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63화 (163/1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63회

두 사람이 한 뼘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았고 허공에서 눈빛이 교차했다. 고개만 조금 숙이면 바로 박영지의 입술을 가질 수 있었지만, 염진구의 목은 나무토막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염진구의 전신은 석상처럼 굳어졌다고 해도 좋았다.

박영지의 눈에서 서글픈 빛이 떠오른 후 사그라졌다.

작고 도톰한 박영지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고,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보.”

염진구의 팔을 놓은 박영지가 되돌아 걸어갔다.

‘바보라고!’

박영지의 말 한 마디에 염진구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게 요동쳤다. 전신을 동여매고 있던 번민의 올가미가 폭발할 것 같은 심장의 박동과 함께 투두둑 끊겨나갔다.

“난 바보 아니라고!”

염진구가 응어리를 토해내듯 비명처럼 외치고 저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박영지에게 달려갔다.

“박영지, 잠깐.”

박영지의 팔을 잡은 염진구가 박영지를 뒤돌려 세워 와락 가슴에 품었다. 염진구의 품에 안긴 박영지가 머뭇머뭇 팔을 들어 염진구의 허리를 안았다. 박영지의 팔이 자기 허리를 안은 사실을 깨달은 염진구는 용기백배해서 박영지의 입술을 덮쳤다.

박영지는 염진구의 입술을 거부하지 않았고 눈을 스르르 감았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염진구의 뇌리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펑! 펑!

염진구의 뇌리에서 찬란하게 폭죽이 터졌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한 감촉이 전신으로 파도처럼 밀려갔다. 전신의 감각이 화들짝 깨어나 낯설고 생소하지만,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감촉에 환호했다.

꽤 긴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염진구가 고개를 들었고, 박영지를 품에 깊이 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떨어질 줄을 몰랐다.

“카악, 퉷!”

골목길을 걸어가는 한 사내의 갑작스러운 가래침 뱉는 소리에 깜짝 놀란 박영지가 염진구의 품에서 떨어졌다.

행인이 지나가길 기다린 염진구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기, 영지야.”

“응.”

“성탄절에 눈이 오면 같이 눈길 걷자. 괜찮지?”

박영지가 염진구를 올려보며 말했다.

“좋아. 근데 눈이 오지 않으면?”

“어? 눈이 오지 않으면... 눈이 오지 않아도 같이 걷자.”

“후후. 그럼 우리 정식으로 사귀는 거네?”

“그래.”

박영지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염진구의 손을 잡았다.

“이제 역까지 바래다줘.”

염진구는 가슴에 충만한 기쁨을 느끼며 보드랍고 따스한 박영지의 손을 꼭 쥐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내 짝이 있었는데 그걸 몰랐어. 영지 말이 맞잖아? 바보.’

*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난 강수는 겨울 등산복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텅텅 비어버린 마나하트에 조금이라도 마나를 채워야 마음이 놓인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초겨울의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뺨을 스치는 바람은 매서웠다. 동 입구에서 스트레칭으로 간단하게 몸을 푼 강수는 허연 입김을 뱉으며 수련 장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훅훅! 훅훅!”

강수는 바람처럼 가볍게 달려나갔다.

평탄한 길을 달리는 것은 너무 쉽다. 비탈진 산을 타기 시작하면 몇 배로 힘들어지고, 호흡과 다리의 고통이 수반된다. 하지만 폐가 터질 듯하고, 팽창한 다리 근육이 파열할 것만 같은 고통은 어느 순간 서서히 사라지고, 기분은 나는 듯이 가뿐해진다.

비탈진 산길을 수지 않고 달린 강수는 여명이 터올 무렵 수련 장소에 도착했다.

“후우흡, 후우-”

강수는 잠시 가쁜 숨을 골랐다.

배낭에서 수건을 꺼내 땀을 닦은 강수는 낙엽이 지기 시작하는 저 아래 산자락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대부분 나무는 모든 나뭇잎을 떨어내고, 나목이 되어 산의 속살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자연은 우주의 법칙에 순응하고, 우주의 흐름에 따라 변할 뿐이다. 자연에 속한 모든 것들 역시 마찬가지다. 오직 인간만이 자연을 거스르고, 오히려 자연을 정복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 외적 존재일까?’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는 자연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는 인간의 도전을 보면 그럴지도 몰랐다.

‘후후, 인간은 언젠가 우주를 정복하겠다고 할지도 몰라.’

인간은 태양계 정복을 코앞에 두고 있다. 태양계를 정복하고 나면 수천 년, 수만 년 후가 될지 몰라도 아마도 우주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우주라....’

강수는 고개를 들어 어둠이 걷히며 가물가물 사라지고 있는 별을 보았다.

저기 어딘가에 자랄인의 삶의 터전인 자랄 행성이 있다. 자랄인은 우주의 기운인 마나를 이용해 마법 문화와 마나 문화를 발전시켰다.

