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80화 (180/1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80회

수많은 관람객으로 웅성거리는 전시장을 둘러본 후, 갤러리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핀 장영봉은 시종일관 입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갤러리 입구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 삼삼오오 무리 지어 있는 중년 여성 등 각양각색의 대기자가 백여 명 남짓 줄 서 있었다.

갤러리를 찾은 관람객에게 미안했지만, 입장을 통제하지 않으면 원활한 작품 감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전시장이 관람객으로 혼잡했다. 전시 공간이 미술관에 비교해 좁은 갤러리인지라 사람이 조금만 몰려도 입장을 통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강수의 두 번째 개인전 때는 캐리커처 사인회 줄이라 큰 의미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림을 감상하려는 순수 관람객이다. 갤러리의 전시장 입장을 통제할 정도로 관람객이 몰려드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강수가 그만큼 대중적인 인기가 높다는 방증이었다.

우웅! 우웅!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사무실에서 온 전화였다.

“미영 씨, 무슨 일이지?”

[부장님과 면담을 원하는 손님이 오셨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아, 지금 갤러리 입구니까 금방 올라간다고 하세요.”

[네.]

장영봉은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 3층 사무실로 들어갔다.

블루 계통 슈트를 입은 날렵한 체형의 40대 후반 사내가 자기 책상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장영봉이 소파에서 일어난 사내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수석 큐레이터 장영봉입니다. 앉으시죠.”

장영봉의 위아래를 거만한 눈으로 훑은 사내가 명함을 꺼내 장영봉에게 건네주었다.

“명성그룹 홍보팀장 강석현이오.”

장영봉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명성그룹 홍보팀에서 오셨군요.”

명성그룹은 장영봉도 익히 알고 있는 국내 30대 기업의 한 곳이다. 대기업에서 사내 전시용이나 문화계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예술품을 구입하는 사례가 있었다. 기업에서 구매하는 금액은 꽤 높아서 보통 억대 단위를 훌쩍 넘는다.

장영봉은 설마 하는 기대감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저희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강석현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림이 때문에 왔소. 그룹 차원의 그림인데 제작해 줄 수 있겠소?”

‘작품 의뢰?’

오늘 오전에 성목미술관 큐레이터가 찾아와 이강수 작품 2점을 소장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전시 작품은 이미 완판되었기 때문에 이강수 작품을 예약하고 싶다고 했다.

명성그룹에서 어느 작가를 원하는지 몰라도 오늘만 두 곳에서 작품 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이는 드문 일로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사건이었다.

“어떤 그림을 원하는지요?”

“우리 그룹이 내년부터 기업 이미지를 환경 친화적인 기업, 환경보호를 실천하는 기업, 자연과 함께 하는 녹색 기업이라는 컨셉으로 채택했고, 그런 내용으로 홍보물은 물론이고, 광고를 준비하고 있소. 우리가 원하는 그림은 기업 이미지의 컨셉에 맞는 그림이오.”

강석현이 서류가방에서 프린트물 한 부 꺼내 장영봉에게 건넸다.

“이 자료에 각 그림에 대한 전시 장소와 사이즈가 정리되어 있소. 현장 점검하기 전에 참고하면 될 것이오.”

프린트 물을 살펴본 장영봉이 고개를 들었다.

“900호짜리 대작도 있고, 작품 규모가 상당히 크군요. 작가 선정과 제작 기간, 금액 같은 부분만 조율하면 작품 제작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혹시 생각해 놓은 작가가 있는지요?”

“우리가 원하는 작가는 지금 이곳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강수 화가요.”

“네? 이강수 화가요?”

장영봉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이강수가 미술계에 신성처럼 떠오르며 화제의 중심에 있지만, 결정적으로 경력이 짧은 신인화가다. 대기업의 본사에 전시하는 작품을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쟁쟁한 작가가 아니라 신인화가 작품으로 선정할 줄은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이강수는 작년부터 활동한 신인입니다. 외람된 질문이지만 특별히 이강수 화가를 선정한 이유가 있을까요?”

“장 부장이 생각하기에도 의외요?”

“그, 그렇습니다. 이강수가 실력이 출중한 화가는 분명하지만 경력이 짧거든요.”

“위에서 내려온 지시라 사실 나도 잘 모르겠소. 처음엔 왜 이강수인지 의문이 들어서 이강수에 대해 조사를 좀 해보았지. 이강수 작품 리스트 가운데 퍼스트타워 로비에 800호 대작 ‘향유고래의 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가서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소. 그림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소. 거대한 스케일과 깊은 바닷속 장엄한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정도였으니까. ‘향유고래의 꿈’은 명성그룹 기업 이미지 컨셉하고 어울리기도 해서 건물주를 만나 매매를 문의했는데 팔지 않는다고 하더군. 아쉽지만 어쩌겠소?”

“아, 그렇군요.”

장영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라고 한 곳은 아마도 로열패밀리 측의 인사일 것이다.

