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77화 (177/1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77회

12월 12일 일요일 오전 10시경.

구파발역 출구는 북한산에 등산 가는 사람으로 붐볐다.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멘 등산복 차림의 중년 사내가 2번 출구에서 올라왔다.

중년 사내는 박진수였다. 박진수는 국내 100대 기업의 한 곳인 알로직의 상무로 재직 중인 임원이었다. 그는 강렬한 햇살이 부담스러웠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진수야, 여기다.”

출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역시 등산복 차림에 둥글둥글한 얼굴의 중년 사내가 팔을 흔들고 있다.

항상 사람 좋은 웃음과 넉넉한 마음으로 반겨 주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연을 이어 온 박진수의 가장 친한 친구 민효철이다.

두 사람은 1964년 같은 동네에서 길 하나 사이에 두고 몇 개월 차이로 태어나 중학교까지 함께 다녔고, 박진수 집이 먼저 서울로 올라가 잠시 헤어졌으나 3년 뒤 민효철 집도 서울로 올라가 다시 가까워졌다.

“오래 기다렸냐?”

“아니, 나도 좀 전에 왔어. 가자.”

두 사람은 버스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버스정류장에는 백여 명의 등산객들이 줄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대의 버스가 먼저 온 등산객을 태우고 간 뒤에야 두 사람은 북한산행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대부분 중년의 등산객을 가득 태운 버스는 잠깐 사이 북한산 입구에 섰다.

버스에서 내린 등산객이 북한산 입구로 빨려 들어갈 때 둘은 버스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곧 오른쪽으로 골목길이 나왔는데 박진수와 민효철은 조경사의 손길이 스친 듯 여러 종류의 관상수가 그림처럼 서 있는 길로 들어섰다.

등산객이 뜸한 길로 들어서자 민효철이 입을 열었다.

“요즘 재순 씨는 어때? 별말 없어?”

“응. 별말은 없어도 사소한 일로 신경질 부리거나 짜증을 잘 내지. 아무래도 욕구불만이 쌓이겠지.”

잠시 말을 끊은 박진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휴, 어쩌다 내가 여편네 눈치나 보는 고개 숙인 남자 꼴이 됐는지 한심하다.”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거지, 뭘 그래. 재순 씨한테는 다양한 취미 생활로 욕구를 풀어보라고 해보지? 골프나 요가, 운동할 건 많이 있잖아.”

박진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아내야 스트레스 푼다고 수영도 하고, 골프도 치러 다니지. 한데 운동하면 몸이 더 좋아져서 오히려 골치가 더 아프다. 그렇다고 운동 말고 다른 취미 생활하라고 할 수도 없고.”

“풋, 그런가?”

“아니, 남은 심각한데 웃어?”

“하하, 미안하네. 욕구를 다른 데로 배출하려고 운동했는데 몸이 더 건강해졌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그만. 하긴 운동하면 몸에서 활력이 용솟음칠 테니 성욕 감소는커녕 역효과가 나는구먼.”

“이래저래 따져 봐도 내가 죄인인데 아내를 탓할 수도 없고, 나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라네.”

“흠, 이해해. 요즘은 원체 여성 발언권이 세졌으니까. 진수야, 남편이 여편네한테 따귀 맞는 이유라는 유머 아냐?”

“글쎄? 따귀를 왜 맞는데?”

“40대는 술 먹고 들어와 해장국 끓어달랬다고 맞고. 50대 남자는 마누라 전화하는데 어디다 누구랑 하느냐고 물어서 맞고. 60대 남자는 마누라 옷 갈아입는데 어디 가느냐고 물어서 맞는다더라.”

“허허. 유머라고 하지만 이거 가슴에 절절하게 와 닿는군. 내 얘기 같아서 괜히 뜨끔해.”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10코스 둘레길을 걸었다. 10코스의 길이는 약 3.5km이고, 걷는 속도에 따라 다르지만, 두 사람은 중간에 요기도 하고, 경치를 구경하며 쉬엄쉬엄 걸은 탓에 왕복하는데 약 5시간 30분 걸려서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왔다.

민효철이 말했다.

“막걸리 한잔하고 가야지.”

“미안하지만 오늘은 약속이 있어 집에 일찍 가봐야 하네. 다음에 한잔하세.”

“무슨 일 있나?”

“그게....”

박진수가 우물쭈물하다 말했다.

“아내가 지압을 받아보라고 해서....”

“지압?”

“뇌졸중 후유증으로 다리 저는 노인을 지압으로 고쳤다는 사람이 있다면서 나도 받아보라고 하더라고.”

“지압으로? 우리나라에 그런 놀라운 사람도 있었나?”

“나도 금시초문이라 어이없어서 사기꾼 아니냐고 한마디 했더니 같은 아파트 부녀회에 친하게 지내는 회원이 있는데 그 여자 아버지가 실제로 좋아졌다면서 속는 셈 치고 받아보라고 하도 성화해서 알았다고 했어.”

