르고 그러슈? 그리고 나 술 안 마셨어.”

“자, 아버님 오실 때 됐다. 그만들 하고 모두 밖에 나가보자.”

“그럽시다.”

실내 모인 김주하의 일가친척이 김용극을 필두로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정원으로 나온 강수가 김용극을 따라 정문으로 나가는 김주형, 김주광 형제를 불렀다.

“주형아, 주광아. 나 좀 보자.”

“예? 왜요?”

“초상화 그리려면 사진이 필요해서 몇 컷 찍으려고.”

“네.”

“어디가 좋을까? 정원이 워낙 아기자기해서 어디서 찍든 작품이 나오겠다. 저쪽 화단 앞에 서봐라.”

주위를 둘러본 강수가 가리킨 곳에 두 형제가 서서 포즈를 취했다.

찰깍! 찰깍! 찰깍!

강수가 화단을 배경으로 삐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주형과 주눅이 들어 보이는 듯한 김주광, 두 형제의 사진을 몇 컷 찍었다.

“됐다. 이제 가도 된다.”

얼굴은 앳되지만 175센티가 넘는 신장의 김주형이 강수에게 주뼛주뼛 다가왔다.

“저기, 사촌 매형 되실 아저씨. 뭐 좀 물어봐도 됩니까?”

“응? 물론이지. 내가 아는 건 뭐든지 얘기해주마.”

“고맙습니다. 사실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아저씨가 너무 유명해서 조금 알아봤거든요.”

“어? 그랬냐? 하하. 내가 대단한 유명인사는 아닌데 이거 쑥스럽군.”

“아니에요. 지금 아저씨가 얼마나 유명한데요. 아저씨가 화가로 본격적인 활동은 재작년부터 하셨잖아요. 그전에는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림동화책을 냈고요.”

“음, 그랬지.”

“아저씨에 관한 기사를 검색해보고 아저씨처럼 순식간에 성공하는 사람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충격 먹었어요.”

김주형이 눈빛을 반짝이며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거실에서 아빠가 말했지만, 노력하면 정말 아저씨같이 성공할 수 있는 건가요? 아저씨처럼 노력해서 성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 상식으로 우리나라가 노력한다고 성공하는 사회는 아닌 것 같거든요. 한데 툭하면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 아빠 말이 너무 짜증 나요.”

“그건....”

강수가 김주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질문이 아니었다.

성공!

현대를 사는 사람은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사전적 의미의 성공은 ‘목적하는 바를 달성하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는 원론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성공의 의미는 경제적인 부를 이룬 것을 말한다. 부차적으로 자기가 종사하는 분야에서 정점에 섰을 때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기가 종사하는 분야에서 정점에 올랐을 때 경제적인 부도 따라온다.

성공.

강수도 성공이라는 단어 앞에서 여러 번 좌절을 겪었다. 화가로 성공하는 일은 요원하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학부 시절, 집안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알바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제는 재능의 부재와 성공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려 전업화가를 포기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 방향을 틀었다. 그 뒤로는 생활에 매몰되어 성공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김주형의 던진 질문 때문에 성공이라는 단어를 되짚어보게 되었다.

‘난 성공했나?’

스스로 성공했는지 물어보았다.

‘음, 누구나 화가로서 성공했다고 하겠지? 하지만....’

자기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예술가와 비교하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는 그들의 작품은 수백억 원씩 한다.

세계의 최고 작가로 군림하고 있는 그 작가군에 강수가 도달할지는 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강수가 입을 열었다.

“주형아, 내가 대답하기에 앞서 한 가지 물어보자. 성공에 관해 물었는데 너는 성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그야 아저씨처럼 자기가 일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돈을 많이 버는 것 아닌가요?”

“너는 내가 성공했다고 보니?”

김주형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즉각 대답했다.

“그럼요. 일러스트레이터에서 화가로 전업해서 단 2년 만에 한국 최고의 화가가 됐잖아요. 저번 달에 홍콩 경매에서는 ‘눈물’이 18억 2,000만 원에 낙찰됐고요. 엄청나게 성공한 거죠.”

“하지만 크리스티 홍콩경매에서 내 작품보다 더 비싸게 낙찰된 작품도 많았거든. 가장 비싸게 낙찰된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르 마랭’이라는 제목의 유화 작품으로 약 790억 원이지. 데이비드 호크니의 200호짜리 작품은 490억 원에 낙찰됐고.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추상화는 200억, 조안 미첼의 작품 시르티스는 90억, 이 외에도 카우스, 조지 콘도 등의 작품도 수십억 원의 성적을 거두었지. 쿠사마 야요이 작품도 34억에 낙찰됐고. 루이스 부르주아의 조각은 95억 원에 낙찰됐어. 그들과 비교하면 내 그림의 낙찰가는 초라한 금액이라고 할 수 있지. 난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은데 과연 내가 성공한 걸까?”

