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61화 (161/1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61회

한가람 미술관으로 들어간 강수는 2층 대관자 사무실로 올라갔다.

방문자 민원을 처리하는 전시 도우미 소효정이 강수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이 작가님. 팀장님이 안쪽 회의실로 오시라고 합니다.”

“네, 고마워요.”

사무실에는 구매자 두 명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막일에는 오후 4시에 오픈한 탓에 구매자가 줄을 길게 섰지만, 지금은 오전 10시 오픈이다. 그때처럼 구매자가 밀리지는 않았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던 이유빈과 우민식이 강수에게 묵례했다.

강수는 미소 띤 얼굴로 두 사람의 인사를 받으며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서 염진구와 최이석 평론가가 강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일찍 오셨네요.”

“어서 오게. 작품 감상하려고 좀 일찍 왔지. 둘러보니 오늘도 전시장에 관람객이 가득해. 대단히 성공적인 전시회일세.”

“네. 다행히 관람객이 찾아와 주었네요.”

강수가 의자에 앉자 최이석이 말했다.

“한데 염 팀장에게 자네가 강하아트 대표라는 말을 듣고 꽤 놀랐어. 이렇게 대규모 전시를 연 주최사 대표가 자네라곤 생각지도 못했지.”

“하하. 어찌하다 그렇게 됐습니다. 저는 전시아이디어를 낸 것 외에 한 일 없고, 전부 제 동기인 이 친구가 전시를 준비하고 진행했습니다. 전시회는 순전히 진구의 작품이죠.”

강수가 옆에 앉은 염진구의 어깨를 두어 번 가볍게 토닥였다.

“제가 청년예술가를 위한 전시회를 열자고 하는 바람에 진구가 고생 좀 했죠.”

강수의 말에 염진구가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냐. 고생은 무슨. 전시 준비하면서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고, 덕분에 나도 많이 배웠다.”

“대강의 얘기는 염 팀장에게 들었다네. 역시 실무는 전시 디렉터 몫이지. 알바생을 썼다고는 하지만 정식 직원 없이 혼자서 이런 규모가 큰 전시를 준비하는 게 쉽지 않지.”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 전시회엔 직원을 채용해서 진구 어깨 좀 가볍게 해주려고 합니다.”

“오, 그래? 내년에도 희망을 던져라 전을 개최할 계획이란 얘기인가?”

“물론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전시를 열지 안 열지는 전적으로 진구 의사에 달렸죠.”

“염 팀장 의사에?”

최이석과 강수가 동시에 염진구를 쳐다보았다.

“진구야, 내년에도 전시회 열어야지?”

강수의 질문에 염진구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림도 안 팔리고, 관람객도 없는 초라한 전시회가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다행히 많은 관람객이 찾아와 주고 작품도 예상보다 많이 팔리고 있어서 실패한 전시는 아닌 것 같아 내년에도 개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들으셨죠. 내년에도 개최한다고 합니다.”

“하하. 듣던 중 반가운 얘기야. 염 팀장. 수고스럽더라도 내년에도 신인을 대상으로 하는 전시를 꼭 열어주게나. 내 생각에 이 전시를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하면 규모도 더 커지고,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전시회로 발전해 나갈 수도 있을 것 같네. 그리고 기왕이면 내년부터는 신인상이나 인기상 같은 경쟁 부문을 마련해서 소정의 상금과 함께 작가를 선정하면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아, 그 생각을 못 했네요. 내년부터 선정할 것이 아니라 이번 전시부터 당장 시행해도 되지 않을까요? 교수님이 심사위원을 맡아주시면 되고요.”

최이석 교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심사위원 맡는 것은 어렵지 않네만 계획에 없었던 시상 부문을 갑자기 시행해도 되겠는가?”

“아직 전시회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가능하지 않을까요? 진구야. 네 생각은 어떻냐?”

“최 교수님 말씀대로 계획에 없던 일을 하면 혼란을 야기할 수 있으니까 시상 부문은 내년 전시부터 도입하는 것이 낫겠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내년부터 신설하도록 하자. 그러면.”

강수가 최이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교수님. 이번 전시회에 시상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니까 내년부터 신설하겠습니다. 심사위원장은 최 교수님이 맡아주시고, 각 부문별 심사위원도 위촉해 주셔야 합니다.”

