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56회
강수 작업실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온 김주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강수 옆에서 송다린이 작업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마저 불안해졌고 애가 타들어 가는 듯했다.
주하는 거실을 빙글빙글 돌며 고민했다.
‘다린이 같은 여자애가 오빠 주위에 있으니까 불안해서 안 되겠어. 강수오빠랑 빨리 결혼해야 그나마 마음 놓이겠다.’
강수를 믿고 있지만 자기의 감정은 그것과는 별개였다. 장래를 약속한 사이라고 서혁중이 선언했지만, 엄연히 따지면 아직 잠자리도 갖지 않았다. 만에 하나 강수가 다른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 잠자리 갖고, 여자가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돌이킬 수가 없다.
자기와 결혼했다고 강수 주변에 여자가 꼬이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처럼 불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희 씨도 그렇고 오빠한테 늘씬하고 예쁜 여자만 꼬이네? 할아버지한테 빨리 귀국할 수 있냐고 물어봐야겠다.’
김주하는 시간을 보았다.
‘열 시면.... 유럽은 오후 세 시쯤 됐겠구나.’
주하는 스마트폰에 입력해 놓은 할아버지의 여행 일정표를 확인했다. 일정표에는 보름 동안 노르웨이 오슬로를 비롯해 주요 도시를 관광한다고 나와 있었다.
할아버지는 출국하면서 사소한 일로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 크루즈여행사에서 보내준 상세한 세계일주 일정표를 출력해 놓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 달에 두어 번 안부 통화만 했을 뿐이었다.
‘내 인생이 걸린 결혼 문제니까 이건 사소한 일이 아니라 중대 사안이야. 전화했다고 뭐라 하지 않겠지?’
주하는 김대풍에게 전화했다. 한참 후에서야 신호가 끊기고 할아버지의 강단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하야, 웬일로 전화했냐? 집에 무슨 일 생겼느냐?]
“아뇨. 집에는 아무 일 없어요. 건강은 어떠세요?”
[나야 아픈 데도 없고, 생생하지. 여행 다니니까 더 건강해지는 것 같다.]
“호호. 역시 할아버지는 바깥 체질인가 봐요. 할아버지 어디예요?”
[여긴 노르웨이 오슬로다. 북극이 가까워서 춥긴 해도 자연 풍광이 아주 그만이야. 너도 나중에 강수와 와서 둘러보거라. 볼 게 아주 많구나. 얘들은 잘 있니?]
“네. 모두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어요.”
[다들 몸 성히 잘 있고 별일 없으면 됐다. 더 할 말 없으면 끊으마.]
전화 끊는다는 말에 김주하가 화급하게 김대풍을 불렀다.
“아뇨! 할아버지 잠깐만요.”
[왜?]
김주하는 할아버지가 외국에 나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면전이 아니라 전화상이라는데 용기가 났다. 마음을 굳게 먹은 김주하는 자기 생각을 후닥닥 말했다.
“할아버지! 나 강수오빠랑 결혼하고 싶어요. 잠깐 귀국해서 결혼시켜주고 다시 나가세요.”
[...?! 강수와 결혼시켜 달라고? 인석아, 귀국까지 고작 한 다섯 달 남았는데 뭐가 그렇게 바빠? 조금 기다리면 될 일 가지고 여행하다 한국에 들어가야 해?]
“할아버지가 들어오셔야 결혼식 올릴 수 있으니까 그렇죠. 하여튼 상황이 바꿔서 할아버지가 빨리 들어오셔야 한단 말이에요.”
[상황이 바꿔? 무슨 소리냐?]
“강수오빠가 유명해져서 주변에 여자가 꼬여요. 강수오빠를 믿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아요.”
‘송다린이란 애가 적극적으로 오빠를 유혹하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란 말이에요.’
주하는 나중 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수가 뭣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와이옥션이 저번 달 17일에 홍콩 호텔에서 경매를 개최했어요. 이브닝 세일에서 강수오빠 그림 3점 소개했는데 그 가운데 ‘졸업반 아이들’이란 작품이 칠억 원에 낙찰됐어요. 젊은 화가 작품이 칠억이나 하는 가격에 낙찰되기는 드문 일이라 여러 언론 매체에서 기사 내고, 네티즌 사이에서 꽤 화제가 됐어요.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은 거의 다 알 테고 일반인에게도 많이 알려졌거든요. 강수오빠가 정말 유명인사 됐다고요.”
[.......]
“할아버지?”
잠시 침묵이 이어진 후 김대풍의 차분한 목소리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다.
[강수 그림이 칠억에 낙찰됐다고 했느냐?]
“네. 일이억도 아니고 칠억이요. 포털사이트 들어가서 검색창에 이강수 넣고 검색해보세요. 기사가 쭉 떠요. 강수 오빠 그림이 칠억에 낙찰되고 나서 아빠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다니까요.”
[칠억에 낙찰된 거 하고 용극이와 무슨 상관있다고 그걸 자랑하고 다녀?]
