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90회
유일글로벌 전무이사 배성제는 유일 그룹 배종태 회장의 혼외자식이다. 비록 회장의 신임을 얻지 못해 연매출 5천억 원 규모의 계열사인 유일글로벌 전무이사로 재직하고 있지만, 그룹 내부거래로 탄탄하게 성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사의 중요한 거래처다.
배성제가 자기를 비합리적인 사람으로 여기면 자사가 유일글로벌에 납품하는 제품에도 영향이 미칠 가능성마저 있었다.
어떻게 할지 잠깐 고민하는 사이 배성제가 비꼬는 듯이 말했다.
“지압으로 허리를 고친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요. 혹시 그 지압사가 신통력이라도 있는 건가요?”
배성제의 부정적인 반응에 흠칫한 박진수는 이강수 얘긴 더 언급할 필요 없다고 판단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하하. 신통력이 있을 리 없죠. 신통력이 있었으면 그 지압사는 벌써 유명인사가 되었겠죠. 전무님 말씀처럼 지압 효과로 일시적으로 호전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허리 상태를 지켜보면서 변화를 체크하고 있거든요. 사실 예전 상태로 돌아갈까 봐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는 MRI 찍어서 정밀검사해 볼 생각입니다.”
“잘 생각했습니다. 지압은 임시방편이니 과학적인 검진으로 근본적인 치료를 하셔야죠.”
“네. 그래야죠.”
두 사람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세컨드샷 날릴 페어웨이에 도착했다.
배성제가 자기 공으로 다가가 티를 꼽고 공을 올려놓았다.
“전무님! 잠깐만요.”
세컨드샷을 준비하는 배성제가 자기를 부르는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내가 스마트폰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그룹 전략기획실장 전화입니다.”
배성제가 재빨리 스마트폰을 건네받았다.
“김 실장, 전화 바꿨네. 무슨 일인가? 뭐야? 아버지가! 음.... 여긴 남양주네. 당장 올라가지.”
스마트폰을 사내에게 건네준 배성제가 박진수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박 상무님, 회사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올라가 봐야 합니다. 게임은 나중에 하죠.”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을 직감한 박진수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배 전무님. 바쁜 일 먼저 보셔야죠.”
“박 부장, 가세.”
“네, 전무님.”
유틸리티 우드를 캐디에게 건네준 배성제가 빠른 걸음으로 필드를 벗어났다.
박진수가 멀어지는 배성제를 지켜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어렵게 마련한 자리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 터졌는지 몰라도 하던 게임을 그만두고 떠날 정도면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이이기에 저렇게 황망하게 돌아가지?’
배성제를 놀라게 할 일은 흔하지 않다. 배성제가 당혹해할 정도의 사건이라면 언론사에서 다룰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가!”라고 중얼거리며 놀란 것을 보면 언론 보도와는 무관한 그룹 내부의 문제일 수도 있다.
‘기조실장한테 알아보라고 해야겠구나.’
복잡한 표정의 박진수는 골프채를 캐디에게 주고 필드를 떠났다.
*
3월 19일.
크리스티 이브닝 프리미엄 경매는 크리스티 홈페이지에서 스트리밍으로 실시간 중계되었다. 크리스티 홍콩경매에 작품을 출품한 작가나 그의 지인, 관련 갤러리의 큐레이터, 각종 미디어의 문화부 기자 등 적지 않은 사람이 인터넷으로 홍콩 경매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강수의 작품 ‘눈물’의 낙찰이 결정되자 현장과 스트리밍을 지켜보던 기자들이 즉각 기사를 작성해 인터넷 매체에 올리기 시작했다.
-홍콩 경매에 출품된 이강수의 ‘눈물’ 1350만(18억 2250만 원) 홍콩달러에 낙찰!
-이강수의 눈물, 시작가 5억의 약 3.6배인 18억2250만 원에 낙찰되다
-이강수의 ‘눈물’ 홍콩에서 한국 작가 출품작 중 최고 낙찰가 기록!
