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55화 (155/1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55회

강수가 싱긋 미소 지으며 송다린의 흑백이 뚜렷하고 깨끗한 눈을 쳐다보았다.

“작업복은 가져왔어?”

“작업복이요?”

송다린이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미스코리아였던 엄마의 유전자를 그대로 이어받은 송다린은 강수의 눈길을 사로잡고 관심을 끌어낼 계산으로 일부러 자기의 몸매를 가감 없이 드러낸 옷을 입었다.

작업복을 가져올 이유가 없었다.

“스케치부터 하고 물감은 나중에 칠하면 당분간 작업복은 필요 없을 것 같아서 가져오지 않았는데요. 작업복을 따로 입어야 하나요?”

“입으면 좋겠지만, 필요할 때 입으면 되겠지?”

"네."

강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그 속에는 약간의 뼈가 있었다.

복사기가 없는 관계로 강수는 근로계약서 2부에 똑같은 내용을 적어 송다린에게 건네주었다.

“읽어보고 이상한 점 있으면 말하고 없으면 사인해.”

“없는데요.”

송다린은 인센티브 10%인 1안에 맞게 작성된 근로계약서에 사인하고 강수에게 주었다.

“작업에 관해 설명해주마. 옆으로 가자.”

“네.”

근로계약서 1부를 송다린에게 돌려준 강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심 의문을 품었다.

송다린의 옷차림은 평범하고 캐주얼하긴 했지만, 몸매가 너무 드러나서 섹시한 몸매 뽐내려는 연예인의 옷차림 같았기 때문이다.

건너편 작업실로 간 강수가 이젤에 세로로 길게 걸린 캔버스 앞으로 갔다.

서혁중과 고원철이 강수를 쫓아 이젤 앞으로 가는 볼륨감 넘치는 송다린을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송다린에게서 눈길을 거둔 고원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서혁중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고원철의 따가운 눈길을 느꼈는지 서혁중이 목소리는 내지 않고 입만 뻐끔거렸다.

“왜?”

고원철도 소리를 내지 않고 입을 놀렸다.

“몰라서 물어?”

“뭐가?”

고원철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작업이나 하자.”

강수가 캔버스 중앙을 가리켰다.

캔버스 중앙은 세로로 선을 그어서 양분해 놓았다.

“다린이가 안범진보다 먼저 왔으니까 좌측을 그릴지 우측을 그릴지 선택해라.”

“좌측을 그리겠어요.”

“그러면 다린이가 좌측을 그리는 것으로 하자. 여기 있는 원본 보고 그대로 그리면 돼.”

캔버스 옆에는 원본 크기와 똑같은 크기로 현상된 커다란 사진이 놓여 있었다.

강수가 그려놓은 스케치와 원본을 번갈아 살펴보던 송다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님, 스케치하고 원본 사진하고 좀 다르네요? 스케치한 카카오닙스 조각이 훨씬 커 보이는데요?”

“후후. 맞아. 카카오닙스 조각이 너무 작아서 본래 크기보다 3배 크기로 그렸어. 그러니까 다린이도 3배 크기로 그려야 돼. 그 대신 사진 속 형상은 똑같이 그려야 하지.”

송다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어머! 정말이요?”

강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물론이죠.”

너무 기쁜 나머지 송다린이 그 자리에서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리다니 손뼉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짝짝!

“와아, 살았다. 정말 이 사진 속 카카오닙스 크기로 그리면 죽었구나, 했는데 말이에요. 이정도 크기면 가뿐하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강수가 그림에 대해 추가로 설명했다.

“사진을 잘 보면 카카오닙스 조각의 색은 대표적으로 커피색과 갈색, 밝은 갈색, 세 가지 색을 가지고 있어. 나중에 채색할 때는 세 가지 색을 만들어 줄 테니까 스케치가 끝나면 얘기해.”

“알겠어요. 참, 저쪽에 그림 많던데 전부 선배님 작품인가요?”

“아니. 내 작품이 가장 많지만, 친구 이동석 작품도 있고, 혁중이, 원철이 작품도 몇 점 있어.”

“아, 잠깐 구경해도 돼요?”

“그럼. 물어볼 것 없이 언제든지 구경해.”

“네.”

반대쪽 미니부스로 가려던 송다린이 문득, 뒤돌아서 강수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가자미처럼 눈동자를 돌려 강수와 송다린을 훔쳐보던 서혁중이 숨을 급하게 들이켜며 눈을 부릅떴다.

‘흡. 저, 저건 스킨십?’

