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45화 (145/197)

# 145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45회

10월 18일 정오.

강수는 북한산 수련장소에서 오전 마나회로 수련을 마치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쏴아-

한줄기 산바람이 강수의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가을 햇볕은 따뜻했지만, 산바람은 차가운 기운이 스며 있었다. 강수는 어제 밤늦게까지 수십 통의 축하 전화에 시달렸다. 축하 전화를 마다할 수도 없고 새벽 1시를 넘어서야 매너모드로 설정하고 잠들 수 있었다.

스마트폰은 지금도 매너모드가 유지된 상태였다.

스트레칭을 끝낸 강수는 등산복 바지에서 작은 포장지를 꺼냈다.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펼치자 주하에게 줄 반지가 나타났다.

‘오늘은 성공할까?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인챈트가 맘대로 되질 않네.’

인챈트마법은 확률이 0.5%에 불과했지만, 운이 따라주면 서너 번만으로 성공할 수도 있다. 아직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어디 해보자.’

강수는 바위 위에 포장지 그대로 일곱 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금 반지를 올려놓았다. 반지를 노려보며 인챈트마법을 영창하고, 캐스팅했다.

“실드 인챈트!”

푸르스름한 기운이 강수의 양손에 연기처럼 모이더니 급속하게 백금 반지로 빨려들어갔다. 4, 5초쯤 지나자 강수가 짤막하게 신음을 토했다.

“크윽!”

마나하트를 가득 채운 3서클의 마나가 순식간에 고갈되었고, 강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3서클의 마나를 흡수한 백금 반지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본래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잠시 심호흡하며 심장이 진정되기를 기다린 강수가 천천히 반지를 집었다. 요리조리 반지를 살핀 강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기랄. 이번에도 실패인가.’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강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아이템 하나 만들기 힘드네.”

4서클 마나하트를 완성하면 적어도 이틀에 하나의 아이템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4서클 마법사가 되려면 몇 년은 족히 걸리겠지? 인챈트가 안 되면 어쩔 수 없어. 그냥 주는 수밖에.’

몸을 추스른 강수는 반지를 포장해 주머니에 넣고 가방을 멨다.

‘그나저나 ’졸업반 아이들‘이 칠억에 낙찰됐으니 다음 달에 개막하는 단체전 출품작을 얼마에 내놓는다?’

본래 계획은 호당 20~30만 원에 그림값을 책정하려고 했다. 한데 홍콩경매에서 너무 비싼 가격에 낙찰되는 바람에 그림값을 얼마에 책정하면 적당한지 난감해졌다.

‘졸업반 아이들은 호당 천사백이 넘으니 말도 안 되는 가격이고, 팔랑리 마을의 봄은 호당 백십 정도고, 시골마을의 만추가 호당 삼백 정도인데 어느 가격에 맞춰야 하나? 안 되겠어. 장 선배한테 물어봐야겠다.’

산길을 천천히 내려가던 강수는 스마트폰을 꺼내 매너모드를 해제하고 장영봉에게 전화했다.

컬러링이 끊기고 장영봉의 흥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작가, 실검에 뜰 줄은 몰랐네. 축하하네.]

“실검이요? 무슨 소리죠?”

[자네 이름이 실검에 올랐는데 설마 아직 못 봤는가?]

“아침 일찍 등산해서 지금 산입니다.”

[그래서 못 봤군. 이강수 이름 석 자가 포털 사이트 실검 5위고, 졸업반 아이들이 실검 8위야.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실검에 올랐으니 축하할 일이 아닌가?]

강수는 실검에 자기 이름이 올라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황당하고 너무 뜻밖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 실검에 제 이름이 5위나 하다니 놀랍네요. 선배님,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전화했습니다.”

[얘기하게.]

“다음 달 단체전에 출품할 제 작품 가격을 호당 얼마로 책정하면 적당할까요?”

[‘희망을 던져라’ 전이 얼마 남지 않았군. 이 작가가 따로 생각해 본 가격은 있고?]

“처음엔 이삼십만 원에 책정하려고 했습니다. 한데 홍콩경매 때문에 그렇게 책정할 수가 없어서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네요.”

[홍콩경매가 없었으면 몰라도 이제 호당 이삼십만 원은 말이 안 되지. 산골마을의 만추가 백삼십오만 홍콩달러에 낙찰됐으니 한화로 치면... 약 일억팔천이백만 원이네. 호당 계산하면 삼백만 원 정도야. 한데 졸업반 아이들은 호당 천사백만 원 정도 하더군. 두 작품 사이에 간극이 너무 커. 어쨌든 앞으로 자네 그림값이 어떻게 변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처음 참가한 경매니까 일단 ‘졸업반 아이들’의 낙찰가는 예외로 두고, ‘시골마을의 만추’ 낙찰가를 기준으로 해서 최소 삼백만 원으로 하면 어떨까 싶네.]

