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69화 (169/1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69회

12월 초순.

계절은 어느덧 겨울로 접어들었다. 하늘은 눈이라도 올 것처럼 우중충한 잿빛이었고, 북서풍이 속살을 드러낸 산하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도시의 빌딩을 사납게 할퀴며 지나갔다.

일성빌딩 강수 작업실.

강수는 책상에 앉아 통화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네, 선배님. 들어가세요.”

세 번째 개인전 개막일이 닷새 앞으로 다가오면서 강수는 하루에 10통이 넘는 축하 전화를 받았다.

방금 대학 선배와 통화를 끝낸 강수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강수는 요즘 건강에 문제 있는 재벌가나 갑부가 있는지 매일 잠깐씩 인터넷을 검색하고 있었다.

‘오늘도 재벌가에서 입원했다는 기사는 없군. 언젠가는 기사에 뜨겠지.... 음, 한데 마냥 기다릴 게 아니라 다른 방법은 없나?’

강수는 치유마법을 남발하지 않기 위해 재벌이나 갑부를 치유 대상으로 잡았다. 하지만 과거 기사를 살펴보더라도 재벌가 총수나 로얄패밀리 구성원이 건강상 문제로 기사로 나온 적은 아주 드물었다. 2년 전 한진그룹 회장이 타계한 일도 미국 병원에서 세상을 뜬 후에야 뉴스에 나왔다. 그만큼 재벌가는 자기들 건강 문제를 감추고 있으며 최악의 상황이 될 때나 언론에 나온다고 봐야 한다.

‘레벨을 낮춰볼까?’

치유 대상을 재벌가가 아닌 일반 부자로 낮추면 후원할 수 있는 사람 찾는 일이 수월할 것이다.

‘아무래도 레벨을 낮춰야겠다. 어쨌든 급한 건 아니니까 검색하다 보면 곧 나오겠지.’

인터넷 창을 닫고 작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강수에게 서혁중이 다가왔다.

“선배님, 바쁘세요?”

“아니. 괜찮아.”

“그럼 사향노루 스토리 작업 끝났는데 최종적으로 검토해 주실래요?”

“어, 알았어.”

강수는 서혁중이 내민 원고를 받았다.

서혁중은 멸종동물을 지켜라 시리즈물의 제3권 사향노루 스토리를 2주 동안 무지개출판사 편집기획팀과 작업했고, 최종 결과물을 강수에게 제출한 것이다. 고원철은 제4권 여우 편을 작업하고 있었다.

멸종동물을 지켜라 1, 2권을 출간한 무지개출판사 편집기획팀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멸종동물을 지켜라 1, 2권의 출간을 앞둔 시점에 ‘졸업반 아이들’ 7억 낙찰 소식이 절묘하게 터져서 적은 광고비만으로 막대한 효과를 보았다. 또한 멸종동물을 지켜라 시리즈에 이강수가 공동저자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간에 화제가 되었고, 수달, 반달가슴곰 각각 선주문이 7천부나 쏟아지더니 출간 후에는 불티나게 팔려나가며 베스트셀러 1, 2위에 나란히 등극했다. 그리고 어린이 부문을 뛰어넘어 전체 베스트셀러에도 10위권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뿐만 아니라 숲 속 다람쥐 가족, 벙어리 황구 죽돌이, 공주를 구해줘! 등 이강수가 그린 동화책까지 주문이 밀려들었고,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전부 올라갔다. 그림동화책 베스트셀러 순위에 이강수 이름 들어간 작품이 절반이나 깔리는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고, 그 다섯 권을 전부 무지개출판사에서 출간했으니 경사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3권 사향노루의 스토리를 면밀하게 읽고 검토한 강수는 원고에서 눈을 뗐다.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에서 내쫓긴 사향노루 가족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고 마침내 역경을 이겨낸다는 스토리는 흥미진진해서 굳이 자기가 손볼 곳이 없었다.

