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64화 (164/1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64회

노원역 근처의 한 호프집.

몇몇 탁자에 손님이 자리해 있고, 실내는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창가의 탁자에는 두 중년 사내가 치맥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정장 차림의 오십 대 초반의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작업복 차림의 사십 대 후반의 사내였다.

“형, 나도 웬만하면 형한테 도와달라는 소리 하지 않지만, 이번에 돌아오는 어음 막지 못하면 회사가 부도나서 어쩔 수 없이 부탁하는 거야. 회사가 부도나면 우리 식구는 길가에 나앉을 거라고.”

“창민아, 내가 돈이 있으면 안 도와주겠냐? 나한테 이억이라는 돈이 어디 있어야 도와주지.”

“내가 형 돈 빌려서 안 갚은 적 있어?”

김창민의 형 김동민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휴우- 그럼 없냐?”

“그래. 지난번에 빌린 돈은 아직 다 갚진 못했지만 거의 갚고 조금 남았잖아.”

올해 4월에 5천을 빌려 간 동생은 아직 2천만 원을 갚지 못했다.

“순호가 대학생이라 형 생활 빡빡하다는 거 나도 알아. 염치없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줘. 이번 부도만 넘기면 지금 600세대 아파트 공사하고 있어서 이자, 원금 필히 다 갚을 수 있어.”

동생이 가져온 공사계약서는 확인했다. 아파트 공사하고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렸지만, 아파트 전기공사는 하청에 하청이 관행이다. 중간 업체가 부도내고 잠적하면 아래 하청업자가 줄 도산한다. 공사계약서를 확인했어도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대출이 내 맘대로 되냐? 하여튼 길게 얘기해봐야 똑같은 말만 반복하니까 그만 일어나자.”

참담한 얼굴의 김창민이 의자에서 일어선 김동민을 올려보며 울상을 지었다.

“어떻게 할 건데?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형한테 손 벌리지 않을게. 제발.”

“모르겠다. 생각은 해 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형, 열흘이야. 26일까지 꼭 대출받아야해. 그렇지 않으면 우린 아파트 공사도 못 하고 완전히 파산한다고.”

“알았으니까 내일도 새벽에 나가봐야 할 텐데 들어가자.”

김창민이 자기의 친형, 김동민의 손을 와락 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형, 나도 더 알아볼게. 나 좀 살려줘.”

김동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뒤를 김창민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따라 나갔다.

동생과 헤어진 김동민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근처 아파트로 향했다.

아내는 예민하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자기의 무거운 표정과 착잡한 마음을 금방 알아챌 것이다. 김동민은 평상시의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마음속 근심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아파트에 도착해 거실로 들어선 김동민은 다가온 아내에게 슬쩍 물었다.

“순호는 왔어?”

“아직이요. 12시나 돼야 온대요. 당신 뭐 안 먹어도 돼요?”

“응. 배부르게 먹고 왔어.”

“술은 많이 안 마셨네요?”

“거래처 박 부장이 몸 관리한다며 많이 안 마시더라고. 씻을게.”

양복을 벗어 아내에게 건네준 김동민은 아내가 자기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로 들어온 후에야 김동민은 미간을 찡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김동민은 아내에게 동생 만났다는 사실을 숨겼다. 몇 년 전부터 동생 창민이가 몇 차례 돈을 빌려 갔다. 다행이라면 올해만 빼고 그 전에 빌려 간 돈은 꼬박꼬박 갚았다. 그 때문에 아내는 동생과 만난다고 하면 좋게 보지 않았고, 으레 금전 문제일 거라고 생각했다.

샤워하고 평상시의 기분을 회복한 김동민은 화장실에서 나온 아내가 준비해 놓은 실내복을 입었다. 김동민은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하는 아내를 피해 서재로 쓰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서재에는 꽤 커다란 두 개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었다.

50호짜리 그림은 제목이 ‘갈림길’이고, 100호짜리 그림 제목은 신비한 에메랄드그린 바탕의 ‘DNA 남녀’다.

갈림길은 길모퉁이에 있는 한옥을 중심으로 길이 좌, 우, 중앙으로 갈라지는 골목의 갈림길을 걸어가고 있는 세 명의 인물을 그린 작품이다. 특이하게 각각의 갈림길을 걷는 세 명의 남녀는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서로 친분이 없는 인물들이 분명한데 갈림길 골목 분위기와 인물의 느낌이 인생의 한 자락을 보는 것만 같아서 마음에 와닿았다.

DNA 남녀는 멋지고, 심오한 그림이다.

캔버스 중앙에 나선 구조의 선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형체가 놓여 있다.

언뜻 보면 DNA 나선 구조의 타원형 물체로 보인다. 하지만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남녀가 기이한 형태로 뒤엉켜 허공에 부양해 있는 형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 같은 DNA 사슬 수십 가닥이 공중에 부양해 있는 남녀에게 뻗어 선처럼 연결되어 있다.