장영봉은 호당 500만 원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세 작품의 낙찰가가 호당 110만 원에서 1400만 원까지 고무줄처럼 늘어나 있어서 적정가 매기는 것이 난해했다.

“호당 삼백만 원이면 10호 그림이 삼천이네요. 좀 비싼 것 같은데요?”

[10호가 삼천이면 비싸긴 한데 졸업반 아이들은 호당 천사백이야. 그것에 비교하면 반대로 삼백은 너무 싸지.]

“알겠습니다. 비슷한 가격으로 책정해야겠습니다. 선배님, 고맙습니다.”

[고맙긴. 나는 자네가 기획한 ‘희망을 던져라’ 전이 정말 기대된다네. 자네 그림이 칠억에 낙찰되는 바람에 제대로 홍보가 돼서 관람객이 엄청나게 몰릴 걸세.]

“하하. 그러면 좋겠습니다.”

단체전 출품작은 대부분 10호나 15호, 20호짜리 소품이다. 호당 300만 원으로 치면 소품이라고 해도 그림값이 만만치 않다.

‘호당 삼백이나 받아도 될까? 10호가 삼천, 20호가 육천이나 하는데?’

자기 그림값이지만 그림값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

‘호당 오십만 원에 팔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지.’

갑자기 턱없이 높아져 버린 자기 그림값을 생각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수는 걸음을 빨리해 하산했다.

작업실에 도착하자 고원철과 서혁중이 반색해서 강수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칠억 낙찰, 축하합니다.”

“선배님! 졸업반 아이들이 칠억에 낙찰됐다는 뉴스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도 기사가 떴고, 더구나 실검에 선배님 이름이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기사에서도 스타 탄생을 예고한다고 하고요. 와, 선배님, 이러다 완전 유명인사 되는 거 아닙니까?”

둘의 얼굴에는 부러움과 경외심 같은 다양한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어, 고맙다. 실검에 떴다고 유명인사 되냐? 반짝 관심받다 잊히는 거지.”

“선배님은 반짝 떴다 사라지는 아이돌이 아니고, 고급문화를 선도하는 미술계의 스타라고요. 반짝스타하고 거리가 멉니다.”

“맞아. 졸업반 아이들이 칠억에 낙찰됐다는 건 그림의 가치를 인정받은 거지. 흥미 위주 가십거리하고는 차원이 다른 얘기지.”

강수가 두 후배의 과장된 칭찬에 피식, 실소했다.

“무명화가 그림이 칠억에 낙찰됐다는 기사가 가십 기사 아니냐?

서혁중이 팔을 내저었다.

“흥미를 유발하는 기사이긴 해도 가십은 아니죠. 확실한 팩트를 담고 있으니까요.”

서혁중이 호기심으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한데 선배님.”

“왜?”

“홍콩경매에서 ‘졸업반 아이들’이 칠억에 낙찰됐는데 이번 단체전에 출품하는 작품 가격은 얼마에 책정할 건가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너희가 내 입장이라면 호당 얼마에 정할래?”

“네? 그, 글쎄요? 얼마면 좋을까요?”

고원철이 불쑥 자기 생각을 말했다.

“작품마다 가치가 다르겠지만 시골마을의 만추보다는 높고, 졸업반 아이들보다는 낮게 잡으면 대충 호당 사오백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오백? 50호가 칠억인데 100호가 사오억이면 어떻게 되는 거냐?”

“그건 홍콩경매 결과고, 모든 작품에 일률적으로 50호 칠억을 적용할 순 없지 않냐?”

서혁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다음 경매에선 얼마에 낙찰될지 알 수 없는 일이긴 해.”

“그렇다고 호당 가격이 너무 낮으면 스스로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니까 최소 시골마을의 만추보다는 높아야 할 것 같단 말이지.”

“말 되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강수가 말했다.

“사실 나도 그게 애매해서 장 선배한테 이번 단체전에 출품할 그림값을 얼마로 하면 좋겠냐고 전화로 물어봤다.”

“어? 그랬습니까? 장 선배가 뭐라고 했나요?”

“졸업반 아이들은 예외로 치고, 시골마을의 만추가 일억 팔천 정도에 낙찰됐으니 그 가격에 맞추는 게 적당할 것 같다고 하더라. 근데 그 가격에 맞춰도 호당 삼백이나 해.”

“그럼 10호 그림이 삼천이네요.”

“10호 그림이 삼천이면 너무 비싸지 않냐? 그래서 호당 이백만 원으로 낮추고 20호 이하 그림만 출품하려고 한다.”

