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74화 (174/1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74회

신유라는 손뼉 치며 환호하는 사람을 헤치고 장영봉 앞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장 부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 신유라 씨?”

“맞아요. 절 기억하시네요?”

“하하. 해왕식품 서준홍 회장님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는데 기억하죠. 더구나 이강수 작가 작품도 몇 점 구매한 고객인데 모를 수가 없죠.”

“호호. 그런가요? 이건 회장님께서 구매하려는 작품 목록입니다.”

신유라가 내민 작품 목록을 살핀 장영봉이 말했다.

“개막 전 사전 판매는 예외적인 경우인데 이번 전시는 출품작 수가 115점이나 돼서 30점만 특별히 사전 판매했습니다. 한데 의외로 30점이 전부 판매되어 우리도 놀랐습니다. 회장님께 번거롭게 해서 죄송하다고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계약서를 써 드리겠습니다. 사무실로 올라가시죠.”

“네.”

장영봉과 사무실로 올라가며 신유라가 물었다.

“이강수 작가처럼 전시 오픈 전에 사전에 판매되는 작가가 많나요?”

“하하. 그건... 드문 현상이죠. 유명 화가의 경우 어쩌다 사전 판매되는 경우가 있어도 몇 점에 불과할 뿐이죠. 사전 판매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그럼 이강수 화가가 특별한 경우군요.”

“네. 외국은 순식간에 스타작가로 뜨는 경우가 있긴 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렵죠. 더구나 그림이 억대에 팔리려면 십 년 이상의 작품 활동과 자기 작품세계를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미술계나 평단에서 작품성을 인정받고 궁극적으로는 컬렉터의 선택을 받아야겠죠. 그 때문에 최정상급 작가나 억대를 바라볼 수 있답니다.”

신유라가 이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강수 작가는 작품 활동한 지 겨우 2년째 아닌가요? 박연경 실장님은 이강수 씨를 초신인 화가라고 하더라구요.”

“맞습니다. 그래서 이강수 작가가 특별한 겁니다. 마치 몇십 년의 작품 활동을 뛰어넘은 듯한 완성된 작품성과 독창적인 작품 세계,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표현 기법을 선보이고 있거든요. 미술계나 평단보다 일반 대중과 컬렉터가 더 빨리 이강수 화가 그림의 진가를 알아본 것이죠.”

“이제 좀 이해가 되네요.”

사무실로 들어간 장영봉은 계약서를 작성해 신유라에게 주었다. 계약서를 받은 신유라는 장영봉과 작별하고 2층 전시장으로 내려갔다. 1층은 이강수의 지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관람객이 너무 많아 그림 감상하기엔 정신이 없을 것 같았다.

‘역시 2층 전시장은 시장 바닥처럼 북적이진 않네.’

2층 전시장에 들어서 신유라는 느긋하게 그림을 감상하며 양이명을 기다렸다.

이강수의 그림은 변화무쌍했다. 일상의 한 장면이 깊은 울림을 주는가 하면 초현실적인 그림은 아무 생각 없이 그림에 빠져드는 것 같은 마력이 있다. 기억이 들려주는 이야기 전시 작품은 시골 풍경과 아이들, 농사짓는 농부 등 평범한 시골의 일상을 표현했지만, 현실과 환상의 조화되어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그림을 감상하던 신유라는 가로, 세로 86cm*75cm인 변형 30호짜리 그림 한 점 앞에서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눈 내린 겨울 풍경 속에서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초록색, 검은색, 갈색 등 현란한 색깔의 옷을 입은 십 수 명의 아이들이 웃음꽃 핀 얼굴로 얼음판 위에서 뛰놀고 있었다. 화면 정면에는 세 명의 아이들이 팽이치기하고, 그 뒤로는 머플러 휘날리며 바람처럼 스케이트 타는 네 명의 아이들과 썰매 타며 개와 뛰노는 몇몇 아이. 저 멀리 산 아래에서는 몇 명의 아이들이 스키를 타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그림이었다.

‘아, 이 그림 갖고 싶어. 어휴- 그림값이 너무 비싸.’

그림값이 1억8천만 원이나 하는, 평범한 월급쟁이에게는 까마득히 높은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양이명에게 애교부리며 한 점 사달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이젠 그 수준을 훌쩍 벗어났다.

‘칫, 너무해. 무슨 그림값이 미친 듯이 폭등하는 거야? 좀 천천히 올랐으면 좋잖아. 삼사천만이면 얘기라도 해볼 텐데 이건 도저히 말도 꺼낼 수가 없네.’

신유라는 변형 30호짜리 작품 ‘밀레니엄이 시작된 그해 겨울 단상’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2층 전시된 그림을 전부 감상하고 나자 1시간이 훌쩍 지났다.

1층 전시장으로 내려온 신유라는 전시장에서 술렁거리는 분위기를 느꼈다. 특히 전시장 한쪽에 수십여 명의 사람이 모여 웅성거렸다. 몇 명의 카메라맨이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 찍기도 했다.

