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마법사 - 154회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범진을 보며 고원철이 가볍게 웃었다.
“후후. 작업이 자기와 싸워야 할 정도로 쉽지 않은 작업이니만큼 보수는 나쁘지 않아. 오죽하면 혁중이가 자기가 해도 되냐고 할 정도니까.”
보수가 좋다는 말에 귀를 쫑긋 세운 안범진이 물었다.
“보수가 어떻게 되는데요?”
고원철은 강수에게 들은 대로 두 가지의 보수 방식을 말했다.
보수를 들은 안범진의 입꼬리가 귀를 향해 쭉 올라갔다.
“시급 삼만 원에 인센티브까지 줘요? 와, 인센티브 주는 알바가 다 있네요.”
안범진이 시급 3만 원에 관심을 보이자 고원철이 자기 경험담을 얘기해주었다.
“...그래서 알바 할 생각 있으면 10% 인센티브를 선택하는 게 좋을 거다.”
“첫 번째 안이면 시급 만 원 외에 낙찰가가 일억이면 인센티브로 천만 원 받는 거네요?”
“수수료 제하고 수령 받은 금액에서 10%겠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경매회사 수수료가 20%는 넘을 거다. 그걸 감안해야겠지.”
“아, 그렇군요. 작업은 일요일 빼고 12월 10일까지면... 순수하게 약 30일 일하는 건데 당연히 해야죠.”
“그럼 두 사람 다 알바하는 거다?”“
“예. 합니다. 낙찰가 10%나 인센티브 주는 이런 알바를 어떻게 안 할 수 있습니까? 선배님, 인센티브 받으면 제가 한턱 쏘겠습니다.”
“하하. 좋지. 그 말 잊지 마라.”
가만히 듣고 있던 송다린이 물었다.
“알바는 언제부터 하죠?”
“내일부터 당장 하면 좋고, 정리할 게 있으면 모레부터 하면 돼.”
“시간은요?”
“시간은 각자 네 시간씩이니까 두 사람이 의논해서 서로 겹치지만 않으면 돼. 작업실은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근처라 찾기 쉬워. 주소를 범진이한테 문자로 보낼 테니까 알아서 찾아오고. 또 궁금한 거 있어?”
“작업실 문 열고, 닫는 시간은 정해져 있나요?”
“그렇진 않아. 나하고 혁중이는 오전에 출근해서 오후 열 시쯤에 끝내는 편이야. 너희는 수업이 있으니까 하루에 네 시간씩 편한 시간에 오면 돼. 또?”
안범진과 송다린이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고원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없으면 난 일어나지. 그럼 강수 선배 작업실에서 보자.”
“네, 선배님. 들어가세요.”
고원철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안범진이 송다린을 쳐다보았다.
송다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난 오후 다섯 시 이후가 좋아. 네가 다섯 시 전까지 작업해 줄래?”
“뭐? 야, 시간을 네 맘대로 정하냐?”
안범진이 불만을 내비치자 송다린이 애교 있게 두 손을 모아 빌며 말했다.
“내가 오전에는 잠이 많아서 일찍 일어나는 게 힘들어서 그래. 범진아, 이렇게 부탁 좀 할게. 응?”
어차피 두 사람 중 한 명은 오전에 작업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이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어휴, 알았어. 아침에 잠이 많으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오전에 할게.”
“고마워. 범진아, 넌 복 받을 거야.”
“헐, 복은 무슨. 우리도 일어나자.”
두 사람은 카페에서 나와 홍우대로 향했다.
*
돈암동 한 골목길로 서류 가방을 든 염진구가 들어섰다.
염진구는 단체전 개막이 다가옴에 따라 인터넷, 미디어 홍보와 프로그램 진행을 위한 준비, 작가의 출품작 점검 등으로 알바생 한 명과 함께 바쁘게 움직였다. 강수가 얻어준 돈암동 일성빌딩 근처 임시 사무실인 원룸으로 걸어가던 염진구는 진동하는 업무용 스마트폰을 꺼내 통화를 연결했다.
“강하아트 염진구입니다.”
스마트폰 건너편에서 톤이 굵은 50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가인갤러리 지석원 관장이라고 합니다. 잠시 통화 괜찮은지요?]
“예. 말씀하십시오.”
[강하아트에서 주최하는 단체전에 이강수 화가가 50여 점을 출품한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이강수 화가가 50점 출품하는 거 맞습니까?]
“예. 30호 이하 소품 위주로 50점 출품합니다.”
[전화한 건 다름이 아니라 내 고객 중 한 분이 이강수 화가의 작품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 고객이 이강수 화가의 작품을 몇 점 구매하고 싶어 하는데 팸플릿에 소개된 작품 말고, 어떤 작품이 출품되는지 미리 살펴보고 싶다고 하십니다. 작품을 사진 파일로 받아볼 수 있을까요?]
“예. 물론 보내드려야죠. 이메일 주소 알려주시면 사무실에 들어가서 작품 사진 보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메일주소 보내죠.]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은 염진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강수의 작품 문의가 벌써 이십여 건이다.
