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95회
강수와 함께 복도로 나온 배성제가 스마트폰을 꺼내며 말했다.
“아래 지하 1층 휴게실로 가 있게. 요양사에게 연락하고 금방 내려가겠네.”
“알겠습니다.”
휴게실로 내려간 강수는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뽑아 들고 빈 탁자에 앉았다.
세계 최빈국의 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의 어려운 시절을 헤쳐 온 80세의 대기업 회장 입장에서 자기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여생을 얼마나 누리겠다고 3,000억 원이나 하는 돈을 핏줄이 아닌 타인에게 기부하겠는가?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부자가 아니라 소득 수준이 낮은 사람들의 소액 기부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에 반해 선진국은 소득이 높을수록 기부액이 많고, 거부들은 재산의 사회 환원을 하나의 책임이자 의무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기부 문화는 사회 역사적 발전과 관련이 있다. 짧은 기간 동안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며 고속 성장한 한국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 있어 기부는 선진국보다 인색한 편이다.
서구 사회에서 기부 문화가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 사회의 노력과 대기업 등 부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국가의 제도적 지원 등 삼박자가 잘 어우러진 덕분이다.
미국 역사에서 재벌이 기부를 통해 사회 변혁을 일으킨 것은 재산의 99%를 기부하겠다고 서약한 워런 버핏과 수백억 달러를 기부한 빌 게이츠다. 물론 자본가의 기부 역사는 기부 문화의 개척자라고도 불리는 정치가이자 사업가 벤저민 프랭클린,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와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이 자선사업을 통해 변화시킨 영역은 교육, 문화, 의료 등 광범위하다.
워런 버핏, 빌 게이츠가 이들과 다른 점은 기부 서약 운동을 통해 동시대인들에게 진정한 나눔과 공생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기부와 기부 서약 뒤로 ‘착한 자본가’들이 기부에 동참했고, 2015년 12월 1일, 당시 30대 초반에 불과한 마크 저커버그와 프리실라 챈 부부는 페이스북 주식을 1%만 남기고, 점진적으로 모두 사회에 기부한다고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밝혔다. 실제로 그들 부부는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 재단을 설립해 약속을 실천하고 있다.
음료수 한 캔을 비우고 10분이 흘렀지만, 배성제는 내려오지 않았다.
우웅!
스마트폰이 진동했고, 문자 발송자는 배성제였다.
-갑자기 일이 생겨 내려가지 못했네. 다음에 연락하지.
문자를 확인한 강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배성제는 거짓을 말했고, 아마도 배종태가 기부를 거부했을 것이다.
‘하긴 상속세조차 내지 않으려고 편법 증여가 판치는 한국에서 대기업 회장에게 3,000억 원을 기부하라는 건 헛소리에 불과하겠지.’
애초에 배종태 회장이 기부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지 않았던 만큼 기부하지 않는다고 해서 별 감흥은 없었다. 강수는 계단을 이용해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
4월 9일.
김대풍이 곱게 늙은 여인과 함께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두 사람은 여행용 가방 하나씩 끌고 입국장에서 나왔는데 11개월이나 세계여행을 한 사람들 치고는 소지품이 단출했다.
“드디어 한국에 돌아왔구려.”
김대풍이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을 떠난 지 1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한국에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감회가 새로웠다.
“호호. 얼마 전에 출국한 것 같은데 벌써 1년이 다 돼가요. 시간이 빠르게 지났어요.”
“넓은 세상을 둘러보느라 1년 가까이 흘렀지만 한 5년은 젊어진 것 같소. 아무래도 주하 결혼시키고 날 잡아서 여행을 또 가야겠어.”
“또요?”
“크루즈 세계여행을 한 번 더 하면 또 5년은 젊어지지 않겠소?”
“호호.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거지 여행한다고 정말로 젊어지겠어요?”
“기분이라도 젊어지는 게 어디요? 기분이 젊어지면 몸도 따라서 젊어지지 않겠소?”
“젊은 기분으로 사는 게 낫긴 하겠지만, 세월에 장사 없다고 했어요. 근데 정말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네요?”
“오지 말라고 했으니 나올 리가 없지. 당신하고 입국하는데 마중 나와 봐야 귀찮기만 하고.”
“흥, 그렇죠? 그나저나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키워온 주하가 결혼해서 나가면 섭섭하겠어요?”
“다 컸는데 나갈 때가 됐지 섭섭하긴 뭐가 섭섭해? 신혼집도 용산이라 언제든지 불러서 얼굴 볼 수도 있구먼. 더구나 마음에 드는 놈이 채갔으니 경호원 붙여가며 애써 키운 보람이 있어.”
“호호, 맞아요. 주하가 돈 못 버는 화가랑 사귄다고 했을 때는 주하가 남자를 먹여 살리겠구나 했는데 말이에요. 얼마 전에 18억 원짜리 그림을 그린 화가라며 이강수란 이름이 실검에 오를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예요. 주하가 사람 보는 눈이 있나 봐요.”
