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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마법사-167화 (167/1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67회

11월 22일 월요일.

로얄바스 본사 팀장 회의에 참석한 후 자기 책상으로 돌아온 김동민 부장은 자료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절전 모드가 되어 있는 검은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대출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느라 심적 갈등이 심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옥션 사이트에 그림을 올리긴 했지만, 입찰자가 있는지 확인할 때마다 실망과 함께 갈등의 골이 더 깊어졌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막상 입찰자가 한 명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그림을 잘못 샀나 하는 후회도 되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경매를 확인했을 때 김동민은 가슴 떨리는 기쁨을 맛보았다. 경매로 올린 두 작품에 한 명씩 입찰자가 생긴 것이다. 동생 때문에 며칠 동안 속을 태웠던 김동민은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날아갈 것 같은 마음으로 편하게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김동민은 마우스를 클릭해 절전모드를 해제하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입찰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해보고 싶었다.

옥션 사이트에 접속한 김동민은 자기 경매페이지를 열었다.

‘엇!’

결과를 확인한 김동민의 눈이 커졌다.

갈림길, DNA 남녀 두 작품 다 입찰자가 한 명씩 늘었고, 입찰 금액은 각각 5천100만 원, 8천100만 원이었다.

‘이러면!’

시작가에 낙찰되어도 고마운 일인데 뜻밖에 경합이 붙었다. 김동민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이제 낙찰은 될 수 있을까라는 단계에서 최종적인 낙찰가가 얼마일까의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김동민이 내심 기쁨에 들떠 있을 때 결재판을 든 40대 중반의 사내가 김동민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부장님, 주말에 좋은 일 있으셨나봅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응? 왜 내 얼굴이 안 좋았나?”

“저번 주에 무슨 걱정이 있었는지 안색이 조금 어두워 보였거든요.”

박 과장이 내민 결재판을 받아든 김동민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내가 그랬어? 이거 참, 박 과장 눈은 속일 수가 없구먼.”

회사에서 부하직원은 상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상사가 웃어야 사무실 분위기가 활기차고 부하직원들이 따라 웃고, 상사의 기분에 맞춰 일을 진행해야 일처리가 원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직장인 대부분이 상사의 눈치를 본다는 설문조사도 발표된 바 있다.

<눈치 보는 사회>저자 장진수 사회심리학자는 저서에서 “권력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그 때문에 부하직원은 “상사의 기분이 어떤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수시로 눈치를 보게 되는데, 이처럼 권력자의 눈치를 보는 것은 본능적인 행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내 밥줄이 걸려 있는 직장에서 상사의 권력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눈치 빠른 박 과장이 지난주 목요일부터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심적 갈등으로 고뇌하고 있는 상사 김동민의 상태를 모를 리가 없었고, 일부러 결재를 며칠 늦추었다.

상사의 분위기를 파악해 결재판을 내민 박 과장은 지적사항 없이 결재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뚜우- 뚜우-

인터폰이 울렸다.

결재를 끝내고 ‘바스라운지’ 욕실 플랫폼 행사 일정을 살펴보던 김동민이 수화기를 들었다.

“김동민입니다.”

[김 부장, 바쁜가?]

“아닙니다. ‘바스라운지’ 플랫폼 행사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간단하게 할 얘기가 있으니까 내 방으로 오게.]

“네, 상무님.”

상무의 부름을 받은 김동민은 복장을 점검하고 상무실로 갔다.

“상무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거기 앉아.”

김동민이 소파에 앉았고, 적당히 배가 나온 50대 후반에 눈매가 부드럽고 매부리코를 한 상무, 강호성이 상석에 앉았다.

“김 부장, 오늘 저녁에 시간 되나?”

“예. 시간 있습니다.”

“잘됐군. 오늘 저녁에 장한토건 황 전무 만나는데 김 부장이 대작 좀 해줘야겠어.”

“아, 예.”

국내 건설 시공능력 60위권에 위치한 중견 건설업체 장한토건은 상당한 매출을 차지하는 자사의 중요한 거래처다. 장한토건 사주의 인척으로 실세의 한 명인 황 전무가 만나자고 하면 을의 위치에 있는 로얄바스 측에서 접대를 안 할 수 없다.

술 접대는 고역이지만, 싫다고 할 수 없었다.

