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75화 (175/1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75회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선암갤러리 여직원이 사무실로 들어온 한 무리의 여성들을 밝은 인사로 맞았다.

“안녕하세요.”

미모의 여성들이 한꺼번에 사무실로 들어오자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다 정체를 파악했는지 깜짝 놀란 여직원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당황해서 물었다.

“어, 어떻게 오셨어요?”

“호호. 그림도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그림은 사려고 왔어요.”

“네. 그림 구매는 저쪽에 계시는 장영봉 부장님과 상의하시면 돼요. 들어가세요.”

“고맙습니다.”

핑크티티 멤버가 장영봉 책상으로 다가갔고, 매니저 오태근과 강수가 조용히 따라갔다.

“반갑습니다. 핑크티티 여러분. 장영봉입니다.”

장영봉이 앞으로 나와 먼저 인사했고, 핑크티티 멤버 세나, 지영, 소냐, 서린, 진하가 허리를 숙여 날아갈 듯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세나입니다.”

“저는 지영이에요.”

“전 소린.”

“소냐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진하라고 해요.”

핑크티티 뒤에 있던 오태근이 앞으로 쓱 나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매니저 오태근입니다.”

“반갑습니다. 난 여러분이 온 줄도 몰랐습니다. 언제 왔나요? 온다고 미리 연락해줬으면 우리가 신경 썼을 텐데요”.

오태근이 팔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좀 전에 왔습니다. 그리고 우린 일반 관람객일 뿐입니다. 저희 때문에 따로 신경 쓰시면 죄송해서 올 수도 없었을 겁니다.”

“아, 예. 스케줄로 바쁠 텐데 우리 갤러리까지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가 작품이 1, 2층에 전시되어 있는데 다 감상했는지요?”

“아직 다 보지는 못했는데 그림부터 구매하겠다고 해서 올라왔습니다.”

“그렇군요. 여긴 협소하니 회의실로 가는 게 낫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장영봉은 핑크티티 멤버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회의실로 자리를 옮긴 장영봉이 핑크티티 멤버를 둘러보며 물었다.

“어떤 작품을 구매할 생각인지요?”

“저는 ‘동녘 하늘에도 노을이 피는가’를 사겠어요.”

지영이 먼저 자기 의사를 밝혔고, 다른 멤버들도 차례차례 구매할 작품을 말했다.

“계절이 바뀌는 풍경이요.”

“추수하는 농부요.”

“별 헤는 밤이요.”

장영봉은 프린트물을 보고 핑크티티가 구매하려는 작품 가운데 팔린 작품이 있는지 체크했다.

“다행히 전부 팔리지 않았네요. 여기 매매 서류를 작성해 주시고요.”

장영봉이 핑크티티 멤버가 얘기한 작품을 리스트의 판매 란에 체크하고 구매계약서를 한 장씩 나누어주었다.

강수는 흐뭇한 표정으로 핑크티티를 바라보았다.

둘 다 무명이었던 때 우연히 세나 초상화로 인해 핑크티티와 인연을 맺었다.

핑크티티는 ‘웃어봐’가 차트역주행하며 네티즌과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고, 기존의 앨범에 수록된 노래가 재조명되어 차트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가을에 나온 새 앨범으로 차트 줄 세우기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바쁜 일정 와중에 핑크티티가 시간을 쪼개 자기 그림을 구매하겠다고 전시장을 찾아왔으니 기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했다.

계약서를 작성해 장영봉에게 돌려준 핑크티티 멤버들이 자기들이 방송과 지방 공연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강수에게 늘어놓았다. 강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다 오태근을 보며 말했다.

“요즘 핑크티티 인기가 굉장하더군요. 새 앨범도 대박 나고 정말 축하드립니다.”

“이게 다 이 작가님 덕분이죠. ‘웃어봐’가 이 작가님이 그린 세나 초상화와 만나면서 차트역주행을 견인했으니까요. 더구나 핑크티티 초상화까지 그려주셔서 엄청난 이슈가 되었지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오태근의 말에 강수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린 초상화는 계기를 만들었을 뿐 여기 다섯 멤버 개개인의 실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오늘의 핑크티티가 있는 거겠죠.”

문득, 강수 옆에 앉은 진하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강수오빠 아니었으면 우린 무명으로 끝장났을 거예요. 오빠 때문에 이렇게 성공한 건데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전시회도 한번 가보지 못해 미안해요. 용서해주세요.”

진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다른 멤버들이 강수에게 일제히 미안함을 표시했다.

“죄송해요. 고의가 아녔어요. 정말 너무 바빴어요.”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바빴어요. 이해해주세요.”

“우리가 너무 무심했어요. 미안해요. 그러니까 용서해주세요.”

“야야, 갑자기 단체로 왜들 그러냐? 잘못한 게 있어야 용서하지 용서는 무슨 용서?”

진하가 강수의 왼팔을 껴안으며 코맹맹이 소리로 아양을 떨었다.

“아아, 왜 죄가 없어요. 오빠한테 무관심한 게 죄죠. 용서해주세요. 네?”

