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53화 (153/1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53회

전수민이 푸념하듯 투덜댔다.

“팀장님, 멸종동물을 지켜라는 오랫동안 기획하고 자료 준비하고, 구성도 짜고 했으니까 어떻게 쓴다고 해도 우리가 전문작가도 아닌데 무슨 수로 스토리 써서 돈을 벌어요?”

유가은이 우는 소리를 했다.

“우리한테 스토리작가라뇨? 너무하세요.”

허상배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어느 출판사에서 우리한테 글을 의뢰하겠어요. 열심히 동화 써서 출판사에 가져간다고 해도 누가 출판해 주고요? 팀장님이면 몰라도 말이죠.”

“팔릴 책이면 출판하지 왜 안 하겠냐? 팔릴 책이 아니면 퇴짜는 당연한 거고.”

“그렇죠, 뭐.”

팀원을 둘러본 강승호가 입맛을 다셨다.

“우리가 하던 일 팽개치고 스토리 작가로 전업해도 먹고 살 만큼 벌 순 없을 거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고 누에는 뽕잎을 먹어야지. 만약 사장님이 인세를 인정하지 않으시면 별수 없이 스토리작가에게 넘겨야겠지.”

팀원들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어렸다. 특히 아이디어를 낸 허상배는 낙심했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멸종동물을 지켜라 시리즈물을 기획하고, 자료 찾고, 캐릭터를 만들고, 대강의 줄거리까지 짰다. 퇴근하고 여가를 거의 다 투자해서 이뤄낸 결과였다. 그 노력을 이강수가 인정하고, 대가로 배분해 준 인세는 의외로 쏠쏠했다. 특히 시리즈물의 경우 인세가 무려 2.5%나 된다. 더구나 처음부터 일만 부나 찍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팔려나갈 부수를 생각하면 투잡이라고 할 만한 수입이 될 터였다. 그런 수입이 사라지면 일할 기분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월급을 받지만, 박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심히 기획해서 대박 작품을 만들어도 과실은 인세로 계약한 작가와 회사로 돌아갈 뿐 기획실 직원은 보너스 조금 받는 게 전부다. 노력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으면 이전처럼 최선을 다할 순 없을 것이다.

강승호가 기운이 빠져나간 듯한 팀원의 기색에 힘주어 말했다.

“너무 실망하지 마라. 사장님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는데 지레 부정적으로 생각할 건 없잖아. 한국 편도 이제 겨우 두 권 나왔을 뿐이고, 서혁중, 고원철 작가가 시리즈물을 계속 할 수도 있잖아?”

“정말 서혁중, 고원철 두 작가라도 우리랑 계속 시리즈물 했으면 좋겠네요.”

“시리즈물이 어떤 성적 낼지 지켜보면서 대처해도 늦지 않아. 그리고 미리미리 준비해서 손해 볼 것 없으니까 작자 마음에 드는 국가 하나씩 정해서 한국 편과 같은 컨셉으로 기획해 놔라.”

세 사람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잘됐으면 좋겠네요.”

*

홍우대 도서관 입구.

가방을 멘 학생들 사이에서 밤색 니트에 푸른 남방을 받쳐 입은 키 큰 남학생이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훤칠한 신장에 비해 조금 말라 보이는 남학생은 예술, 역사 도서가 소장되어 있는 3층 자료실에 들어가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거리며 실내를 살폈다.

‘저기 있군.’

밤색 니트를 입은 남학생이 성큼성큼 한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멈춰선 책상에는 단발머리에 부분 염색을 한 목이 긴 여학생이 서너 권의 책을 쌓아 놓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누군가 자기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여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여학생은 연예인급 미모가 빛나는 송다린이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한 송다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범진?”

안범진이 오른팔을 들어 밖을 향해 손짓했다.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시간 돼?”

송다린이 멀뚱히 안범진을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굽이 낮은 구두를 신었고 170cm쯤의 신장에 브이넥 셔츠는 잘록한 허리에 걸쳐 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은 바지를 입어 그대로 드러난 늘씬한 몸매가 고스란히 안범진의 시각을 자극했다.

“나가자.”

앞장서서 나가는 송다린의 아찔한 뒤태에 시선을 준 안범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따라 나갔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연예인 해도 될 애가 왜 회화과 들어왔는지 미스터리야.'

복도로 나온 송다린이 무슨 일인지 말하란 듯이 팔을 양 겨드랑이에 끼고 안범진을 쳐다보았다.

“혹시 그림 그리는 알바할 생각 있어?”

“알바? 그걸 왜 나한테 묻지?”

“고원철 선배가 물어보라고 해서 묻는 거야.”

“고원철 선배?”

“우리가 1학년 때 4학년에 복학한 선배야. 모임이나 행사 때 몇 번 보긴 했을 텐데 네가 알 리 없지.”

안범진의 말투에서 어딘가 비아냥대는 듯한 느낌이 풍겼다.