전화 걸어 강수의 출품작을 문의할 정도로 적극적인 컬렉터라면 구매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강수의 두 번의 개인전에서 작품이 오픈 당일 완판됐듯이 이번에도 단체전 개막일에 완판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림값이 호당 280만 원이면 국내 정상급 작가의 가격과 맞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업반 아이들 낙찰가에 비교하면 굉장히 낮은 가격이다. 또한 소품 위주의 작품이라 큰맘 먹으면 일반인도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다.
‘홍콩경매에서 졸업반 아이들이 칠억에 낙찰되어 이슈가 됐는데 개막일에 완판 안 되면 오히려 이상하지.’
강수의 작품 50점의 평균 캔버스 크기는 13호쯤 된다. 50점이 완판된다고 가정하면 강수 그림만으로 약 18억 원의 매출을 올린다.
‘십팔억이라니! 홍콩경매가 없었으면 50점 그림값은 십 분지 일에 불과했겠지. 그림 한 점이 칠억에 낙찰되어 그림값이 단숨에 열 배나 올랐으니 강수 이 자식은 운마저 따라주네.’
이강수가 일궈내고 있는 성공을 생각하면 질투가 날 정도였다.
‘그림값이 십팔억인데 고작 이억 정도 되는 행사 비용을 가지고 고민했던 것이 참으로 우습구나.’
얼마 전 희망을 던져라 단체전의 연례행사를 두고 결과물을 보고 논의하자고 얘기했던 것이 떠올라 실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강수가 10여 점만 출품해도 운영비는 나오니 사무실 열고 매년 희망을 던져라 전을 개최해도 되겠어.’
강수의 작품이 실제로 몇 점이나 판매될지는 모르지만, 이강수에 대한 컬렉터들의 관심과 반응,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어 보면 높은 그림값에도 불구하고 완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임시 사무실이 있는 빌라에 도착한 염진구는 지석원 관장에게 자료를 보내기 위해 서둘러 3층 원룸으로 올라갔다.
*
가인갤러리 관장실.
통화를 끝낸 지석원은 염진구에게 이메일 주소를 보내고, 출력해 놓은 자료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출력물은 이강수에 대한 자료였다. 자료를 자세하게 훑은 지석원은 프린트물을 탁자에 내려놓고 등을 소파에 묻고 팔짱을 꼈다.
‘이강수, 이 친구 내 덕에 완전히 떴군. 내가 홍진자에게 졸업반 아이들을 추천하지 않았으면 칠억에 낙찰될 일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지.’
문득 홍콩에서 있었던 경매 상황을 떠올린 지석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니어도 제임스 자버와 밍우옌이 430만 홍콩달러까지 경합했지? 홍 여사가 끼지 않았어도 오억 팔천에 낙찰됐겠구나. 그 정도만 해도 이슈가 됐을 테지. 후후. 나는 그저 조금 거들었을 뿐 이미 뜰 친구였군.’
지석원은 11월 10일에 개막하는 희망을 던져라 전에서 이강수의 그림 6점을 구매하라는 새로운 오더를 홍진자에게 받은 상태였다. 이강수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홍진자는 손주들에게 이강수의 그림 한 점씩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지석원이 단체전의 디렉터 염진구에게 출품작을 사진 파일로 요청한 이유는 구매 작품을 미리 정해놓기 위해서였다. 구매가에서 10%의 커미션을 받는 지석원은 가능하면 가장 비싼 작품을 구매할 생각이었다.
‘30호 이하 소품만 출품한다고 했으니 30호짜리만 골라서 사야겠어. 30호라고 해봐야 한 점에 팔천사백이군. 한데 홍콩 낙찰가에 비교하면 너무 싼 가격 아닌가?’
일반적으로 판단하면 신인화가에 불과한 이강수의 그림값은 터무니없이 비싸다. 하지만 홍콩 경매에서 낙찰된 가격이 있기 때문에 너무 낮은 그림값은 오히려 스스로 자기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
‘세 작품의 낙찰가 간격이 워낙 커서 그림값 책정하기 모호했겠구나. 그래서 호당 가격을 산골마을의 만추 낙찰가보다 조금 낮게 책정한 모양이군.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이강수의 그림값은 졸업반 아이들 가격에 형성될 게 틀림없어. 이런 기회는 흔치 않지. 나도 몇 점 사야겠지?’
띠링~
문자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문자를 확인한 지석원은 책상으로 가 컴퓨터를 켜서 이메일을 확인했다.
염진구가 보낸 메일에 50개의 첨부 파일이 들어 있었다. 첨부 파일을 다운받은 지석원은 그림을 하나씩 열어 전부 살펴보았다.
‘흠.... 경운기 모는 노부부, 밭일하는 농부, 산에서 뛰노는 아이들, 서정적인 시골 풍경이군. 훗, 병아리가 하늘을 날아? 허공에 정지한 잠자리 떼, 하늘로 비상하는 매미? 이런 그림은 환상적인 느낌이 나는데? 전체적으로 지나간 시절을 그렸군. 자기가 살았던 삶의 공간에 대한 추억인가? 한데 홍콩경매에 출품한 그림도 색 표현이 놀라웠는데 만 이 친구는 확실히 색깔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구나. 인물은 인물대로 개성적이고, 곤충들이 꼭 살아서 움직이는 것만 같군. 모니터로 봐도 아늑하고, 아득한 느낌이 드는데 원화는 어떨까? 원화로 빨리 보고 싶구나.’