“흐흐. 그건 맞아. 실은 주하가 허우대만 멀쩡한 놈한테 빠졌나 싶어서 그 친구를 박대했지. 나 때문에 두 사이가 깨졌으면 주하한테 평생 원망들을 뻔했어.”
“어머, 정말요? 이강수란 아이 딱 봐도 남자답게 잘생기고 얼마 전에는 그림이 18억 원에 낙찰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데 왜 박대했어요?”
김대풍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역시 당신도 이강수를 좋다고 하는군. 당신도 인정하듯이 그 녀석, 여자한테 인기 많게 생겼잖아. 거기에 그림까지 잘 그리지. 그런 놈은 여자가 가만 놔두질 않아. 심지가 곧지 않으면 여자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이 여자 저 여자 정이나 뿌리고 다니지. 그런 놈 만나봐야 주하가 마음고생만 직싸리 할 것 아니야? 주하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그 꼴은 못 보지.”
“그래서 박대했단 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괜찮게 봤지. 한데 이 친구가 생긴 것하곤 다르게 오만하고 건방진 구석이 보이더군. 그때는 기분 상해서 주하 짝으로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 지금 돌이켜보면 자신감에 따른 당당한 면모라고 볼 수 있어. 어쨌든 내가 싫다고 한들 당사자들이 좋다는데 어쩌겠어? 내가 간여할 일이라곤 지켜보는 것뿐이었지.”
“결과적으론 고작 서른 초반에 우리나라 최고 화가가 된 손주사위 보게 되었네요. 어서 가기나 해요.”
건물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대기 중인 대형 택시에 올라탔다.
여행용 가방을 트렁크에 넣은 운전사가 운전석에 앉으며 행선지를 물었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이태원 청화아파트로 갑시다.”
“예, 손님. 청화아파트로 출발합니다.”
김대풍 자택에서 청화아파트는 지척이다. 비록 낡고 오래된 아파트지만 이태원 요지에 자리하고, 평형대가 넓어 무척 비싼 아파트다. 김대풍은 자기보다 20년 넘게 젊은 애인인 여자에게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게 자기 집 바로 옆에 있는 청화아파트 50평대를 사주었다.
택시가 부드럽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김대풍은 손녀에게 줄 결혼 선물로 어떤 것이 적당할지 생각에 잠겼다.
*
다음 날 오전 8시경.
강수는 이른 아침부터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한눈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정장을 입은 강수는 한남동 김대풍 저택으로 출발했다.
오늘은 세계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한 김대풍에게 인사하기 위해 일가 친족이 전부 모인다. 시간에 맞춰 갈 수도 있지만 먼저 가서 어른들을 기다리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에 일찍 집을 나섰다.
김대풍 어르신의 일가 친족은 김대풍 어르신이 출국할 때 만났으니 거의 1년 만에 다시 보는 셈이다. 그때는 이제 막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한 무명화가에 불과했다. 개인전의 호성적과 훤칠한 외모로 호감은 얻었으나 주하에게 얹혀사는 남자로 은근히 무시와 업신여김을 당했다. 물론 강수는 김주하 친척의 깔보는 듯한 시선과 업신여김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모든 가치의 기준을 돈으로 판단하는 주하 친척의 모습을 충분히 이해했다.
질곡의 역사와 기적 같은 경제 발전, 일부 재벌의 거대한 부의 축적, 그 속에서 형성된 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절대적이다. 그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돈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없지만, 강수는 행복의 절대적인 척도는 아니라고 여겼다. 자기 부모님만 보더라도 비록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강원도 시골에서 농사 지으며 소소한 행복을 가꾸며 살아오셨다.
9시쯤 되어서 강수는 한남동 김대풍 저택에 도착했다.
명품 원피스를 입어 아름다운 외모가 눈부시도록 빛나고 있는 김주하가 주차장 입구에서 강수를 맞이했다.
“오빠, 어서 와요.”
“다른 분들은?”
“10시까지 모이기로 한 걸요. 아직 안 왔어요. 들어가요.”
“그래.”
강수와 주하는 초록의 옷을 차려입기 시작한 산뜻한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일 년 만에 맞이하는 집주인을 위해 홍 씨 부부가 얼마나 쓸고 닦았는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와, 오늘따라 거실이 유독 빛이 난다. 근데....”
실내에서 뭔가 달콤한 냄새가 났다.
강수가 코를 벌렁거렸다.
“킁킁, 냄새가 좋은데?”
“후후. 대식구가 모이잖아요. 주방에서 요리 만드느라 바빠요.”
“홍 씨 아주머니 혼자서 요리하시나?”
“아뇨. 만드는 요리가 얼마나 많은데요. 주방 보조 아주머니 한 분 불렀어요.”
“그랬구나. 아침을 대충 때우고 와서 그런지 냄새가 좋으니까 식욕이 당기네.”
“후후. 조금 요기 할래요? 갈비하고 몇 가지 가져올게요.”
강수가 주방으로 가려는 주하를 붙잡았다.
“아냐. 객이 먼저 손댈 순 없지. 이따 같이 먹어야지.”