‘설마 자랄인과 만날 일은 없겠지?’

외계 문명과의 조우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할 수 없다. 몬스터가 우글거리고 봉건주의 형태의 제국이 지배하고 있는 자랄인과 접촉하면 상호 우호나 평화보다는 전쟁이 일어날 공산이 크다.

‘호킹 박사의 우려처럼 정복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고, 유년의 끝처럼 만물의 영장이라고 차처하는 불쌍한 인간을 더 높은 영적 존재로 진화시켜 줄 수도 있겠지.’

시간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만, 미래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불확실성의 영역이다.

사념을 접은 강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쿠션 방석을 깔고 앉아 수련을 시작했다.

*

금요일 밤 방송하는 DBC ‘한 주간 문화계 소식’에서 ‘한국 청년예술가들이야, 희망을 던져라’ 전을 소개했고, 전시가 주말을 끝으로 폐막한다는 소식을 전국에 알렸다. 방송의 파급력이 컸는지 주말이 되자 한가람 미술관에 수많은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관람객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품을 감상하고, 비교적 저렴하게 책정된 예술품을 구매해 갔다. 2,000여 점의 전시 작품 가운데 개막 후 3일간 850여 점이 팔린 상태에서 주말에 550여 점이 판매되었다. 전시 작품은 최종적으로 1,450여 점이나 판매되는 성적표를 거두었다. 출품작 전부 완판된 작가도 많았고, 대부분 작가는 10점 이상의 작품이 판매되었다. 강하아트에서 개최한 첫 전시회임에도 불구하고 관람객 수나 작품 판매에 있어서 놀라운 성과를 이뤄낸 전시회였다.

11월 14일 일요일 저녁 7시.

‘한국 청년예술가들이야, 희망을 던져라’ 전이 드디어 폐막했다.

뜻밖의 성적을 받아든 참여 작가들은 친구들과 지인들, 혹은 삼삼오오 짝지어 성공적인 전시를 자축하는 뒷풀이를 하기 위해 식당이나 갈비집, 호프집으로 흩어졌다.

대관자 사무실에는 강수를 비롯해 염진구, 이동석, 김종대, 장범일, 고원철, 서혁중, 우민석, 김주하, 임해영, 소효정,  이유빈 등 대학 동기와 전시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다.

사무실에 모인 강수 일행은 염진구 주위에 몰려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염진구를 지켜보았다. 염진구는 얼굴에서 생기가 돌며 빛이 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전시회의 성공 때문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염진구는 판매 프로그램을 마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동석이 참지 못하고 대뜸 물었다.

“진구야, 얼마나 팔렸냐?”

염진구가 주위에 몰려 있는 학교 동기와 강수 일행을 둘러보더니 입가에 실없어 보이는 미소를 흘렸다. 염진구의 실없는 모습을 본 기억 없는 이동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흐흐, 매출이 상당해.”

염진구가 매출을 옮겨 적은 쪽지를 보며 대답했다.

“일단 1,450 점이 팔렸고, 총매출은 43억8천5백80만 원이야.”

“우와! 엄청나다.”

“43억이나 되냐?”

“어제 매출이 주춤한 것 같던데 오늘 어느 정도 회복한 거 같다?”

“그래. 어제보다 1억8천이나 더 팔렸다.”

서혁중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자그마치 1,450 점이나 팔렸는데 43억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래요? 게다가 강수 선배님 그림값 빼면... 25억 정도에 불과하네요.”

서혁중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자 이동석이 버럭 소리쳤다.

“인마, 너 강수 밑에서 돈 좀 벌더니 배가 불렀다? 1,450점에 25억이면 박리다매이긴 해도 일반 관람객이 이삼백만 원짜리 예술품 사기가 쉬운 줄 알아? 더구나 죄다 신인작가들인데 작품 구매해 준 걸 감사해야지 뭔 소리냐?”

김종대가 이동석의 말에 수긍했다.

“동석이 말이 맞아. 비록 작품 가격이 저렴하지만 일반 관람객과 폭넓게 소통했다는 게 중요하지. 신인작가가 수준에 맞지 않게 작품가 높게 매겨봐야 팔리지도 않고 갤러리스트들도 좋게 보지 않아. 작품 가격은 꾸준히 활동하면서 경력 쌓이면 저절로 올라갈 거고.”

서혁중이 머리를 긁적이며 넉살스럽게 말했다.

“아,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한데 1,450점이나 팔렸잖아요. 어마어마하게 팔린 건데 판매액이 25억이라 그냥 해본 얘기예요.”

이동석이 서혁중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그래. 네가 몰라서 한 얘기는 아니겠지. 좀 유명하다 싶은 화가는 그림 한 점에 수억, 수십억이나 하니까 이해한다. 진구야, 매출은 그렇다 치고 수익은 얼마나 났냐?”

“총매출에서 강하아트 몫은 10%인 4억3천8백5십8만 원이고. 투자금 빼면 1억8천만 원 정도 수익 났다. 수익금에서 소득세 38% 떼야겠지.”

