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96회
김주하의 그림값 정하자는 말에 김연숙이 맥이 빠진 듯 미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 그래? 뭐, 그림값을 정하긴 해야지. 네 아빠에게 물어보니까 향유고래의 꿈을 1억 주고 그렸다더라. 네가 매니저니까 알고 있겠네?”
“물론 알죠. 1억이 아니라 1억 2,000만 원이었어요.”
“으응, 비슷하네.”
문득 김연숙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저기, 주하야. 나한테도 그 가격만 받으면 안 되겠니?”
“네?”
1억 2,000에 500호짜리 그림을 그려달라는 말에 김주하가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급기야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 고모. 그건 너무 하잖아요. 3주 전에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강수오빠 그림 ‘눈물’이 18억 2천만 원에 낙찰된 뉴스 안 들어봤어요?”
김연숙이 당황한 얼굴로 얼버무렸다.
“그, 그랬니? 내가 뉴스를 잘 안 봐서....”
“뉴스를 못 봤다니까 제가 정확하게 알려드릴게요.”
샐쭉한 표정의 김연숙이 팔을 저었다.
“아니 그럴 것까진 없고, 그림값은 얼마면 되겠니?”
“아빠 빌딩에 ‘향유고래의 꿈’ 그릴 때는 오빠 그림 호당 가격이 30만 원 하던 때였거든요. 그래서 그림값은 2억 4,000만 원인데 갤러리를 통하지 않고 주문받은 그림이라 갤러리 몫 50% 제하고 1억 2,000만 원에 그렸어요. 고모, 지금 오빠 그림 호당 가격이 얼마인 줄 아세요?”
뭘 떠올렸는지 흠칫 몸을 움츠린 김연숙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호당 가격이 얼마 하는데?”
“작년 12월에 연 세 번째 개인전 때는 호당 600만 원에 책정했고요, 얼마 전에 있었던 홍콩 경매 낙찰가를 계산하면 제일 싼 작품이 카카오나무의 요정들인데 호당 1,400만 원쯤 해요.”
“그, 그래?”
사실 김연숙이 강수의 그림값을 몰라서 모른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 관심과는 무관하게 홍콩 경매에서 18억 원에 낙찰된 이강수 그림에 관해 쏟아져 나온 기사를 자연스럽게 접했다. 이강수 기사를 접한 후, 너무 궁금해 이강수 관련 글을 검색해 볼 수밖에 없었다. 검색 결과 이강수 그림 가격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미친 듯이 뛰었다.
작년에 처음 봤을 때는 흔하디흔한 초보화가의 한 명일 뿐이었다. 조카와 사귀는 새파랗게 젊은 이강수가 순식간에 한국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람 앞일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강수 그림 한 점 안 산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기는 주하의 고모가 아닌가? 얘기만 잘하면 이강수 그림을 저렴하게 얻을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김연숙은 오빠 김용극의 퍼스트타워를 찾아가 로비 벽에 걸린 그림도 보고 김용극을 만나 향유고래의 꿈을 로비에 걸어 놓게 된 사연을 듣고, 오늘이 절호의 기회다 싶어 부푼 마음으로 달려왔다. 한데 자기편이 되어야 할 조카가 이강수와 결혼한답시고 옆에서 초를 치고 있으니 얄미워 미칠 지경이었다.
김연숙은 반발해서 김주하의 심기를 거슬리기보다는 화를 참고 김주하를 살살 구슬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저기, 주하야. 이 서방 세 번째 개인전 때 호당 600만 원이었으니까 내 그림도 그 가격으로 치면 단순히 계산해도 30억이네? 그런데 네 아빠처럼 갤러리 몫 50%를 빼면 15억이고? 맞니?”
“그렇게 계산하면 맞아요.”
김주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런데 주하야, 너도 잘 알겠지만 내가 요즘 어렵거든. 빌딩 공실률도 높고, 은행 이자에 인건비, 시설유지비 등등 온갖 비용을 다 제하고 나면 남는 돈이 얼마 되지 않아. 고모가 어려워서 그러니까 좀 싸게 안 될까?”