고원철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건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님, 낙찰가가 있는데 호당 이백은 너무 낮은 가격 같은데요? 장 선배 말처럼 최소 호당 삼백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도 원철이 말이 맞는 것 같은데요. 최소 ‘산골마을의 만추’에는 맞춰야죠. 컬렉터들은 재테크 투자 개념이 큰데 호당 이백이면 얼씨구나 좋다 하고 살 겁니다. 어차피 일반인이 삼사천 들여서 선배님 작품 살 수는 없으니까 주 고객이 컬렉터라면 제값 받는 게 낫죠.”

“음, 듣고 보니 그렇구나. 이천이든 삼천이든 일반인이 사기엔 부담스런 가격이긴 해. 그럼 삼백만 원으로 책정해보자. 한데 호당 삼백만 워으로 하면 그림값이 너무 비싸서 몇 점이나 팔릴까 싶다.”

“웬걸요. 컬렉터들이 몰려들면 아마 선배님 작품이 제일 먼저 완판될걸요.”

우웅! 우웅!

강수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발신 번호를 확인했으나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다.

“전화 받아야겠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크리스티 한국지부 현대미술 부분 팀장 고한슬입니다. 이강수 작가님 되시죠?]

“네, 이강수입니다.”

‘그리스티 고한슬?’

30대 중반으로 느껴지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크리스티에서 자기에게 전화할 이유가 없었다. 이유가 있다면 오직 한 가지, 경매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불쑥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통화 괜찮은지요?]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죠?”

[작가님 작품을 저희 경매에 출품하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혹시 뉴욕이나 런던, 홍콩 경매에 작품을 출품할 의향이 있는지요?]

크리스티는 소더비와 함께 세계 2대 경매회사의 한 곳이며, 한국 작가를 홍콩경매에서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그 덕분에 한국에서는 무명이었던 몇몇 작가들이 크리스티 홍콩경매를 통해 단숨에 스타작가로 부상했다. 한국의 무명작가들에게 홍콩경매는 등용문 같은 역할을 했다. 무명이나 다름없는 강수도 크리스티는 아니지만 와이옥션 홍콩경매에서 스타작가로서의 발판을 마련했으니, 홍콩에서의 경매는 한국 작가들에게 성공의 지름길이자 기회의 땅인 셈이었다.

크리스티 경매회사를 통해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확실하게 스타작가로 우뚝 설 기회였다.

하지만 강수의 작품이 크리스티 경매에서 유찰되거나 낮은 가격에 낙찰되면 크리스티의 제안은 오히려 강수에게 독배가 된다. 그림의 예술성과 완성도를 떠나서 오로지 낙찰가에 의해 강수의 앞길이 비상과 추락, 둘 중 하나로 판가름 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강수는 크리스티의 제안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두렵지 않았다.

‘고흐와 고갱은 생전 그림이 팔리지 않았고, 화단과 대중이 알아주지 않았지만, 예술적 신념으로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추구했다. 그들과 비교하면 나는 전시회에 출품한 그림이 전부 완판되고 있지 않은가?’

크리스티 경매 결과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입니다. 저로서는 영광이죠.”

[그렇다면 저희 경매에 정식으로 초청하겠습니다. 뉴욕, 런던, 홍콩 가운데 원하는 도시가 있는지요?]

뉴욕은 세계미술시장의 중심지다. 크리스티 경매회사를 통해 해외로 진출한다면 당연히 뉴욕경매다.

“뉴욕경매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역시 뉴욕이 세계미술의 중심지죠. 와이옥션 홍콩경매에 세 작품을 출품하셨더군요. 우리에게도 세 작품 이상 출품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그렇게 하죠. 작품 출품하려면 따로 절차가 필요합니까?”

[아닙니다. 이 작가님은 초청 작가이기 때문에 작품 가지고 오셔서 등록만 하면 됩니다. 작품 등록하시면 뉴욕경매 날짜는 가능하면 빨리 진행할 수 있도록 일정을 잡겠습니다. 혹시 작품 등록은 언제쯤 가능할까요?]

지금까지 100여 점의 그림을 완성해 놓았다. 그 가운데 석 점을 골라서 등록해도 되고, 와이옥션 홍콩경매처럼 새로운 작품을 구상해서 그려도 될 것이다.

‘지금 그려놓은 작품들은 30호 이하 소품이란 말이야. 두 전시가 코앞이기도 하고. 천천히 등록해야겠어.’

강수는 조금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11월에 단체전에 참가하고, 12월에는 개인전이 잡혀 있습니다. 두 전시가 끝난 뒤, 12월 말까지 등록하겠습니다.”

[어머. 전시가 두 번이나 잡혀 있었군요? 전시회에서 좋은 성적 거두길 바랄게요. 그럼 이 작가님, 12월에 작품 등록해 주시고요 제가 중간에 또 전화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강수는 눈을 동그랗게 든 노란 모습의 서혁중을 볼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