김주형이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떴다.

“피, 피카소나 데이비드 호크니 같은 사람하고 비교하면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건 좀 이상한데요. 그렇게 따지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강수가 씨익 웃었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성공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 아까 네가 얘기한 수준만 해도 죽도록 노력한들 이루기 쉽지 않을 거다.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성공이라는 목표를 다르게 잡으면 조금은 쉽게 성공을 쟁취할 수 있지.”

“어떻게요? 기준을 낮게 잡으라는 건가요?”

“비슷해. 갑자기 멕시코 어부 이야기가 떠오르는군. 그 얘기 아니?”

“모르는데요.”

“몇 년 전에 인터넷에서 읽었던 글인데 공감했던 게 있어서 얘기해 줄 테니 너도 그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해봐라.”

강수가 미국인 경제학자와 멕시코 어부가 만나서 나눈 대화를 간략하게 얘기해주었다.

멕시코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 아마도 휴가를 온 듯한 미국인과 그 마을 사람인 멕시코 어부 한 명이 만났다.

멕시코 어부는 낚시하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미국인은 어부를 깨웠다.

“너 지금 물고기 잡았어! 어서 낚아!”

그리고 어부가 잡은 물고기들을 보며 미국인이 물었다.

“많이 잡았군. 이만큼 잡는 데 얼마나 걸렸소?”

“세 시간 걸렸어.”라고 어부가 말했다.

“낚시하는 시간을 더 늘려서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지 않아?”

“지금 잡은 걸로도 우리 가족이 먹고사는 것은 충분해. 오히려 남아.”

“그러면 남은 시간에는 뭘 해?”

“늦잠도 자고 낚시도 좀 하고 아이들이랑 같이 놀고 와이프랑 낮잠도 자. 친구들이랑 만나서 놀고, 저녁에는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부르지.”라고 했더니 미국인이 말했다.

“잠깐만! 나 하버드 MBA거든? 내가 너 돈 더 잘 벌게 해줄 수 있어!”

그리고 돈 버는 방법을 늘어놓았다.

“일단 낚시에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돈을 많이 벌어! 그러면 너의 이 작은 보트를... 큰 배로 바꿀 수가 있단 말이지! 그러면 물고기를 대량으로 잡을 수가 있지. 그럼 결국 너는 너의 어업 회사를 차리게 될 거고. 너는 작은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지. 멕시코 시티로 이사갔다가 뉴욕으로 갈 수도 있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어부가 물었다.

“그럼 그 모든 게 얼마 정도 걸려?”

“15년에서 20년이면 충분해!”

“그런 다음에는 뭘 해?

“주식 상장하고... 성공해서 백만장자가 되는 거지!”

“백만장자.... 그렇게 번 돈으로 뭘 하면 되는데?”

미국인은 이렇게 얘기한다.

“은퇴한 후에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작은 마을에 가서 늦잠도 자고 아이들이랑 놀고 낚시도 좀 하지. 와이프랑 낮잠도 자고 친구들이랑 만나서 놀고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그럴 수 있지.”

멕시코 어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잖아!”

미국인과 멕시코 어부 이야기를 들은 김주형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난 어부가 아닌걸요.”

김주형의 엉뚱한 말에 강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넌 어부가 아니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 아니니?”

“음... 두 사람을 통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전 그렇게 와 닿지 않는데요?”

사실 아무리 그럴듯한 단어와 이야기로 포장해도 현대사회에서 돈을 떠나 성공을 논할 수 없다.

“좋아. 멕시코 어부 이야기의 의미를 강요할 수는 없지. 하지만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성공의 유일한 목표일 순 없어. 나도 한국 최고의 화가가 되겠다고 목표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거든.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을 뿐인데 지금의 내가 된 것뿐이야.”

뭔가 느낀 것이 있는지 김주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만 더 하마. 성공에 대한 네 생각을 조금 바꿨으면 좋겠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조금씩 성취를 이뤄나가면 성공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라도 실패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성공하지 못했다고 절망하지 말 것.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 동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것부터 엄청난 성공이고 축복이라고 여겨도 될 거야.”

“이 세상에 동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것부터 엄청난 성공이고 축복이라고요?”

김주형이 강수가 한 말을 작게 되뇄다.

빵빵!