김연숙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 주하가 고민하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초조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김연숙을 힐끔 살피고 강수에게 말했다.
“오빠, 고모가 요즘 어렵다는데 그림값을 조금 낮춰도 될까요?”
강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주하가 매니저인데 주하가 결정하면 나야 그대로 따라야지.”
“호호, 알았어요. 고마워요, 오빠.”
김주하가 강수에게 싱긋 미소를 지은 후 김연숙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모, 원래는 홍콩 낙찰가를 반영해서 최소 호당 1,000만 원은 받아야 하거든요. 500호면 50억이고, 갤러리 몫 빼도 25억이지만, 고모 말대로 15억을 기준으로 할게요.”
“으응, 그, 그래.”
김주하가 50억이 아니라 자기가 얘기한 15억을 기준으로 그림값을 낮춘다고 했기 때문에 김연숙은 내심 크게 안도하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수오빠가 그림값을 조금 낮춰도 좋다고 하니까 특별히 10억 원만 받도록 할게요. 그 이하는 안 돼요. 됐죠?”
김주하가 새겨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강수오빠’란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 강수의 호의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김연숙은 계산에 밝다. 미래 가치는 차치하고 이강수 그림을 현재 가치로만 따져도 500호면 최소 20억 원은 넘을 것이다. 어쩌면 조카 말대로 50억 원이 될지도 모른다.
김연숙의 얼굴이 꽃이 피듯 활짝 펴지며 주하의 손을 잡았다.
“주하야, 고맙다. 네 아빠가 그러는데 자기 빌딩에는 공실이 없대. 그것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입주 문의 전화가 계속 오고 있단다. 네 아빠 말로는 순전히 향유고래의 꿈 때문이라는 거야. 그 그림이 걸리기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거든.”
“고모가 강수오빠 그림 로비에 걸어 놓으려는 게 공실 해소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그래. 공실만 없어도 수익이 많이 늘어나거든.”
“근데 강수오빠 그림 걸어 놓는다고 아빠 빌딩처럼 공실이 없어질까요? 그러다 공실이 줄지 않으면 어떡하려고요? 공실이 준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물론 그건 내 희망 사항이야. 공실이 줄지 안 줄지 어떻게 알겠니? 하여튼 내 빌딩도 네 아빠 빌딩처럼 공실이 줄어들면 좋겠구나.”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강수가 김연숙을 불렀다.
“주하 고모님, 그림 제작에 관련해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뭔가?”
“제가 올해 9월에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입니다. 그래서 8월까지는 전시 작품 하느라 시간이 나지 않거든요. 주하 고모님이 주문한 그림은 8월 이후에 그려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을까요?”
“나야 빨리 그려주면 좋겠는데 자네 일정이 맞춰야지 별수 있나? 그렇게라도 해주게.”
“네. 알겠습니다.”
이때 현관문이 열리고 김용극의 새 가족과 김주익이 들어왔다. 그의 어린 두 아이는 일 년 사이 키가 부쩍 자라 있었다.
거실에 모여 있던 강수와 주하, 김연숙과 조카들이 김용극과 그의 가족을 맞이했다.
“오빠, 어서 와요.”
“큰아버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소하야, 주한아, 안녕.”
“그래, 반갑다. 모두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구나.”
한바탕 인사가 오고간 후, 김용극이 강수에게 다가가 악수하며 강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우리 자랑스러운 예비 사위, 뉴욕에서 전시할 작품은 차질 없이 준비하고 있는가?”
“네, 아버님.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다.”
“뉴욕 전시는 어떤 결과를 낼지 정말 궁금하군. 하여튼 자네 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특이한 구석이 있어.”
“별말씀을요.”
“아니야. 홍콩에서 자네 그림들이 괜히 17억, 18억에 낙찰됐겠는가? 내 빌딩에 걸린 ‘향유고래의 꿈’을 봐도 알 수 있지. 그래서 말인데 언제 시간 나거든 300호 정도 되는 그림 한 점 그려주게나. 로비 엘리베이터 홀 벽에 그림을 하나 더 걸어놓고 싶다네. 어때? 그려줄 수 있지?”
