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70회
12월 4일 토요일 오후 3시.
일성빌딩 강수 작업실에 장영봉과 작업복 차림의 세 남자가 방문했다. 강수를 비롯해 서혁중, 고원철, 안범진이 한참 위 학번 선배인 장영봉을 깎듯이 맞이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그래, 반갑다. 한 작업실에 모여서 작업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이게 다 강수 선배 덕분이죠.”
장영봉은 강수의 개인전 작품을 운송하기 위해 거래처 표구 업체 직원과 같이 왔다. 장영봉이 함께 온 50대 초반의 중년 사내와 30대 후반의 두 남자를 강수에게 소개했다.
“이분들은 장인표구 사장님과 직원일세. 이 작가 작품을 책임지고 포장해서 운송해 주실 분들이지.”
장영봉이 소개한 장인표구의 사장, 귀밑머리에 희끗희끗 흰머리가 생긴 중년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오, 자네가 이강수 화가란 말인가? 우리나라 미술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는 인물이 이렇게 젊은 작가라니! 놀랍네 그려. 나는 장인표구를 운영하는 박동준이라고 하네.”
“지각변동이라니요? 칭찬이 과하십니다. 이강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강수의 손을 놓은 박동준이 양팔을 휘휘 내저었다.
“아닐세. 부탁해야 할 사람은 나지. 나야말로 잘 부탁함세. 포장할 작품은 어디 있는가?”
“이쪽으로 오시죠. 작품은 저쪽에 있습니다.”
강수가 미니 부스 있는 쪽으로 장영봉과 박동준을 안내했다.
“전시장 부스처럼 해 놓고 보관하고 있었구먼. 여기 있는 그림이 전부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인가?”
“예. 앞에 세 칸까지 보관한 그림이 제 작품입니다. 정확하게 115점입니다.”
미니 부스 공간 한 면 한 면에는 그림이 위에서 아래까지 촘촘하게 걸려있어 한 부스에 약 40여 점이 걸려 있었다.
장영봉이 박동준에게 포장 작업을 부탁했다.
“사장님, 여기 있는 115점. 손상 가지 않게 포장해서 갤러리로 옮겨주십시오.”
“장 부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림 하나 값이 수천만 원짜리인데 그림이 잘못되면 난 배상할 돈도 없어요. 내 모든 것을 걸고 흠집 하나 나지 않게 포장해서 운반하겠습니다. 포장 작업은 옆 공간에서 하면 될 것 같은데 괜찮겠죠?”
강수가 대답했다.
“예, 괜찮습니다.”
“그럼 우리는 자재와 공구 가져와서 포장하겠습니다.”
박동준이 두 직원과 작업실을 나갔다.
장영봉이 미니 부스에 걸려 있는 그림을 일견하고 탄성을 질렀다.
“호오, 이건 색채의 향연이구나. 강수야, 그림 좀 감상해야겠다.”
아름답고 환상적인 색채로 빛나는 그림을 전체적으로 살펴본 장영봉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야, 단시간에 115점이나 그린 것도 놀라운데 그렇게 빨리 그리면서도 퀄리티는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어. 정말 대단한데.”
장영봉의 그림 감상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고 있던 서혁중이 말했다.
“장 선배님, 저는 강수 선배 그림에서 고흐, 고갱, 세잔 같은 후기 인상파의 혁신적이고 자유분방한 특징이 느껴지는데요, 선배님이 보시기엔 어떤가요?”
“어, 동감이야. 강수의 그림에는 후기 인상파 특징이랄 수 있는 풍부한 질감이나 주관적인 색감, 강렬한 원색의 색채, 거칠고 생동감 넘치는 붓 터치 같은 요소들이 밑바탕에 녹아있지. 하지만 한국적인 소재와 인물, 친근한 자연과 시골 풍경, 강수만의 환상적인 색 표현력이 후기 인상주의 그림과 차별성을 갖추고 있어. 19세기 유럽 미술의 주류였던 고전미술의 흐름을 깨고 현대미술의 문을 열어 재낀 인상주의 특징의 탄탄한 토대 위에 신표현주의 꽃이 개화했다고나 할까? 하여튼 딱히 정의할 수 없는 뭔가 특이한 화풍인데 마치 색채를 초월한 듯한 새로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
고원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강수 선배 그림에서 뭔가 정의할 수 없는 특이한 점을 느끼고 있었는데 선배님 평가를 듣고 나니 이해가 되는데요. 모네가 그 유명한 ‘인상, 해돋이’를 살롱 낙선 전시회에 출품했을 때 비평가 루이 르로이가 모네의 작품명을 빗대서 ‘인상파 전람회’라는 비난과 조롱 섞인 기사를 발표했잖아요. 그 기사가 시발점 되어 인상파라는 새로운 미술사조가 생겼고요. 그것처럼 강수 선배 그림은 초인상파라고 하면 적당하지 않을까요? ‘초인상주의’의 탄생이죠.”
“초인상주의? 하하. 그것도 괜찮은데? 참, 너희가 강수 작품 어시스트해서인지는 몰라도 너희 그림도 강수 화풍하고 상당히 비슷한 초인상주의 풍인데 알고 있었냐?”