DNA 나선이 뒤엉켜 타원형으로 형상화된 남녀 모습은 그 형상만으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생명이 잠들어 있는 알 같기도 하고 탯줄을 달고 있는 태아 같기도 하다. 대부분의 생물이 암컷과 수컷으로 분리되어 진화해 온 생물학적 본성을 초현실적 기풍에 담아냈다는 생각도 든다.

“저 그림들은 얼마나 할까?”

최근 이강수의 그림값은 급상승하고 있었다.

‘졸업반 아이들’이 홍콩에서 7억 원에 낙찰되는가 하면 얼마 전에 있었던 한국 청년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한 단체전에 출품한 작품은 호당 280만 원 선에서 판매되었다. 김동민은 이강수 그림값의 가파른 상승세에 놀라는 한편 내심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젠장, 몇 년 가지고 있으면 더 오를 게 분명한데 이걸 팔아야 하나?’

만약 호당 280만 원 선에서 팔수만 있다면 단기간에 엄청난 수익을 얻는다.

‘호당 280만원으로 치면 DNA 남녀가 이억 팔천? 100호라고는 해도 그 가격을 다 받을 수는 없겠지. 게다가 수수료도 줘야 하고....’

김동민은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한 10여 년 전부터 주로 젊은 작가의 저렴한 예술품을 구매해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하는 취미 생활을 해왔다. 신인작가의 저렴한 예술품이라고 해도 한 점에 일이백만 원이 넘기 때문에 고급 취미 인지라 아내 눈치를 보았다.

그 때문에 많이 사지는 못했지만, 일 년에 한 작품은 구매해 왔다.

김동민이 이강수 그림을 2점이나 소장하게 된 계기는 한국청년화가 12인전 때문이다.

작년 여름.

김동민은 구미에 맞는 저렴한 작품을 찾기 위해 선암갤러리에서 개최한 청년 작가들의 전시를 관람했다.

그때 이강수 작품을 처음 접했다. 이강수의 그림에서 평범함 속에 강렬한 힘을 내포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  독특한 분위기가 인상에 남았으나 들어본 적 없는 신인화가였고, 그림값이 다른 화가보다 상대적으로 비싸서 고민 끝에 그림은 구매하지 않았다. 구매는 하지 않았지만 작품 활동을 지켜보며 기회가 되면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한 갤러리를 소개하고 현지 반응과 갤러리의 작품 판매 성적표에 관련한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에서 이강수가 갤러리윤 소속으로 아트페어 상하이에 출품한 다섯 작품이 전부 팔렸다고 짧게 언급한 글을 보았다.

이강수를 언급한 그 짧은 글에 김호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친구 그림을 사가겠다!’

기사에 쓰인 몇 줄의 글에 불과했으나 자기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김동민은 이강수의 개인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올해 봄과 가을에 열린 전시회에서 열심히 모아놓은 비상금을 털어서 과감하게 한 점씩 구매한 것이다.

‘그림을 갤러리 통해서 팔면 중계 수수료가 너무 비싸고, 수수료가 적은 온라인 옥션에 올려봐?’

그림을 온라인 옥션에 내놓을 수는 있지만, 일반인이 값비싼 예술품을 인터넷으로 구매할 것 같지 않았다. 시작가가 일이백도 아니고 수천만 원이다. 하지만 낙찰이나 유찰, 어떤 결과가 나오든 손해 볼 일은 없었다.

김동민은 그림을 살펴보며 얼마를 받으면 팔 수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이천만 원에 산 DNA 남녀는 팔천쯤 받으면 되겠지? 갈림길은 천이백에 샀으니 오천 정도면 적당하고.’

구매가의 약 4배 가격으로 시작가를 정한 김동민은 옥션에 이강수의 그림을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온라인 옥션 사상 가장 비싼 물품의 하나가 될 것이지만 얼마에 낙찰될지 몰라도 낙찰되면 원하는 가격을 받아서 만족이고, 유찰되면 그저 약간 실망스러울 뿐이다.

책상에 앉은 김동민은 옥션에 접속해 개인회원을 판매, 구매 개인회원으로 전환하고 내 물품팔기로 들어갔다. 카테고리를 살핀 김동민은 취미 카테고리에서 그림 항목을 찾고 ‘갈림길’과 ‘DNA 남녀’를 등록했다. 경매 기간은 5일로 설정했다.

그림을 옥션에 등록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막상 이강수의 그림 2점을 등록해놓고 카운트되고 있는 시간을 보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김동민이 쓴웃음을 흘렸다.

‘참나, 그림값이 팔천만 원인데 무슨 기대를 하고 있냐? 어차피 대출을 알아봐야 할까?’

이때 잠옷 차림의 김동민 아내가 문을 열고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뭐 하고 있어요?”

마우스를 클릭해 화면 전환한 김동민이 말했다.

“그냥, 인터넷 보고 있었어. 피곤하면 먼저 자.”

“자려면 같이 자요. 괜히 나중에 와서 잠 깨우지 말고.”

“그럴까?”