이때 대문 밖에서 클랙슨이 울렸다.

강수와 김주형이 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 오셨나 봐요.”

“우리도 밖으로 나가볼까?”

“네.”

강수와 김주형이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달려갔다. 대문 앞에 도착한 검은 색 세단의 뒷문이 열리고 김대풍이 내렸다. 아이들이 달려가 김대풍의 손을 잡거나 품에 안겼다.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안녕.”

“허허. 내 새끼들. 안 본 사이에 훌쩍 컸구나.”

김대풍의 두 아들과 딸, 세 명도 앞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아버지, 잘 다녀오셨어요?”

“무사히 귀국하셔서 다행입니다.”

“아버님, 출국하기 전보다 더 건강해 보이시네요. 혈색이 좋으세요.”

“허허. 그렇게 보이냐? 멋진 세상을 둘러보았더니 나도 한 5년은 젊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너희들도 헛짓거리하지 말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 보아라. 내가 왜 이 좁은 나라에서 평생을 살았는지 후회막급이더라.”

김주익, 김주하, 강수도 김대풍에게 인사했다.

“할아버지, 어서 오세요.”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허허, 역시 우리 손녀사위는 언제 봐도 듬직하구나.”

강수의 어깨를 양 손으로 부여잡은 김대풍이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나는 복 많은 늙은이야. 우리나라 최고 화가가 손녀사위 됐으니 말이다. 아마도 말년 운이 있나보다.”

“과찬이십니다.”

“빈말이 아니야. 자네 나이에 한국 최고 화가가 된 사람이 어디 있으며, 그동안 한눈 안 팔고 진심으로 주하만을 사랑하지 않았는가? 죽기 전에 자네 같이 훌륭한 손녀사위를 보게 되어서 이제 여한이 없어. 허허.”

김대풍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김용극과 김용호, 김연숙이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흡족한 얼굴의 김대풍이 강수와 김주하의 손을 잡았다.

“허허. 이렇게 둘이 같이 서 있으니 선남선녀가 따로 없구나. 아, 참. 내가 해외에 나가 있느라 신경 쓰지 못했는데 어떻게 결혼식 준비는 차질없이 준비하고 있느냐?”

김대풍은 간소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지금 그 사실을 알면 소동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김주하가 활짝 미소 지으며 얼른 대답했다.

“그럼요. 준비는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중에 따로 말씀드릴 테니까 길에 서 있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응? 오냐, 들어가자.”

김대풍은 자식과 손주에게 둘러싸여 청석이 깔린 정원을 지나 본채로 들어갔다.

이날 강수는 김대풍을 비롯해 모든 가족에게 환대받은 것은 물론이고, 아이들은 선망 눈으로 강수를 보았다. 또한 작년에 강수를 무시했던 김연숙마저 강수를 칭찬하는 데 있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강수는 이날, 김대풍 귀국 환영회에서 주하의 배필로서 당당하게 인정받았다.

김대풍 저택에서 나온 강수는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며 드디어 마법 반지를 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일 주하를 만나 마법 반지를 선물해야겠어. 하지만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아직 알리지 말아야지.’

주하와는 지금의 관계가 좋았다. 마법사라는 자기가 가진 또 하나의 신분을 주하가 알면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로 인한 변화가 싫었다. 마법을 펼쳐야 할 피치 못할 순간이 닥치지 않는 이상 화가 이강수로 사는 것이 옳았다.

실드마법이 인챈트 된 반지의 내력과 스토리는 구상해 놓았다. 주세 유럽에 기반한 그럴듯한 이야기라 주하 성격상 믿을 가능성이 컸고, 믿지 않아도 실제로 마법이 실현되는 현상을 보면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법반지를 받고 깜짝 놀라는 주하의 모습만 떠올려도 웃음이 나왔다.

*

다음날 오후.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솟아있는 서울 시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남산 공원의 한 곳.

선남선녀라고 해도 좋을 두 남녀가 바위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름 아닌 강수와 주하였다.

강수가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리 뒷골목 골동품점에서 산 도자기에서 이 마법 반지가 굴러 나올 줄은 몰랐어. 책상에서 떨어져 도자기가 깨지지 않았으면 이 마법반지는 영원히 도자기 안에서 잠들어 있었을 거야.”

김주하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고개를 꺄웃했다.

“무슨 이유로 도자기 안에 이 반지를 숨겨놓았을까요?”

“과거로 돌아가 보지 않은 이상 도자기 안에 반지를 숨겨놓은 사연을 누가 알 수 있겠어?”