‘이 정도 스토리면 내가 수정할 곳이 없지. 편집기획팀에서 열심히 하는군.’

고원철과 서혁중의 스토리텔링은 아직 서툴고 미흡하다. 흠잡을 데가 없는 스토리가 나오는 이유는 순전히 무지개출판사 편집기획팀이 심혈을 기울여 수정, 보완하기 때문이다. 강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수가 서혁중에게 다가가 원고를 넘겨주며 말했다.

“혁중아, 스토리 좋다. 수정할 부분이 없는데. 이대로 가면 되겠어. 스케치 하도록 해.”

“옙, 알겠습니다.”

“원철이는 어때? 끝나 가냐?”

“저도 오늘 중으로 끝내겠습니다.”

“그래. 원철이도 오늘 중으로 끝내고 내일부터 스케치 시작해야지. 수고해라.”

강수는 사무 공간 옆의 작업 공간으로 갔다. 그곳에선 안범진이 ‘카카오나무의 요정

들’을 작업하고 있었다. ‘카카오나무의 요정들’은 강수가 고심 끝에 지은 제목이다.

안범진이 그리고 있는 부분은 하단에 약간만 남아 있어 채색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카카오닙스 조각으로 그린 10여 그루의 카카오나무.

단색화 풍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무 사이에 있는 요정 같은 아이들을 볼 수 있다.

나무 뒤에 숨어있는 아이, 나무를 타는 아이, 나뭇잎 위에서 머리를 팔로 받치고 옆으로 누워있는 아이, 나뭇잎에서 태어나는 아이, 카카오 열매처럼 매달려 있는 아이, 나무와 합쳐지는 아이 등 카카오나무 사이사이에 7명의 아이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했다. 단색조의 깊은 색채와 어우러진 초현실적인 그림은 보는 이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 것이다.

‘저걸 다 그리고 색칠하느라 범진이 하고 다린이가 고생했지. 그리고 보니 좀 있으면 다린이가 오겠구나.’

송다린은 오후 3시 이후 오는데, 오는 시각은 일정하지 않았다.

삑삑삑삑!

출입문이 열리고 청아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안녕하세요. 송다린 왔습니다.”

“다린이 왔구나.”

송다린만 보면 얼굴에 웃음꽃이 피는 서혁중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투 컬러 패딩을 입고 들어온 송다린을 반갑게 맞이했다.

“밖은 어때? 쌀쌀하지?”

“네. 구름이 껴서 그런지 좀 추워졌어요. 여기 오니까 푸근하고 따뜻하네요.”

송다린이 패딩을 벗어 옷장에 넣었다. 몸에 착 달라붙은 목폴라 티를 입어 볼륨감 넘치는 몸매를 드러낸 송다린이 강수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서 와라.”

안범진이 붓질을 멈추고 이젤에서 물러났다.

“와, 얼마 남지 않았네? 범진아, 내일이면 끝나는 거 아니니?”

안범진이 송다린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내일 끝날 것 같다.”

“수고했어.”

“수고는 뭘. 강수 선배님, 전 가보겠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내일 작업 끝나면 맛있는 거 사주마. 범진아,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송다린 옆에서 알짱거리고 있던 서혁중이 기다렸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맛있는 거면 고를 거 뭐 있나요? 범진아, 내일 킹크랩 먹으러 가자. 어떠냐?”

“킹크랩 좋죠. 근데 너무 비싸서....”

“돈은 걱정하지 마라. 강수 선배님이 보통 부자야? 킹크랩 먹으려면 저녁이 좋은데 내일 저녁에 시간은 되고?”

“네. 됩니다.”

저녁 식사 결정권자인 안범진의 동의가 떨어지자 서혁중이 어떻게 할 거냐는 눈빛으로 강수를 쳐다보았다.

“난 괜찮아.”

“하하. 그럼 내일 저녁 킹크랩으로 정한 겁니다. 간만에 킹크랩 원 없이 먹게 생겼네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범진은 가방을 챙겨 나갔고, 작업할 분위기가 되자 서혁중이 힐끔 송다린을 쳐다보고 자기 자리로 갔다.