“허허. 내가 꺼낸 말인데 책임져야지. 알겠네. 심사위원장은 내가 맡지. 몇 개 부문을 수상자를 선출하면 되겠는가?”

“수상 부문과 수상자는 진구와 의논해서 결정해주십시오. 상금 규모는 여타 대회 못지않게 지원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 그리고 보니 교수님이 할 얘기가 있다고 하셨는데 제가 딴 얘기만 했네요. 교수님, 혹시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는지요?”

강수의 질문에 최이석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벌써 다 했다네.”

“예?”

“실은 이번 전시회가 무척 뜻깊은 행사라 단발성 행사로 끝내기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그래서 매년 정기 행사로 개최하자는 제안을 하려던 참이었거든.”

문득 강수가 눈빛을 반짝이며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 그러셨군요. 최 교수님 뜻대로 되었으니 저희 전시회가 발전할 수 있도록 교수님이 물심양면으로 힘써 주셔야 합니다.”

“응? 하하.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건가?”

“그렇습니다. 교수님은 저희와 한배를 타신 겁니다. 심사위원장은 물론이고 자문위원으로 모실 테니 저희 전시회를 세계적인 전시회로 키워주십시오.”

“허허. 이거 어째 스스로 올가미에 걸려든 기분이 드는군? 어쨌든 자네 말대로 내 뜻대로 되었으니 기분이 무척 좋아. 앞으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이번 전시회가 끝나는 대로 제대로 된 사무실을 마련해서 교수님 자리도 준비하고, 직원도 뽑아서 다양한 기획 전시를 해보겠습니다.”

염진구가 흠칫해서 강수를 쳐다보았다.

“다양한 기획 전시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강수가 씨익 웃었다.

“네가 공부하면서 해보고 싶었던 전시 있지 않았냐? 수익을 떠나서 예술을 저변에 확대하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전시를 기획하면 자금은 내가 댈 테니까 뭐든지 해봐.”

강수의 즉흥적인 제안에 염진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래?”

“하하. 염 팀장이 참으로 부럽군. 내가 젊었을 때 이 작가와 같은 능력 있는 친구를 두었으면 내 꿈을 원 없이 펼쳐보았을 텐데 말이지. 그런 친구가 세상에 어디 있었어야지. 한데 염 팀장은 나와 달리 능력 있는 친구를 두었으니 꿈을 마음껏 펼쳐보게나.”

염진구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학 다닐 때는 강수가 이렇게 유명해지고 성공 가도를 질주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응? 왜 그런 생각을 했나?”

염진구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강수가 대학 때는 진흙에 묻혀 있었거든요. 그림은 사진처럼 정확하게 잘 그렸지만, 개성적인 표현력이 부족하고, 구도는 답답했고, 채색이 밋밋했어요. 그림이 전체적으로 건조했죠. 한데 작년부터 진흙 밖으로 나온 진주처럼 재능이 피어나더군요.”

염진구의 평은 학교 동기인 김익현 교수에게 들은 평가와 비슷했다. 최이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작가가 대학 때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군. 하지만 미술계에는 이 작가처럼 어느 날 스타 작가로 명성과 부를 거머쥐는 경우가 종종 있지.”

듣고 있던 강수가 볼멘소리했다.

“진구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적나라하게 혹평하는 거 아니냐?”

“대학 때 일인데 뭘. 그때 네 그림하고 지금 그림하고 비교하면 같은 사람이 그렸다고는 생각도 못 할 만큼 180도 달라졌으나까 자부심 가져도 돼.”

“크- 틀린 말이 아니니 유구무언이다.”

염진구가 강수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여기 능력 있는 친구가 뭐든지 해보라고 하니까 교수님 말씀처럼 구상만 했던 전시를 추진해봐야겠습니다.”

“허허. 그래. 염 팀장이 어떤 전시를 기획할지 벌써 기대되는군.”

강수가 최이석을 은근한 목소리로 불렀다.

“저기, 교수님.”

“응? 왜?”