“예. 뉴욕 전시가 끝나면 시간이 있습니다. 뉴욕 전시 끝나고 그리겠습니다.”
“하하. 고맙네. 자네처럼 듬직한 사위를 얻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강수가 멋쩍은 얼굴로 물었다.
“저, 아버님. 엘리베이터 홀에는 어떤 그림을 걸지 생각해보셨는지요?”
“아, 로비에는 바다 속 그림이 있으니까 엘리베이터 홀에는 높은 산 정상에서 대자연을 굽어보는 통쾌한 그림이면 어떨까 싶네.”
“그것도 괜찮겠네요. 높은 산이라면 어떤 산이 좋을까요?
“우리나라 산이야 설악산, 한라산, 지리산, 백두산이 있고, 밖으로 눈을 돌리면 융프라우, 킬리만자로, 에베레스트 같은 산이 있지 않은가? 가만, 에베레스트 산에서 굽어보는 대자연이라.... 상상만 해도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군. 이보게.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 어떤가? 제목은 ‘정상에서’라고 지어도 될 것 같고.”
강수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에베레스트요? 글쎄요....”
에베레스트 산은 당연히 사진으로만 보았다. 푸른 하늘아래 솟아 있는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찍은 사진은 많지만, 정상에서 백설을 인 산봉우리가 끝없이 펼쳐진 산 아래를 찍은 사진은 많지 않다.
문득 강수는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서 아래를 굽어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 광경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전문 산악인도 오르기 어려운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직접 올라가 산 아래 경관을 보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산에 오를 수 없으면 사진과 영상, 상상을 재구성해 작품을 창작할 수밖에 없다.
‘에베레스트라.... 한 번 가봐야 하나?’
강수가 정상까지 올라간 산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마을의 도솔산은 수십 번 올랐지만, 그 외는 대학 때 등산한 설악산, 한라산과 군에서 제대하고 피아골로 올라가 능선을 타고 2박 3일간 종주한 지리산이 전부다. 산 정상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경관은 하나같이 장관이었고, 자연의 웅장함에 마음마저 경건해지곤 했다.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서서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설산의 행렬을 보면 그 기분과 감상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강수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김용극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허허, 강수 군. 꼭 에베레스트 산을 그리지 않아도 된다네. 그냥 해본 말이니까 우리나라 산을 그려도 상관없네.”
“아, 예. 알겠습니다.”
강수는 어떤 산을 그릴지 결정하면 산 정상에 등반해서 스케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강수와 얘기를 마친 김용극이 주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용호가 아직 안 왔구나. 주하야, 용호는 언제 온다느냐?”
“시간 맞춰 온다고 했으니까 11시 전에는 올 거예요.”
“벌써 10분 전인데 언제 오려고. 아버지가 출국할 때도 늦게 와서 혼나더니 오늘도 늦을 건가?”
김연숙이 코웃음을 쳤다.
“흥, 막내는 아버지도 포기했잖아요. 그나마 오빠가 걔 건물 관리해줘서 지금까지 남아 있지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빈털터리 됐겠죠.”
“아니야. 관리는 내가 해주지만 팔아먹으려고 했으면 내도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용호가 지킬 건 지키고 있는 거야.”
김용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관문이 열리고 깔끔한 슈트를 입었지만 뭔가 염세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 사내가 두 소년과 함께 들어왔다.
중년 사내는 김대풍의 둘째 아들 김용호였다. 두 소년은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그의 두 아들, 김주형과 김주광이었다. 김용호는 이혼해 애인과 살고 있었고, 두 아들은 따로 엄마와 지내고 있었다.
김용호는 두 아들이 아버지의 눈에 들어 유산을 조금이라도 챙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집안 행사가 있으면 두 아들을 데려오는 편이었다.
