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7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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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8일 11시 30분경 인천국제공항 1층 입국장 출구.
출구 앞에는 누군가를 마중 나온 피켓 든 많은 사람이 북적였고, 여행에서 도착한 사람과 한국으로 여행 온 외국인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들 속에서 적당한 크기의 캐리어를 끌고 나온 롱코트를 입은 미모의 중년 여인이 출구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웰컴 밍우옌’이란 피켓을 발견하고 활짝 미소를 지으며 피켓을 든 빨간 패딩을 입은 20대 후반의 여성, 예술저널21 기자 김화영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입에서 영어가 흘러나왔다.
“미스 김, 생큐 유 포 피킹 미 업.”
김화영dl 유창한 영어로 대답했다.
“밍우옌 씨, 어서 오세요.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고마워요.”
“홍콩에서 밍우옌 씨가 흔쾌하게 인터뷰에 응해주셨는데 이렇게 보답할 수 있어서 다행인걸요. 호텔은 예약하셨죠?”
“네. 남산 근처 르네상스람다호텔이요.”
“그럼 체크인부터 해야겠죠?”
“물론이죠.”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휘이잉-
입국장 밖으로 나온 밍우옌이 쌩쌩 부는 겨울바람을 맞고는 몸을 한차례 떨었다.
“아유, 바람이 엄청 차가워요.”
“네. 한국 겨울은 꽤 추워요. 오후엔 좀 풀린다고 했어요. 옷은 따뜻하게 입고 오셨죠?”
“겨울 코트 입었는데 생각보다 더 추워요. 호텔에 도착하면 옷부터 더 입어야겠어요.”
주차장에 도착한 김화영이 자동차의 트렁크를 열었다.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은 밍우옌이 황급하게 조수석에 앉았다.
“아유, 살 것 같아요.”
겨울이 한국 가을 날씨와 비슷한 홍콩에서 온 밍우옌은 영하 2도에 불과했지만 체감 온도는 훨씬 추운 듯 몸을 떨었다.
“녹음기 켜도 괜찮죠?”
“아, 켜세요.”
김화영이 소형 녹음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김화영은 밍우옌을 에스코트해 주며 밍우옌을 밀착 취재하기로 했다. 그녀는 밍우옌 로드 인터뷰를 통해 ‘이강수 작품 구매기’ 같은 기사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강수 작품을 구매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한 밍우옌은 김화영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초행길인 서울을 에스코트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이강수 작품 구매기’ 같은 기사까지 써주면 자기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의 간접 광고가 되기 때문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서울은 처음인가요?”
“네, 처음이에요. 시간만 넉넉하면 며칠 관광하고 싶은데 가게가 너무 바빠서 내일 밤에 출국해야 해요.”
“서울 온 김에 여기저기 둘러보고 가면 좋을 텐데 아쉽겠어요.”
“내일 출국하기 전에 잠깐 둘러볼 예정이에요.”
부릉!
시동을 건 김화영이 서울을 향해 승용차를 몰았다.
“이강수 개인전 오프닝에 참석하려면 체크인하고 쉬지도 못하고 바로 선암갤러리로 가야겠네요?”
“호호. 맞아요. 미리 가서 오프닝 끝나면 마음에 드는 작품 골라야죠.”
평일의 도로 상황은 양호했다.
승용차는 막힘 없이 도로를 달렸다.
“밍우옌 씨가 와이옥션 경매에서 경합을 벌인 ‘졸업반 아이들’ 낙찰가가 한국에서 빅잇슈 됐는데 아세요?”
밍우옌은 차창 밖에서 펼쳐지는 이국 풍경에 시선을 주며 대답했다.
“아뇨. 잘 몰라요. 다만 이강수 화가가 신인이고, ‘졸업반 아이들’은 시작가보다 낙찰가가 워낙 높은 탓에 한국 언론이나 미술계에서 주목할 것이란 예상은 했죠. 실제로는 어땠나요?”