서혁중이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 처음엔 별생각 없었는데 작품 하다 보니까 강수 선배 화풍을 많이 따라 그린 것 같더라고요. 장 선배님도 그렇게 느꼈군요?”
“저도요. 비록 강수 선배 그림하고 비교할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죠.”
쑥스러워하는 두 후배를 보며 장영봉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후후, 작품 창작에 있어서 모방은 필연이야. 강수 화풍을 따르면서 각각의 개성적인 표현을 창조해가면 되지. 너희 그림에는 강수 작품과는 다른 그런 개성적인 요소가 투영되어 있어. 마침 미술잡지에 기고 글 하나 써야 하는데 이참에 너희 그림도 포함해서 초인상주의 화풍이 등장했다고 써야겠다.”
“앗, 저희 작품도 논평해 주시는 겁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서혁중과 고원철이 놀란 얼굴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조용히 선배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범진이 한마디 했다.
“저도 여기 와서 강수 선배님 그림 처음 보았을 때 야수파의 초현실적인 색채 표현과 비슷하면서 또 다른 색감과 질감에 엄청나게 충격 받았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을 그렸는데 그림을 보고 있으면 캔버스 속 세상으로 빨려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저도 노력해서 초인상주의 대열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장영봉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좋지. 미술사에 기록으로 남는 미술 유파의 형성은 일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 초인상주의 그룹이 만들어지는 건가? 우리 후배들의 향후 작품 활동이 기대되는구나.”
이날, 잡담처럼 나눈 대화에서 홍우대 출신 젊은 미술가가 주도하는 ‘초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사조가 탄생했다.
미술사에서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새로운 사조의 등장은 몇몇 작가가 모여 선언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작가들의 왕성한 창작 활동이 있어야 하고, 평론가의 작품 연구와 분석, 작품 해석과 의미부여 같은 학술적인 업적이 뒷받침 되어야한다. 또한 미술 관계자, 대중의 폭넓은 지지와 인정을 받아야 새로운 사조는 생명력을 획득한다.
자기의 화풍에 ‘초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사조까지 만들어낸 선후배를 보며 강수는 뭔가 흥분되고 가슴이 뛰면서도 멋쩍은 기분을 느꼈다.
묘한 흥분을 억누른 강수가 장영봉에게 물었다.
“장 선배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무슨 일인가?”
“네, 조언 좀 구할 게 있습니다. 한 달 보름 전에 크리스티 한국지부에서 전화가 왔는데요....”
강수는 10월 중순경 크리스티 한국지부에서 경매와 관련해 연락 온 내용을 설명했다.
“그때는 단체전이나 이번 개인전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별생각 없이 뉴욕경매에 세 작품을 출품하겠다고 했거든요. 한데 지금은 상황이 좀 바뀌었고, 혁중이와 원철이 의견도 일리 있다는 판단이 서더라고요. 선배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뉴욕경매 출품이라... 그런 일이 있었군. 일단 나도 두 후배 의견과 같아. 자네가 뉴욕경매에 참여하겠다고 했지만, 고한슬 팀장이 왜 뉴욕경매를 순순히 받아들였는지 조금 의문이 드는군.”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중단한 장영봉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이어 말했다.
“자네가 우리 미술계와 홍콩에서 이뤄낸 성과를 뉴욕 미술계는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을 걸세. 한국에서 아무리 인지도 높은 작가라고 해도 뉴욕에서는 신진작가일 뿐이고, 뉴욕 현대미술 경향이나 흐름과는 거리가 멀 테니까. 물론 자네 그림이 창의적이고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놀라운 작품이라 뉴요커나 컬렉터들도 지대한 관심은 보일 걸세. 다만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 맹점이라고 보이네. 뉴욕경매에 출품하기 전에 뉴욕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먼저 여는 게 나을 것 같네.”
“역시 뉴욕에서 개인전을 먼저 여는 것이 순서군요. 이번 크리스티 경매 출품은 취소해야겠네요.”
“취소할 것 없이 뉴욕경매는 일단 보류하고 준비한 세 작품은 홍콩경매로 바꿔서 출품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 홍콩은 뉴욕과 버금가는 세계 최대의 미술 시장으로 성장하지 않았나? 저번 와이옥션 홍콩경매에서 놀라운 성과를 냈고, 홍콩에서 자네 인지도가 급상승했기 때문에 이번에 크리스티 홍콩경매에 출품하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맞아요. 선배님, 홍콩경매에 다시 출품하세요. 뉴욕은 천천히 진출하고요.”
“선배님이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명성에 굶주린 것도 아닌데 머나먼 뉴욕까지 가서 맨땅에 헤딩할 거 없죠.”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은데요.”
고원철, 서혁중, 안범진도 한마디씩 거들며 장영봉 의견에 동조했다.
“알겠습니다. 고한슬 씨와 통화해서 홍콩 쪽으로 알아보죠.”
“이야, 크리스티 홍콩경매에 나가면 얼마에 낙찰될지 기대되는데요.”