여자가 의도적으로 남자의 몸에 손대는 것은 명백하게 호감의 표시다. 서혁중이 모솔이지만, 먼저 스킨십을 시도하는 이유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무관심하거나 비호감인 남자에게 여자는 절대 스킨십을 시도하지 않는다.

‘다린아, 강수 선배는 임자가 있단다....’

서혁중은 임자 있는 강수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송다린의 모습을 훔쳐보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서혁중이 머릿속으로 김주하를 떠올리고 송다린과 비교해보았다.

‘흠, 객관적으로 보면 비주얼은 송다린이 한 수 위인 것 같다? 하지만 주하 씨 외모도 연예인급이고, 미모가 다는 아니지. 성격이나 속궁합이 오히려 더 중요할지도 몰라.’

염두를 굴리며 서혁중이 다시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송다린이 강수의 팔을 살짝 잡아끌며 말했다.

“저기, 선배님. 시간 되면 작품 설명 좀 해주면 안 될까요?”

“작품 설명?”

“요즘 작업하면서 뭔가 자꾸 막혀서요. 이제 곧 4학년이고 졸업반이잖아요. 나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가야 하는데 스타일이나 창작 기법, 작품 재료는 뭐로 할지, 어떤 주제를 다뤄야 할지 등등 도대체 뭘 그려야 할지 막막해요. 선배님한테 배우고 싶은 게 많아요.”

강수가 자신의 왼팔을 잡은 송다린의 햐얗고 손가락마저 예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송다린은 손을 놓을 생각이 없는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서 있었다.

강수가 송다린에게 잡힌 왼팔을 들어 뭔가 생각하는 듯 턱을 만지작거렸다.

송다린은 강수의 팔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 내 스킨십이 까인 거야? 세상에 이럴 수가?’

지금까지 자기가 먼저 접근한 스킨십을 거부한 남자는 단연코 한 명도 없었다. 송다린은 한 번도 당한 적이 없는 상황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정신적인 충격에 휩싸였다.

“음.... 그건 예술가가 창작 활동하는 동안 끝없이 고민해야 하는 원초적인 화두라고 봐야지. 창작에 대한 고뇌는 예술가로서 다린이가 안고 가야하는 숙명 아니겠어? 그럼 작품 보러 가자. 설명이랄 건 없고 궁금한 건 얘기해 주지.”

강수가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멀뚱히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송다린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고 미니부스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퍼득 정신 차린 송다린이 눈동자를 굴렸다.

‘아- 사귀는 사람이 있구나! 어휴, 바보 같으니. 강수 선배 같은 사람한테 애인이 없을 리 없지. 당연한 걸 깜박 했네. 하지만!’

송다린은 강수를 따라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가락에 반지가 없는 걸 보면 결혼은 안 했어. 아직 기회는 살아 있어.’

강수를 따라 미니부스로 간 송다린은 그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 강수 선배님이 추상화도 그려요?”

“그건 추상표현주의를 토대로 작품 하는 학교 동기 이동석 그림이야.”

“선배님 그림이 아닌 것 같았어요. 선배님 작품 성향하고는 거리가 멀더라고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송다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선배님 동기면 이제 겨우 스물아홉인데 추상표현을 하네요? 인지도 없는 신인화가가 추상표현하는 건 너무 무모한 것 같아요.”

“작업실 같이 하는 종대가 그러는데 요즘은 구상표현 한다더라. 젊으니까 다양한 기법을 천작하면서 작품 활동의 폭을 넓혀가는 거겠지.”

옆 부스로 건너간 송다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킥킥, 그림이 재밌다. 여기부터는 선배님 작품이죠?”

“그래.”

“이 작품 제목은 뭐예요?”

“거기 서라.”

“거기 서라요? 호호. 정말요?”

“정말인데. 제목이 맘에 안 들면 다린이가 지어 볼래?”

“호호. 아녜요. 그림도 재밌는데 제목도 독특해요.”

송다린이 제목을 물어본 작품, '거기 서라'는 초록과 황금색이 섞여 물결을 이루는 벼와 그사이에 난 논두렁 길로 신발을 물고 뛰는 강아지, 강아지 뒤를 고함치며 쫓는 아이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은 소재도 재밌지만, 무엇보다 색 조합이 특이한데요. 이 그림의 채색은 정말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이 평화롭고, 아련한 정취가 느껴져요. 이런 색 조합이나 색 선택은 타고난 건가요? 아니면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주관적인 인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건가요?”

송다린의 질문에 강수가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을 정리한 강수가 입을 열었다.

