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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마법사-157화 (157/1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57회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칠억에 팔린 그림을 어떻게 운으로 돌릴 수 있겠나? 자네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는데 다른 사람도 그걸 알아본 게지. 어쨌든 내가 제시했던 일억 원을 가볍게 넘겼으니 주하와의 결혼을 허락함세.]

“아! 그러면 어르신이 돌아온 후에 결혼식을 준비....”

김대풍이 기다렸다는 듯이 강수의 말을 끊고 강수가 말꼬리 잡지 못하게 일사천리로 자기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결혼식은 말이지 이렇게 하자. 내가 4월 초에 귀국할 예정이니 4월 중순에 결혼식 올리면 된다. 용산에 있는 아파트를 결혼 선물로 줄 테니 신혼집 마련하다고 돌아다닐 것 없고. 주하 아비한테 사돈 될 분들 만나서 인사하라고 잘 일러둘 테니 너는 주하하고 결혼식 올릴 만반의 준비를 끝내 놓도록 하거라. 예식장은 호텔도 좋지만 호텔이 맘에 들지 않으면 예식은 웨딩업체한테 맡기고 한남동 내 집에서 해도 된다. 할 말 있느냐? 혹시 할 말 있으면 나중에 전화하거라. 지금은 일행과 함께 움직이느라 정신도 없고 시간도 없어 길게 얘기하지 못하니 그리 알고. 이제 일 보거라.]

“예?”

[전화 끊는다는 말이다.]

“예, 예. 어르신. 들어가십시오.”

뚜-

신호가 끊겼다.

신호가 끊긴 스마트폰을 내려보며 강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송다린으로 인해 불안한 모습을 보인 주하에게 마음 놓으라고 약혼식이라도 올리려고 하던 차에 때마침 김대풍의 전화가 온 것이다.

‘갑자기 뭐지?’

뜻밖에도 김대풍 어르신이 4월에 결혼할 수 있게 준비하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김용극 어른에게 얘기한다고 했다. 그림을 1억에 팔라는 과제를 가볍게 통과했기 때문에 주하강수가 재빨리 스마트폰을 집어 통화를 연결하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이강수입니다. 여행은 즐거우신지요?”

[오냐. 아주 즐겁지. 해외 나들이가 이렇게 즐겁고 재미난 줄 알았으면 진즉에 세계 곳곳으로 여행이나 다닐 걸 그랬다. 그나저나 오랜만이지?]

“예, 어르신. 7월 초에 주하랑 전화로 인사드렸으니 넉 달이 지났습니다.”

[흠, 벌써 그렇게 됐구나. 이 군. 자네 그림이 홍콩에서 칠억에 낙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늦었지만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서너 사람이 경합을 벌여서 낙찰가가 크게 뛰었습니다.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와의 결혼이 순조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김대풍 어르신이 직접 전화해서 결혼식을 언급할 줄은 몰랐다. 이제 주하와 결혼할 일만 남았다. 주하와의 결혼식과 허니문을 떠올리자 괜히 가슴이 설레었다.

‘내년 4월이면.... 휴우- 아직도 다섯 달이 넘게 남았구나. 이 기쁜 소식을 당장 주하에게 알려줘야지.’

강수가 스마트폰을 톡톡 터치해 주하에게 전화했다.

[오빠, 집에 들어갔어요?]

“응. 집이야. 주하야, 방금 김대풍 어르신하고 통화했다.”

[할아버지랑요?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요?]

“놀라지 마라. 폭탄 발언을 하셨으니까.”

[폭탄... 발언이요....]

“어르신이 우리 결혼 허락하셨어. 그리고 4월 초에 입국한다고 하시면서 입국하면 바로 결혼식 올릴 수 있게 준비하라고 하셨다. 어때? 이 정도면 폭탄 발언 아니니?”

[저, 정말이요? 그, 그래서요? 오빠는 뭐라고 했어요?]

주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강수는 긴장한 주하의 상태를 목소리로 느끼며 목청을 높여 말했다.

“뭐라고 하긴? 알겠다고 했지. 참, 용산에 있는 아파트 주신다고 신혼집은 구할 필요 없다고 하시던데? 주하는 아파트에서 사는 거 괜찮아?”

[용산에 있는 아파트를 준다고요? 와, 나는 용산에 아파트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사는 데는 단독주택도 좋고, 아파트도 괜찮아요. 한데 오빠는 며칠 뒤엔 단체전이 있고, 12월엔 개인전이 잡혀 있는데 결혼식 준비할 시간은 있겠어요?]

“12월에 여는 세 번째 개인전까지는 좀 바쁘겠지만 그 후로는 작업 스케줄 없어서 결혼식 준비하는데 시간은 충분할 거야.”

