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62회
강수는 마나하트의 마나가 완전히 고갈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자랄 행성 마법사가 상위 마법을 펼치지 않는 이유를 뼈저리게 통감했다.
‘나야 외부의 위험이 없는 집안이라 상위 마법을 마음대로 쓰지만, 전쟁터나 몬스터와 싸울 때 마나가 완전히 고갈되면 죽음과 진배없지. 그러니 자랄 행성 마법사는 상위 마법을 함부로 쓸 수가 없겠지.’
강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반지를 주어 소파에 앉았다.
‘성공했을까?’
반지를 살피던 강수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서, 성공?’
반지의 안쪽에 문양 같은 마법어가 ‘실드’라고 새겨져 있었다.
“하하하. 성공했다. 성공이야!”
강수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대소를 터트렸다.
흥분을 가라앉힌 강수가 테스트 삼아 반지에 인챈트된 실드마법를 캐스팅했다.
“실드”
영창 없이 실드를 캐스팅하기 무섭게 손에 쥔 반지에서 무형의 기운이 뻗어 나와 강수의 전신을 감쌌다.
‘된다. 완벽해.’
실드마법이 인챈트된 것을 확인한 강수는 마법을 해제했다.
“해제 실드.”
실드마법을 해제하자 몸을 감쌌던 무형의 기운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강수는 감격스러운 눈으로 손에 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운이 좋았는지 굉장히 빨리 실드마법 인챈트에 성공했다.
‘실드마법을 인챈트하긴 했는데 반지를 주면서 뭐라고 하지? 대학 때 배낭여행 간 파리 뒷골목 허름한 골동품 가게에서 샀다고 하면 믿을까? 아니면 투팍탈 만난 사실을 알려야 할까?’
강수는 평범한 한 명의 미술가로서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주하와 만나는 관계가 편하고 좋았다.
자기가 투팍탈을 만나 인류 유일의 마법사가 됐다는 사실을 주하가 알게 되면 지금 같이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관계가 유지될지 의문이었다. 그 때문에 자기의 정체를 밝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었고,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실드가 형성되는 걸 보면 내가 말하는 대로 믿을 수밖에 없겠지. 중요한 건 마법이 아니라 실드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야. 결혼식까지 잘 보관해둬야지.’
본래는 실드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을 선물하려고 준비했지만, 결혼식이 코앞에 다가온 만큼 손가락에 평생 끼는 결혼반지가 제격이었다.
강수는 반지를 작은 상자에 넣고 서랍에 보관했다.
*
덜컹, 덜컹!
지하에 뚫린 공간을 달리는 전동차 안에는 각양각색의 사람으로 가득했다.
최이석, 이강수와 저녁을 먹고 헤어진 염진구는 지하철을 이용해 집으로 가고 있었다. 염진구는 출입문 구석에 몸을 기대고 거무스름한 터널의 벽이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이익의 20%나 인센티브로 준다고 했어.... 알 수 없는 녀석.’
인센티브가 과할 정도로 많다. 이강수는 종잡을 수 없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염진구는 자기가 받을 인센티브를 대략 계산해보았다.
오늘까지 작품 판매 매출이 약 32억이다. 32억에는 강수 그림 판매액 18억 원이 포함되어 있다.
‘강수는 자기 그림값 18억까지 포함하라고 했으니 32억의 10%가 강하아트 몫으로 3.2억 원. 3.2억 원에서 투자금을 빼면 약 7천만 원이 순이익이지. 순이익의 20%면 천사백만 원이 인센티브란 얘기.’
지금처럼 그림 판매가 이뤄진다면 주말 동안 10억 이상의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 인센티브는 더 늘어날 것이다. 항상 빠듯하기만 했던 생활비가 강수가 매달 주는 250만 원의 월급 때문에 숨통이 트였다. 한데 인센티브까지 받으면 저축하고 문화생활 할 수 있는 여유까지 생긴다.
‘고맙긴 한데....’
염진구는 강수 그림값을 빼고 수익을 계산해보았다.
‘만약 강수 그림값을 빼면 매출은 14억. 주말 매출을 10억으로 예상하면 총매출은 24억. 24억의 10%면 2.4억. 강수 그림값을 제외하면 오히려 천만 원 손해구나.’
직원을 쓰면 비용은 더 늘어난다.
‘매출액 분배를 9대1로 한 것이 문제군. 8대2는 되어야 조금이라도 이익을 낼 수 있겠는데? 게다가 이번 전시회는 강수 효과를 톡톡히 보았지. 강수 효과가 사라지면 이번처럼 흥행하기 쉽지 않겠지?’
염진구는 이번 전시가 성공했다고 다음 전시도 성공할 것이라고 낙관하지 않았다.
‘더구나 다음 전시회에는 부문별 선정 작가에게 상금을 상금까지 줄 계획이잖아? 대여섯 개 부문에 대상자만 해도 상금이 꽤 될 텐데 매출액 분배는 적어도 8대2는 돼야 하지 않을까?’