‘대체 누가 이강수 그림을 원하는 걸까? 한데 이강수는 시간이 없을 텐데....’

이강수는 연말까지 크리스티 홍콩경매 작품을 준비해야 하고 내년엔 뉴욕 전시 작품을 그려야 한다. 명성그룹이 요구하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만약 이강수가 이번 의뢰를 수락한다면 최소 백억 원이 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백억 대의 작품 의뢰를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웠지만, 제작 여부는 이강수의 의사에 달려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장영봉이 대답했다.

“이강수 화가에게 그림을 제작할 수 있는지 의향을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강수 화가는 내년 9월까지 뉴욕 개인전 스케줄이 잡혀 있어서 어떨지 모르겠군요.”

강석현이 미간을 좁히며 턱을 쓰다듬었다.

“음.... 뉴욕 개인전 스케줄에 맞춰야하기 때문에 우리 작품을 그리기 어렵다는 건가?”

“제가 뭐라고 단정 지어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 스케줄을 변경하지 않는 한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스케줄을 변경하면 간단하게 해결되겠군.”

“그렇긴 합니다만 결정은 이강수 작가가 할 겁니다.”

“아무래도 직접 전화해서 의향을 물어보는 것이 빠르겠군. 장 부장, 이강수 씨 연락처 좀 주시오. 내가 직접 전화해 보겠소.”

“연락처는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만 작품에 관련한 업무는 우리 갤러리에 일임한 상태입니다. 이 작가와 통화해도 결국 우리와 상의하라고 할 겁니다.”

강석현의 얼굴에 불쾌한 듯한 표정이 드러났다.

“허, 그래?”

강석현이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장영봉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놀랍군, 놀라워. 재능 좀 있는 새파란 신인화가인 줄 알았는데 대작가 못지않은 위세야. 윗선 지시만 아니었으면 이런 곳에 올 일도 없었을 건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석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알겠소. 일단 의향을 타진해서 알려주시오. 우리도 위에 보고는 해야 하니까 말이오.”

“물론입니다. 오늘 중으로 이강수 화가와 논의해서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연락해 주시오.”

사무실 문까지 강석현을 배웅한 장영봉은 강석현의 말투와 태도에 기분이 약간 상했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한 마음과 약간 흥분한 기분을 만끽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이강수 ‘기억이 들려주는 이야기’ 전은 117억 원이라는 엄청난 매출액을 올렸고, 이강수 이름 석 자를 실검까지 올려놓았다.

전시 작품이 완판된 후 의도적으로 언론사에 보도 자료를 배포했는데 관람객의 증가는 물론이고, 작품 구매 문의, 예약 판매까지 그 효과가 생각보다 파장이 컸다. 마치 신의 한 수를 둔 기분이 들었다.

오프닝 전에는 높은 호당 가격 때문에 전시 작품이 전부 팔릴지 걱정하기도 했다. 우습게도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완판된 후에 여러 기관에서 이강수 작품을 구매할 수 있는지 문의가 왔다. 그리고 오늘은 이강수 작품과 관련하여 성목미술관과 대기업 명성그룹 홍보팀에서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성목미술관은 국내 대기업의 한 곳인 한용그룹이 운영하는 미술관으로 한용그룹 창업자 고(故) 박한용 선생의 옛 자택에 설립된 유수의 미술관이다. 2,000여 평 넓이에 자리 잡은 성목미술관은 본관, 별관, 박한용 기념관, 조각공원, 아트샵 등이 자리해 있다.

삼성동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위치한 성목미술관은 관내에 작은 숲속에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사계절 내내 운치가 아름다운 미술관으로 유명하다. 그 때문에 서울의 빌딩 숲에서 잠시 벗어나 아이 손을 잡고 동네 산책하듯 나들이하기 좋은 미술관이다.

성목미술관은 국내외 현대미술 뿐만 아니라 사진, 패션, 디자인,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장르의 창의적인 기획전시를 개최해 오며 한국 예술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장영봉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놀라운 일이야. 일단 전화로 물어봐야겠다.’

장영봉은 스마트폰을 꺼내 이강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곧 연결되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이 작가, 별일 없지?”

[네. 전시장에 나가봐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닐세. 작품 그리느라 바쁜데 괜히 여기서 시간 낭비할 필요 없지. 뭐 좀 물어보려고 전화했는데 통화는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어제는 몇 군데에서 자네 작품 구매할 수 있냐는 문의가 오더니 오늘은 성목미술관에서 찾아와 80호에서 100호 내외 작품 2점을 예약 구매하고 싶다고 했다네. 어떤가? 가능하겠는가?”

[성목미술관에서 예약 구매요?]

“이 작가가 작품을 전시회 출품하기 전에 2점을 먼저 구매하겠다는 거지. 가격은 이번 전시회에서 책정한 호당 육백이고. 실은 가격을 떠나서 성목미술관에서 이 작가 작품을 소장하면 굉장히 호재인 건 알고 있겠지?”

[아, 물론이죠. 성목미술관 잘 알죠.]

