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43회
대여섯 명이 그림 앞에서 흥겨운 듯이 웃고 있었다.
“하하하. 재밌는 그림이야.”
“후후. 표정이 살아있어.”
“킥킥!”
‘왜 웃지? 설마 그림 보고 웃는 건가?’
의문이 든 제임스는 사람들 옆으로 다가가 그림을 살펴보았다. 귀엽고 장난기가 한눈에 보이는 동양 꼬마 아이 얼굴이 잔뜩 화폭을 채우고 있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익살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제임스의 얼굴 근육이 실룩였다.
“푸하하.”
제임스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림 속 아이들을 따라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을 그친 제임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림을 자세하게 구석구석 훑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이들이 전부 웃고 있는데 어색한 구석이 한 곳도 없어. 캐릭터는 말할 것 없고 채색마저 흠잡을 데가 없군. 이건.... 마치 처음 팡리쥔 그림 접했을 때 느낌이 든다?’
뉴욕 경매장에서 팡리쥔의 를 보았을 때 그는 그 그림을 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누군가와 경합이 붙어 당시 가격치고는 높은 가격에 를 낙찰 받았는데 주위 사람들이 대체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써서 중국화가 그림을 사냐고 수군댔었다.
제임스는 그림 옆에 붙은 라벨을 확인했다.
‘Lee GangSu? Children of the graduating class. Executed in 2021.’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의 화가였다.
‘코리아 출신이군. 시작가는 십오만 홍콩달러. 높은 추정가는 삼십만 홍콩달러. 의외로 시작가가 낮지만 경합이 붙으면 꽤 올라갈 수도 있겠어.’
제임스는 다음 그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 사이로 바라본 전면에는 ‘산골마을의 만추’가 걸려 있었다.
낙엽이 물든 붉은 산과 그 위에 눈이 시린 푸른 하늘, 붉은 산 아래에는 황토길 사이에 토속적인 특색이 짙은 산골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빨갛고 파란색이 충돌하는 거친 배경 아래 마치 고흐가 붓질한 것처럼 투박하고 굵은 선으로 자연이 꿈틀거리는 산골 풍경이었다.
제임스는 한참 동안 ‘산골마을의 만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환상 문학에 나옴 직한 독특한 마을이군. 꿈틀대는 색깔이 환상을 부추기고 있어. 산골마을의 만추라. 시작가는 십팔만 홍콩달러, 이것도 시작가가 낮군.’
제임스는 이강수의 세 번째 작품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화롭고,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그린 그림이었다. ‘산골마을의 만추’와는 다르게 색깔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세 번째 작품은 심리적으로 포근한 기분과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었다.
‘시작가는 십팔만 홍콩달러. 그림은 수준 높은데 시작가를 왜 이렇게 낮게 책정했지? 젊은 작가인가?’
제임스는 전시 도록을 펼쳐 이강수를 찾아 경력을 읽었다.
‘흠, 역시 2018년에 졸업한 젊은 작가로군. 이강수 과거 작품은 어떤지 알아봐야겠군.’
제임스는 근래 들어 세계 미술계의 변방으로 치부하는 동남아시아와 인디아 미술 쪽으로 관심을 쏟고 있었다. 세계 미술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뉴욕, 런던 등의 미술품 가격은 이미 오를 만큼 올라서 상승 동력이 약해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림값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어 있는 동양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제임스는 호텔 8층에 위치한 와이옥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제임스를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성이 밝은 미소로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전시 어시스턴트 송지혜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송지혜의 영어 발음은 매끄러워서 듣기 좋았다.
송지혜 앞으로 걸어간 제임스가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나는 제임스 자버라는 사람이오. 이강수 작가의 기존 작품을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미스터 자버,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송지혜가 사무실 한쪽에 있는 고객 서비스 공간으로 걸어갔다.
3대의 32인치 모니터가 준비되어 있는 그곳에는 이미 두 사람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송지혜는 빈 모니터에서 마우스를 움직여 이강수 폴더를 찾아 클릭했다. 이강수 폴더 안에는 네 개의 폴더가 있었다. 폴더 이름은 각각 ‘한국청년화가 12인전’, ‘아트페어 상하이’ 출품작, 첫 번째 개인전 ‘서울의 삶, 그 인상’, 두 번째 개인전 ‘열다섯 개의 시선’ 전이었다.
송지혜가 제임스에게 말했다.
“손님, 폴더 안에 이강수 화가의 기존 전시회 출품 작품이 있습니다.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고맙소. 미스 송.”
의자에 앉은 제임스는 ‘한국청년화가 12인전’부터 폴더를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모니터 상으로 보는 그림은 원화를 보는 것과 비교할 수 없지만, 작가의 작품 활동을 통해 작품 성향을 파악할 수는 있다.
눈물, 초대, 도시의 일몰, 강가, 동행, 달이 있는 동네, 기억의 끝, 내 안에서 크는 섬.