염진구도 매출액 분배를 9대1로 하려는 강수의 마음과 의도는 잘 안다. 하지만 강하아트가 청년예술가의 예술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기관은 아니지 않은가. 기업은 물론이고 어떤 기관이든 수익이 나야 지속할 수 있다. 염진구는 다음 전시회부터 매출액 분배를 8대2로 바꿔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마트폰의 진동을 느낀 염진구가 발신자를 확인했다.
같이 살고 있는 유진 누나였다.
“나야, 왜?”
[왜 이렇게 늦어? 누구랑 술 마시니?]
“아니. 강수하고 저녁 먹고 지금 가고 있어. 근데 누나 술 먹었어? 목소리가 좀 취한 거 같다?”
[어, 좀 먹었지. 됐고, 늦지 않게 빨리 들어오기나 해라.]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술 마시고 있어?”
[불금이잖아. 남자도 없고. 솔로 둘이서 한잔하고 있다. 왜?]
“솔로 둘? 영지 누나 왔어?”
[그래. 영지랑 같이 있어. 끊는다.]
전화가 사정없이 끊겼다.
‘뭐야, 술 취해서 전화하고.’
염진구는 방 두 칸에 작은 거실 겸 주방이 있는 집에서 두 살 위 누나와 5년째 동거하고 있었다.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누나와 동거하고 있었지만 이제 독립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언제까지 누나 집에 있을 수도 없고, 인센티브 받으면 대출해서라도 누나 집에서 나가야겠다.’
“이번에 내리실 역은 남구로역, 남구로역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염진구는 안내방송에 퍼뜩 정신 차리고 남구로역에서 내렸다.
지상으로 올라온 염진구는 서늘한 밤기운에 목을 움츠렸다.
“완전히 초겨울이군.”
염진구는 추운 겨울이 싫었다. 여자친구가 없어서 싫기도 했지만, 손발이 꽁꽁 어는 추위보다는 후덥지근해도 더위가 나았다. 올해도 혼자 기나긴 겨울을 보낼 생각 하니 괜스레 옆구리가 시린 것 같았다.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약 7, 8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흐릿한 보안등 불빛을 받으며 골목길을 걸어 염진구가 도착한 곳은 태성빌라.
염진구는 4층으로 올라가 우측, 2호의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실내 공기가 염진구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진구 왔구나.”
“그래.”
‘누나라도 이렇게 반겨주면 독립하기가 싫단 말이야.’
사람 온기가 집에 있다는 사실이 괜히 쓸쓸할 때는 한 가닥 위안으로 다가왔다.
얼굴색이 불그스름해진 누나 염유진과 누나 친구 박영지가 주방 식탁에서 염진구를 맞이했다.
식탁에는 적포도주에 몇 가지 안주가 있었다.
“영지 누나, 안녕.”
“진구야, 어서 와.”
155cm쯤의 신장에 귀염성 있는 작은 얼굴, 아담한 체형의 여성이 의자에서 일어나 염진구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서 한잔할래?”
“난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박영지와는 4년 넘게 알고 지내며 친해진 사이라 서로 반말했다.
자리에서 발딱 일어난 염유진이 염진구에게 목청을 높여 말했다. 염유진은 박영지와 신장이나 체형이 비슷했다.
“야! 진구 너. 이리 안 와. 영지가 한잔하라면 할 일이지 주제에 튕기고 있어.”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염진구가 식탁에 앉았고, 박영지가 싱크대 선반에서 와인잔을 꺼내 적포도주를 절반쯤 따라주었다.
“고마워.”
염진구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자 박영지가 스모크드 치즈 한 조각을 건네주며 말했다.
“너 요즘 기자랑 인터뷰도 하고 잘 나가더라. 네가 기획한 전시도 관람객으로 넘치고.”
치킨을 받은 염진구가 빙긋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거 내 능력보다도 순전히 강수 때문에 관람객이 몰린 거야. 강수 아녔으면 관람객이 절반도 들지 않았을걸.”
“설마 그렇게까지?”
박영지가 고개를 갸웃했고, 염유진이 발끈해서 말했다.
“야, 이강수가 잘나긴 했지만 네가 준비하고 마케팅까지 다 했는데 이강수 때문에 관람객이 배로 늘었다는 건 과장이 심한 거 아냐?”
“과장?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전시가 성공해서 다행이지. 덕분에 인센티브도 받을 것 같아.”
염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뭥미? 인센티브. 어머, 잘됐다. 얼마나 준대?”
염진구가 어깨를 으쓱했다.
“매출에 따라 다른데 이천은 넘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와, 월급도 받고 인센티브로 이천이나 받아? 이강수 이 인간, 사람 됨됨이가 됐네. 됐어. 가만, 너 인센티브 받으면 방 얻어 나가도 되겠다?”
“그렇지 않아도 대출 보태서 독립할 생각이니까 붙잡지나 말아.”