“그러게 말이에요. 반지에 새겨진 문양이 특이해요. 처음 보는 문양인데 옛날에 이렇게 정교한 문양을 새겼다는 게 신기해요. 이런 정교한 문양을 중세 유럽에서 어떻게 새길 수 있었을까요?”

김주하가 강수가 준 반지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강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골동품상 주인이 중세 유럽 물건이라고 얘기했으니까 반지도 그때 제조했겠지? 이런 걸 흔히 얘기하는 아이템이라고 하는 거야.”

“피-. 오빠, 아이템은 게임에서 나오는 용어지 실제로 그런 물건이 어딨어요?”

“여기 있잖아. 못 믿겠다는 거야?”

“믿고 안 믿고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이 반지가 게임에서나 나오는 아이템이라고 하니까 그런 거죠. 문양만 뛰어나지 그냥 반지인데 어떻게 요 반지에서 실드마법이 펼쳐진단 말이에요?”

“마법어를 외우면 반지에서 실드가 나와 몸을 감싸서 보호해준다니까? 그 문양을 봐. 주하 말대로 중세 유럽 사람이 그런 미세하고 정교한 문양을 새길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마법으로 새긴 게 분명해.”

주하가 미간을 살포시 좁히면서 문양을 살피며 말했다.

“정말 문양만 보면 옛날에 새긴 문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교해요. 아, 맞아. 누가 장난치려고 도자기 안에 숨겨 놓은 거 아녜요? 그 사람이 죽고 나서 그저 그런 도자기라서 골동품 가게로 흘러든 거죠.”

“어? 내 말을 믿지 않네. 직접 보여줘야 믿겠구나?”

“네. 어디 마법을 보여주세요. 자요.”

주하가 반지를 내민 반지를 받은 강수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반지에서 실드마법이 펼쳐진다는 말을 누가 믿을까?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실드마법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남산 공원, 사람 왕래가 없고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 볼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해서 데려왔다.

강수는 일부러 마법 시범을 보여주기 위해 주하의 질문을 유도했고, 드디어 주하의 입에서 마법을 보여 달라는 말이 나왔다.

강수는 반지를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우고 폼을 잡고 집중하는 듯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마법어를 외웠다.

“실드.”

투명한 실드가 강수의 몸을 감쌌다. 하지만 김주하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이상한 현상도 보이지 않았다.

김주하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멀뚱 강수를 바라보았다.

“됐어.”

“네? 뭐가요?”

“실드마법이 내 몸 주위에 펼쳐졌거든.”

강수가 큼지막한 돌을 하나 주워서 주하에게 건네주었다.

“이 돌로 손등을 내리쳐봐. 실드에 막혀서 내 손은 티끌만한 상처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

강수가 손을 주하 앞으로 내밀었다.

“오빠!”

주하가 소리를 빽 질렀다.

“이 돌로 어떻게 오빠 손을 쳐요? 그러다 잘못돼서 다치면 어쩌려고요? 싫어요.”

“실드마법이 몸을 보호해줘서 괜찮다니까 그러네. 못 치겠으면 내가 직접 보여주지.”

“네?”

주하가 말릴 틈도 없이 강수가 큼지막한 돌로 자기 왼손을 내리쳤다.

퍽!

“꺅! 오빠!”

진짜로 돌로 자기 손을 칠지 몰랐던 주하가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 주하야. 손은 멀쩡해.”

강수가 왼손을 들어 주하 앞에 내밀었다.

놀란 얼굴로 강수의 손을 잡은 주하가 흠칫했다. 실드에 막혀 강수의 손이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강수의 손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쥐려고 해도 쥐어지지 않았다.

“어머, 오빠 손이 잡히지 않아요? 무슨 일이죠?”

김주하의 손이 강수 손 1센티 위에서 멈춰 있었다.

“에헴, 이제 믿을 수 있겠지?”

손이 잡히지 않자 강수의 몸 여기저기 만져본 주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아무리 더듬어도 실드에 막혀 강수의 몸을 만질 수 없었다.

“어머나! 정말이네. 신기해라.”

실드마법을 해제한 강수가 새끼손가락에서 반지를 빼 주하의 오른손 무명지에 끼워주었다.

“이걸 항상 끼고 다녀. 실드마법을 펼칠 수 있는 마법어를 가르쳐 줄 테니까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에 마주치면 실드마법을 캐스팅해. 실드가 몸을 보호해 줄 거야.”

강수가 끼워준 마법반지를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만지작거리던 주하가 입을 열었다.

“오빠, 이건 정말 귀한 거잖아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물인데 오빠가 끼워야 하지 않아요?”