-이강수, 100만 달러 작가 그룹에 등극
<이강수 화가가 세계적인 작가라고 해도 손색없는 100만 달러 작가로 비상했다. 19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이강수의 ‘눈물’이 예상을 뛰어넘고 1350만 홍콩달러에 낙찰되었다. 이를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약 155만 달러로 100만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다.
100만 달러 고지는 세계적인 작가로서 명성을 확인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의미지만, 실제 전 세계적으로 그림 한 점에 100만 달러 고지를 밟은 생존 예술가는 많지 않다.
또한 2020년 ‘한국청년화가 12인’ 전에 참여하며 미술계에 진출한 이후 급격한 그림값 상승으로 인해 논란이 되기도 했던 거품 논쟁은 오늘부로 깔끔하게 종지부를 찍게 됐다. 그림값 100만 달러는 500만 달러, 1000만 달러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관문을 멋지게 돌파한 이강수가 세계 미술시장에 진출하여 고 김환기 화백이 가지고 있는 최고 작품가를 경신하기를 기대해본다.>
-이강수, ‘눈물’ 1350만 홍콩달러에 낙찰. 세계적인 작가 대열에 합류
<크리스티 이브닝 프리미엄 경매에서 이강수의 ‘눈물’이 1350만 홍콩달러에 낙찰되었다. 이는 한화로 약 18억 2000만 원으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높은 낙찰가였다. 외국 미술시장에서 생존 한국작가 경매 최고가 기록은 이우환이 가지고 있다. 그의 1977년 작 ‘점으로부터’가 2012년 11월 홍콩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서울옥션 제10회 홍콩경매에서 24억 2100만 원에 낙찰되었다. 작품 ‘점으로부터’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질서정연하게 찍어 나가는 점을 통해 작가의 철학적 사고를 표현한 초기 작품으로 세로 162.1, 가로 291㎝ 크기의 3점이 한 세트다.
이강수는 올해 31살로 굉장히 젊다. 31살에 불과한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우환이 가지고 있는 생존 한국 작가 경매 최고가 기록을 깰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강수는 젊은 작가로서는 홍경택이 보유하고 있었던 ‘펜슬1’의 9억 6800만 원 기록을 가볍게 제쳤다. ‘눈물’뿐만 아니라 이강수의 나머지 두 작품도 응찰자가 치열한 경합을 벌였고, ‘카카오나무의 요정들’은 약 17억 1000만 원, 커피 열매 따는 소녀는 약 16억 6000만 원이라는 고가에 낙찰되었다.
한편, 이번 크리스티 홍콩경매에서 중국 대표작가인 쩡판즈의 '세 여자' 21억 2000만 원, 장샤오강의 '대가족' 시리즈가 14억 7000만 원에 낙찰됐다. 한국 단색화의 정점에 있는 작가군인 박서보의 ‘정렬 98-VII’ 8억 8020만 원, 정상화의 ‘Untitled 93-X-X’ 7억 2900만 원, 이우환의 ‘선으로부터’ 5억 2650만 원, 홍경택의 ‘서재: 17xx’ 4억 2930만 원, 박해나의 ‘혈맥: 소나무’ 1억 6천6백만 원, 장동운의 ‘태엽 장치 풍경’은 1억 5660만 원에 팔렸다. 경매 낙찰률은 84%, 낙찰총액은 127.8억 홍콩달러다.>
김화영([email protected]) 저작권자 © 예술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꽃보다중년: 이강수 씨,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그려주십시오.
┗정선생: 미투~
-Alago: 한국 작가 가운데 최고가 낙찰된 이강수 씨! 축하합니다.
-아썰: ‘눈물’ 낙찰가가 18억 원이 넘었다!!! 그러면 2년 전에 팔린 ‘도시의 일몰’과 ‘초대’는 최소 10억 원은 나가겠지? 이거 팔면 세금도 안 낼 텐데 그림 한 점 사서 로또 당첨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졸라 부럽다.