죽을죄 지은 듯한 얼굴로 옆에 달라붙어 용서 구하는 핑크티티에게 강수가 당황해서 허둥댔다.

진하가 지영을 향해 눈짓했다. 진하의 의도를 캐치한 지영이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머금으며 강수의 오른팔을 덥석 껴안으며 아양을 떨었다.

“죄송해용, 한번만 봐 주세용. 앞으로 잘할 게용, 네?”

진하와 지영이 강수에게 과감하게 스킨십을 시도하자 세나가 슬그머니 의자에서 일어나 뒤로 가더니 강수의 어깨를 주무르며 안마를 시전했다.

“그림 그리느라 몸이 많이 굳었죠? 특히 어깨가 혹사당했을 거 같아요. 제가 풀어드릴게요.”

세 명의 미녀가 강수에게 찰싹 달라붙어 애교부리며 장난 반, 진심 반 용서를 구하자 혼이 나간 강수가 즉시 항복했다.

“아, 알았어. 전부 다 용서할게. 용서한다니까. 됐냐?”

“호호,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오빠, 더운 날도 아닌데 이마에 땀이 맺혔네요.”

“뭐? 저, 정말 땀이 맺혔어?”

강수가 소매로 땀을 닦겠다고 팔을 들자 진하가 팔을 뻗어 제지했다.

“잠깐요. 땀을 옷으로 닦으면 어떡해요.”

진하가 손수건을 꺼내서 마치 연인처럼 달콤한 표정으로 이마에 맺힌 진땀을 닦아주었다.

진하와 지영, 세나의 장난에 난감한 표정으로 꼼짝 못 하는 강수를 지켜보며 오태근이 실실 쪼갰다.

똑똑!

노크와 함께 여직원이 문을 열고 반쯤 들어와 말했다.

“장 부장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어, 그래? 지금 나간다고 전해드려요.”

“예, 부장님.”

“죄송하지만 손님이 와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저희도 저녁에 방송 스케줄이 있어서 숙소 가서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때다 싶었는지 핑크티티의 등쌀에 진땀 흘리던 강수가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 오늘도 바쁘군요. 방송사에 가려면 준비할 것이 많겠네요. 오 매니저님, 같이 나가죠?”

“네. 나가시죠.”

강수 옆에 붙어 있는 진하가 볼멘소리를 했다.

“태근오빠, 삼십 분만 더 있다 가면 안 되나요?”

“신인이 미리 가서 대기해야지 시간 맞춰갈 순 없잖아. 다음에 또 오는 걸로 하고 오늘은 이만 가자.”

“치이, 삼십 분 더 있어도 늦지 않을 건데요.”

진하가 구시렁거렸지만 세나와 다른 멤버가 순순히 의자에서 일어나자 진하도 고집 피우지 않고 일어났다. 결국 모두 장영봉을 따라 회의실에서 나갔다.

밖으로 나온 장영봉은 자기를 기다리는 회색 슈트를 입은 40대 후반의 중년인을 보고 반색해서 다가가 깍듯이 인사했다.

“선배님! 어서 오십시오.”

50대 중반 중년인의 이름은 손우근. 홍우대 출신으로 국내 대기업의 하나인 진오그룹이 운영하는 이라지움 미술관에서 학예팀장을 맡고 있다.

“하하. 장 부장. 오랜만이지? 한 여섯 달쯤 됐나?”

“예. ‘미래의 시간’ 전 때 찾아가 뵈었으니 그 정도 됐습니다. 선배님, 저쪽으로 가서 얘기하시죠. 차는 뭐로?”

“녹차 마시지.”

장영봉이 여직원에게 녹차 두 잔을 부탁하고 손우근과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은 장영봉이 운을 뗐다.

“선배님, 요즘도 바쁘세요?”

“어, 내가 하는 일이야 항상 비슷하지. 그래도 진행하던 한국고미술사 자료 연구가 1차 마무리돼서 요즘은 좀 한가한데 곧 ‘예술의 도시, 도시의 예술’이란 학술 대회 준비 시작하면 바빠지겠지. 자네는 어때? 요즘 애 둘 키우기 참 힘든데 생활하는 데 어려움은 없고?”

큐레이터 연봉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손우근이 넌지시 물었다.

“어렵죠. 아니 어려웠죠.”

“그래. 요즘 살기 팍팍하지. 근데 어려웠다고?”

“제가 후배 이강수 덕을 톡톡히 보았거든요. 이 작가 아니었으면 아내가 취준생 될뻔 했습니다.”

“그건 무슨 소린가?”

장영봉이 느닷없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대답 대신 다른 얘길 꺼냈다.

“휴우- 선배님, 삶이라는 게 참 이상합니다. 죽어라 학교 다니고, 졸업하고 작품 활동도 했지만 쉽지 않았죠. 결국 취직해서 아둥바둥 노력해도 나아지는 것 없이 생활고에 쫓기고 쪼들리기만 했는데 말이죠. 의지와 열정으로 앞길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현실은 무능하고 초라한 가장이었을 뿐이었고요.”