“형님, 누님, 먼저 와 있었군요.”
“그렇지 않아도 네 얘기하고 있었는데 제때 오는구나.”
“제 험담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험담은 무슨. 언제 오나 걱정하고 있었지.”
“그래요?”
김용호는 김대풍이 출국할 때 술 냄새 풍기며 늦게 와서 호되게 경을 쳤다. 그날 김용호는 말 한마디 못 하고 구석에서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김용호가 강수를 일견하더니 대뜸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이강수 군! 아버지가 출국했을 때 봤으니 거의 일 년 만인가?”
“예. 안녕하세요?”
“그때는 추태를 보였지? 오늘은 맨 정신이라네. 얼마 전에 뉴스에도 나오고 그새 유명인사가 되었더군. 늦었지만 축하하네. 아, 결혼식도 미리 축하하네.”
“아, 예. 감사합니다.”
김용호가 뒤돌아 두 아들에게 손짓했다.
“너희도 이리와 인사해라. 너희 사촌 매형 되실 분인데 얼마 전에 그림이 18억에 팔렸다고 뉴스에서 대서특필한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란다. 너희도 열심히 공부하면 사촌 매형처럼 크게 성공할 수 있단다.”
고등학교 1학년인 첫째 김 주형이 피식 실소했다.
“풋,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한다는 보장만 있으면 공부 안 할 애들이 어디 있어요? 아무리 공부해도 뜻대로 안 되는 엿 같은 사회라....”
얼굴을 구긴 김용호가 아들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끊었다.
“주형아,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다니라는 학원은 안 가고 허구한 날 컴퓨터나 붙잡고 게임하는 주제에 그런 말이 나와? 열심히 노력하고 나서 그런 소릴 하면 귀엽게 봐주기라도 하지. 쓸데없는 소리 치우고 인사나 해.”
뭔가 반항적인 눈빛을 흘리고 있는 김주형이 강수 앞으로 다가와 인사했다.
“김주형입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김주광입니다.”
“만나서 반갑다. 이강수다.”
자식을 인사시킨 김용호가 곧바로 자기 용건을 말했다.
“이 군, 화가인 자네에게 결례란 걸 알지만 한 가지 부탁 좀 하세.”
“말씀하십시오.”
“우리 아이들 초상화 좀 그려줄 수 있겠는가? 초상화 정도 그릴 화가야 많지만 우리나라 최고 화가나 다름없는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군.”
“주하 작은아버님 부탁인데 그려드려야죠. 초상화면 15호나 20호 사이즈면 적당한데 혹시 원하는 사이즈가 있습니까?”
“아니야. 자네가 잘 알겠지. 한데 20호면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
“가로 73센티, 세로 60센티 정도 합니다.”
“그 정도면 되겠군.”
“8월까지는 뉴욕 전시 작품 준비하느라 시간이 없고 그 후에 그리도록 하겠습니다.”
“급한 건 아니니까 자네 일정에 맞춰서 그리면 된다네.”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주하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를 비롯해 집안 친척들이 전부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니 강수에게 미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정도는 어쩔 수 없었다. 다음부터 그림 의뢰는 제대로 된 그림값을 받겠다고 다짐했다.
“작은아버지.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으면 그림 가격도 정해야죠?”
“아, 물론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지. 이 군, 얼마면 되겠는가?”
“제가 강수오빠 매니저거든요. 고모한테 그려주는 그림을 호당 이백 받기로 했으니까 작은아버지도 그렇게 받을게요. 20호면 4천씩 8천이요.”
“응? 누나도 그림 부탁했어? 누나는 어떤 그림 부탁한 거야?”
김용호의 질문에 김연숙이 대답했다.
“로비에 걸 그림이야. 내 그림은 500호짜리야.”
“헐, 500호면 형님 빌딩 로비에 걸린 그림만큼이나 크겠군. 가만, 그림값이 10억이네? 이 군 그림값 장난 아닌데 10억이면 너무 싼 거 아냐?”
김용호가 의심의 눈초리로 김연숙을 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