염유진이 주먹으로 식탁을 두드리며 웃었다.
“카카카. 붙잡긴 누가 붙잡냐? 꿈 깨고 얼른 독립이나 해라. 내가 너 땜에 연애도 못 하고 노처녀로 있잖아.”
“뭐어? 남자 사귀면 언제든지 나간다고 했는데 맨날 내 핑계만 대고 그래. 에이, 당장 방부터 알아봐야지.”
박영지가 피식 웃으며 두 남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진구야, 너 요즘도 마술하니?”
“어? 요즘 바빠서 한동안 오프모임에 못 나갔어. 이제 전시 끝나니까 슬슬 나가봐야지.”
“마술은 계속하려고?”
“바빠지면 예전처럼 할 수는 없지만 취미로 가끔 해야지. 그보다 밤이 깊었는데 영지 누나는 언제 집에 가려고 지금까지 안 가고 있어?”
“글쎄? 이제 슬슬 일어나긴 해야지.”
“이제 열 시 반인데 뭐가 늦었다고 그래? 너 결혼하면 와이프한테도 빨리 들어오라고 갈구겠다?”
“당연하지. 결혼한 여자가 남편, 자식 두고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면 안 되지. 영지 누나, 내 말이 틀려?”
술기운이 적당하게 올랐는지 볼이 붉어진 영지가 고개를 도리도리했다.
“아니. 네 말이 맞아. 결혼했으면 가정에 충실해야지.”
“얼씨구? 직장 다니면 일이 밀리거나 회의다, 회식이다 해서 늦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빨리 오라고 할래?”
“기본적으로 가정에 충실하자는 얘기야. 맞벌이하면 어쩔 수 없겠지.”
박영지가 볼을 감싸더니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진아, 더 늦기 전에 집에 가야겠다. 엄마가 일찍 들어오라고 했어.”
“그래? 진구야, 영지 지하철까지 바래다주고 와라. 불량배 만나면 있으나마나겠지만 혼자보다 둘이 낫겠지.”
“뭐! 꼭 말을 해도.”
염유진을 한차례 노려본 염진구가 귀찮은 마음에 미간을 좁히며 박영지를 쳐다보았다. 마침 진구에게 시선을 주고 있던 박영지와 눈이 마주쳤다.
동글동글한 작은 얼굴에 발그레한 볼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 예쁘고 섹시해보였다.
‘귀엽긴 한데 키가 작아서....’
염진구는 자기 키가 작았기 때문에 은연중에 자기 키와 비슷한 여자를 사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박영지를 누나의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박영지는 무슨 생각인지 잠자코 염진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기이한 열기를 담고 있었다. 박영지의 눈빛에 이상하게 마음이 떨린 염진구가 자기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툴툴거리며 말했다.
“알았어. 지하철까지 바래다주고 올게.”
박영지가 분홍색 반코트를 걸치고 핸드백을 들었다.
“유진아, 다음에 보자.”
“응, 밤길 조심히 잘 가.”
염유진의 배웅을 받으며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는 싸늘했다. 밖으로 나온 박영지가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밤공기가 쌀쌀하지?”
“이제 본격적으로 추워지려나 봐. 벌써 다음 달이면 12월이네. 진구야,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까?”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면 뭐해. 같이 눈길 걸을 사람도 없으면서.”
“헤헤. 아직 한 달 넘게 남았잖아. 또 알아. 그사이에 좋은 남자 만날지? 가자.”
박영지가 염지구의 팔을 오른팔로 슬쩍 안으며 앞으로 걸었다. 염진구가 흠칫했으나 박영지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박영지의 손에 오른팔을 잡힌 채 나란히 골목길을 걷는 염진구는 느닷없이 쿵쿵 뛰는 심장 때문에 머리칼이 쭈뼛쭈뼛 서고 신경이 곤두섰다. 자기 팔을 붙잡은 영지의 손과 팔의 매끈한 감촉이 옷감을 뚫고 전해졌다.
‘가, 갑자기 왜 이러지? 이렇게 걸으면 꼭 여자 친구 같잖아?’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과 욕망이 꿈틀거렸다. 보안등 불빛이 골목길을 밝히고 있었지만,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보안등 불빛이 분위기를 잡아주는 것 같았다.
뛰는 심장과 박영지의 따뜻한 팔의 감촉을 느끼며 염진구의 머릿속은 잡생각으로 가득했다.
조금 전 섹시한 얼굴과 뭔가를 갈구하는 것 같은 박영지의 눈빛이 떠올랐고, 팔짱을 끼고 걷고 있는 것조차 염진구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무슨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기만의 착각일 수 있다는 생각에 염진구는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박영지의 얼굴만 힐끔거렸다.
두 사람은 별말 없이 골목길을 걸어갔다.
어느 순간 염진구는 절반이나 걸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지하철까지 걸어가면 이런 기회가 또 올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염진구는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염진구를 따러 멈춘 박영지가 고개를 들어 염진구를 올려보았다.
염진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박영지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