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58회
강수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나한테는 주하가 있지. 한데 진구야. 전시가 며칠 안 남았는데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냐?”
“개막 행사는 거창하게 할 필요 없어서 조촐하게 준비했고, 전시 도우미 15명 뽑았다. 네가 얘기한 대로 125명의 작가 프로필과 작품 소개에 대한 자료 파일로 첨부하고, 관람객의 질문에 답변할 수 있게 전부 외워야 한다고 단서 달고 광고 냈는데 경쟁률이 무려 30대1이다. 시급 이만 원이라 다른 알바에 비교하면 워낙 높지만 6일 단기 알바인데 이렇게 많이 지원할 줄은 몰랐네. 이력서 심사로 5배수 뽑고, 전화 면담으로 2배수 뽑아서 최종 면접으로 15명 채용했다. 알바생 뽑느라 시간 많이 투자했다.”
“수고했어. 30대1이나 되는 경쟁률을 뚫은 알바생인데 점심은 제공해야겠다.”
“뭐. 점심도 제공한다고?”
“점심 주지 않으면 대충 때울 수도 있잖아. 젊은 친구들인데 빵이나 컵라면 같은 거로 대충 먹으면 허기져서 되겠냐? 만 원이든 이만 원이든 상관없으니까 근처에서 음식 맛있게 하는 식당 정하고, 거기 가서 점심 먹으라고 해.”
염진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알았다. 알바생들이 엄청나게 좋아하겠네. 미술관 측과 전시장 사용에 따른 협의도 끝냈고, 9일 오후 1시부터 작품 반입할 수 있으니까 디스플레이하라고 작가들한테 연락했다. 문제는 설치 작품 디스플레이인데 작가들이 알아서 설치한다고 하더라. 물론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라고 했다.”
“설치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닐 텐데 작가들이 잘하겠지. 내가 따로 도와줄 일은 없고?”
염진구가 고개를 저었다.
“전시 준비하는 데 네가 나설 일이 뭐가 있어? 그것보다 작가 대표나 강하아트 주최 측 대표로 개막 연설할래?”
“연설?”
강수가 씨익 웃으며 손사레를 쳤다.
“됐다. 주최 측 대표 개막사는 전시 디렉터인 네가 할 일이고, 작가 대표는 다른 사람 시켜. 난 앞에 나서는 거 별로야.”
“네가 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주하가 일곱 시에 온다니까 저녁 같이 먹자.”
“그럼 고맙지. 난 자료 살펴보고 있을 거니까 넌 가서 하던 작업해라.”
“그럴까?”
강수가 의자에서 일어나 건너편 작업실로 갔다. 붓을 들고 작업을 재개하려던 강수는 스마트폰의 진동을 느끼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양 교수님이네.’
강수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이강수입니다.”
[이 작가. 통화 괜찮은가?]
“예, 물론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법인 설립 신청 서류는 준비됐다네. 이제 제출만 하면 되지. 서류 제출하기 전에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하려고 전화했네.]
“어떤?”
[희망나무 설립하는데 있어, 자네 지원이 없었으면 아직도 요원한 일이었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이사나 감사 두 직책 가운데 하나 맡는 것이 어떤가 싶어. 자네가 투자한 돈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 그건....”
[왜? 어려운가?]
“아닙니다. 어렵다기보다는 제가 자원봉사는 미숙해서요. 자원봉사 활동은 교수님이 오랫동안 해 오셔서 전공 못지않은 풍부한 지식과 실무를 겸비하셨지만, 저는 자원봉사 활동을 한 번밖에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회 약자, 소외 계층과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교수님의 원대한 꿈을 실현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는 직접적인 일을 하겠습니다.”
[후원금 모금 말인가?]
“그렇습니다. 제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일은 후원금 모금입니다. 그 일에 힘을 쏟고 싶습니다.”
[허허, 그것참.... 뭐라고 할 말이 없구나. 대부분의 가치가 돈으로 매겨지고, 환산되는 현실에서 후원금 모금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라네. 십이억 원이나 출연한 자네가 후원금 모금까지 하겠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야. 알겠네. 그럼 나는 준비한 서류를 제출하겠네.]
“예, 교수님, 수고하십시오.”
[그래. 수고하게. 그리고 이 년간 운영비가 있으니까 후원금 모금은 급하지 않아. 무리하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강수가 통화를 끝내자 강수의 전화 통화를 들은 송다린이 궁금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선배님, 무슨 후원금 모금하세요?”
“응. 너 ’희망나무’라고 아냐?”
“아뇨. ‘희망나무’가 뭐 하는 곳인데요?”
“우리학교 철학과 양진태 교수님이 운영하는 자원봉사단체야. 양 교수님이 희망나무 회원을 주축으로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거든. 복지법인을 운영하려면 운영비가 필요하고, 그 후원금 모금을 얘기하는 거다.”
“철학과 양 교수님이 그런 일을 하셨군요? 몰랐어요.”