“요즘은 자석 요법이나 침술, 사혈, 파스 요법 같은 자격증 없이 대체의학으로 치료하는 사람이 많더군. 지압이면 증도 없이 치료하진 않겠지?”

“그건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군. 무슨 자격증이 있거나 물리치료사라도 되겠지.”

“재순 씨가 어련히 유명한 사람 불렀겠지만,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군. 지압 받고 효과 있으면 나한테도 알려주게나.”

“6시에 보기로 했으니까 만나보고 결과를 알려주지.”

“알았네. 다음 달 청계산에서 보세.”

민효철과 작별한 박진수는 택시를 잡아 목적지를 알려주고 뒷자리에 앉았다.

‘음....’

뒷자리에 앉는데 허리가 묵직했다.

‘이건 좋지 않군.’

이른 아침 회사에 출근해 온종일 일하고 퇴근해 집에 오면 허리가 뻐근했지만, 지금까지 가벼운 산행은 괜찮았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민효철과 산행을 해 왔다. 한데 둘레길 도는 산행마저 허리가 뻐근해지면 상태가 더 악화했다고 봐도 된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허리가 더 악화하면 직장마저 위태로워진다.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허리가 발목을 잡을 줄이야. 수술해야 하나?’

회사는 당장 그만둬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다. 스톡옵션으로 받은 주식만 처분해도 30억 원은 되고, 채권에 투자한 돈도 10억 원은 된다. 아파트는 분당에 2채 있고,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금융자산은 약 3억 원이다.

돈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평사원으로 시작해서 더 올라갈 데가 없는 정점에 섰다. 연봉도 무시 못 하지만 무엇보다 회사에서 성공 가도를 달려오며 구축한 자기의 위상과 영향력을 포기하기 쉽지 않다. 자신이 이룩해 놓은 업적을 지키기 위해서는 회사를 그만 둘 수 없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수술이 고민되는 이유다.

집에 가서 듣도 보도 못한 자에게 지압 받아야 한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괜히 짜증이 치밀었다. 박진수는 배낭을 허리에 대고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뭔가 생각에 사로잡힌 듯한 박진수의 얼굴을 백미러로 힐끗 살핀 택시기사는 조용히 차를 몰았다.

*

삑삑삑삑삑!

아파트에 도착한 박진수는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당신 왔어요?”

“응.”

거실에서 박진수의 아내, 이재순 여사가 나왔다. 50대 초반인 이재순 여사는 40대 중반으로 보일 정도로 나이보다 젊어 보였고, 군살 없는 몸매를 하고 있었다. 박진수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날씬한 몸매를 가꾸고 있는 아내가 더 부담되었다. 보통의 아줌마들처럼 적당히 군살이 있으면 그나마 성욕이 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박진수는 절박했다.

“얼른 씻어요. 씻고 나오면 친구한테 오라고 할 테니까요.”

“알았소.”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간 박진수는 거울에 비친 자기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몸 여기저기 군살이 붙어 있는 거울 속 중년 사내를 보고 인상을 썼다. 그나마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까?

운동할 시간도 여의치 않았지만, 허리에 이상이 생긴 이후로 겁이 나서 운동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박진수는 샤워하고 나와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주방에서 야채 쥬스를 준비한 이재순이 박진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여보, 이거 마셔요. 좀 전에 전화했으니까 친구하고 지압사가 곧 올 거예요. 산행은 어땠어요?”

“오늘은 하늘도 청명했고, 공기도 깨끗해서 걷기 좋았지. 당신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효철 씨 부부도 같이 와야 나도 가죠. 나만 가면 이상해요.”

“그럼 할 수 없고.”

박진수가 아내가 건네준 견과류 넣은 야채 쥬스를 한 모금 마셨다.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운동해서 처녀 때 몸매로 돌아온 아내였다. 그런 아내가 옆에 붙어 살갑게 굴면 가끔 심볼에 피가 몰릴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아내를 실컷 유린하고 싶은 욕구가 들끓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삽입하지 않고 애무만 해도 될까 싶어 해보았지만, 갈증만 더 나고 뜨거운 육체로 몸부림치는 아내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해 자괴심만 들었다.

그때의 비참함은 가슴을 찢었다.

띠리리링띠리~

차임벨이 울렸다.

“내가 열어줄게요.”

이재순이 현관으로 나갔고, 박진수도 아내의 뒤를 따라 현관으로 갔다. 이재순이 현관문을 열자 부티 나는 패션의 중년 여인과 깔끔하게 콤비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최경화와 이강수다.

초면이라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호호. 경화 씨, 어서 와요. 여보, 115동에 사는 최경화 씨에요.”

“박진수라고 합니다.”

“네. 허리 때문에 고생 많다는 얘기 들었어요. 남자는 허리가 생명이라고 하는데 빨리 치료해서 좋아지길 바래요.”

“아, 예에.”