[그럼 결혼식 준비는 세 번째 개인전이 끝나고 나서 해야겠어요.]

“아니. 지금부터 할 수 있는 거 체크해서 미리미리 준비해 놓자. 뭘 먼저 하면 되지?”

[제일 먼저 해야 할 게 양가 부모님 상견례이긴 한데....]

“그럼 상견례부터 하자. 난 우리 부모님께 여쭤볼 테니까 주하도 상견례는 언제가 좋을지 주하 아버님에게 알아볼래?”

[네. 그럴게요.]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주하야, 잘 자.”

[네. 오빠도요.]

*

빌라 3층의 강하아트 임시 사무실.

사무실 실내는 15평 남짓의 공간이었고, 거실과 방 두 개가 있었다. 실내 공간은 두 사람이 사무실로 쓰기에는 넓은 편이었다.

염진구는 스마트폰을 들고 통화하고 있었다.

“여섯 작품 가운데 ‘거기 서라’와 ‘잠자리와 소년’은 이미 예약 판매되었습니다.... 그 두 작품은 구매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하늘이 붉게 물들면 꽃이 핀다’까지 총 여섯 작품을 예약하셨습니다. 여섯 작품에 대한 예약금은.... 사천육백칠십육만 원입니다. 오늘 중으로 입금해 주십시오. 입금 안 되면 예약은 해지됩니다. 통장 번호는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염진구가 통화를 끝내자 맞은편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조작하고 있던 알바생 우민식이 부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탄성을 질렀다. 적당한 체격에 날렵한 외모의 소유자인 우민식은 염진구가 출강 나가는 마천대학교 미대 2학년으로 군대 갔다 온 복학생이다.

“와, 또 여섯 작품이나 팔렸네요. 이러다 개막 전에 50점 전부 팔리는 거 아닐까요?”

강수 작품 6점을 사전 구매한 지석원에게 문자로 통장번호를 보낸 염진구가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도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개막 전에 강수 작품이 다 팔리면 십팔억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셈이라 경사이긴 한데 정작 전시장에 와서 강수 작품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은 한 점도 살 수가 없는 게 문제란 말이지. 그래서 사전에 다 팔기보다는 한 20여 점은 남겨 놓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하. 작품이 사전에 다 팔릴 걸 걱정해야 하다니! 이거 실화입니까?”

“이게 다 칠억에 낙찰된 ‘졸업반 아이들’ 효과 아니겠냐?”

염진구의 말에 우민식이 미간을 좁히며 괴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고민되는데요?”

“뭐가?”

“컬렉터들이 전시장에서 원화 보고 사는 것도 아니고 사진만 보고 구매하고 있으니 저도 한 점 구매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염진구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있으면 고민할 것도 없이 사면될 텐데 돈이 없어서 고민하는 거 아니냐?”

“그렇죠. 15호짜리 한 점 사려고 해도 부모님께 대출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그림 산다는 게 주제넘은 짓 같아서요.”

“부모님이 사면되지 않냐?”

“음, 그렇긴 한데.... 15호짜리 그림이면 이삼백 정도 생각하실 텐데 사천 이백이나 주고 사진 않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제가 빌려서 사려는 거죠.”

염진구가 가볍게 웃었다.

“후후. 민식아.”

“예, 교수님.”

“냉철하게 생각해보자. 만약에 이강수가 와이옥션 홍콩경매에 그림 3점을 출품하지 않았으면 칠억 낙찰도 없었을 테고, 언론에서 기사도 낼 일도 없었겠지?”

“뭐, 그랬겠죠.”

“그럼 네가 이강수 그림을 살지 말지 고민했을까?”

“그건....”

잠시 염진구가 얘기한 상황을 떠올려본 우민식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런 고민 안 했을 것 같네요.”

“칠억에 낙찰된 홍콩경매가 없었으면 단체전에 출품하는 이강수 그림은 호당 삼십만 원 내외에서 책정했을 거다. 그랬으면 10호 그림값이 삼백만 원이야. 삼백만 원이면 어때? 구매하려고 했을까?”

“글쎄요? 제가 교수님 도와드리면서 이강수 화가를 알았지 그 전에는 몰랐거든요. 10호 그림이 삼백이든 이백이든 사겠다는 생각조차 안 했겠죠.”

“하지만 컬렉터들은 홍콩경매 낙찰과 상관없이, 그림값이 싸든 비싸든 강수 그림을 살 사람은 사거든. 컬렉터들은 그림 구매에 있어서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왜 강수 그림을 사는지 한번 생각해봐라. 내가 하는 고민의 답을 찾을지도 모르지.”

“그렇네요. 고민해보겠습니다.”

염진구가 시간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 5시 40분이다.

“난 강수 좀 만나고 올 테니까 민식이는 시간 되면 퇴근해라.”