“나도 지금까지 내일 한다고 자원봉사는 해보지도 않았지. 한데 양 교수님은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사회의 소외된 사람을 보살펴 왔거든. 교수님처럼 자기를 희생해서 자원봉사 활동은 하지 못해도 힘닿는 데까지 후원금이라도 모금해서 양 교수님이 설립한 복지법인을 도와드리려고.”
“그렇구나.”
송다린이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며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서 강수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선배님은 보통 사람하곤 다른 뭔가 있어요. 존경스러워요,”
“내가 아니라 양 교수님을 존경해야지? 내가 뭐 했다고 존경스러워?”
“물론 양 교수님도 존경스러운 분이죠. 하지만 세상은 돈이 있어야 돌아가잖아요. 복지법인 설립해도 운영비가 없으면 무슨 활동을 하겠어요? 그런 복지법인을 운영할 수 있게 후원금 모금하는 일이 더 어려운 거죠.”
강수가 빤히 올려다보는 송다린의 눈길을 피해 슬쩍 이젤을 향해 몸을 돌리며 붓을 들었다.
“작업해야지?”
“네에, 선배님.”
송다린은 이강수가 은근슬쩍 자기를 피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흥. 키, 얼굴, 몸매. 어딜 보나 김주하보다는 내가 낫지. 언제까지 날 피하는지 두고 보겠어.’
송다린은 자기 이젤로 걸어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11월 10일 오후 4시.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1층 1관 전시장에서 ‘한국 청년예술가들이여, 희망을 던져라’ 전의 개막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후원사가 한 곳도 없는 단체전이라 개막식 행사는 단출했다. 전시장 중앙에 연단이 있었고, 연단 뒤에는 컷팅식을 위해 금장커팅봉과 오색 리본이 준비되어 있었다.
연단 앞에는 백여 명의 단체전 참여 작가들이 자리해 자기를 찾아온 지인들에게 손을 흔들거나 묵례하곤 했다. 그들 앞에는 수백 명의 사람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팟!
후레쉬가 터지며 불빛이 번쩍였다.
행사 도중 곳곳에서 기자들이 사진을 찍었다.
“... 한 명의 외침이나 변화를 갈구하는 도전과 시도는 작고 보잘 것 없지요. 하지만 물방울이 모여 작은 물줄기를 이루고, 작은 물줄기가 모여 거대한 강을 이루듯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젊은 작가들이 새로운 물결이 되어 커다란 흐름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던져라 전에 참가한 젊은 피가 끓는 청년예술가들이 한국 예술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전시 개막에 붙인 소감은 이상으로 마치고 이제 ‘한국 청년예술가들이야, 희망을 던져라’ 전의 개막을 선포합니다.”
짝! 짝! 짝!
“강하아트 화이팅!”
실내에 모인 관람객은 박수로 염진구의 짧은 개최사를 반겼다.
주최 측 디렉터 염진구의 개막 축사 뒤에 열 명의 작가 대표들이 오색리본을 잡고 컷팅식을 거행했다.
컷팅식을 끝으로 전시 개막식이 끝나자 실내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박수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짝! 짝! 짝! 짝!
“와아-”
실내가 떠나갈 듯한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전시장에 울려 펴졌다.
전시 도우미가 연단과 행사 물건을 치우기도 전에 일단의 관람객이 가드 봉에 막혀 있던 전시장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그들 가운데 포털 사이트에서 ‘파란해’라는 별칭 쓰는 유태곤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태곤은 탑뉴스 손예연 기자의 기사에 댓글로 이강수 그림을 사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 네티즌이었다.
유태곤은 이강수 그림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데 고민을 많이 했다. 그는 자기의 질문에 답한 네티즌 ‘동트기’의 댓글을 읽고 4년 동안 부어 온 5년짜리 적금을 깨 이강수의 그림을 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오늘 월차 내서 개막식에 참석했다.
4년이나 부어 온 적금을 깼지만 아깝지 않았다. 물가상승률을 따지면 요즘 금리는 제로금리나 마찬가지 아닌가? 투자할 데가 마땅치 않아 적금을 부었지 이자 받겠다고 적금 부은 것이 아니다.
재테크의 일환으로 주식을 해보았지만, 이익 내기 어렵고 주가의 등락에 신경이 너무 쓰여 직장생활에 지장이 생길 정도였다.
유태곤은 주식 투자는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리고 주식은 포기했다.
180cm 정도의 키에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유태곤은 누구보다 빠른 걸음으로 1관을 둘러보았다.
‘어? 여기 없어?’
유태곤은 서둘러 1관을 빠져나와 2관으로 들어갔다. 2관에 전시된 수백 점의 작품을 건성으로 훑으면서 이강수 작품을 찾았다.
‘여기도 없고?’
유태곤은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가 3관과 4관도 빠르게 훑었다.
‘이거 뭐야? 대체 이강수 작품은 어디에 있는 거야?’
갑자기 치미는 짜증에 속으로 투덜대며 3층으로 올라갔다.
‘1층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이강수 작품을 전시해야지 3층에 전시한 이유가 뭐야? 설마 6관에 전시해 놓은 건가?’