작품 하나하나 살펴보는 제임스의 눈빛이 시간이 흐를수록 강렬해졌다.
마지막 폴더 ‘열다섯 개의 시선’ 전의 군마, DNA남녀, 탄생, 마지막 시선으로부터, 야만의 종말까지 강수의 기존 작품을 뚫어질 듯이 살펴본 제임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임스는 진흙 속에 묻힌 진주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니터로 봐도 소장 욕구가 생길 정도로 뛰어난 그림이다. 경매가 끝나면 한국에 가서 이강수를 만나봐야겠다.’
중국 화가들이 명성을 얻기 전, 제임스는 작가를 찾아가 직접 그림을 사기도 했다. 이미 전속 갤러리가 있으면 어렵겠지만 가능하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강수를 만나 작품을 직접 구매할 생각이었다.
*
10월 17일 오후 7시.
홍콩 스카이 블루뷰 호텔 8층 와이옥션 경매장.
제16회를 맞이한 와이옥션 홍콩 세일 경매장은 세계에서 온 컬렉터 170여 명이 운집해 있었다. 오후 6시에 막이 오른 경매는 고미술품 경매가 끝나고 와이옥션 홍콩 세일의 백미인 현대미술품 경매가 시작했다.
연단 좌우 양쪽에 설치된 100인치 정도의 평면 디스플레이에 이강수의 ‘팔랑리 마을의 봄’이 나타났다.
디스플레이에는 LOT 넘버, 작가, 작품 제목이 위에 표시되었고, 그 아래 HKD, CHY, USD, KRW 등의 화폐가 표시되었다.
연단에 선 미모의 여성 경매사가 작품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이강수 화가의 2021년 작품 ‘팔랑리 마을의 봄’입니다. 이강수 화가는 2018년 대한민국 홍우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경매사는 이강수의 경력과 작품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경매 절차에 들어갔다.
“이제 이강수 화가의 ‘팔랑리 마을의 봄’, 경매가 십팔만 달러부터 만 달러씩 호가합니다. 십팔만 달러!”
경매사가 경매 시작가를 외치자 여기저기서 패들이 올라왔다.
“십구만, 이십만, 이십일만···.”
경매사는 패들이 올라오면 지체하지 않고 호가를 높여나갔다.
“···삼십만 달러. 지금부터는 호가를 이만 달러로 올리겠습니다. 삼십이만... 사십만···.”
사십만 달러가 넘자 수십 명의 응찰자가 10여 명으로 줄었다.
“···사십육만... 오십만 달러.”
오십만 달러까지 가격이 치솟자 응찰자는 34번, 165번 두 명으로 압축되었다.
응찰자가 두 명으로 줄어들자 경매사는 패들 든 사람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차분하게 경매가를 매겨갔다.
“···오십팔만, 육십만, 육십이만, 육십사만 달러.”
육십사만 달러에서 34번 패들만 올라왔다.
34번 응찰자와 경합한 165번 패들을 든 응찰자는 경매장 중간에 앉은 40대의 중국인 여성이었다. 귀족적인 우아한 외모의 소유자인 여성은 고개를 빼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선 방향에 있는 34번 응찰자를 바라보았다.
앞모습이 보이지 않는 34번 응찰자는 회색 재킷을 입은 은발의 신사였다.
이때, 은발의 신사, 제임스가 고개를 슬쩍 돌려 40대의 여성 응찰자를 쳐다보았다.
‘응? 어디서 본 얼굴인데?’
여성 응찰자는 홍콩에서 맛으로 유명한 딤섬 레스토랑을 남편과 공동 소유, 운영하는 밍우옌이었다.
밍우옌은 은발의 신사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누구지?’
밍우옌이 기억 어딘가에 있는 은발의 신사를 불러내려고 미간을 찌푸렸다.
경매사가 경매를 진행했다.
“현재 육십사만. 마지막 기회입니다. 응찰자가 없으면 낙찰하겠습니다.”
경매사가 34번 패들의 주인에게 팔을 뻗고 실내을 한차례 살폈다. 경매사의 마지막 시선은 밍우옌을 향했다. 얼굴을 찡그린 밍우옌을 본 경매사가 빠르게 말했다.
“네, 육십사만 달러! 34번 손님께 낙찰되었습니다.”
땅.
경매사가 육십사만 홍콩달러에 경매를 마무리 짓고 경매봉을 가볍게 내리쳤다.
“박수 한번 주십시오.”
짝짝짝!
장내 응찰자들이 가볍게 손뼉 치며 낙찰을 축하했다.
‘아, 제임스 자버.’
밍우옌은 언젠가 읽은 ‘중국미술을 사들이는 슈퍼 컬렉터’란 기사를 떠올렸고, 은발의 신사가 한때를 풍미한 컬렉터 제임스 자버, 34번 응찰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제임스 자버가 무명에 불과한 이강수란 화가 그림에 시작가 세배나 되는 육십사만 달러를 투자해?’