“잠깐이지만 인터넷상에서 센세이셔널한 이슈가 됐죠. 그리고 한 달 전에 ‘희망을 던져라’라는 한국의 청년 화가들이 대거 참여한 그룹전이 열렸는데 그 전시회에 이강수 씨가 50점이나 되는 작품을 출품했었죠,”
“그런 전시회가 있었군요. 난 몰랐어요. 알았으면 그때 왔을 텐데 말이죠. 작품은 다 팔렸나요?”
“아마 그때 왔으면 헛걸음했을 지도 몰라요. 홍콩경매 때문인지 아니면 호당 가격이 저렴한 편이라 그랬는지 몰라도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개막 당일 순식간에 완판됐거든요.”
“이강수 화가 그림을 보면 그림에 뭐라고 할 수 없는 마력이 느껴졌는데 역시 다 팔렸군요. 한데 그림이 저렴했나요? 호당 가격이 얼마였죠?”
“음, 홍콩달러로 환산하면 약 이만 달러쯤 되겠네요.”
김화영이 대충 암산해서 가격을 알려주자 밍우옌이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호당 이만 달러면 정말 저렴했군요. 왜 그렇게 싸게 출품했죠?”
“글쎄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은 이강수 화가 그림이 호당 이만 홍콩달러면 싼 가격은 아니었죠. 홍콩경매로 인해 이슈를 일으키긴 했지만 이강수는 신인화가에 불과하거든요. 그 때문에 호당 이만 홍콩달러는 적당한 가격이라고 할 수 있었죠. 하지만 이번 전시회에 출품한 가격은 호당 약 사만사천 홍콩달러로 올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저렴한 가격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군요.”
밍우옌이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호당 사만사천 달러면 꽤 비싸긴 하네요. 50호짜리 2점 밖에 못 사겠어요.”
“저는 한 점도 못 사는데 2점이나 산다니 밍우옌 씨가 부럽네요. 참, 뒤에 팸플릿 있어요. 작품 구매하는데 참고하세요.”
“고마워요.”
좌석을 빼 뒷좌석에 놓인 팸플릿을 집은 밍우옌이 다시 좌석의 위치를 맞췄다.
밍우옌이 눈빛을 반짝이며 팸플릿을 한장 한장 넘겼다. 그녀의 입에서 나직이 탄성이 나왔다.
“어때요?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나요?”
“아, 비록 팸플릿에 실린 사진이지만 ‘잠자리와 소녀’ 연작이 마음에 드네요. 울트라 바이올렛 보석 색 잠자리, 황금 잠자리, 진홍색 잠자리, 은처럼 빛나는 잠자리, 삼색 잠자리. 어린 소녀와 보석 같은 잠자리가 어우러진 모습은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멋진 세계네요. 원화로 빨리 보고 싶군요.”
“저도 ‘잠자리와 소녀’ 연작이 마음에 들어요. 그림이 독특할 뿐만 아니라 채색이 파격적이죠.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속 세상같이 환상적인 그림이에요.”
“이강수 화가 그림은 과거 내가 살았던 시골 평화로웠던 풍경을 떠올리게 해요. 그리고 환상적인 색채의 새처럼 커다란 잠자리는 미스 김 말처럼 정말 동화 속 한 장면 같아요.”
팸플릿을 쭉 살펴보던 밍우옌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여기 실린 작품은 대부분 20호 내외 사이즈네요? 왜 큰 작품은 싣지 않았을까요?”
“맞아요. 30호 이상 작품이 없죠?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저번 단체전도 그렇고, 이번 개인전도 전부 30호 이하 크기로 그렸다고 해요. 그래서 호당 가격이 사만사천 홍콩달러지만 제일 비싼 30호 그림이 백삼십삼만 홍콩달러 정도죠.”
“아, 그래요? 호호. 그럼 대여섯 점은 살 수 있겠어요. 잠자리와 소녀 연작이 여기 나온 5점이 다면 이걸 사서 레스토랑에 전시하면 딱 좋은데 말이죠.”