“무슨 소리. 나는 남자라고. 아무리 커다란 위험이 닥쳐도 내 한 몸 건사할 수 있어. 당연히 주하가 끼워야지.”

“오빠....”

김주하가 감격에 겨운 눈으로 강수를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일지도 모를 귀중한 마법반지를 자기에게 주었다.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과 격정이 전신에서 휘몰아쳤다.

주하가 와락 강수의 품에 안겼다.

강수는 나긋나긋한 주하의 육신을 힘껏 안았다.

“아-”

주하의 입에서 환희에 가득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깊고 깊은 입맞춤은 둘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결합시켰다.

눈을 감은 주하는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강수의 육신으로 스며드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기 육신이 강수의 몸에 완벽하게 합체했다고 느꼈다. 강수와 한 몸이 된 주하는 극도의 쾌락에 휩싸여 하늘을 둥둥 떠다니며 유영했다.

주하는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다.

두 사람을 방해하는 것은 없었다. 파란 하늘은 몇 점의 구름이 둥실 떠다녔고, 간혹 새들이 요란하게 울었다. 한 줄기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시샘했고, 둘의 머리카락을 흩뜨리고 지나갈 뿐이었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주하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부드럽고 황홀한 감각이 서서히 물러가고 그 자리를 살과 뼈로 된 육신이 채웠다. 온몸이 제대로 돌아온 것을 느낀 주하가 강수의 품에서 눈을 떴다. 한없는 애정을 품고 있는 강수의 신비로운 눈과 마주쳤다. 문득 강원도 해변에서 강수를 만나 지냈던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강수의 신비로운 눈동자 속에서 변치 않는 강수의 마음을 확인한 주하는 괜스레 눈물이 차올랐다.

“헤헷.”

주하는 수줍어하며 강수 품에 홍조가 드리운 얼굴을 묻었다.

“주하야, 왜 눈물을 흘려?”

주하가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흐응, 눈물 아니에요.”

“어? 그럼 눈에서 나오는 이 축축한 건 뭐야?”

“몰라요. 너무 행복해서 나오는 내 마음 한 조각이라고요.”

“계속 행복했다간 큰일 나겠는걸. 그러다 주하 마음이 다 녹아 없어지면 어쩌려고?”

“히히. 이렇게 영원히 오빠랑 함께할 수만 있으면 내 마음 다 녹아 없어져도 괜찮아요.”

강수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아니. 주하와 영원히 함께 있을 테니까 마음이 녹아 없어지면 절대 안 돼. 알았어?”

“알았어요. 오빠,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다시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고, 입술이 포개졌다.

파란 하늘에서 흰 구름이 두둥실 흘러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따스한 햇볕이 두 사람을 포근히 비추었다.

남산 푸르른 신록의 저 아래 삐죽삐죽 솟은 고층빌딩이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났다.

<완결>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셨는지요?

어느새 연휴 마지막 날이군요.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돈을 벌기 위해 회사에 다니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하더군요.

회사에 시간을 저당잡히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번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인데 전적으로 자기의 통제 속에서 산다면 읽었던 책에서 주장했던 최상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살려면 금수저거나, 강수처럼은 아니어도 작품 하나로 수백, 수천만 원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겠네요.

하지만 우리 사회는 금수저도, 능력 있는 사람도 더 많은 돈을 버는데 시간을 쓰고 있죠.

남은 생을 오직 돈 버는데 시간을 써야 하는 대부분의 현대인들.

사는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돈이면 충분한데 말이죠. 아닌가요?

이번 회로 그림 그리는 마법사를 완결했습니다.

강수의 활약을 더 원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할 뿐입니다.

제가 이 소설을 쓰면서 각종 자료를 찾아보고 느꼈는데 예술가들의 삶은 다이나믹하고, 비극적이기도 하죠.

커다란 용광로에서 거대한 에너지가 들끓고, 분출하고, 침잠하는 역동적인 세상이기도 합니다. 평범한 예술가들도 있지만, 기묘하고 가슴 저리는 끝없는 이야기가 생성되고 있는 오묘한 세상이기도 합니다.

제 능력 부족으로 그런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했고, 그 점이 가장 아쉽습니다.

공지에서 밝혔듯 애초에 컨셉이 달라서 한계에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처음부터 구상을 예술로 잡았으면 좀 나은 이야기를 쓸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점도 좀 아쉽습니다.

등장한 캐릭터들의 삶을 한 명, 한 명 깊게 들여다봤으면 정말 긴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제 능력 부족이고, 첫 단추를 잘못 꿴 불찰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모든 독자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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