┗절대원소: 하긴. 요즘 로또 10명 넘게 당첨되면 세금 떼고 10억밖에 안 되죠. 로또로 신분 상승도 어려운 일이 되었네요.
┗마음따라: 10억 밖이라니! 얼마가 됐든 로또 한 번 당첨돼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10년 넘게 매주 샀는데 1등 근처에도 가 본 적 없다. 그런데도 매주 로또 당첨되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신기해.
┗절대원소: 로또가 많이 산다고 당첨됩니까? 순전히 운이죠.
-빨간돛: 다음 개인전 때 이강수 그림 한 점이라도 사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강물처럼: 작년 이강수 개인전에서 그림 한 점에 1억 원 내외였다. 그때가 일반인이 이강수 그림 살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지. 올해는 뉴욕에서 개인전 연다고 했는데 호당 천만 원이 넘을 것 같다. 20호짜리만 해도 2억. 50호는 5억. 이 가격에 살 수 있는 직장인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손으로 꼽을걸.
-헐! 그림 하나에 5억 주고 사느니 그 돈이면 융자 보태 아파트를 사고 말겠다.
┗파리대왕: 아파트를 산다고? 요즘 아파트 시세 하강국면인데 살 집이면 몰라도 투자할 목적이면 이강수 그림이 훨씬 낫지 않을까 싶다.
-가을바람: ㅋㅋ눈물 23호 작품이 18억 2천이다. 호당 계산하면 7천9백이 넘는다. 호당 천만 원이면 어째 싸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나뿐인가요?
┗greenroad: 확실히 갭이 너무 크군요.
┗늦은후愛: 그렇게 따지면 카카오나무의 요정들은 호당 1425만원입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하죠? 아는지 모르겠다만 피카소 그림도 1000억짜리 작품이 있는가 하면 수십억짜리도 있을 만큼 작품에 따라 가격이 천지 차이입니다. 23호에 불과한 ‘눈물’이 다른 작품보다 더 비싸게 낙찰됐다는 건 그만큼 예술성이나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방증이지요. 그래서 이강수 작품의 호당 가격은 참고사항일 뿐이고, 호당 가격은 무의미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강수의 그림은 호당 가격이 아니라 개별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에 따라 가격차가 날 것 같네요.
┗가을바람: 그럴 수도 있겠네요.
-리얼리: 낙찰가 18억 2천?? 가짜뉴스는 아니지?
┗솔매: 가짜뉴스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자슥아, 크리스티 홈페이지에서 경매 진행을 실시간으로 내보냈다. 어디서 가짜뉴스 드립이야.
┗리얼리: 개자슥아, 걍 해본 말이다. 이게 왜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고 난리야?
-yoyo: 강수옵빠~ 추카추카 ♬♪♪♬♩♪
-사랑만이: ㅋㅋ카오스아트야, 보고 있냐? 돈맛을 본 이강수 그림이 장샤오강 대가족보다 비싸게 낙찰됐다. 대가족 별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대단한 작품이나 된 것처럼 얘기하고 있어.
┗ChaosArt: 어휴, 무식한 인간아. 늦은후愛님이 친절하게 언급한 윗글은 보았니? 대가족 시리즈 가운데 70억짜리도 있고, 50억짜리도 있다. 이번 작품처럼 현저하게 낮은 것도 있고, 작품마다 가격이 다르단 말이다. 예술의 가치를 이해 못 하는 문외한에게 더 얘기해 무엇하랴? 관두자.
┗유사달: 같은 한국인으로서 이강수 그림이 장샤오강의 대가족 시리즈보다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하다. 앞으로 승승장구해서 쩡판즈, 작품에 왜색이 진득진득 묻어있는 재수 없는 무라카미 다카시, 땡땡이 그리는 쿠사마 야요이까지 뛰어넘어 아시아의 최고 작가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
┗alandll: 옳소! 1000만 달러 작가 가즈아~
크리스티 홍콩경매에서 놀라운 낙찰가를 기록한 이강수에 관한 기사가 인터넷 매체에 게재되기 시작했고, 몇 시간 뒤에 실검순위에 올라갔다. 눈물, 이강수, 18억, 크리스티 홍콩경매 등 이강수와 관련한 검색어가 무더기로 실검 순위에 등장했다. 이강수 관련 기사에는 축하와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
이날 밤 11시.