“잠자리와 소녀 연작이 저도 궁금해요. 가서 확인해보시죠.”
김화영이 엑셀을 밟았다.
부아앙!
김화영의 승용차가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빠르게 질주해갔다.
*
해왕식품 비서실.
파일을 들고 회장실에서 나온 박연경은 신유라를 불렀다.
“유라 씨, 이리 와봐.”
“네, 실장님.”
신유라가 다가오자 박연경이 손에 들고 있는 파일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회장님이 구매하시라고 한 그림 목록이야. 네 시에 이강수 화가 개인전 오픈하니까 지금 가서 대기하다 오픈하면 바로 장 부장한테 구매 목록 주도록 해.”
“알겠어요.”
“참, 유라 씨는 이강수 그림 꽤 산 것 같던데 몇 점이나 가지고 있어?”
“5점이요.”
“오, 5점이나 샀구나! 이강수 그림값이 무지막지하게 올랐는데 너무 부럽다.”
“그림값이 올라서 좋긴 한데 이번 전시회 보니까 20호가 일억 이천이나 해서 이젠 살 엄두가 나지 않아요.”
“맞아. 고작 석 달 전만 해도 100호가 이천이었는데 지금은 호당 육백이야. 적당히 올라야지 이건 올라도 너무 올랐잖아.”
“순전히 홍콩경매에서 칠억에 낙찰된 ‘졸업반 아이들’ 때문이죠, 뭐. 앞으로 일반 컬렉터는 사기 어려울 테고 큰손 컬렉터만 사겠지요.”
“그러게 말이야. 우리 같은 사람은 어디 겁나서 억대 그림을 사겠어? 그나마 유라 씨 덕에 이강수 그림 한 점 사 놓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얼마 전에 ‘DNA 남녀’가 온라인 경매에서 삼억 이천에 낙찰됐다는 기사 봤을 때 어찌나 놀랍고 기쁘던지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나중에 한턱 크게 쏠게.”
“호호. 알았어요. 전 다녀올게요.”
“아니, 여기까지 와 봐야 퇴근 시간이니까 그냥 거기서 퇴근해.”
“네. 감사합니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던 신유라가 문득, 의문의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저기, 실장님.”
“왜?”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구매할 작품을 정했으면 전화로 구매해도 되지 않나요?”
신유라의 질문에 박연경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후훗, 놀라지 마. 사전 구매는 이미 마감됐어.”
신유라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되물었다.
“네에? 사전 구매 마감이요? 그게 무슨 소리죠?”
“회장님은 며칠 전에 3점을 사전 구매하셨고, 오늘 5점을 더 구매하려고 연락했더니 현장 구매 작품만 남았다는 거야. 놀랍지 않니?”
“와, 그런 경우도 있는 거예요?”
“그런 작가가 가끔 있긴 해. 서수경 화가 알아?”
“서수경? 아뇨.”
“서수경은 독일로 유학 가서 한국의 풍경을 신표현주의 화풍으로 표현해서 뜬 화가야. 그녀가 독일 유명 갤러리 전속화가가 되고 언론과 화단에서 주목하고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때는 작품 주문이 밀려서 그녀 작품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었다고 했어. 이강수도 그런 것 같아.”
얘기하던 박연경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강수는 미술계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초신인 화가에 불과하고, 호당 육백만 원이나 하는 데도 컬렉터들은 투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봐. 이강수, 정말 이해가 안 돼.”
“글쎄요? 이해가 안 가긴 하지만, 돈만 있으면 저는 한 점 구매했을 거예요. ‘졸업반 아이들’ 호당 가격에 비교하면 아직도 저렴한 편이거든요.”