이런저런 얘기하는 사이 김연숙과 그녀의 세 자녀, 방지영, 방완수, 방완철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강수의 인사에 김연숙이 얼굴을 활짝 펴고 인사를 받았다.
“어머, 반가워. 우리 이 서방.”
김연숙이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는 듯이 강수 앞으로 쪼르르 다가와 강수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작년 5월 처음 만났을 때 얼굴만 잘생긴 무명화가라며 홀대하던 모습을 떠올린 주하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김연숙을 바라보았다.
‘풋, 고모도 웃껴. 냉대할 땐 언제고 이젠 강수 오빠가 대단한 사람인지 알았나 봐? 하긴 뉴스에도 나오고 인터넷 실검에 오르기까지 했는데 그걸 모르면 눈뜬장님이지.’
주하는 고모가 옛날 일은 잊어버린 듯이 강수에게 살갑게 구는 모습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끼며 마음이 뿌듯했다.
김연숙의 모습을 위선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좋고 싫은 자기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점은 인간성이 나쁘지 않다고 볼 수 있었다.
“주하 고모님은 그전보다 건강해 보이시네요. 운동 열심히 하시나 봐요?”
“호호, 어떻게 알았어? 6개월 전부터 하루에 3시간씩 매일 운동하고 있거든. 살도 3키로는 뺐지.”
“몸무게 빼기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시네요.”
옆에서 끼어들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방완수가 강수에게 인사했다.
“엄마, 잠깐만. 아저씨, 안녕하세요?”
“완수구나. 그동안 잘 지냈어?”
“네. 아저씨가 인터넷에서 실검에 오른 거 봤어요. 친구들이 아저씨 보고 18억의 사나이라고 해서 아저씨가 주하 누나랑 결혼할 사이라고 하니까 뻥치지 말라면서 인증샷 가져오면 믿는 대요. 같이 셀카 몇 장 찍어도 돼요?”
“하하. 물론 되지.”
아이 옆에서 방지영이 콧방귀를 뀌며 방완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참나, 오빠, 무슨 셀카야. 폰 이리 줘. 찍어줄 테니까.”
“어, 그럴래?”
“히히. 오빠 찍고 나도 찍어 줘. 친구한테 보여줘야지.”
“그럼, 그럼. 찍어 줄게.”
뭔가 더 할 얘기가 있는지 김연숙이 입이 근지러운 얼굴을 하고 강수와 사진 찍는 딸과 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지영이 몇 컷 찍어주고 방완수에게 자기 폰을 주고 강수와 팔짱 끼고 몇 컷 담았다.
사진 촬영이 끝나자마자 김연숙이 두 아이를 밀치고 강수에게 말을 걸었다.
“이 서방, 내가 묻고 싶은 게 있어. 괜찮지?”
“네, 말씀하세요.”
“주하 아빠 빌딩 퍼스트타워 있잖아. 거기 로비에 걸린 ‘향유고래의 꿈’이란 자네 그림을 봤는데 너무 좋더라. 그 그림을 보니까 우리 이 서방이 보통 화가가 아니라 천재 화가란 걸 알겠더라.”
뜬금없는 극찬에 강수가 가볍게 웃으며 부인했다.
“하하. 아닙니다. 천재라니요.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아닐세. 내가 그림은 잘 모르지만, 향유고래의 꿈은 아무나 그릴 수 없는 그림이란 건 알아. 그 그림을 보는데 갑자기 깊은 바닷속에서 향유고래와 같이 있는 것 같은 환상에 빠졌거든. 그런 그림은 본 적이 없다네. 그래서 말인데....”
김연숙이 강수 앞으로 바싹 다가서며 다시 강수 손을 잡았다.
“그 그림을 내 빌딩 로비에도 그려주면 안 될까? 아니 꼭 그려줬으면 좋겠는데.”
“아, 똑같은 그림을요?”
“그래. 다만 내 빌딩 로비에 맞게 그리려면 크기가 좀 작아야 할 거야. 한 500호 정도면 적당할 걸세.”
“저, 향유고래의 꿈과 똑같은 그림은 제 맘대로 그릴 수가 없는데요.”
“뭐? 왜 그런가?”
“주하 아버님이 그 그림의 소유주이기 때문이죠. 지식재산권과 같은 개념으로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다르게는 그릴 수 있습니다.”
“호호, 그럼 다르게 그리면 되지. 이 서방, 언제쯤 그릴 수 있을까? 나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어.”
팔짱을 끼고 김연숙을 지켜보던 김주하가 생글생글 미소지으며 끼어들었다.
“호호, 고모. 그림 그리는 건 좋은데 그림값부터 정해야 그림을 그리겠죠? 제가 오빠 매니저거든요. 그립값은 저하고 얘기해요.”
떨떠름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주하가 매니저?”
“네. 오빠가 작품 창작하지 무슨 그림을 파는 사람이에요? 오빠 그림을 사려면 본래 선암갤러리 통해서 수수료 주고 사야해요. 한데 고모가 오빠 그림 사고 싶다니까 저랑 얘기해요.”
강수가 속으로 웃으며 주하가 흥정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