지석원은 그림을 훑어보며 과거 시골 마을의 풍경을 되새기며 추억으로 빠져들었다. 한참 동안 그림을 감상한 지석원은 50개의 첨부파일을 USB에 옮겨 담고 관장실 밖으로 나가 사무직 여직원에게 다가갔다.
“민솔 씨.”
“네, 관장님.”
깔끔한 마스크의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무 여직원 노민솔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지석원이 USB를 노민솔에게 내밀었다.
“여기 이강수 폴더에 그림 파일 50개 있어. A3 크기로 전부 출력해 와.”
“이강수 폴더요? 예. 알겠습니다.”
USB를 받아든 노민솔은 반코트와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
일성빌딩 강수의 작업실.
‘다섯 시 다 됐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신경이 곤두서서 긴장해 있는 서혁중은 붓질을 건성으로 하면서 아까부터 출입문을 힐끔거렸다.
‘혹시 몰라서 물어보라고 한 건데 다린이가 정말 알바할 줄은 몰랐네.’
송다린이 알바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고원철에게 들은 서혁중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알바 목적이 돈이 아니고 창작하는 데 도움을 얻고 싶어서라는 말을 듣고 이해하긴 했지만, 놀랍기는 여전했다.
‘다린이와 같은 작업실에서 작업하고 매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서혁중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서혁중은 자기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연예인을 해도 될 외모의 소유자인 송다린을 언감생심 마음에 둘 수는 없었다. 그저 옆에서 바라볼 수만 있어도 행복할 것이다.
‘좀 늦네?’
“혁중아,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냐? 아까부터 출입문을 힐끔거리냐?”
“어? 기다리긴 누굴 기다려?”
“난 또 다린 후배 기다리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냐?”
“인마, 내가 다린이를 왜 기다려? 다섯 시에 온다고 했으면 알아서 오겠지.”
“그래? 다린이는 다섯 시 이후에 온다고 했어. 좀 늦을 수도 있을 거다.”
이때, 차임벨이 울렸다. 서혁중의 고개가 저절로 출입문으로 향했다.
“다린이 왔나보다. 문 열어줘라.”
“그, 그러지.”
서혁중은 출입문으로 걸어가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문 앞에 도착한 서혁중은 도어락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자주색 코트를 걸치고, 핸드백을 든 눈부시게 예쁜 송다린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혁중 선배님 맞죠?”
“어? 그, 그래. 반갑다. 어서 들어와.”
실내로 들어온 송다린은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강수를 보고 장미꽃처럼 붉고 육감적인 입술에 미소를 지었다.
첫눈에 이강수의 훤칠하고 잘생긴 외모와 자연스러운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이강수 선배님, 처음 뵙네요. 송다린입니다.”
“반갑다. 원철이가 얼짱이라고 해서 궁금했는데 정말 얼짱 맞네.”
강수가 예쁘다고 칭찬하자 송다린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짤랑짤랑하게 웃었다.
“호호. 고마워요.”
송다린은 강수를 보며 속으로 강수의 첫인상에 대해 품평하고 있었다.
‘사진 빨이 아니라 실제로 잘생겼어! 키도 크고 체격도 남자답게 탄탄해 보이네. 너무 마음에 드는 선배다.’
“일하기로 했으니까 계약서 작성해야지?”
“네.”
강수를 따라가는 송다린의 두 눈에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송다린이 코트를 벗어 팔에 걸었다.
코트를 벗자 상체에 달라붙은 목폴라 티에 색깔 빠진 검은색 진바지, 표범 무늬 혁대를 찬 S라인 몸매가 드러났다. 가슴은 적당히 융기했고, 허리는 잘록했다. 팽팽한 힙은 군더더기 없는 날씬한 허벅지로 이어졌다.
환상적인 몸매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난 옷차림이었다.
실내가 밝아지듯이 빛나는 송다린을 바라보던 서혁중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심장 떨린다. 저렇게 입고 작업하면 반칙인데? 아, 작업복 같은 거 걸치겠구나. 설마 저렇게 입고 있겠어?’
강수를 따라 작업실 반대편으로 간 송다린이 코트를 들며 말을 건넸다.
“선배님, 이 코트 걸어 놓을 옷장은 있나요?”
강수가 슬쩍 뒤돌아보고 옆의 옷장을 가리켰다.
“겉옷은 앞으로 이 옷장에 보관해.”
“네, 선배님.”
계약서 철에서 계약서 2부를 꺼내 돌아선 강수가 코트를 옷장에 넣고 서 있는 송다린을 보고 움찔했다. 168cm정도 되는 늘씬한 신장에 볼륨감 넘치는 몸매가 순간적으로 강수의 시선을 강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