송다린은 자기의 머리에 입력된 선배가 아니라면 여러모로 존재감 없는 선배라고 봐도 무방해서 잠자코 있었다.

“고원철 선배가 네 그림 괜찮다고 회화 작업하는 알바 할 수 있냐고 물어보랬어.”

이름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학교 선배니 안범진 말대로 오월제 같은 교내 행사에서 봤을 수 있었다. 자기 기억에도 없고, 미술계에서 알려지지도 않은 선배의 작업을 같이할 이유가 없었다.

‘요즘 한창 뜨는 이강수 선배라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라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고원철은 누구야?’

송다린이 고개를 저었다.

“돈은 별로 궁하지 않아. 알바 하느니 내 작품이나 할래.”

“알았어. 선배한테 그렇게 전할게. 시간 뺏어서 미안. 들어가라.”

“어. 수고해.”

알바 안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뒤돌아선 안범진은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계단으로 내려갔다.

안범진이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고원철이란 이름을 한 번 더 뇌리에서 찾아본 송다린은 역시 아무런 내용도 끄집어 낼 수 없었다. 자리로 돌아가려던 송다린이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 여학생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이슬아, 어서 와.”

“다린이네. 레포트 쓰러 왔구나?”

“응. 이슬아, 뭐 좀 물어보자. 너 고원철이라는 선배 알아? 우리 입학했을 때 4학년에 복학한 선배라는데.”

“고원철? 이강수 선배 ‘열다섯 개의 시선’ 전 때 인사해서 안면은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데. 왜?”

“이강수 선배 개인전에서 봤구나?”

“그래. 이강수 선배 조수로 일한다고 하던데? 이강수 선배 개인전 팜플렛에도 어시스트로 올라가 있잖아.”

“뭐?”

순간 송다린의 뇌리에 불이 번쩍 들어왔다.

‘고원철 선배가 이강수 선배 밑에서 일한다고? 그럼 알바라는 게 강수 선배 작품 도와주는 알바인가?’

“이강수 선배 조수로 일한다는 거 정말이야?”

“그때 들은 얘기라 지금도 조수로 일하는지는 나도 몰라.”

“알았어. 고맙다.”

송다린이 후다닥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서둘러 도서관 건물 밖으로 나왔지만, 안범진은 그새 모습을 감추었다.

‘어디로 갔지? 내가 싫다고 했으니 다른 애 섭외하러 갔겠지? 전화해야겠다.’

스마트폰을 꺼냈지만 연락처에는 안범진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다른 애 섭외하기 전에 연락해야 하는데....’

괜히 초조함을 느낀 송다린은 연락처에서 강이슬을 찾아 통화를 눌렀다.

컬러링은 금방 끊겼다.

[다린아, 왜?]

“너 안범진 전화번호 있니?”

[어.]

“나한테 없어서 그러는데 번호 좀 불러줄래?”

[잠깐.... 010-9674-xxxx.]

“고맙다. 바빠서 이만 끊을게.”

[그래.]

송다린은 강이슬이 불러준 번호를 눌렀다.

[송다린?]

“그래. 너 지금 어디냐?”

[실기실인데. 무슨 일로 전화했어?]

“네가 좀 전에 얘기한 알바, 그게 어떤 일인지 자세하게 알아보고 내가 할만한 일이면 하고 싶거든.”

[돈 궁하지 않다며?]

“돈은 궁하지 않은데 요즘 창작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어. 선배 작업하면 뭔가 깨우치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

“왜? 안 되는 거야?”

[아니. 아직 알바할 애를 구하지 않았어. 선배랑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이십분 후에 정문에서 보자.]

“알았어. 바로 갈게.”

송다린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졸업반 아이들이 홍콩경매에서 7억에 낙찰된 이강수 선배는 학교에서 유명인사다. 미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자기조차 최근에 7억의 사나이라는 기사를 읽고 이강수의 존재를 알게 됐다.

‘12학번. 이제 겨우 스물 아홉. 나랑 나이 차이는 고작 여섯 살. 올해 두 번의 개인전 출품작 전부 완판. 특히 두 번째 개인전 출품작은 75점이나 되는데 해왕식품 회장이 직접 방문해서 구매했고, 갤러리윤 박윤재 관장이 구매했어. 눈부신 성공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어. 이런 속도로 성장하면 몇 년 안에 한국 최고의 생존 작가가 될게 불을 보듯 뻔해.’

송다린은 자료실로 올라가 의자에 걸어놓은 머스타드 색상 가디건을 걸쳤다.

책은 반납대에 놓고, 백과 짐을 정리해 수납장에 보관하고 정문을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김동유 교수나 홍경택은 삼십 대 후반에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억대 낙찰가를 기록하면서 스타작가가 됐어. 그 두 사람과 비교해도 강수 선배는 십년이나 빨리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어. 게다가 얼굴도 배우 해도 될 만큼 잘생겼고. 비록 금수저는 아니지만, 꼴값 떠는 금수저보다 더 나은 남자야. 이강수 선배 작품 알바면 좋겠다.’