‘누가 왔길래 사람이 저기 잔뜩 모여 있지?’

호기심이 생긴 신유라는 사람이 몰려있는 곳으로 다가가 안쪽을 살펴보았다.

이강수와 몇 명의 여성이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들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앗! 핑크티티다!’

핑크티티 팬은 아니어도 이강수 그림을 사 모으면서 알게 된 걸그룹이었다. 이강수가 핑크티티의 리더 세나의 초상화를 그렸고, 세나의 초상화가 인터넷과 SNS를 타고 화제가 되면서 ‘웃어봐’의 차트역주행이 시작되었다. 핑크티티는 이강수의 초상화 덕분에 단숨에 인기 걸그룹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 사실을 인터넷 검색으로 알고 나서 친구들과 카페 ‘빈이네 이야기’에 찾아가 핑크티티 초상화를 감상하기도 했다.

‘그림 사러 왔을까? 아니면 개인전 전시회 축하하러 왔나?’

핑크티티 다섯 멤버는 이강수와 함께 전시된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핑크티티의 비주얼을 뜯어본 신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도 별로 하지 않고 간편한 데일리룩 차림인데 확실히 여자 아이돌 그룹답게 미모는 흠잡을 곳이 없어. 키 크고 핸섬한 이강수 화가하고 잘 어울리네.’

핏이 살아있는 슈트를 입은 이강수는 키가 크고 체격이 탄탄해서 핑크티티와 함께 서 있어도 조금도 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미녀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더욱 빛나는 미남 화가였다. 문득 핑크티티 다섯 멤버 속에 있는 이강수가 무척 멋있어 보였다. 자기의 이상형, 아니 대부분 여자가 선망하는 현대판 백마를 탄 왕자와 다르지 않았다.

‘작년엔 그냥 무명화가일 뿐이었는데.... 그때하고 지금하고 너무너무 달라 보여.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지?’

작년 이강수를 잠깐 보았을 때는 그림 잘 그리는 초짜 화가에 불과했기 때문에 자기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만약 지금처럼 멋있는 남자였으면 접근해서 인사하고 말 한마디라도 걸어봤을 것 같았다.

이강수를 살펴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사귀고 있는 양이명이 떠올랐다.

‘이건 뭐.... 비교가 안 되잖아.’

양이명은 경제적으로 능력 있는 남자였지만 외모는 주위에서 흔히 보는 보통의 남자였다. 옷이 날개라고 했듯이 명품 옷이 아니면 양이명은 평범한 청년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외모 콤플렉스를 가끔 드러내긴 했지만 심하진 않았다.

양이명이 자기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로 대외 과시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빛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데리고 다니며 대리만족하는 것이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관계지만 자기도 얻을 것은 충분히 얻고 있기 때문에 불만은 없었다.

‘대표이사 형이 아니었으면 나와 만날 일 없는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했겠지. 돈만 아니면....’

자기에게 돈이 풍족했다면 양이명을 만날 이유가 없었다. 양이명은 자기를 대한민국 0.5%의 상류층으로 끌어올려 줄 사내일 뿐이었다. 그것에 반해 이강수는 돈과 외모, 명성, 대중의 인기, 놀라운 재능까지 전부 소유한 매력 덩어리 남자로 변신해 있었다. 그의 작품 세계를 보면 긍정적이고 선한 에너지가 넘친다. 분명히 그림처럼 인간성도 선하고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핑크티티 다섯 멤버와 스스럼없이 대화 나누며 웃고 있는 이강수를 보고 있으니 갑자기 마음이 설렜다.

우웅!

이때, 문자가 왔다.

양이명이 선암갤러리에 도착해서 자기를 찾고 있었다. 사람 사이로 정문을 보니 양이명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휴-”

한숨을 내쉰 신유라가 찡그린 미간을 펴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얼굴을 화사하게 편 신유라가 사람 속에서 나와 자기를 발견하고 팔 흔드는 양이명에게 다가갔다.

마주 걸어온 양이명이 신유라가 빠져나온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유라 씨, 저 사람들은 뭐야?”

“걸그룹 핑크티티가 왔어요. 핑크티티가 예쁘긴 한가 봐요. 저 사람들은 그림이 아니라 핑크티티 구경하고 있더라고요.”

“큭큭, 그래? 한데 핑크티티가 여길 무슨 일로 왔을까? 유라 씨는 알아?”

“글쎄요? 내가 보니까 이강수와 핑크티티가 친한 것 같아요. 아마 개인전 축하해주러 온 것 같은데요.”

“흠, 그래? 하여튼 핑크티티가 이강수 전시장엘 왔으니 기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는데.”

“네? 가만있지 않으면요?”

“젊고 잘나가는 화가 이강수, 차트역주행으로 대세 걸그룹으로 떠오른 된 핑크티티. 둘을 엮으면 그럴듯한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겠어?”

“설마요. 몰래 만나는 것도 아니고 전시회에 온 것뿐인데요?”