5관을 둘러본 유태곤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6관으로 들어섰다.
‘참나, 6관 가장 구석에 있다니. 일부러 저기에 전시했단 말인가? 이게 무슨 보물찾기도 아니고....’
유태곤은 이강수 작품을 3층 6관 가장 구석에 전시한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다른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마지막에 이강수 작가의 그림을 보라는 의도일 것이다. 이강수의 작품을 1층 1관에 전시하면 1층만 둘러보고 발길 돌리는 관람객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강수 그림이 궁금해서 온 사람이 상당할 텐데 이강수의 작품을 1층 1관에 전시하면 위치적으로 안 좋은 3층에 전시 공간이 배정된 작가들은 불만이 많겠지. 한데 이강수 작품을 이곳에 전시함으로 인해 5, 6관에 공간을 배정받은 작가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겠지. 이강수가 의외로 마음도 넓구나.’
관람객이 하나둘 6관으로 들어오며 자기처럼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이강수 작품이 걸려 있는 구석으로 걸어간 유태곤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게 뭐야? 왜 죄다 빨간 딱지가 붙어 있어?’
일반적으로 빨간 스티커는 작품이 판매되었다는 표식이다.
‘뭐가 이래? 설마 개막 전에 다 팔려나간 거야? 누구 놀려?’
기분이 상한 유태곤은 인상을 구기며 황급히 옆 부스로 들어갔다.
‘오, 여기 작품은 안 팔렸구나. 빨리 한 점 사야겠다.’
15호 내외의 그림을 구매할 계획이었던 유태곤은 찡그린 인상을 펴고 20여 점의 작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강수의 작품이 전시된 곳으로 한 명 두 명 관람객이 다가왔다. 개막하자마자 6관까지 이강수의 그림을 찾아서 온 이유는 뻔하다.
재테크가 목적이든 소장이 목적이든 이강수 그림을 구매하려는 것이다.
이강수의 그림은 시골 마을과 농부, 아이들, 자연 풍경과 그 속에서 생존하는 곤충과 동식물 등 전체적으로 시골의 삶과 자연을 형상화했다. 그림은 입체적인 느낌이 강했는데 나무와 수풀, 곤충, 동물은 자연과 일체가 되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평화로운 마을, 그 속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의 표정과 몸짓에서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그림은 다 좋지만 유독 이 작품이 마음에 와닿는구나. 15호, 사천이백만 원. 허, 정말 눈알 튀어나오게 비싸군.’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미 적금도 깼다.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발걸음을 돌리기에는 지금까지 들인 시간과 고민, 월차가 아깝다. 무엇보다 개막하기 전에 팔려서 빨간 스티커가 붙어 있는 상황이 이강수 그림을 투자하는데 마지막까지 남은 한 가닥 우려를 불식시켰다.
구매할 작품을 결정한 유태곤은 2층으로 내려가 대관자 사무실로 들어갔다.
넓은 사무실에는 세 명의 남녀 직원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썰렁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사무실이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캐주얼한 복장의 알바생으로 보이는 여성이 상큼한 미소로 유태곤을 맞이했다.
“그림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그림 구매는 저쪽 창가 책상으로 가세요.”
여성이 안쪽 창가 옆의 책상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노트북 한 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책상에 정장 입은 사내가 앉아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유태곤은 창가 책상으로 갔다.
정장을 입은 사내, 우민식이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온 유태곤에게 앉기를 권했다.
“안녕하세요? 여기 앉으시죠.”
유태곤이 책상 앞에 놓인 고객 의자에 앉았다.
“손님, 어느 작가 그림을 구매하실 건지요?”
“이강수 화가의 작품 ‘가을 산, 하늘가’요.”
“음, ‘가을 산, 하늘가’는....”
자료를 검색한 우민식이 계약서를 유태곤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15호 작품으로 가격은 사천이백만 원입니다. 계약서 작성하시고 계약금 10%는 계약서에 적힌 통장으로 입금하시면 됩니다. 오늘까지 입금이 확인되지 않으면 계약서 내용대로 계약은 무효가 됩니다. 잔금은 14일까지 입금하셔야 하고, 입금이 확인되면 15일 월요일에 전문배송업체가 배송지로 작품을 배송해 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유태곤은 계약서를 작성해 앞의 사내에게 주었고, 우민식은 유태곤이 작성해 준 계약서에 직인을 찍어 원본을 주고 사본은 챙겨놓았다
.
“구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이때, 등 뒤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났다. 유태곤이 출입문을 돌아보았다. 사무실 입구에 몇 명의 사람이 들어오더니 자기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누구 그림 사러 왔을까?
계약서를 챙긴 유태곤이 옆으로 물러나 천천히 입구를 향해 걸었다. 유태곤은 뒤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강수 그림을 사러 왔다네.”
“예, 손님. 의자에 앉으시죠.”
‘역시 이강수 그림을 사러 왔구나.’
“안녕히 가세요.”
“네, 수고해요.”
유태곤은 이강수 그림 사기를 잘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알바생의 상냥한 인사를 받으며 흐뭇한 기분으로 사무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