송다린은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며 학교 정문으로 갔다.

*

홍우대 근처 카페 “까망하양”

실내로 들어선 안범진은 근처 사람의 시선이 송다린과 자기에게 모이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실소했다.

‘크크. 얘랑 다니니까 부러움을 한 몸에 받네. 괜히 얼짱이 아니구나.’

안범진은 아메리카노와 자몽주스를 주문해 쟁반에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선배님, 저기 있네.”

안범진이 왼쪽 창가 탁자로 다가갔고, 송다린이 따라갔다.

“선배님,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그래. 정신없이 지냈지. 반갑다, 범진아.”

안범진과 악수하는 평범하게 생긴 고원철을 훑어본 송다린이 차분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후배 송다린입니다.”

“어, 송다린 후배도 만나서 반가워. 앉자.”

안범진과 송다린이 자리에 앉자 고원철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린 후배가 알바에 관심 있는 줄은 몰랐네. 의외인걸.”

“왜 내가 알바에 관심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옆에 앉은 안범진이 피식, 실소하며 대답했다.

“몰라서 묻냐? 너 입학 초기에 스포츠카 재규어 끌고 다녔지?”

“응? 잠깐.”

“그걸 보고 누가 알바 할 사람으로 여기겠냐?”

“그땐 내 차 없어서 오빠 차 잠깐 끌고 다녔던 거야. 지금은 미니 쿠페 몰고 다니잖아.”

“하여튼 넌 학교다니면서 알바 한 적도 없잖아.”

안범진이 고원철에게 말했다.

“선배님, 다린이는 돈 때문에 알바 하는 거 아녜요. 자기 작품하는 데 막혀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알바 한대요.”

“돌파구를 찾고 싶다고?”

송다린이 진지한 얼굴로 부언했다.

“네. 일이학년 때는 세계적인 명화나 좋아하는 작품 모방도 하고 풍경화, 정물, 도시 풍경 같은 거 아무 생각 없이 닥치는 대로 그렸거든요, 근데 요즘 들어 내 작품을 하려고 하니까 뭘 그려야 할지 막막해서 선배 작품 도와주면서 뭔가 창의적인 자극을 받고 싶어요. 범진이가 그림 그리는 알바라고 하던데 어떤 작업 하는 거죠?”

“어떤 작업이냐 하면....”

고원철이 잔을 들어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며 두 사람을 바라보며 괜히 뜸을 들인 후 본론을 꺼냈다.

“너희 이강수 선배 알지?”

고원철의 입에서 이강수 이름이 나오자 송다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알죠. 요즘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나가는 선배죠.”

“너희가 할 알바는 이강수 선배 작품 어시스트 하는 거야.”

“어? 원철 선배 그림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강수 선배 알바에요?”

“그래. 이강수 선배가 크리스티 뉴욕경매에 출품할 작품 3점을 준비하는데 12월 10일까지 끝내야 하는 그림이 있어.”

“크리스티 뉴욕경매요?”

“크리스티에서 강수 선배한테 작품 출품해 달라고 요청했거든. 그래서 작품 3점을 뉴욕경매에 출품하기로 했다고 하더라.”

“우와, 강수 선배가 크리스티 뉴욕경매에도 진출해요? 굉장한데요.”

고원철이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이미지를 하나 화면에 띄운 후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세 작품 가운데 하나가 이 그림인데 120*165cm 사이즈야.”

“이건 사진 같은데요? 이거 카카오닙스로 형상화한 건가요?”

안범진이 화면을 확대해 살펴보며 물었다.

“맞아. 카카오닙스로 만들어서 찍은 거다.”

“이렇게 보니까 무슨 단색화 같네요?”

“카카오닙스 조각으로 만들었으니까 단색화 느낌이 날 수밖에 없지. 그걸 회화로 그리는 거야.”

안범진이 눈을 크게 뜨고 고원철을 바라보았다.

“헐, 이 카카오닙스 조각 하나하나를 그린다고요?”

고원철이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카카오닙스 조각 하나씩 그리고 색칠하려면 좀 고될 거다. 쉬운 작업은 아냐.”

사진을 확대했다 줄였다 반복해서 살펴보던 송다린이 고원철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세히 보니까 숲속에 아이들이 있네요? 제목이 뭐예요?”

“카카오나무 숲속 아이들이나 카카오나무와 아이들. 뭐로 정할지는 미정이래.”

“재밌겠어요. 난 이 알바 할래요.”

안범진이 움찔하더니 이상한 눈으로 송다린을 보았다. 무수히 많은 카카오닙스 조각을 그리고 색칠하는 작업은 창의성과는 거리가 먼 단순 노동이나 다름없다.

‘그런 작업을 하겠다고? 이 녀석은 무슨 생각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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