“나는 중간에 빠질 테니까 김 부장이 책임지고 끝까지 가도록 하게.”

경매 경쟁자의 등장으로 기분이 고양된 김동민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네, 상무님. 제가 끝까지 접대하겠습니다.”

“좋아. ‘바스라운지’ 행사 점검해서 변경 사항 있으면 보고하고.”

“지금 점검하고 있습니다. 변경 사항 정리해서 보고하겠습니다.”

“그래, 됐어. 나가보게.”

“예.”

상무실을 나와 자기 자리로 돌아온 김동민은 저녁에 고역스러운 접대를 해야 하지만 대출에 대한 고민을 털어버릴 수 있어서 의외로 마음이 가벼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황 전무가 지저분하게 놀기는 했지만 장한토건에 납품하는 물량을 보면 절대 기분 상하게 접대할 수 없었다.

김동민은 신사업이자 회사의 동력이 되고 있는 ‘바스라운지’ 진행 사항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바스라운지는 대기업의 인테리어 시장 진출로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중소 인테리어 업체들이 로얄바스의 검증을 거친 경쟁력 있는 제품을 전시, 판매하는 공간이다. 로얄바스를 비롯해 욕실 제품 생산 업체와 인테리어, 리빙 브랜드 등 80여개 업체의 600여 품목 프리미엄 제품을 전시, 판매하고 있었다.

바스라운지는 3년 전에 시작한 로얄바스의 신사업 영역으로 사업 개시 후, 가입 회원사가 꾸준히 늘고 있으며 소비자 사이에서도 욕실 인테리어 트렌드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프리미엄 욕실 인테리어 시장에서 사업 확장을 성공적으로 일궈냄으로 인해 몇 년간 역신장하며 하락하고 있던 매출이 작년부터 반등하면서 ‘바스라운지’는 로얄바스의 신성장 동력이 되었다.

김동민은 바스라운지 참여 업체 임원과의 미팅, 제품 검토, 사업설명회 참석 등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자기 책상에 돌아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휴우-”

심신에서 기운이 빠져나갔는지 갑자기 피로가 몰려들었고,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부하직원은 모두 퇴근했고, 장한토건 황 전무와 약속 시각은 오후 7시 30분. 1차는 일식집, 2차는 룸살롱으로 갈 것이다.

책상을 정리한 김동민은 잠깐 시간이 남아 경매가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옥션에 접속했다.

경매 페이지를 열어 입찰가를 확인한 김동민이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입을 쩍 벌렸다.

DNA 남녀의 입찰가가 1억3천3백만 원까지 치솟아 있었다. 김동민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갈림길을 클릭했다.

‘으헉! 일억천!’

갈림길은 시작가 5천만 원의 2배가 넘은 1억천만 원이었다. 아랫배에서 뜨거운 기운이 불끈 치솟아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심신을 잠식한 피로가 들불처럼 전신으로 퍼져나간 뜨거운 기운에 말끔하게 사라져버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10킬로미터는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흐흐흐.”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괴소를 흘리던 김동민이 시각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 6시 40분. 경매 종료까지 3시간 넘게 남았다. 남은 시간 동안 얼마가 더 상승할지 몰라도 최종가는 지금보다 상승할 것이 분명했다.

취미로 시작한 예술품 컬렉팅이 10년 만에 제대로 한 건 터트렸다.

문득 2, 3년 전에 읽었던 인터넷 기사 한 대목이 떠올랐다. A라는 컬렉터가 4천만 원에 산 게르하르트 리히터 10호 작품이 10년 후에 17억 원을 호가해 엄청난 수익을 거뒀다는 내용이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난 1년도 안 돼 7배 가까운 수익을 내고 있으니까 A라는 컬렉터 못지않게 대박 쳤다고 볼 수 있어. 크크크.’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김동민은 1초, 1초 줄어드는 경매 시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뚜우- 뚜우-

인터폰이 울렸다.

‘상무님이군.’

“네, 상무님.”

[황 전무 접대하러 가야지. 주차장으로 내려오게.]

“예.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김동민은 아쉬운 눈길로 모니터를 바라보다 컴퓨터를 종료했다.