“헤헤. 강수오빠가 800호짜리 대작 ‘향유고래의 꿈’을 퍼스트타워 로비에 일억 이천만 원 받고 그렸거든요. 그 그림 지금 팔아도 십억 원은 넘게 나갈걸요? 강수오빠 명성이 더 높아지면 그림값은 앞으로 계속 오르지 않겠어요?”
[허, 그래? 놀랍구나.]
“헤헤. 저도 믿기지가 않는다니까요. 그리고 강수오빠가 기획한 ‘한국 청년예술가들이여, 희망을 던져라’ 전이 11월 10일 예술의 전당에서 개막하거든요. 그 전시회에 강수오빠가 소품 위주로 50점 출품하는데 호당 이백팔십만 원이에요. 50점 그림값 전부 합치면 약 십팔억 정도예요.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네티즌 사이에서 시끌벅적해요. 신인화가 그림이 호당 이백팔십이라는 게 말이 되냐? 거품이다. 칠억 낙찰가에 비교하면 엄청나게 싸다. 무조건 사야 한다. 하면서요.”
[허허. 내가 없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오냐, 알았다. 내가 강수와 전화 통화해보마.]
“뭐라고 하시게요?”
[인석아, 강수와 결혼시켜 달라며. 그놈에게 내가 귀국하면 결혼식 올릴 수 있게 날 잡으라고 해야지.]
“할아버진 언제 귀국하실 건데요?”
[험, 결혼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니? 예정보다 한 달 정도 일찍 들어가마.]
“한 달 일찍이면 3월에 들어오시겠네요?”
[인석아, 내가 5월 2일에 출국했는데 무슨 3월이야. 4월 초구먼. 하여튼 넌 걱정하지 말거라. 4월 초에 결혼식 올릴 수 있게 철저하게 준비하라고 할아비가 강수에게 얘기하마. 내년 4월 초면 잠깐만 기다려라.]
스마트폰을 멀리 치웠는지 목소리가 끊어졌다 다시 들렸다.
[주하야, 내년 4월 3일이 일요일이구나. 그때 결혼식 올리면 되겠어. 너도 괜찮지?]
내년 4월 3일이면 앞으로 다섯 달 남았다.
조금 더 빠르면 좋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옆에서 새 할머니가 날짜를 찾아 알려준 모양인데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결혼식장과 신혼집 등 이것저것 준비를 하려면 다섯 달 정도는 걸릴 것 같았다.
“알았어요. 할아버지만 믿을게요.”
[오냐. 걱정 말거라. 전화 끊으마.]
김대풍은 털코트를 입은 오십 대의 여인과 푸른 잔디가 시원하게 펼쳐진 아름드리 보리수나무 길을 수백여 명의 사람 속에서 함께 걷고 있었다.
김대풍이 크루즈 세계여행자들과 방문 중인 곳은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 위치한 비겔란 조각공원이다.
비겔란 조각공원.
조각가 비겔란(vigelend Adolf Gustav)의 작품이 전시된 곳으로 그가 40여 년간 피와 땀을 쏟으며 심혈을 기울여 만든 200여 점의 화강암으로 조각한 작품과 수많은 청동상으로 조성되어 있다.
비겔란 조각공원의 정점은 높이 17.3m에 이르는 화강암 조각 모놀리스다.
멀리서 보면 커다란 돌기둥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121명의 남녀노소가 뒤엉켜 있는 거대하고 충격적인 조각상이다. 거대한 모놀리스가 인생살이의 축도라면, 모놀리스를 중심으로 계단을 따라 아래쪽으로 늘어서 있는 조각들은 그 축도를 풀어놓은 세밀화다.
젊은 여인들이 무릎을 꿇은 채 광장 아래쪽을 향해 서로 팔을 걸고 희망을 이야기하고, 노부부가 대화를 나눈다.
죽음을 앞둔 쓸쓸한 표정이 정밀하게 묘사된 노파의 얼굴.
등을 맞대고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두 사람.
아들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담담한 표정의 아버지.
그는 인간 군상을 조각했는데 인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다양하고 세밀하게 표현했다. 그의 작품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인간의 삶을 담아냈으며, 삶의 지속성과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손녀와 통화를 끝낸 김대풍이 스마트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김대풍 옆에서 공원을 걷고 있는 털코트의 중년 여성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하가 결혼시켜 달라는 게 그렇게 기쁘세요?”
“허허. 그것도 그거지만 주하와 사귀고 있는 이강수라는 청년을 몇 번 얘기 했지.”
“네. 재능이 넘치는 화가라면서요?”
“그 친구에게 내 딴에는 어렵다고 생각한 숙제를 하나 냈는데 민망할 정도로 간단하게 해결했구려.”
“그래요? 무슨 숙제였는데요?”
“화가니까 그림 한 점을 일억에 팔라는 숙제였지.”
중년 여인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몇 년 전에 미대 졸업한 신인화가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낸 숙제였지. 아무리 잘나가도 신인화가 그림 한 점을 일억에 살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한데 저번 달에 열린 와이옥션 홍콩경매에서 그 친구 그림이 칠억에 낙찰됐다고 하니 내가 낸 숙제가 함량 미달 인건가?”