유일종합병원 VIP 병실.
차분한 분위기가 풍기는 고급스러운 가구와 소품으로 인테리어 한 넓은 실내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실내는 소파, 옷장, 탕비실이 갖춰져 있었고, 병상 앞에는 벽걸이 TV가 걸려 있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실내 왼쪽에 놓인 소파에는 남자요양사와 골프장부터 배성제를 수행한 박 부장이 앉아 있었고, 실내 오른쪽에 놓인 병상 옆에는 배성제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배성제는 어둡고 심각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아버지 배종태를 하염없이 내려보고 있었다.
유일 그룹의 회장이자 배성제의 아버지 배종태는 오늘 오전 자택에서 호흡곤란과 심장마비 증세로 갑자기 쓰러졌다.
배종태의 이상 증상을 알아차린 비서가 심폐소생술로 응급조치하고 즉각 인근 병원으로 후송했다. 배종태는 병원 의료진의 신속한 조치로 위급 상황을 넘기며 목숨을 건진 후, 배종태의 전문의가 있는 유일종합병원으로 옮겼으나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배성제는 모든 이복형제가 돌아간 뒤에도 자리를 뜨지 못한 채 병상을 지키며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을 속으로 삼키고 있었다.
‘아버지, 이대로 가면 안 됩니다. 제발 정신 차리세요. 이대로 돌아가시면 저는 뭐가 됩니까.’
배성제는 간절하게 아버지가 깨어나길 빌었다.
유일 그룹 회장 배종태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고, 배성제는 본처가 아닌 세컨드에게서 얻은 막내아들이었다. 늦둥이로 배종태의 귀여움을 받은 배성제는 중학생 때 직계가 아닌 혼외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멋대로 행동하며 사고치고 다녔다. 툭하면 사고 치는 배성제는 결국 배종태의 눈 밖에 났다.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정신 차린 배성제가 자기 처지에 눈 뜨고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을 직시했다. 그때는 이미 이복형제인 두 형과 두 누나가 알짜 계열사를 거의 물려받았다. 이복형제들에 비교하면 자기가 물려받은 재산은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든 배성제는 난잡한 행실을 접고 배종태 앞에 무릎 꿇고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배종태는 돌아온 탕아를 쉽게 용서하지 않았다. 배종태는 연매출이 1000억에 불과한 계열사 유일글로벌에 배성제를 사원으로 입사시키고 회사 생활을 지켜보았다. 12년 동안 열성적으로 직장 생활하며 맡은 바 책무를 다한 배성제는 전무이사까지 고속 승진했다. 그동안 유일글로벌도 연매출 4000억으로 성장했다. 유일글로벌의 성장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며 12년 동안 회사에 헌신한 막내아들을 기특하게 여긴 배종태는 올해 안에 자기가 소유한 유일시스텍 지분을 넘겨주기로 배성제에게 약속한 것이다. 유일시스텍은 연매출 2조 원에 이르고 3천억 원대의 이익을 내는 내실이 탄탄한 기업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깨어나지 못하면....’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했다. 절대로 그런 상황이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버지가 정신 차리고 건강을 회복해야 그룹의 마지막 남은 알짜 기업인 유일시스텍 지분 30%를 물려받을 수 있다. 만약 아버지가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면 배다른 동생이라고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하이에나 같은 이복형제들로부터 인간쓰레기로 취급받고 그룹에서 축출당할 것이다. 물론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자기 지분만큼 상속받겠지만, 유일시스텍의 지분 30%를 물려받고 유일시스텍의 1대 주주가 되는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배성제의 시름 깊은 밤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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