반코트를 걸친 김동민은 서둘러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

진득한 어둠이 깔린 깊은 밤, 네온사인 불빛이 명멸하는 건물 입구에서 흐트러진 옷차림의 사내 두 명이 밖으로 나왔다. 밤색 반코트를 걸친 사내는 김동민이었고, 김동민보다 체격이 큰 중년 사내는 황 전무였다.

황 전무와 길가에 서 있는 벤츠로 걸어간 김동민이 재빨리 벤츠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전무님, 오르시죠.”

“그래.”

뒷좌석에 앉은 황 전무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전무님,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어, 강 상무는 무어가 바쁘다고 먼저 내빼고 말이야. 김 부장이 나 땜에 욕봤지?”

“아닙니다. 전무님 덕분에 저도 즐거웠습니다. 대리기사가 편하게 모실 겁니다. 편히 쉬십시오.”

“수고했어. 김 부장도 들어가요.”

“예엡!”

탁!

김동민은 뒷문을 닫았다.

빛의 터널 속으로 빨려들어 가듯이 서서히 멀어지는 승용차를 지켜본 김동민이 시선을 거두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갔다. 술은 적당하게 마셨지만, 술기운이 전신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접대를 끝낸 탓에 술은 조금 취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술기운이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는지 경매 결과에 대한 기대감이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는지 분간이 가지는 않았다.

시간은 어느덧 밤 11시다.

‘경매는 끝났겠군.’

경매 결과가 너무나 궁금했다.

김동민은 개찰구를 지나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승강장에는 적지 않은 사람이 전동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투피스를 입은 오피스룩 차림의 여성 뒤에 줄을 선 김동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경매 결과를 확인하려고 하니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후우-”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 김동민이 인터넷 창을 열고 옥션에 접속했다. 김동석 앞에 서 있던 여성이 찡그린 얼굴로 뒤를 힐끔 쳐다보더니 코를 막으며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뒷머리를 긁적인 김동민은 개의치 않고 옥션에 로그인했다.

‘어디 낙찰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보자....’

예상대로 두 개의 그림은 낙찰되었다.

‘낙찰가가 얼마야. 삼억이천이백만 원??’

낙찰가를 확인한 김동민은 낙찰가를 인지하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으헉!”

낙찰가격이 뚜렷하게 뇌리에 각인되는 순간 너무 놀라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DNA 남녀의 낙찰가는 3억2천2백만 원이었고, 갈림길의 낙찰가는 2억9천3백만 원이었다. 상상도하지 못한 놀라운 낙찰가였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김동민은 부들부들 떨며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빠앙-

열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왔다.

스크린도어가 열렸고, 멍한 얼굴의 김동민은 여성의 뒤를 따라 전동차에 올라탔다. 전동차가 출발할 때 몸이 한쪽으로 쏠리며 넘어질 뻔한 김동석은 정신을 차리고 빈 노약자석에 앉았다.

‘꿈은 아니지? 그럼, 그럼. 꿈은 아니지.’

김동석은 지지대 파이프를 만져보고, 의자도 톡톡 두들겨보았다.

‘이렇게 감각이 뚜렷한데 꿈일 리가 없지.’

술기운 때문인지 몸이 붕 떠 있는 느낌이 들고, 갑자기 머리가 어질거렸지만 손으로 만지고, 두드리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분명히 꿈이 아니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주변을 더듬거리던 김동민은 양손이 비었고, 스마트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스마트폰이 어디 갔어?”

김동민은 빈 양손을 보고 허둥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어나서 스마트폰을 찾았지만 좌석에도 바닥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김동민이 반코트와 양복주머니, 바지주머니를 차례로 뒤졌지만 스마트폰은 나오지 않았다.

‘뭐, 뭐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스마트폰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카톡!

‘어?’

톡이 온 소리를 들은 김동민이 반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스마트폰은 거기에 있었다.

‘폰을 여기에 넣고 몰랐다니. 내가 꽤 취했구나.’

쓴웃음을 지은 김동민은 아내에게 톡을 보내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젖혔다. 전동차 천장에 달린 등이 빙글빙글 돌았고, 덜컹거리며 달리는 전동차가 마치 공중부양을 해서 날아가는 것 같았다.

김동민은 깃털처럼 가벼운 몸이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환상적인 기분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꿈에서 깨는 것은 아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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