“음, 색의 조합, 선택이라.... 다린이도 색채학을 배워서 알겠지만 먼셀의 표색계는 색상을 정의하고 체계적으로 정리, 분류, 도식화해 놓았지. 하지만 색상은 무궁무진하게 존재해서 나만의 색을 만들 수 있어. 색의 선택이나 배합은 사물을 바라보는 개인의 경험과 통찰, 직관에 의해 형성된 작가 고유의 감각이라고 할 수 있어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닌 것 같고 스스로 깨우쳐야 할 영역 같다. 나 같은 경우는 직관적으로 색을 선택하는 편이지.”

“맞아요. 색상 감각은 개개인의 고유한 영역이 틀림없어요. 그런 면에서 선배님의 작품들은 색상의 충돌 속에서 카오스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네요. 굉장히 독특한 색채예요.”

“하하. 칭찬인가? 고마워. 그럼 다린이는 그림 보도록 해. 그림 보다 궁금한 점 있으면 메모했다 이따 물어보고. 난 그리던 것이 있어서 옆으로 가볼게.”

송다린이 아쉽다는 눈빛으로 강수를 올려다보았다. 포승줄로 강수를 묶어 놓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강수는 송다린의 눈길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네에.”

건너편으로 가는 강수의 모습을 지켜보며 속으로 실망에 가득 차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 미모와 간절한 눈빛이 전혀 먹히지 않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여자를 사귀기에 날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야?’

송다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

서혁중이 작업실로 들어오는 김주하를 맞이하며 우렁차게 말했다.

“형수님, 어서 오세요. 언제 오시나 눈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호호. 솔직히 말해요. 날 기다린 게 아니라 저녁을 기다렸죠?”

“아니요. 저녁은 주문만 해도 가져오는데요. 형수님 기다리면서 덤으로 저녁도 기다린 겁니다.”

서혁중은 이강수에게 눈에 띌 정도로 호감을 표시한 송다린에게 똑똑히 들으라고 일부러 큰 목소리로 김주하를 반겼다.

카카오닙스 조각을 열심히 그리고 있던 송다린은 또렷하게 귀에 박히는 형수님이란 단어를 인지하고 출입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실내로 들어오는 두 여성을 볼 수 있었다. 두 여성의 면모를 훑은 송다린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키 작은 여자가 형수? 설마 형의 와이프를 지칭하는 그 형수?’

“다린아, 이리 와서 형수님께 인사해라.”

서혁중의 손짓에 송다린이 두 여성 앞으로 걸어갔다.

“강수 선배님과 장래를 약속한 김주하 씨야. 이분은 임해영 씨고.”

짐작은 했지만, 이강수와 장래를 약속한 사이라는 말을 들은 송다린의 눈이 흔들렸다.

‘강수 선배가 이 여자와 장래를 약속했다고? 생긴 거나 입은 옷을 보니 평범한 여자는 아니구나.’

김주하와 송다린의 눈이 마주쳤다.

첫눈에 남자의 혼을 빼버릴 것 같은 끔찍한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낸 자신만만한 옷차림, 극강의 자신감으로 흐트러짐 없는 자태의 송다린을 보는 순간 엄마의 경고가 김주하의 뇌리를 때렸다.

‘한눈팔면 어떤 여자가 채갈지 모른다고 했는데 이 아이는 위험하다.’

직감이 위험한 아이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김주하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송다린 씨? 오늘부터 후배 두 명이 강수 오빠 작업 도와준다는 얘기 들었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송다린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서혁중은 두 사람의 첫만남을 불안한 눈으로 주시했다.

‘주하 씨가 긴장하네? 다린이가 강적이라는 걸 느낀 모양이다. 강수 선배랑 결혼할 사이라는 걸 얘기 했는데 설마 다린이가 딴 짓 하지 않겠지?’

서혁중이 송다린의 표정을 힐끔 살펴보았다. 송다린의 표정은 평온해서 속마음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내가 괜한 젓 한 건 아니겠지?’

이때, 강수가 다가오며 쾌활하게 말했다.

“주하야, 마침 배고팠는데 잘왔어. 다린이 하고 인사도 했으니까 같이 저녁 먹자.”

“네. 선배님. 우리가 상 차리겠습니다.”

옆에서 얼짱 송다린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단순한 생각이었던 서혁중은 괜히 김주하보기 미안해서 고원철에게 고함쳤다.

“원철아, 책상 위 치워.”

“어, 알았다.”

서혁중과 고원철이 저녁식사 차린다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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