“예. 교수님. 다녀오십시오.”

염진구는 사전 판매된 작품 리스트를 서류 가방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

“진구 선배님, 어서 오세요. 이제 개막이 며칠 남지 않았네요? 전시 준비 마무리하느라 바쁘죠?”

“그래. 바쁘지.”

강수 작업실에 들어선 염진구가 누가 왔는지 돌아보지도 않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강수와 그 옆 이젤에서 작업하는 육감적인 뒤태의 존재를 발견하고 흠칫했다.

‘헉! 무슨 몸매가.... 예술이잖아? 누구지?’

염진구의 반응에 서혁중이 빙긋 미소 지으며 속삭이듯 입모양으로 말했다.

“제가 얘기한 얼짱 송다린입니다.”

염진구도 목소리를 내지 않고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쟤가 송다린? 송다린이 여긴 왜?”

“강수 선배 작업 알바요.”

“그래?”

염진구는 교내에 아주 유명한 송다린이란 20학번 얼짱 후배가 있다는 얘기를 서혁중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염진구가 강수에게 다가가 조용히 불렀다.

“강수야, 잠시 얘기 좀 하자.”

강수와 송다린이 고개를 돌려 염진구를 보았다.

“진구구나. 다린아, 내 동기 염진구인데 서로 인사했나?

“아뇨. 처음 뵈어요.”

‘강수 선배와 동기면 과 선배네. 그럼 잘 보여야지.’

염두를 굴린 송다린이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깍듯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염진구 선배님이군요. 20학번 송다린입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두근두근!

매혹적인 미소에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송다린이 허리를 숙이자 가슴이 파인 브이자 티셔츠 사이로 가슴골이 아슬아슬하게 염진구의 눈에 들어왔다.

‘헉!’

갑작스런 시선 강탈에 염진구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시, 심장 떨리게시리....’

“여, 염진구라고 해. 반갑다.”

송다린의 살인 미소와 아찔한 모습에 폭격당한 염진구는 반사적으로 허리 숙여 인사를 받았다.

서혁중이 당황해서 맞절하듯 인사하는 염진구를 보며 킥킥거렸다. 고원철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실소 지었다.

속으로 한숨을 쉰 강수가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는 염진구의 어깨를 잡았다.

“진구야, 우린 옆으로 가서 얘기하자. 다린이는 하던 작업 해.”

“네, 선배님.”

“어? 그, 그래. 가자.”

강수와 염진구는 옆으로 가 회의용 책상에 앉았다.

정신 차린 염진구가 쑥스러운 얼굴로 주섬주섬 판매 예약된 작품 리스트를 가방에서 꺼냈다.

“그건 뭐냐?”

“네 그림 벌써 24점이나 팔렸다. 판매 작품 리스트야."

염진구가 리스트를 강수 앞으로 내밀었다.

“잘못하면 사전 판매로 개막하기도 전에 다 팔릴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하러 왔다.”

“뭐? 사전 판매로 24점이 팔렸어?”

리스트를 살펴보며 강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하. 어떻게 원화도 안 보고 그림을 사냐? 내가 할 소리가 아닌가?”

“원화는 아니지만, 그림을 사진 파일로 보내줘서 네 그림을 보긴 했지.”

“그래? 네 생각을 얘기해봐라.”

“네 그림이 남은 며칠 동안 얼마나 더 팔릴지 모르겠다만, 개막하기도 전에 다 팔면 문제 소지가 있는 것 같다. 관람객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일단 사전 판매는 30점에서 마감하고 20점 정도는 전시장에서 판매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강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이거 참. 칠억 낙찰가 파급력이 어마어마하다. 어쨌든 개막하기도 전에 그림이 절반 가까이 팔려나가서 기분은 좋다. 하지만 내 그림 한 점 사겠다고 전시장에 왔는데 전부 빨간 스티커 붙어 있으면 얼마나 황당하겠냐? 사전 판매는 네 말대로 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해라.”

“알았어.”

문득 염진구가 책장으로 가로막힌 건너편에 시선을 주더니 턱짓하며 소곤소곤 말했다.

“강수야, 난 혁중이가 얼짱이라고 해서 그냥 예쁜 줄 알았는데 거의 여신이다. 넌 괜찮냐?”

“뭐가?”

강수의 표정을 유심히 쳐다본 염진구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넌 주하 씨가 있어서 무심할 수 있구나.”

염진구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는 강수가 피식 실소했다.

송다린의 미모가 남자의 본능을 자극할 정도로 특출 나게 뛰어나긴 했으나 남녀 관계에 있어서 외모가 전부는 아니다. 애정과 사랑, 믿음과 신뢰가 결여된 본능의 만남은 지속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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