작업 공간에 강수와 둘만 남자 문득 송다린이 강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속에 복잡한 감정의 빛이 가득했다.

송다린의 갈망으로 가득 찬 눈을 마주본 강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다린아, 우리도 작업할까?”

송다린은 말없이 묵묵히 강수를 쳐다보았고, 강수는 슬쩍 송다린의 눈을 피해 이젤 앞으로 갔다.

강수는 자기를 바라보는 송다린의 눈에 담긴 감정의 빛을 모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송다린은 틈만 나면 자기에게 과다한 관심을 보였고, 사소한 접촉이지만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했다.

송다린의 과감한 접근을 느꼈기 때문에 강수는 송다린 앞에서 언행을 조심했다. 특히 송다린이 오해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약간의 틈만 보여도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는 소지가 다분했다.

강수가 팔레트를 들고 말했다.

“다린아, 내일 킹크랩 먹을 때 너도 갈래?”

“네. 그럼 저 빼놓으려고 했어요?”

“아니. 다린이 스케줄을 모르니까 물어본 거지.”

팔레트에 물감을 짜서 섞는 강수의 옆모습을 보며 송다린이 자기 이젤 앞으로 갔다. 그녀의 가슴 속에서 아릿한 서운함이 차올랐다.

자기에게 무관심한 남자가 어디 있었던가?

지금까지 자기의 선택을 받은 몇 명의 남자들은 뛰어난 외모, 건장한 체격, 최상류층의 집안 등 최고의 남자로 손색없었고, 그들은 자기를 여왕처럼 떠받들었다. 자기에게 사랑을 갈구했고, 간과 쓸개를 내줄듯이 헌신했다.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도 예외는 없었다. 한데 그런 금수저 출신 남자들도 몇 번 만나면 지겨웠고, 흥미가 사라졌다.

하지만 단 한명, 눈앞의 남자는 예외였다.

여자친구 김주하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기의 미모와 은근한 스킨십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선후배 사이에 그어진 선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었다.

‘휴우- 시간이 얼마 없어. 이대로 물러나는 건 너무 아쉬운데. 앞으로 남은 시간 일주일. 그 전에 뭔가 수를 내야겠어.’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친 송다린이 캔버스로 시선을 주었다.

*

“경화 왔느냐?”

마당에 주차하고 벤츠 GLC에서 내린 최경화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마당에서 걸어오는 아버지를 보며 뭔가 위화감 느꼈다. 곧 그 위화감의 정체를 인식하고 크게 놀라서 소리쳤다.

“앗! 아버지, 다리를 절지 않네요?”

최경화의 놀란 얼굴을 보며 최완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며칠 전부터 팔다리 저린 것도 없고 걷는 것도 똑바로 걸을 수가 있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른쪽 팔다리가 저리지 않아요?”

“그래. 아무렇지도 않아. 몸이 아주 개운해.”

“정말이요?”

“그래. 내가 왜 없는 말을 하겠느냐?”

“아버지, 갑자기 몸이 좋아진 이유가 뭐예요?”

“글쎄다? 오랫동안 안마원에 다녔잖니. 그게 효험을 본 모양이지.”

“그럴 리가 없어요. 아버지가 안마원에 다닌 게 벌써 4년이에요. 그동안 상세가 조금씩 악화했지 호전되지 않았잖아요?”

마당으로 나온 성백희 여사가 두 사람에게 다가와 말했다.

“우연인지 몰라도 이 군이 네 아빠 머리하고 어깨 지압해주고 난 후부터 좋아진 거 같더라.”

“네? 이 군이 지압을 해 줘요? 이 군이 누구죠?”

“이 군이 누구긴. 주하 신랑감 이강수 말이다.”

“이강수요? 이강수가 지압해서 좋아졌다는 게 무슨 소리죠?”

“허허. 임자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구려.”