컴퓨터를 끈 김동민은 아내의 손에 이끌려 안방으로 들어갔다.

*

전시회가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한 강수는 작업실에서 세 번째 개인전 작품을 그리고 있었다. 강수 옆에서는 후배 안범진이 스케치가 끝난 캔버스에 가는 붓으로 물감을 입히고 있었다. 물감을 입히는 작업은 스케치보다 훨씬 고되고 단순한 반복 작업이었다.

인내심과 끈기가 부족하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20호 캔버스에 바탕칠을 끝낸 강수가 카카오닙스 조각에 색을 입히고 있는 안범진에게 시선을 주었다. 안범진은 강수의 눈길도 의식하지 못한 채 물감칠하는데 혼을 쏟아붓듯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할 적업을 대신하느라 고생하는구나. 이거 좀 미안하네.’

알바비를 준다고는 하지만 돈을 떠나서 단순 반복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니 안범진과 송다린의 노고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보상해 줄 건 돈밖에 없구나. 이 작품은 시작가를 10만 달러로 하고 만약 유찰되면 시작가에서 인센티브를 계산해 줘야겠어.’

인센티브는 10%다. 시작가 10만 달러의 10%는 대략 1,150만 원이다.

‘이 정도 보상해 주면 그나마 좀 덜 미안하겠군.’

강수는 두 후배가 열정적으로 쏟아붓는 노고에 어울리는 보상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우웅!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주하였다. 강수는 안범진이 작업하는데 방해되지 않게 복도로 나가 통화를 연결했다.

[오빠, 작업 중?]

“응. 방금 바탕칠 끝내고 잠깐 쉬고 있었어.”

[헤헤. 그럼 통화 괜찮겠다. 저기, 나 목천 외할아버지 댁에 갔다 올게요. 이번에 내려가면 이삼일 있다 올 거예요.]

“이삼일? 목천이면 독립기념관 있는 곳이네?”

[맞아요.]

“목천엔 왜? 무슨 일 있어?”

[아뇨. 외할아버지 뵌 지 삼 년 정도 됐거든요. 오랜만에 인사드리고 오려고요.]

항상 밝고 활기 넘치는 주하의 목소리에서 왠지 침울하고 슬픈 기색이 느껴졌다.

이상한 느낌이 든 강수가 물었다.

“외할아버지는 연세가 어떻게 되셔?”

[올해 여든 둘이요.]

“건강은 어떠시고?”

[그게.... 좀 안 좋아요. 6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나서 어느 정도 회복됐지만 후유증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세요.]

“아, 그래?”

‘외할아버지 건강이 안 좋아서 목소리가 침울했구나.’

뇌졸중이면 뇌혈관에 문제가 있어서 생기는 병이다.

북한산에서 머리를 다친 후 투팍탈의 치료로 회복된 강수는 자기의 놀라운 변화가 궁금해 뇌에 대해 공부했고, 뇌졸중에 대해 기본적인 내용을 알고 있었다.

뇌졸중은 출혈성 뇌졸중과 허혈성 뇌졸중, 두 가지가 있다.

출혈성 뇌졸중은 뇌동맥 벽이 압력 때문에 파열하여 뇌 조직 내부에 혈종이 형성되고, 주위의 뇌 조직을 압박함으로써 생기는 상태이며, 허혈성 뇌졸중은 뇌동맥의 일부가 좁아지거나 막혀서 그 동맥을 통하여 산소와 영양을 공급받는 뇌 조직이 괴사를 일으킨다고 한다.

도봉산 자락에서 머리 다친 할아버지를 도와줬을 때처럼 치유마법으로 치유할 수 있는 질환이었다. 문제는 마나 소모가 꽤 많다는 점이다. 인챈트마법 사용 후 마나가 고갈되었고, 고작 두 번 마나회로를 수련한 상태였다. 뇌졸중을 치료하기에는 마나가 턱없이 부족했다.

‘마나가 고작 30%밖에 안 찼어. 치유마법을 쓰려면 마나하트를 가득 채워야 하는데....’

마나하트에 마나를 완충하려면 매일 수련해도 주말이나 되어야 한다.

“주하야, 외할아버지댁에 같이 가면 안 될까? 외할아버지 건강이 안 좋다고 하시니 더 나빠지기 전에 뵙고 인사드리고 싶거든. 주말에 시간 낼 수 있는데.”

[어? 오빠랑 가면 저야 좋지만 12월에 개최하는 개인전이 멀지 않았잖아요? 시간 괜찮아요?]

“개인전 작품은 100점 넘게 완성해 놓았어. 몇 점 못 그려도 문제 될 거 없어. 주하만 괜찮으면 토요일 오전에 같이 가자.”

[음, 좋아요. 토요일에 같이 가요. 그럼 이따 저녁에 오빠 보러 갈게요. 그때 얘기해요.]

“그래. 저녁에 보자.”

강수는 마나회로 수련 시간을 두 시간씩 늘려 금요일까지 마나를 완충하기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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