“혁중 선배님. ‘카카오나무의 요정들’은 120호 정도 되는데 칠억은 뛰어넘지 않을까요?”
“그건 모르지. ‘졸업반 아이들’은 몇 명의 응찰자끼리 치열하게 경합해서 시작가보다 수십 배나 올랐거든. 다음 크리스티 경매에도 그런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렇군요.”
장영봉이 강수에게 말을 건넸다.
“음, 이 작가.”
“예?”
“그렇지 않아도 개인전 때 얘기하려고 했는데 뉴욕경매 얘기가 나왔으니 지금 말하지. 사실 우리도 내년에는 자네를 뉴욕 갤러리에 소개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네. 관장님과 얘기도 됐고. 내년 뉴욕에 진출하는 거 이 작가 생각은 어떤가?”
뉴욕은 성공이라는 가능성에 도전하기 위해 세계에서 몰려온 재능으로 무장한 예술가들이 넘쳐난다. 세계 최고의 미술 시장이자 세계 최고의 도시인 뉴욕에서 아무나 성공하지 못하지만, 성공에 대한 가능성이 있으면 현실이 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성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강수는 뉴욕에 진출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이미 한국과 홍콩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둔 마당에 굳이 실패 위험을 무릅쓰고 뉴욕까지 가서 더 큰 성공을 이루겠다고 새롭게 도전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기자가 언급했듯이 한국 미술시장은 좁다. 더 큰 성공이 아니라 더 큰 이상을 목표로 한다면 성공을 떠나서 뉴욕 진출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강수에게 뉴욕은 성공을 위해 도전하는 도시가 아니라 예술의 완성을 위해 언젠가 진출해야만 하는 최종적인 과제일 수도 있다. 그 시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리 찾아왔을 뿐이다. 강수는 자기 앞에 닥친 거대한 과제를 피할 생각이 없었다.
이제 자기 작품을 구매해 준 소장자를 떠나서 예술에 대한 도전과 투쟁의 길, 자기와 싸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강수가 담담하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
“뉴욕 진출. 예술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이죠. 제가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번 개인전이 끝나는 대로 뉴욕 전시를 목표로 작품을 구상하겠습니다.”
“알겠네. 나는 관장님과 상의해서 이 작가가 언제든지 뉴욕에서 전시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네. 한데 대략적인 전시 일정을 예상할 수 있을까?”
강수가 잠시 염두를 굴렸다.
‘뉴욕에서 네 번째 개인전이라? 무엇을 그리지?’
아직 네 번째 개인전에 관한 주제 설정이나 작품 구상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뉴욕에서 다음 전시를 개최한다고 생각하자 무엇을 그릴지 막막했다.
‘에이, 내가 전시하고 싶을 때 천천히 하면 되지 쫓기듯이 당장 결정할 건 없잖아?’
조급한 마음을 떨쳐내자 문득 조금 전, 장 선배와 두 후배가 농담처럼 얘기한 초인상주의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강수의 두뇌가 무섭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강수는 초인상주의의 개념을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갑자기 가슴이 펄떡펄떡 뛰었다.
‘좋아. 다음 전시는 현대 도시와 문명, 도시인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되 초인상주의의 개념을 결합해서 표현해보자. 전시는 여유 있게 내년 9월쯤 하면 되고. 내년 9월까지 적어도 30, 40점은 그릴 수 있겠지.’
강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한 듯 장영봉을 비롯해 후배 세 명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강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든 강수가 자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선후배를 둘러보며 씨익 웃으며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 작품은 내년 8월까지 준비하겠습니다. 전시는 9월 중에 아무 때나 개최하면 될 것 같습니다.”
“8월! 음, 8월까지 작품을 마감하면 9월 중순 이후 오픈할 수 있겠군. 그럼 전시는 9월 중순 이후로 잡겠네.”
“우와, 내년엔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까지 진출하는군요. 뉴욕 전시, 이거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데요.”
서혁중이 탄성을 지르며 너스레를 떨었고, 고원철과 안범진도 부러운 눈으로 강수를 우러러보았다.
강수가 장영봉에게 물었다.
“선배님,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같이 식사하시죠? 범진이가 제 작품 그리느라 너무 고생해서 킹크랩 사주기로 했거든요.”
“아, 이번엔 범진이가 강수 작품 어시스트했구나.”
장영봉이 포장 작업하는 세 사람을 보며 대답했다.
“킹크랩 나도 먹고 싶긴 한데 115점이나 되는 작품을 수장고에 정리, 보관해야 해서 오늘은 어렵겠고, 다음에 같이 가세.”
“네. 그러죠.”
장인표구 박 사장과 두 직원은 폭 7, 8cm쯤 되는 합판으로 각각의 작품에 맞게 액자처럼 틀을 짜서 작품 하나하나 정성껏 포장하고 있었다. 표구 전문가답게 세 사람의 손놀림은 정확하고 빨랐다.
장인표구 박 사장은 2시간 만에 그림 포장을 끝낸 후 장영봉과 함께 선암갤러리로 떠났고, 강수 일행은 뒤늦게 작업실에 도착한 송다린과 킹크랩 요리 집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