“아버지. 무슨 소린지 알아듣게 얘기해주세요.”

“이 군이 머리하고 등을 지압해 줬는데 아주 시원하고 상쾌하더구나. 그날 밤은 잠도 아주 잘 잤지. 그리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찌릿찌릿 한 게 없어지고 팔다리 움직이는 것도 조금 편해졌어. 지금은 너도 봤다시피 완전히 좋아졌지. 지압이 끝나고 머리가 어찌나 시원하던지 오죽했으면 내가 이 군한테 약손이라고 했다.”

“약손이라고요? 전 이 군이 아버지한테 지압하고 나서 저린 증상이 없어졌다는 게 도통 이해 안 되거든요. 지압 한번 했다고 국내 최고라는 제성병원도 치료하지 못한 뇌졸중 후유증이 사라질 리가 없잖아요.”

“이 군이 머리 안마하는 법도 가르쳐 줬단다. 그래서 네 아비가 매일 열 번씩 빠지지 않고 머리 안마를 하고 있는데 그것도 효험이 있었나보구나.”

“네 엄마 말대로 우연히 그런 일이 생긴 건지 아니면 이 군한테 신통력이 있는 건지 우리가 어찌 알겠느냐? 날도 추운데 안으로 들어가거라. 들어가서 얘기하자.”

“네.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쇼핑백 꺼내고 갈게요.”

최경화는 절룩거리지 않고 정상적인 걸음으로 걸어가는 최완제를 믿기지 않다는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강수가 지압해서 저렇게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풋!”

헛웃음이 절로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지압 한 번 했는데 5년이나 계속된 저림 증상이 없어졌다는 게 말이 돼? 정말 안마원에 꾸준히 다녀서 정상으로 돌아온 건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봐도 아버지의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데 대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한 최경화는 트렁크 문을 열고 쇼핑백 두 개를 꺼내 옆으로 온 목천댁에게 건넸다.

“한우하고 송이버섯이에요. 저녁에 어머니, 아버지 드실 수 있게 요리하세요.”

목천댁이 송이버섯이 든 쇼핑백을 열어보며 탄성을 질렀다.

“아휴- 이 귀한 송이를 가져왔네요. 호호. 저는 요리 준비할게요.”

“네. 수고해주세요.”

탁!

트렁크 문을 닫은 최경화는 아버지의 몸이 건강해져서 너무나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찜찜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강수 손이 약손이라고? 그럴 리는 없고 진짜 우연일까?’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수 년 동안 저림 증상과 불편한 걸음걸이를 두 눈으로 목격한 최경화는 오늘 아버지의 기적 같은 놀라운 변화를 우연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스스로 납득되지 않았다. 우연인지 아니면 이강수에게 신통력이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알아야 궁금증과 찜찜함이 해소될 것 같았다.

‘검증을 어떻게 하지. 순희한테 소개해봐?’

최경화는 아파트 부녀회 감사인 김순희와 친한 사이였고, 서로의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근래 들어 김순희는 남편이 허리 디스크로 밤에 힘을 못 써 스트레스가 심했다.

‘이강수가 지압했는데도 허리 디스크가 그대로면 우연이겠지. 만약 허리가 말끔하게 나으면....’

생각해보니 그것도 이상했다.

지압으로 현대 의학도 치료하지 못하는 뇌졸중 후유증을 치료하는 신통력이 있으면 의사를 해야지 화가 할 이유가 없었다.

‘의사나 한의사 면허만 따면 떼돈을 버는데 화가를 뭐 하러 해?’

물론 이강수에게 신통한 능력이 있다고 가정해도 김순희 남편의 허리를 치료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이강수의 의사에 달려있을 것이다. 놀라운 능력이 있어도 스스로 숨기면 알아낼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일단 이강수를 만나서 얘기해봐야겠다. 아버지도 제성병원에 모시고 가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밀검사부터 해봐야지.’

최경화는 서울에 올라가는 대로 이강수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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