“뉴욕 전시 때 프로필에 미술관 소장을 기재할 수 있으니 홍보 차원에서도 유리하다네. 자네에게 물어보고 예약 판매 여부를 알려주기로 했어. 한번 생각해 보게.”

[기간은 언제까지지요?]

“내년 뉴욕 전시 전이면 성목미술관 측도 괜찮다고 했네.”

[시간은 여유 있네요. 성목미술관에서 구매하겠다는데 생각할 것 없죠. 예약 판매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미술관에 그렇게 전하지. 그리고 물어볼 게 한 가지 더 있어. 자네 명성그룹이란 기업 알고 있나?”

[명성그룹이면 꽤 유명한 대기업인데요.]

“바로 그 명성그룹 홍보팀장 강석현이라는 사람이 조금 전에 왔다 갔네. 내년엔 명성그룹 기업 이미지를 친환경 기업 컨셉으로 새롭게 런칭한다고 하네. 새로운 기업 이미지를 각종 광고를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할 계획이라는군. 본사에는 로비를 비롯해 임원실, 휴게실, 회의실, 엘리베이터 홀 등 여러 곳에 기업 이미지에 맞는 그림을 전시할 계획인데 그림 제작을 이 작가에게 맡기고 싶다는군.”

[저한테요?]

“뜻밖인가?”

[물론이죠. 저는 신인에 불과한데 대그룹 본사에 전시할 그림을 세계적인 작가가 아니라 저한테 의뢰해요? 놀라운데요?]

“나도 그 점이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다고 하네. 아마 그룹 차원에서 자네를 낙점한 모양이야. 혹시 이쪽 로열패밀리 하고 아는 사람은 없는가?”

[당연히 없죠.]

“알겠네. 그들 중 누군가 자네 그림이 좋아 소장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임원 가운데 누군가가 ‘향유고래의 꿈’을 보았을 수도 있고.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제작해야 할 작품 수가 30점이나 된다네. 게다가 500호 넘는 초대작이 3점이나 돼. 대기업에서 특정 작가의 작품을 구매, 전시하는 경우도 그 작가의 그림값은 물론이고 명성도 올라가지. 놓치기 아까운 기회인데 뉴욕 전시가 걸리는군. 이 작가 생각은 어떤가?”

[대작 3점을 포함해서 30이이나 된다고요?]

“그렇다네.”

사실 대기업에서 작품 제작 의뢰가 들어오면 감사할 일이다. 작가 선정 공모만 해도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수십 명의 작가가 몰려들 판에 거절은 있을 수 없다. 대부분 작가는 생각할 필요 없이 모든 일을 미루고 대기업의 작품 의뢰부터 작업할 것이다. 하지만 이강수는 이미 돈으로부터 자유롭다. 화가로서의 명성마저 국내 최고 작가와 견줄 수 있을 만큼 치솟았고,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뉴욕 진출을 준비하고 있는 스케줄을 중시한다면 굳이 명성그룹 의뢰를 수락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판단은 이강수 몫이었다.

[....]

“....”

잠깐의 침묵이 스마트폰 사이에서 통신망을 타고 흘렀다.

작업실에서 창밖 풍경에 시선을 주며 장영봉과 통화하고 있던 강수가 잠시 명성그룹의 작품 의뢰를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강수는 내년부터 뉴욕 전시에 집중할 계획이었다. 국내를 벗어나 세계에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해 모든 역량을 다 투입할 생각이었다. 물론 전시를 몇 개월 미루고 명성그룹 작품 의뢰를 처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돈과 약간의 명성을 위해 뉴욕 개인전을 미룰 필요가 있냐는 것인데....’

명성그룹의 작품 의뢰는 고마웠지만,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더구나 자기가 맡지 않으면 다른 작가에게 기회가 간다. 다른 작가에게 양보하는 것도 괜찮았다.

결론을 내린 강수가 말했다.

“저기, 선배님,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제작해야 할 작품이 너무 많은데요. 명성그룹 건은 포기하고 내년엔 뉴욕 개인전 작품에 전념하겠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서 지금 같은 의뢰가 와도 작업할 수 없으니 선배님이 잘 얘기해 주십시오.”

[알겠네. 강석현 팀장에겐 그렇게 전하도록 하지. 그럼 즐거운 연말연시 보내도록 하고 다음에 보세.]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도 연말연시 잘 보내세요.”

전화를 끊은 강수는 작업하고 있던 캔버스로 시선을 돌렸다.

‘카카오나무의 요정들’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다음 주 개인전이 폐막하는 화요일쯤에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예상보다 이삼일 빠른 속도다.

‘카카오 열매 따는 소녀 그릴 시간이 이삼일 여유 생겨서 다행이다. 날밤 세면서 그릴 뻔했는데 말이지.’

‘카카오 열매 따는 소녀’는 기존에 구상했던 스케치를 폐기하고 새로 그리기로 한만큼 시간이 더 필요했다.

강수는 스마트폰을 한 쪽에 치워 놓고 붓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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