손우근이 안쓰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치다 말했다.

“다들 그렇지. 그런데?”

“제 노력과는 상관없이 순간의 선택이 너무 커다란 변화를 가져와서 요즘 깜짝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하긴 인간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놓이지. 그리고 그 선택에 의해 성공과 실패로 갈리기도 하고. 장 부장도 순간의 선택이 어떤 변화를 가져온 모양이군?”

장영봉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네. 선배님 말씀처럼 애 둘 키우려니 생활이 빠듯했죠. 예서가 내년부터 학교 다니면 더 쪼들릴 것 같아서 아내가 한 달 전부터 직장을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한데 이 작가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거든요.”

“이 작가 때문이라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장영봉이 작년 ‘한국청년화가 12인전’ 전시회를 준비하며 이강수를 만나게 된 사연을 얘기해주었다.

“... 그때 마지막 작품이었던 ‘강가’를 보지 않고 전시회에 참여시키지 않았으면 이강수와 인연이 닿지 않았을 겁니다. 이강수 그림을 구매할 일도 인센티브 받을 일도 없었겠죠. 그랬으면 일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을 테고 결국 맞벌이할 수밖에 없었겠죠.”

“그 순간의 선택이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군. 다행일세. 갑자기 장 부장이 너무 부러워지는군.”

손우근이 부러운 눈빛을 거두고 이어 말했다.

“장 부장도 알다시피 그림이라는 분야는 오랜 시간 자기를 갈고닦으며 작품 세계를 구축해야 한 단계씩 성장하는 곳 아닌가? 한데 장 부장이 보내준 이강수에 관한 자료를 검토하면서 너무 빠른 성장 속도에 속으로 의아했다네. 올해 봄과 가을에 개최했다는 두 번의 개인전을 놓친 게 안타까울 지경이야. 내가 좀 신경 썼어야 했는데 말이지.”

“선배님, 이번 전시 작품은 살펴보셨는지요?”

“물론이지. 갤러리에 도착하자마자 전시장부터 둘러봤지. 그림이 기대 이상으로 훌륭해서 굉장히 놀랐다네. 그림의 완성도와 표현력은 신인화가가 그렸다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더군. 더구나 그림 가격은 호당 육백만 원이나 하더군. 꽤나 인상적인 가격이야. 하하.”

손우근이 너털웃음을 지었고, 장영봉이 멋쩍은 듯이 웃었다.

“하하. 그림값이 신인 범주를 한참 벗어났죠?”

“범주를 벗어나다 뿐인가? 국내 최정상급 현역 작가와 맞먹는 충격적인 가격이지. 한데 신인이라는 딱지를 떼어놓고 그림만 놓고 보면 수긍할 만한 가격이야. 아니, 비싸면 또 어떤가? 한두 점이 팔린 것도 아니고 개막하자마자 수십 점이나 팔려나갔으니 그게 더 놀라운 일이지.”

“선배님이 인정해주시니 마음이 편안해지는데요?”

“아, 장 부장 바쁠 텐데 딴 얘기만 했군. 이강수 기존 전시 도록과 작품 파일을 얻었으면 하는데 가능할까?”

“예. 전부 챙겨드려야죠.”

손우근이 이강수 기존 전시 도록과 작품 파일을 요청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 장영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선배님. 혹시 이강수 작품을 이라지움에서 소장할 수 있을까요?”

“음, 실은 이번 전시 작품 가운데 몇 점 구매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책정한 예산이 없고, 작년에 미술계에 진출한 신인이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 그 대신 내년 미술관 소장 작품 선정하는 운영회의에서 이강수 작품을 소장하자고 강력하게 제안하려고 하네. 사실 신인화가 작품 소장은 조건이 까다로운 편인데 이강수는 그 조건을 충족하고 남으니까 운영회의에서 부결할 수 없을 거야.”

“아, 예. 이라지움 미술관에서 이강수 작품을 소장하면 정말 감사하죠.”

소규모 미술관도 아니고, 대기업이 운영하는 국내 최대 규모 미술관의 한 곳인 이라지움 미술관에서 이강수 작품을 컬렉팅하는 것은 미술계에서 작품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의미이고, 작품 가격 상승의 동력이 된다. 왜냐하면 미술관에서는 작품의 작품성과 내적 가치, 예술적 가치, 미술사적 의미 등 다양한 측면에서 평가해 구매, 소장하기 때문이다.

이번 이강수 개인전에서 작품의 호당 가격을 6백만 원에 책정한 데는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나 작품성과 함께 홍콩경매 낙찰가의 영향이 컸지만, 갤러리윤 관장 박윤재의 컬렉팅과 해왕식품 서준홍 회장의 컬렉팅도 한 몫 단단히 했다. 한데 이라지움 미술관에서 이강수 작품을 소장하면 기존의 그림값이 오르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발표할 그림의 작품 가격을 호당 6백만 원 이상으로 책정하는데도 부담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이강수는 예술가로서의 명성이 한층 공고해질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장영봉은 내심 이라지움 미술관에서 이강수 작품을 소장해주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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