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65회
“이게 뭐야? 시작가 팔천만 원? 미친놈.”
20대 후반의 2년 차 직장인 현정택은 시작가 8천만 원에 올라와 있는 그림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욕부터 내뱉었다. 시작가 8천만 원짜리 그림이면 보통 작가의 그림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림 그린 화가를 확인했다.
‘이강수? 이강수가 누구야? 듣보잡 화가 그림이 팔천만 원이나 할 리는 없을 테고.’
현정택은 그림에는 관심 없고 그저 new 카테고리에 8천만 원짜리 경매가 떠서 장난인지 아니면 0을 잘못 써넣은 것인지 확인하려고 클릭해본 것뿐이다.
현정택은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이강수를 써넣고 검색했다.
‘헉! 무슨 기사가....’
화가 이강수에 관한 기사가 모니터에 좌르륵 떠올랐다. 의외의 결과에 놀란 현정택은 기사를 하나씩 클릭해서 읽어보다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와, 우리나라에 이렇게 잘나가는 젊은 화가가 있었나? ‘졸업반 아이들’이 칠억에 낙찰됐으니 경매에 올린 그림이 팔천이면 비싼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희망을 던져라 전시회에서는 호당 이백팔십만 원에 책정해서 팔았어? 뭐야, 단순하게 계산해도 100호짜리 그림이니까 이억 팔천인데?”
이강수라는 화가의 그림값을 확인하고 나니 팔천에 올려놓은 그림값이 오히려 싸 보였다.
‘헐, 근데 이걸 누가 사냐?’
그림 경매 사이트야 컬렉터들이 주 고객이니 8천만 원에 올려도 판매가 가능하겠지만, 옥션은 일반 생활용품을 다루는 경매 사이트다. 자기처럼 그림에 관심 없는 일반인이 응찰할 리 없었다. 더구나 new 카테고리에서 사라지면 이강수 그림이 경매에 등록됐다는 것조차 수많은 경매 물품 속에서 묻히고 말 것이다.
일반인이 넘볼 수 없는 놀라운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 이강수 그림을 메인 화면에 노출하는 프리미엄으로 등록한 것도 아니고, 일반으로 올린 이유가 궁금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현정택은 검색한 기사를 쭉 살펴본 후에야 판매자의 의도 아니 심정을 대충 유추해볼 수 있었다.
‘그림값이 단기간 급등해서 차익을 노리거나 급전이 필요했나보군. 시간이 많았으면 판매가 유리한 서울옥션 같은 예술품 경매 사이트에 올렸겠지. 한데 DNA남녀를 낙찰받으면 호당 이백팔십만 원에 팔수 있는 건가?’
8천에 낙찰받아서 2억 8천에 팔수만 있으면 대박이었다.
‘나야 돈이 없어 못 사지만 돈에 여유 있으면 투자해 볼만한 것 같다. 카페에 올려놓자. 투자할만하다고 판단하면 알아서 사겠지.’
현정택은 수십만 명의 회원이 가입해 활동하고 있는 재테크 카페, ‘10년 안에 20억 벌기’의 자유게시판에 올리기 위해 카페에 접속했다.
‘제목을 뭐라고 할까?’
잠시 머리를 굴린 현정택은 제목을 타이핑했다.
-2억을 내 품에?
‘제목이야 아무렴 어때. 본문이 중요하지.’
현정택은 자기가 발견한 이강수 그림 경매 정보를 요약해서 본문을 작성하고, 몇 개의 기사는 링크 걸어놓고 자유게시판에 올렸다.
*
인터넷 매체 '머니이코노미' 기자 이규오는 기사 소재를 찾아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습관적으로 들리는 재테크 카페에 들어가 게시판을 살펴보았다. 쓸만한 정보는 재가공해 기사로 쓰기 위함이다.
‘발품 팔면 대박 물건이 보인다. 매주 일요일 새벽 묘지 헤매며 수익 내는 방법? 이건 무슨 엽기적인 제목이냐. 지하 대형 상가 사서 내 돈 안 들이고 월 120만 원 버는 비법? 2억을 내 품에?’