박진수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젠장. 무슨 여자가 초면에 할 말 안 할 말 가리질 못해? 경박하고 교양 없는 여자 같으니.’

“이강수입니다.”

박진수는 한 번의 인사로 최경화를 예의 없는 경박한 여자로 판단했다. 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싸늘한 눈빛으로 강수의 위아래를 훑은 박진수가 아내를 향해 떨떠름한 어투로 물었다.

“설마 이 친구가 지압하는 거야?”

“네. 왜요?”

“헐, 그래?”

박진수는 지긋한 나이에 수련으로 표정과 눈빛이 깊은 도인 풍의 지압사를 예상했지 서른 될까 말까 한 젊은 친구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박진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강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불신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의 입에서 까칠한 목소리가 나왔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상당히 젊은데 지압 한지는 얼마나 되는가?”

박진수의 표정과 언행에서 어떤 질문 할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 강수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저는 지압사가 아니라 전문적으로 지압을 배우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박진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전문 지압사가 아니란 말인가? 그럼 혹시 지압과 관련해서 자격증이나 다른 면허는 있는가?”

“지압이나 기타 의료와 관련한 자격증은 없습니다.”

“자격증 없이 지압해 왔다는 말이군?”

비아냥대는 듯한 박진수의 질문에 강수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제 전공은 그림입니다. 지압은 대학 때 잠깐 배웠을 뿐입니다.”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의 박진수가 굳은 얼굴로 이재순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자격증도 없는 친구에게 지압 받을 필요 있냐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재순이 애교스럽게 말했다.

“아이, 당신도 참. 지압하는데 무슨 자격증이 필요해요. 지압 받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게 아니잖소. 지압으로 다리 저는 최경화 씨 아버지를 치료했다니까 하는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말을 뭐 하려 하겠어?”

강수는 박진수의 의심과 거부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의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전문 지압사도 아니면서 지압으로 다리 저는 사람을 고쳤다고 하면 자기라도 사기꾼으로 여겼을 것이다.

최경화는 까칠하게 구는 박진수를 보며 속으로 코웃음 치고 있었다.

‘흥, 남자 구실도 못 하는 주제에 뭘 그렇게 따지고 있어. 오히려 지압해 달라고 매달려도 모자를 판에. 이 서방한테 그냥 가자고 할까보다.’

이재순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는 최경화의 불만을 눈치챘다.

박진수가 문전박대하듯 최경화와 이강수를 냉대하자 이재순이 박진수의 옆에 붙어 옆구리를 꼬집어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호호, 여보, 잔소리 그만하고 지압부터 받아보세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지압 받으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 것 아니에요?”

분위기가 냉랭해지자 박진수도 더 왈가불가하지 않았다.

아내 말대로 지압을 받아보면 결과가 나올 일이었다.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만 하고 잠자코 있던 강수가 입을 열었다.

“저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모이자 강수가 자기가 세운 원칙에 대해 운을 뗐다.

“사모님 말대로 지압을 받아보고 판단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제가 시술할 지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저의 생명 에너지를 끌어내서 시술하는 지압이고, 치유 효과가 발생합니다. 두 번째는 혈도를 자극해 체내 혈행을 원활하게 하고, 피로를 풀어주는 단순한 지압입니다. 첫 번째 지압은 제 생명 에너지가 빠져나가기 때문에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하셔야 하고, 두 번째 지압은 아무런 대가가 없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지압을 원하시는지요?”

생명 에너지라는 단어가 풍기는 무거운 의미에 최경화와 이재순이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박진수도 흠칫 표정이 변했다.

며칠 전, 최경화와 만나기로 약속한 강수는 치유마법을 어떤 식으로 포장할지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대안 의술로 각종 대체 요법이 있었으나 기치료사가 가장 무난했다. 하지만 기치료는 사기성 논란이 많았고, 실제로 사기였다는 글도 적지 않았다.

기치료의 위험성에 대한 글도 있었다. 그 글의 한 부분에서 “기치료 도중 기치료사의 생명 에너지가 빠져나가기도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강수는 그 글에서 생명 에너지라는 단어만 차용한 것이다.

박진수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치료 효과를 내려면 생명 에너지가 빠져나간다? 자네의 생명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대가가 필요하다 이 말이군?”

“그렇습니다.”

“정녕 생명 에너지가 빠져나가면 자네의 생명이 준다는 말 같은데 맞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연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시술할 수 없고, 시술의 대가도 상상하시는 것 이상일 겁니다.”

“치료 효과를 보려면 당연히 첫 번째로 해야겠지. 한데 생명 에너지가 소모된다니 물어보기도 겁나는군. 그래, 치료비는 얼마를 내야 하는가?”

“치료비는....”

강수가 잠시 말을 끊었고, 세 사람이 호기심과 불신이 반반 섞인 눈빛으로 강수를 바라보았다.

강수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가진 재산의 절반입니다.”

강수가 한 말이 세 사람의 머리에 인식되기까지 2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2초 뒤 세 사람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눈을 껌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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