“기자들이 그런 걸 따지겠어? 대충 사람 관심 끌 만한 자극적인 기사만 내보내면 되는 거지.”

“요즘 추측성 기사 함부로 썼다간 명예훼손죄에 걸릴 텐데요.”

“명예훼손죄? 그거 법정에서 시비 가리려면 한세월이야. 승소하는 경우도 거의 없고. 현실이 이러니까 언론사 입맛에 맞게 현실을 왜곡, 호도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치색까지 입히기도 하잖아. 네티즌들이 기자를 기레기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알았어요. 기레기가 현실을 왜곡하든 말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우린 그림이나 감상해요. 여긴 시끄럽고 혼잡하니까 2층부터 봐요.”

“잠깐만.”

양이명이 관람객으로 가득 찬 1층 전시장을 둘러본 후 근처의 그림을 하나 살펴보았다.

“야, 이거 이강수 인기가 엄청난데. 작년 상하이에서 이강수 그림 샀을 때와 비교하면 그림값이 열 배도 넘게 올랐어. 아무래도 이강수 그림으로 재테크나 해야겠어.”

이강수 그림으로 재테크한다는 양이명의 말에 신유라는 뛸 듯이 기뻤다. 양이명과 결혼하면 양이명이 소장한 그림은 전부 자기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빠, 2층에 ‘밀레니엄이 시작된 그해 겨울 단상’이란 그림이 굉장히 마음에 들거든요. 그 그림 한번 볼래요?”

“2층에? 그럼 올라가서 볼까?”

“벌써 빨간 딱지 붙은 그림이 꽤 돼요. 팔리기 전에 빨리 가요.”

‘밀레니엄이 시작된 그해 겨울 단상’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든 신유라가 마음이 조급해졌는지 양이명의 손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 ‘밀레니엄이 시작된 그해 겨울 단상’ 앞으로 갔다. ‘밀레니엄이 시작된 그해 겨울 단상’에는 빨간 딱지가 붙어있지 않았다.

“이 그림이에요. 다행히 아직 팔리지 않았어요.”

“어디 보자. 밀레니엄이 시작된 그해 겨울 단상, 변형 30호.”

제목과 사이즈를 먼저 확인한 양이명이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양이명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양이명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해 겨울 내내 나는 할아버지 댁에서 대나무로 만든 스키를 탔지. 저 아이들처럼.’

기억이 양이명을 그해 겨울, 춘천 덕미리로 인도했다.

눈앞에 백설이 뒤덮인 외딴 마을, 덕미리가 펼쳐졌다.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없었던 양이명은 춘천 할아버지 댁에서 얹혀살았다. 밀레니엄이 시작된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바람이 끊임없이 불었고, 눈발이 공중에 휘날렸다.

아버지와 함께 살지 못했던 그해 겨울, 미친 듯이 스키를 탔다. 가슴 속 슬픔과 응어리진 울분이 눈발처럼 휘날려 사라질 때까지.

눈 덮인 외딴 마을, 개 짖는 소리만 정적을 깨웠던 풍경이 흔들렸다. 눈앞에 펼쳐졌던 덕미리가 아지랑이처럼 허공으로 흩어지고 그림 ‘밀레니엄이 시작된 그해 겨울 단상’이 나타났다.

“... 빠, 괜찮아요?”

신유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귓전에서 맴돌았다. 양이명이 자기 팔을 잡고 가만히 흔드는 신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응. 이 그림 마음에 들어. 이 그림 사야겠어. 기다리고 있어. 구매하고 내려올게.”

“아, 그, 그래요.”

양이명이 전시장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신유라는 전시장 밖으로 나간 양이명의 뒷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다 그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왜 넋 놓고 그림을 본 거야?’

신유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장영봉은 구매자와 계약서 작성하느라 전시장에 내려갈 틈이 없었다.

그림은 전시회 개막 한 시간 만에 22점이 팔렸다. 개막 전에 30점이 팔렸기 때문에 완판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싼 호당 가격이 판매 부진으로 이어질까 싶어 내심 우려했으나 지금은 그런 우려가 말끔히 씻겨나갔다. 특히 컬렉터도 아닌 일반인 밍우옌이 홍콩에서 날아와 ‘잠자리와 소녀’ 연작, 5점을 전부 구매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그림이 욕심나도 비행기 타고 외국에 가서 구매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이강수의 작품이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마력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장영봉은 마지막 손님과 작품 ‘밀레니엄이 시작된 그해 겨울 단상’의 매매계약서를 작성하고 한숨 돌리고 있었다.

“호호. 난 ‘동녘하늘에도 노을이 피는가’ 살래요. 제목이 의미심장하고 있어 보이잖아요.”

사무실 입구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여인의 웃음소리에 장영봉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사무실로 들어오는 몇 명의 여성을 발견한 장영봉은 눈을 크게 뜨고 나직이 외쳤다.

“핑크티티!”

이강수와 함께 웃으며 들어온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들은 인기 걸그룹 핑크티티의 다섯 멤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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