“이야, 판매 대금에서 고작 10%밖에 받지 않아도 매출이 많으니까 수익이 1억8천이나 되는구나. 팔리긴 정말 많이 팔렸다.”

이번에는 김종대가 질문을 던졌다.

“거기서 강수 혼자 올린 매출이 혁중이 말대로 18억이지? 강수 매출 빼면 어떻게 되냐?”

“강수 매출 빼면 25억8천 정도 된다. 수익은 고작 7백만 원으로 쪼그라들고.”

장범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회사 일에 매여 시간을 내지 못했던 장범일이 모처럼 친구들을 보기 위해 달려왔다.

“어휴, 소품 50점 팔아서 18억이라니? 이게 꿈은 아닌 게 분명한데 꿈같기만 해서 현실이라는 게 적응 안 되네. 어쨌든 그저 강수가 친구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짓궂은 표정을 지은 이동석이 팔을 높이 들었다.

“뺨 한 대 쳐줄까? 그럼 꿈이 아니란 걸 확실하게 인식할 텐데.”

황당한 표정의 장범일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팔을 저었다.

“아이구, 꿈이 아니란 것은 인식하고 있거든. 사양이다.”

잠자코 있던 고원철이 문득 한마디 했다.

“강수 선배님, 이건 뭐 일당백이네요.”

“일당백? 크크. 비유가 어째 이상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지. 강수야, 내년 전시에도 참가할 거냐?”

김종대의 질문에 쑥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강수가 염진구를 쳐다보았다.

“진구야, 내년에 내가 작품 출품할 필요 있을까?”

시종일관 흥이 나 있던 염진구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음, 네가 12월에 세 번째 개인전을 개최하니까 원칙대로라면 출품 자격은 없지. 하지만 개인전 3회 제한은 내부적으로 정한 원칙이니까 굳이 원칙을 지켜야 할 이유는 없어. 다만 넌 신인작가라고 하기엔 너무 유명해졌고, 그림값도 비싸서 신인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전시에 참가하는 것은 격이 맞지 않긴 해.”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두 번째 전시회는 빠져야겠다.”

서혁중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 적어도 내년까지 만이라도 참가하면 안 되겠습니까? 선배님 때문에 이만큼 성공한 건데 강수 선배님이 빠지면 어째 좀 불안할 것 같거든요.”

결심을 굳힌 듯 염진구가 목소리에 힘주어 말했다.

“아니야. 강수가 희망을 던져라 전에 참가하는 건 여러모로 명분이 안 서. 다음 전시회에서는 강수 없이 우리끼리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해.”

“진구 말이 맞아. 강수가 신인들 전시에 참여하면 네티즌은 물론이고 여기저기서 비아냥거릴걸.”

“당연하죠. 강수 선배는 우리하곤 차원이 다른데 자기 길을 가야죠.”

김종대가 염진구에게 하나의 의견을 제시했다.

“한데 진구야, 개인전 3회 제한은 없애는 게 낫지 않냐? 현실적으로 개인전 3번 했다고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림이 잘 팔리는 것도 아니잖아. 더구나 초청전이 아니면 별 의미 없기도 하고.”

“그렇긴 한데....”

김종대의 제안에 염진구가 강수를 보았다.

자기의 의중을 묻는 염진구의 눈빛에 강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희망을 던져라 전은 투자는 내가 하지만, 총책임자는 너야. 나는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 전시에 관한 모든 것은 네가 알아서 결정해라. 됐냐?”

염진구가 피식 웃었다.

“알았다.”

서혁중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말했다.

“강수 선배님, 숙녀님들도 계시는데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디 가서 식사라도 하면서 얘기하시죠?”

강수가 아차! 하는 얼굴로 주하를 바라보았다.

“앗, 그러네. 주하야, 미안해. 얼른 밖으로 나가자.”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강수를 지켜보고 있던 주하가 낭랑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 뭐가 미안해요? 전시회에 관해서 토론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걸요. 그래도 혁중 씨말대로 저녁 먹으면서 얘기하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그럼, 그럼. 채빈이네 레스토랑으로 갈까?”

“좋아요. 제가 전화해 예약할게요.”

강수가 주위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 주하 친구 채빈이네가 하는 최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저녁 식사하러 가는 거 어때? 여기서 멀지도 않아.”

“와, 찬성이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누가 싫다고 하겠냐? 당연히 오케이지.”

“어서 가요. 벌써 군침이 돕니다.”

‘아, 부럽다.’

강수 일행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알바생 우민식이 홍우대 출신 화가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며 속으로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문득, 우민식은 가슴에서 창작에 대한 욕구가 불길처럼 일어남을 느꼈다.

‘그리자. 미친 듯이 그려서 나도 전시회에 참가해야 해.’

우민식은 남모르게 주먹을 꾹 쥐며 내심 결의를 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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