내 돈 안 들이고 월 120만 원 버는 비법은 대충 감이 왔다.
제목을 클릭해서 본문을 확인한 내용은 자기가 추측한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지하 1층 150평 상가를 감정가의 60%에 낙찰받아 3.6% 금리로 낙찰가의 90%를 대출받고, 기존 임대인과 계약해 받은 보증금과 월세로 낙찰금과 이자를 제외하면 차익 120만 원 남는다는 내용이었다.
경매 고수가 아니면 투자하기 쉽지 않은 케이스다. 이 경험담의 맹점은 장기적인 임대 여부와 대출금 3억5천5백이다. 지하상가라 만약에 공실 되면 곧바로 매달 은행 이자를 생으로 물어내야 한다.
이규오는 ‘2억을 내 품에’를 클릭했다.
‘그림 경매?’
옥션 사이트에 8천만 원짜리 그림이 경매에 올라왔다는 정보였고, 호당 가격을 최근에 있었던 전시회에 출품된 호당 가격으로 매기면 2억8천이므로 차액이 2억이나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림 재테크는 자기 분야가 아니다. 하지만 예술품을 전문으로 경매하는 서울옥션이나 와이옥션에 출품하지 않고 그림과는 거리가 먼 일반 옥션 사이트에 8천만 원이라는 거액으로 등록한 점이 특이했고 흥미를 유발했다.
‘이강수? 아, 칠억의 사나이.’
이규오는 한 달 전 홍콩에서 센세이셔널한 낙찰가를 기록한 이강수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때 언론에서 이강수를 꽤 주목했고, 낙찰가가 거품이라는 주장도 있었는데 내 분야가 아니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 소장자가 일반 사이트에 이강수 그림을 왜 올렸는지 몰라도 기사로 쓸 수는 있겠어.’
그림에 관한 본격적인 재테크 기사보다 가볍게 읽는 가십 기사의 소재로 적당했다.
이규오는 경매로 올라온 이강수 그림에 관해 기사 쓰기로 결정하고 자료를 검색해 훑어보기 시작했다.
*
11월 27일 토요일.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었고 전국적으로 기온이 뚝 떨어져 칼바람이 불었다.
올해도 기나긴 겨울이 닻을 올리고 자연의 법칙을 쫓아 위대한 항해를 시작했다. 항해가 끝날 때쯤이면 겨울은 봄의 언덕에서 닻을 내릴 것이다.
충남 목천읍 인근 저수지 옆으로 난 도로에 단단한 엔진음을 토해내며 랜드로버가 달려왔다.
저수지를 지난 랜드로버는 북서풍이 비켜간 듯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로 들어섰다. 산자락 아래 형성된 마을은 삼십여 호에 불과했다.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 황량한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오빠, 저기예요. 보여요?”
강수 옆에 붙어 팔짱 끼고 있던 주하가 산자락 아래 정원이 잘 가꾸어진 터가 넓은 한옥을 가리켰다.
“어디.”
김주하가 가리킨 산자락 아래에는 동양화에 나올법한 아늑한 정취가 풍기는 한옥이 쏟아지는 햇볕을 받으며 자리하고 있었다. 한옥은 본채와 별채, 두 채가 있었다. 머리를 숙여 한옥을 살펴본 강수가 말했다.
“마당이 상당히 넓은 것 같다?”
“네. 한 2백 평은 될걸요?”
“그렇구나.”
김주하의 외할아버지댁에 도착한 랜드로버가 대문이 열려 있는 마당 안으로 들어가 멈춰 섰다. 넓은 마당은 화단과 작은 텃밭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뒷좌석에서 내려 집을 살펴본 강수는 고풍스러운 멋이 풍기는 한옥의 자태에 속으로 감탄했다.
‘이야, 대청, 툇마루, 처마, 나뭇결이 살아 있는 나무 기둥, 기와. 전부 멋있네.’
차가 도착한 소리를 들었는지 부엌에서 후덕한 인상의 50대 여성이 나와 차에서 내리는 주하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마을에 사는 가정부 목천댁이었다.