“한 시간만 있으면 전시가 끝나고 휴관합니다. 약속 없으면 저희와 저녁 식사 하시는 건 어떨까요? 제가 한정식이 유명한 맛집으로 모시겠습니다.”

“한정식 맛집? 음, 약속은 없어. 내가 한정식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고 한정식 맛집을 알아 놨나? 좋아, 가보세.”

“네. 오늘 갈 한정식집은 음식이 정갈하고 깊은 맛이 있어서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하. 이거 벌써 기대되는군.”

강수는 두 사람과 전시에 관한 담소를 나누며 좀 더 얘기를 나눈 후 한정식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고 헤어져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에 도착해 주차장을 둘러보았으나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하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가끔 때마침 빠진 빈 곳이 있는데 오늘은 없구나.’

옛날 아파트 단지라 주차공간이 부족한 탓에 밤 10시도 안됐지만, 지하주차장도 빈 곳이 없었다. 별수 없이 이중주차한 강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차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이사하고 싶어도 주하와 결혼하면 어차피 집을 옮겨야 하니 좀 기다릴 수밖에 없구나.’

주차공간은 옛날 기준에 맞춰 지은데 반해 자동차가 두세 대씩 있는 세대가 많으니 주차난이 심각했다.

차에서 내린 강수는 지상으로 올라가 동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휘이잉-

차가운 밤바람이 어둠을 휘몰고 불어와 매섭게 얼굴을 때렸다. 낮에는 따뜻했지만,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뚝뚝 떨어졌다. 어느새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강수는 차가운 밤바람이 춥기보다는 시원했다.

‘오늘은 인챈트마법을 시도해볼까?’

마나하트는 며칠 전에 완충했다. 마나를 완충헸어도 섣부르게 인챈트마법을 펼치지 못했다. 인챈트마법은 마나 소모가 심해서 한 번 펼치면 마나가 고갈되고 만다. 요즘은 마나회로 수련을 일주일에 서너 번하기 때문에 마나하트 완충하는데도 2주나 걸린다.

‘실드마법이 인챈트된 반지가 필요할까?’

치안이 안정적인 한국 사회에서 경호원까지 있는 주하에게 실드마법이 인챈트된 반지가 필요한지 의문이 들기는 했다. 물론 안정적인 치안과는 별개로 정신이상자에 의한 황당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실드마법이 인챈트된 반지가 없는 것보다 있으면 좋다는 건 안다.

단지 인챈트마법을 시도하는 족족 쓰라린 실패를 맛보자 반지에 실드마법을 인챈트하겠다는 의욕이 한풀 꺾인 상태였다.

‘4서클 마나하트를 완성해야 마음껏 인챈트마법을 펼쳐볼 텐데 4서클은 요원하기만 하니 아쉽군.’

현관을 열고 실내로 들어간 강수는 거실 TV장 서랍에서 반지 상자를 꺼내 소파에 앉았다.

상자를 여니 백금 반지가 은은한 자태를 드러냈고, 백금에 깊숙이 박힌 깨알 같은 다이아몬드가 반짝반짝 빛나며 마음을 현혹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은은하게 아름답구나.’

반지의 영롱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마음을 뺏긴 강수는 한동안 물끄러미 백금 반지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뇌리가 백지처럼 깨끗해졌다. 강수의 뇌리와 마음에는 오직 하나의 형상, 백금 반지만이 존재했다.

문득, 강수의 입이 달싹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인챈트마법을 영창한 것이다.

“실드 인챈트.”

영창이 끝남과 동시에 인챈트마법을 캐스팅하는 마법어가 자연스럽게 강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강수의 양손에 모이더니 백금 반지로 소용돌이치듯 빨려 들어갔다.

번쩍!

갑자기 백금 반지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사라졌다.

“윽!”

강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심장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마나고갈과 함께 심장에 쇼크가 온 것이다. 전신의 근육이 오그라드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휘몰아쳤다. 강수는 숨도 못 쉬고 한동안 꼼짝하지 못한 채 고통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휴우-”

잠시 후 심장 쇼크가 풀리면서 구겨졌던 강수의 얼굴이 펴졌고 평온이 찾아왔다.

‘이번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웠지?’

그전까지는 심장 쇼크가 와도 이 정도로 극악하게 고통스럽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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