“사실 나는 칠억이라는 낙찰가가 그림의 가치가 반영된 건지 아니면 경매라는 경쟁심으로 인한 건지 판단이 안 서. 여윳돈이 있어도 억대나 하는 그림을 살 수 없을 거야. 한데 유라 씨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싸다고 생각하면 선뜻 산단 말이야. 오히려 그게 장점으로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신유라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제가 작년에 이강수 화가 작품 구매한 이후로 미술 공부를 좀 하고 있어요. 현대 미술의 흐름이나 서양미술사 같은 책을 보니까 제가 이강수 그림 산 경우는 소가 뒷걸음치다 쥐 밟은 거나 마찬가지더라고요. 그냥 운이 좋았던 거예요. 그런 운이 계속 따라주진 않죠. 전 가볼게요.”
“그래.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나가야겠다.”
퇴근 준비하고 밖으로 나가는 신유라의 뒷모습을 바라본 박연경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 이강수 그림을 5점이나 샀다고? 돈 없다더니 어느새 5점이나 산 거야? 지금까지 받은 월급 한 푼 안 쓰고 모아도 5점 살 돈은 안 될 텐데....”
무슨 돈으로 그렇게 많은 그림을 구매했는지 이해 안 가지만 자금 출처를 물어볼 수는 없었다.
‘설마 작년 홍콩에서 만났던 남자?’
모르긴 해도 가장 정답에 가까운 추론일 것이다. 홍콩에 갔다 온 이후로 입는 옷이나, 핸드백이 명품이나 명품에 버금가는 고급 브랜드로 바뀌었으니까.
중산층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자기와 비교하니 괜히 짜증 났다. 입사할 때만 해도 늘씬하고 예쁘기만 할 뿐 평범한 집안 출신 신입사원에 불과했는데 갑자기 상류층으로 가는 루트를 타고 있다.
‘역시 남자를 잘 만나야 해. 순식간에 신세 피는구나....’
박연경은 자기 처지가 초라하게 느껴져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남자랑 결혼할 건가? 가만, 그리고 보니 예식장에 서기 전에는 아니지. 풋, 예식장에 서려면 꽤 많은 고난을 넘어야 할껄.’
신유라가 아직 결혼하지 못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약간 위안이 되었고 마음이 편해졌다.
박연경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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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50분.
신유라는 오프닝 시각에 늦지 않게 간신히 선암갤러리에 도착했다.
“어머!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갤러리에 들어선 신유라는 오프닝 행사장에 가득 모여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을 보고 내심 놀랐다. 개중에는 금발에 키가 훌쩍 큰 사람도 보였는데 외국인이 틀림없었다.
‘오프닝에 외국 사람도 왔어?’
국제아트페어나 외국 유명작가 초청전시회가 아닌 국내 작가 전시 오프닝에 외국 관람객을 보기는 쉽지 않다. 한국 현대미술의 국제적인 위상이나 영향력은 미국이나 영국, 독일, 프랑스 등 문화 선진국에 비교하면 미미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메리카나 유럽은 지리적으로 멀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신유라는 이강수 전시 오프닝에 참석한 서너 명의 외국인을 발견하고 놀란 것이다.
신유라는 황급히 장영봉 부장부터 찾았다. 행사장에 모인 사람이 전부 그림 사려는 컬렉터는 아니겠지만,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지금 당장 장영봉에게 구매 목록을 전해줘야 안심될 것 같았다.
전방 오른쪽 끄트머리에 서 있는 장영봉을 발견한 신유라는 사람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잠시만요. 실례합니다.”
“왜 이렇게 밀어?”
슈트를 입은 한 40대의 사내가 인상을 쓰면서 고개를 돌려 신유라를 쳐다보고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서구형 외모의 소유자인 신유라의 눈부신 미모는 남자의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아름다웠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 괜찮소.”
신유라가 고개 숙여 사과하자 당황한 사내가 몸을 옆으로 비키며 신유라가 앞으로 갈 수 있게 해주었다.
“감사합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지켜보던 주변의 남자들이 신유라의 빼어난 미모에 감탄하며 분분히 길을 터주었다.
“와아!”
짝짝짝!
갑자기 실내가 떠내려갈 듯한 환호성과 우레 같은 손뼉 소리가 울렸다.
이강수의 세 번째 개인전이 개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