“어머, 주하왔구나. 오랜만이네. 예전에 봤을 때는 고등학생처럼 풋풋했는데 어쩜 이렇게 예뻐졌니? 연예인 해도 되겠어.”
“헤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잘 지내셨어요?”
“그럼, 그럼. 조용한 시골구석에 사는데 무슨 일 있겠어? 잠깐만.”
목천댁이 강수를 힐끔 쳐다보고 재빨리 안방에 대고 소리쳤다.
“백희 아주머니, 외손녀 왔어요. 나와 보세요.”
안방 문이 열리고 지긋한 나이의 할머니가 대청으로 나왔다.
피부가 햇볕에 검게 타고, 주름이 가득한 얼굴의 김주하 외할머니, 성백희 여사였다. 고운 태가 나는 70대 중반의 성백희 여사는 젊었을 때 미인 소리를 들었음에 틀림없었다.
“외할머니!”
주하가 대청으로 올라가 성백희 여사를 껴안았다.
“토끼 같은 내 새끼, 어서 오너라.”
성백희 여사 앞으로 걸어간 강수가 허리를 깊이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화가 이강수입니다.”
“주하 어미한테 얘기는 들었다네. 자네가 주하랑 결혼할 젊은이로군.”
“예, 그렇습니다.‘
“늠름하고 신수가 훤한 게 보기 좋구나. 밥은 먹었고?”
“네. 점심 먹고 출발한걸요.”
성백희 여사의 질문에 대답한 주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어떠세요?”
“응, 괜찮아. 몸은 좀 불편해도 산책도 하고 그러는 걸.”
“주하 왔느냐?”
기운이 노쇠한 목소리와 함께 170cm 정도의 신장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노인이 안방에서 대청으로 천천히 나왔다. 노인은 오른쪽 다리를 조금 절룩였다. 그의 얼굴은 살이 없어 홀쭉해 광대가 도드라졌고, 피부에는 검버섯이 가득했다.
김주하의 외할아버지 주완제였다.
“외할아버지!”
주하가 앞으로 가 주완제의 비쩍 마르고 쭈글쭈글한 손을 잡았다.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초췌해진 주완제의 모습을 본 김주하가 놀란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서 금세 눈물이 글썽거렸다.
“허허, 인석아 오랜만에 봤으면 반갑게 웃어야지 왜 울려고 해.”
“흑, 잘 드시지 왜 이렇게 살이 빠지셨어요? 전에는 이렇게 마르지 않았잖아요?”
“나이를 먹다 보니까 살이 좀 빠진 것뿐이야. 아직 죽을 때가 된 것 같지 않으니까 내 걱정 말어. 네 신랑감은....”
주완제가 말끝을 흐리며 옆에 서 있는 강수를 쳐다보았다.
강수가 주완제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어르신, 처음 뵙습니다. 제가 주하 신랑감 이강수입니다.”
“허허, 그래?”
강수의 위아래를 훑어본 주완제가 왼팔로 강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
“듬직하게 생겨서 마음에 드는구먼. 건넌방으로 들어가자.”
건넌방은 거실처럼 넓었는데 소파와 책상과 책장 등이 깔끔하게 자리해 있었다.
일행이 자리에 앉자 목천댁이 다반에 다기를 가져와 탁자에 내려놓고 나갔다.
“녹차 가져오라고 했다. 한잔씩 마시도록 할까?”
“네. 제가 따라드릴게요”
김주하가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녹차를 따랐다.
오른팔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주완제는 왼손으로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음미했다. 그의 왼팔이 가늘게 떨렸다.
“너희 결혼식 날짜는 잡았고?”
“날짜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내년 4월 중순에 결혼식 올릴 예정입니다.”
“허허, 몇 개월 남지 않았구나. 주하처럼 예쁘고 심성 착한 배필은 흔치 않지. 자넨 운이 좋구먼.”
“네. 저도 주하를 만난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 마음 잊지 말고 평생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살도록 하게나. 살다 보면 느끼겠지만 그게 진정한 행복이야.”