여인이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칠억 낙찰이 무슨 소린가 했는데 이강수 그림이 칠억에 낙찰됐다는 얘기였군요? 호호. 일억이라도 받아보라고 했는데 칠억에 팔렸으니 숙제가 너무 쉬웠군요. 한데 숙제를 왜 내준 거죠?”
“허허. 그것이....”
김대풍이 출국하기 한 달 전, 이강수가 손녀 주하와 결혼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당돌하게 요청했던 일을 얘기해주었다.
“그때만 해도 이강수란 친구는 재능 있는 초짜 화가에 불과했지. 한데 내가 한국에 없는 반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그림 한 점이 칠억에 팔린 건지 모르겠군.”
세계여행의 동반자인 수백 명의 사람이 인간 탑 모놀리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김대풍과 털코트 입은 여인도 그들과 함께 걸었다. 모놀리스로 가기 전 다리를 거치게 되는데 다리 난간에서 비겔란의 청동상들이 관광객을 맞이했다.
관광객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청동상을 감상하며 사진을 찍었다. 어떤 사람은 조각과 같은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와, 청동상이 역동적이고 너무 아름다워요.”
“허허. 한데 웬 청동상들이 전부 알몸이야?”
“호호. 비겔란 조각은 전부 알몸이라고 해요. 옷을 입고 있는 인간보다 옷을 벗고 나체로 있는 인간의 모습이 더 아름답고 진실해 보이지 않나요? 비겔란은 아마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알몸을 조각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여성의 성적인 요소를 제한했는지 여성 조각상은 대체로 유니섹스 느낌이 나요.”
“나체가 진실하고 아름답다? 알몸은 젊었을 때나 볼만하지 늙으면 추해져서 볼 게 없어.”
“왜요? 적당히 먹고 운동하면서 몸 관리해주면 나이 먹어서도 아름다운 몸을 유지할 수 있는걸요. 몸 관리 안 하고 나태하게 지내니까 피부도 몸매도 추해지는 거죠.”
김대풍이 곱게 늙어가는 중년 여인을 슬쩍 쳐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구먼.”
“호호. 당신은 지금처럼만 하면 되요. 당신 나이에 적당히 운동해야지 더 했다간 쓰러지세요.”
“흠, 임자가 괜찮다면 지금처럼만 하지.”
문득 김대풍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주하가 걱정 많이 하는데 아무래도 강수에게 전화해야겠어.”
“네, 그러세요.”
*
쏴아아-
욕실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를 맞으며 간단하게 샤워한 강수는 샤워기를 잠갔다. 옛날에는 한여름에만 찬물로 샤워했으나 올해는 찬물로 샤워를 해도 춥지 않았다. 몸이 그만큼 건강해진 모양이었다.
욕조에서 나온 강수는 밖으로 나가려다 힐긋 거울을 보았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거울 속에 있었다. 달리기와 마나회로 수련만 하는 데도 몸에서 활력이 넘치고 운동선수처럼 몸매가 다부졌다.
싱긋 미소 지은 강수는 물기를 닦은 후 커다란 수건으로 허리를 두르고 거실로 나갔다.
샤워를 끝낸 강수는 거실 불을 끄고 발코니로 나갔다. 창밖은 어둠에 묻혀있었으나 군데군데 도시의 불빛이 어둠을 밀어내고 자기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강수는 암흑 덩어리로 변한 북한산에 시선을 주었다.
일상은 길을 굴러가는 수레바퀴나 다름없다. 구르는 수레바퀴처럼 비슷한 하루의 일과가 반복되고,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면 언제나 소소한 하루가 어둠 속으로 서서히 잠식되고 끝내 영원히 사라진다.
하지만 오늘의 일상은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는 강물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미미했는데 비슷하게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에 작은 흔적을 새겼다.
작은 흔적은 바로 송다린의 등장이다.
‘음, 주하가 다린이를 의식하는 것 같던데.... 하긴 다린이 미모가 과하게 예쁘기는 해. 그래서 주하가 긴장한 모양이야. 하지만 다린이는 작업 도와주는 후배일 뿐인데 그래도 주하는 신경 쓰이는 건가?’
강수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처지를 바꿔 주하 경호원이 톱스타 강하늘 같은 사내라면 어땠을까?
강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강하늘 같은 자식이 주하랑 붙어 다닌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나. 주하가 걱정하지 않게 조처를 해야겠는데?’
강수는 거실로 들어가 TV 장식장의 서랍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내 들고 소파에 앉았다.
상자를 열자 일곱 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혔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을 매끄럽게 가공한 백금 반지가 영롱하게 자태를 드러냈다.
‘실드마법 인챈트는 포기하고 반지를 줘야겠어. 결혼식은 김대풍 어르신이 입국하는 대로 하더라도 양가 부모님 모시고 약혼식이라도 올리면 주하가 덜 불안해하겠지?’
우웅!
이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김대풍 어르신?’
김대풍의 해외 전화가 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