한국미술은 몇 년 전까지 단색화의 열풍을 바탕으로 그림값이 상승했지만, 몇몇 최고 작가를 빼면 제한적으로 상승했다. 즉, 한국의 생존 작가 가운데 그림값이 100만 USD가 넘는 작품을 보유한 작가는 이우완, 정상화, 박서보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몇 년 전부터 단색화의 열풍이 꺾이면서 단색화의 낙찰가는 하락하고 있었다.
‘현대미술 가운데 제일 낮은 가격이라 사보려 했는데 그림에 눈독 들이는 사람이 하필이면 제임스람. 제임스와 경합하려면 마음 단단하게 먹어야겠는걸.’
일반적으로 자기가 높게 평가한 작품은 다른 컬렉터도 높게 평가하기 마련이다. 소장하고 싶은 작품을 계획한 가격에 낙찰받기란 쉽지 않다. 결국 미술품 경매는 가장 치열한 돈의 전쟁이다.
경매사가 이강수의 두 번째 작품 ‘산골마을의 만추’를 소개했고, 경매가 시작되자 ‘팔랑리 마을의 봄’보다 더 많은 응찰자가 패들을 올렸다. 경매가는 ‘팔랑리 마을의 봄’의 낙찰가를 가볍게 뛰어넘어 70만 달러에 도달했고, 응찰자는 다섯으로 줄었다.
다섯으로 준 응찰자는 호가가 100만 달러에 이르자 이번에도 34번, 165번 두 명으로 압축됐다.
호가 80만 홍콩달러까지 쫓아갔던 지석원이 자료를 검색하던 폴더블 스마트폰을 접어 허리에 차고, 34번, 165번을 지켜보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명성그룹 안주인의 대리 응찰자로 참가하고 있는 그는 귀에 블루투스 스피커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34번이 누군가 했더니 제임스 자버였어. 제임스가 ’졸업반 아이들‘도 응찰하면 홍진자와 경합을 벌일 텐데 낙찰가가 얼마까지 뛸지 예측 불가로군.’
제임스 자버와 경쟁할 생각 하니 허파가 간질거렸다.
문득, 지석원이 누군가에게 말했다.
“사모님, 보내준 사진 보셨죠?”
[봤네. 이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제임스 자버라는 컬렉터입니다. 십사오 년 전에는 슈퍼 컬렉터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건 옛날이야기고 지금은 아닙니다.”
[보아하니 이 사람이 나와 경쟁하겠군?]
“그럴 수 있죠. 제임스 자버가 ‘졸업반 아이들’도 응찰하면 낙찰가가 예상보다 높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모님은 어느 정도 투자할 계획이신지요?”
[돈은 상관없어. 나와 경쟁하면 얼마까지 쫓아오는지 궁금할 뿐이야.]
지석원은 주변에서 웅성대는 소리와 손뼉 소리를 듣고 말했다.
“사모님, ‘산골마을의 만추’ 경매가 끝났습니다. 역시 제임스 자버가 낙찰받았고, 낙찰가는 백삼십만 홍콩달러입니다. ‘팔랑리 마을의 봄’에 비해 두 배가 넘는 낙찰가고 한화로 약 일억 팔천만 원입니다.”
[음, 두 배가 넘는 낙찰가라. 자네가 보기엔 제임스 자버가 왜 이강수 그림을 사는 것 같나?]
“제가 볼 때 ‘산골마을의 만추’는 한국의 산골마을 풍경을 독특하고 강렬한 색으로 표현했고, 환상적인 분위기마저 풍기는 수작입니다. ‘팔랑리 마을의 봄’은 농촌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렸는데 서양인 시점으로 보면 굉장히 이국적인 풍경이고, 그것을 안정적인 구도와 감각적인 색으로 표현해서 제임스 자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습니다.”
[나는 평범한 한국 시골 풍경화로 보았는데 그림이 꽤 괜찮은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원화를 보면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그래? 나중에 이강수가 개인전 하면 직접 두 눈으로 봐야겠군.]
“사모님, ‘졸업반 아이들’ 경매 시작했습니다. ‘졸업반 아이들’은 현지에서 많은 사람이 주목한 작품입니다. 추정가는 삼십오만 홍콩달러지만 이미 ‘산골마을의 만추’가 백삼십만 홍콩달러에 낙찰되었기 때문에 그 이상 호가할 것이 확실합니다. 얼마까지 응찰할까요?”
[이백만 홍콩달러까지는 지 관장이 알아서 응찰하게.]
“예. 사모님.”
이강수의 마지막 작품, ‘졸업반 아이들’의 경매가 시작되자 수십 개의 패들이 움직였다. 십오만 홍콩달러에서 시작한 호가는 거침없이 100만 홍콩달러까지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