“예. 어르신. 주하를 평생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그래야지.”
이때, 밖에서 차 엔진음이 들려왔다.
따스한 눈으로 주하를 바라보던 성백희 여사가 입을 열었다.
“여보. 신 씨가 온 모양이에요. 이따 얘기하고 안마 받으러 갈 준비하세요.”
“알았어.”
“안마요? 외할아버지는 안마 받으러 어디로 가세요?”
“읍내에 안마사가 있어서 거기로 간단다.”
“안마 받고 차도가 있으신 거예요?”
“그래. 오른쪽 반신이 찌릿찌릿하고 저린데 안마 받고 나면 저린 게 좀 덜 하고 몸도 시원하다고 해서 매일 한 시간 정도 전신 안마 받고 있지. 그래서 신 씨가 저이를 모시고 안마원에 다녀온단다. 신 씨한테 수고비는 주고 있지만 일부러 시간 내서 도와주니 고맙지.”
“네에.”
강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완제를 따라 대청으로 나갔다.
마당에 SUV가 주차해 있고 검은색 잠바를 입은 60대 초반의 사내가 대청으로 걸어와 말했다.
“어르신, 준비하고 나오세요.”
“그려. 잠깐 기다리게. 두루마리만 걸치고 나오지.”
강수를 발견한 신 씨가 호기심허린 눈으로 강수를 훑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자넨 누군가?”
“안녕하세요. 이강수라고 합니다.”
“이강수?”
“주하 신랑될 젊은이야.”
“아저씨, 안녕하세요?”
주하와 함께 대청으로 나온 성백희 여사의 대답에 신 씨가 주하에게 시선을 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네가 주하구나. 꼬맹이 때 보았는데 벌써 숙녀가 되서 결혼하는 거니? 세월 참 무섭게 흐르는구나. 결혼은 언제 하는가?”
“내년 4월 중순에요.”
“하하. 아주머니, 이거 미리 축하드립니다.”
안방으로 들어간 주완제가 회색 두루마리를 걸치고 나왔다. 신 씨가 주완제를 부축해 조수석에 태우고 성백희 여사에게 인사했다.
“아주머니, 다녀오겠습니다.”
“잘 갔다 와. 운전 조심하고.”
“네. 걱정 붙들어 매세요.”
부릉!
시동을 건 차가 대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
이날 저녁 7시 30분.
마을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였고 군데군데 보안등이 길을 밝히고 있었다.
강수는 목천댁이 준비해준 저녁을 두 어르신과 먹고 주하와 마을을 한 바퀴 산책한 후 마당으로 들어섰다. 대문을 잠그는 주하에게 말했다.
“주하야, 먼저 방에 가 있을래.”
“오빠는 왜요?”
“어르신한테 지압 좀 해 드리게.”
“지압이요?”
“실은 대학 다닐 때 인체 구조에 관해 공부하면서 겸사겸사 잠깐 지압을 배웠거든. 지압하면 혈행에 도움이 돼.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 효과는 크지 않겠지만 어르신한테 지압 좀 해드리려고.”
“아, 오빠가 지압도 하는구나. 전혀 몰랐네.”
“지압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곧 갈게.”
“아녜요. 나도 오빠가 지압하는 거 보고 싶어요. 같이 들어가요.”
“응?”
강수는 주하와 목천에 동행하기로 한 후 어떤 식으로 치유마법을 사용할지 고민했다. 환자와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은 전통 민간요법이랄 수 있는 지압과 안마가 제격이었다. 고민 끝에 안마보다는 지압이 한의학적인 전문성을 띤다는 결론을 내렸고, 인터넷을 검색해 지압에 관한 기초적인 내용을 습득해 두었다.
특히 뇌졸중은 머리와 관련 있는 질환이기 때문에 머리에 위치한 혈 자리와 등에 위치한 혈 자리를 파악해 두었다. 머리와 등을 지압하며 치유마법을 사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치유마법을 사용할 때 주하가 동석하는 것은 계획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