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41화 (141/197)

# 141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41회

10월 4일 월요일 돈암동 일성빌딩 5층.

9월 30일 홍콩경매 출품작 3점을 끝내서 갤러리윤으로 보낸 후, 강수는 쉴 틈도 없이 스케치해놓은 그림을 하나씩 작업하고 있었다.

20호 그림을 완성한 강수가 붓을 내려놓았다.

‘단체전이 한 달 정도 남았구나. 단체전에는 50점 정도만 출품할까?’

9월에는 캐리커처 사인회와 와이옥션 홍콩경매 출품작, 멸종 동물을 지켜라 시리즈물에 신경 쓰는 바람에 5점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완성한 작품은 총 86점.

세 번째 개인전 오픈은 12월 8일, 약 두 달 남짓 남았다.

하루에 한 작품씩 그려나간다 해도 최대 145점 내외가 될 것이다. 하지만 11월에 개막하는 단체전이라는 변수가 있다. 단체전에서 시간을 뺏기면 완성작 수는 5점 정도 줄어들 수 있다.

‘이런저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스케치한 걸 전부 그릴 수 없게 됐으니 단체전에 50점만 출품하고, 나머지는 개인전에서 발표해야겠다.’

본래 계획은 단체전에 60점, 세 번째 개인전에서 나머지를 전시하는 것이지만 퍼스트타워 로비에 그린 향유고래의 꿈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작업이 늦어졌다. 완성 작품 개수가 계획보다 줄어드는 만큼 단체전 출품 작품 개수를 50점으로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선배님, 이 기사 실화입니까?”

건너편에서 작업하고 있던 서혁중이 놀라서 소리치며 다가왔다.

“응? 뭐가?”

“저번에 용달로 보낸 작품 석 점이 와이옥션 홍콩경매에 출품됐다는 기사요.”

“그런 걸 가짜 기사로 쓸 일 없으니 실환가 보지.”

“우와, 와이옥션 홍콩경매 출품이라니! 선배님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는 언제까지 계속되는 겁니까?”

“홍콩경매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서혁중을 따라 나온 고원철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서혁중이 스마트폰을 고원철에게 건네주었다.

“묻지 말고 이거 봐라.”

강수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외 컬렉터가 내 작품에 관심을 줄까? 사실 누가 내 작품을 살까 싶어 기대는 별로 안 하고 있다.”

“왜요? 홍경택, 김동유, 오치균, 강형구, 이환권, 최소영 같은 작가들은 국내에서 누가 알아줬나요? 하지만 홍콩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서 스타작가가 됐죠. 선배님 작품은 최이석 교수, 박윤재 관장이 인정할 정도로 뛰어나잖아요. 전 선배님 작품도 홍콩경매에서 뜰 수 있다고 보거든요.”

“과연 그럴까? 하여튼 누군가 내 작품을 구매하면 기분 좋긴 하지. 솔직히 낙찰만 돼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기사를 읽은 고원철이 스마트폰을 서혁중에게 돌려주었다.

“혁중아, 스마트폰 여깄다. 전시가 삼청동 와이옥션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다는데 한번 가보자.”

“한국 대표작가들의 최고 작품이 출품됐다는데 가서 봐야지. 선배님도 같이 가죠?”

“그래. 같이 가자.”

삑삑삑삑!

이때, 도어락 비밀번호를 해제하고 염진구가 들어왔다. 단체전 개최 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염진구의 방문이 잦아졌다. 작업 동료나 다름없는 염진구에게 강수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진구 선배님, 어서 오세요.”

“다들 있구나. 반갑다.”

“진구야, 밥은 먹었냐?”

“시간이 몇 신데. 먹고 왔어. 강수야, 단체전 홍보용 영상물 민찬웅이란 친구가 만들기로 했다.”

서혁중이 탄성을 질렀다.

“이야, 홍보영상물 만들기로 했군요. 근데 민찬웅이 누구죠?”

“김중원 CF 감독 밑에서 일하는 친구야. 실력 있는 친구라 얼마 안 있으면 독립할 걸. 그래서 말인데 민찬웅이 네 개인전 촬영한 동영상 있으면 구해달라고 하더라. 한 주간 문화계 소식에 나온 영상이면 괜찮을 것 같다고 하던데 그 동영상 구할 수 있겠냐?”

강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방송국에 전화해봐야지. 그건 내가 알아볼게.”

“지금 알아볼래? 민찬웅한테 동영상 구할 수 있는지 없는지 빨리 알려줘야 하거든.”

“그래? 알았다.”

톡, 톡, 톡!

스마트폰을 꺼낸 강수가 김도진의 전화번호를 터치했다.

신호는 금방 끊기고 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김 감독님. 화가 이강수입니다.”

[이강수 작가요? 아, 얼마 전에 개인전 개최한 이강수 작가. 기사 읽었습니다. 개인전 성공적으로 치렀더군요. 축하합니다.]

“감독님이 도와준 덕을 많이 봤죠. 감사합니다.”

[하하. 그럴 리가요. 방송에 나간 덕에 성공했으면 다른 전시회도 다 성공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개인전 성공은 순전히 이강수 작가 실력이죠. 한데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었죠?]

“실은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부탁이요?]

“제 개인전 촬영한 동영상 카피본 얻을 수 있을까요?”

[혹시 무슨 일로 그 영상이 필요한 건지요?]

“네. 실은 11월에 개최하는 ‘한국 청년 예술가들이여, 희망을 던져라.’ 전 홍보 영상물 만드는데 그 영상의 일부를 사용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희망을 던져라’요? 음, 그 영상을 개인적인 용도로 보관하면 얼마든지 카피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하면 저작권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럼 홍보물에 사용하면 안 되는 거네요?”

[아닙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우리가 촬영한 영상이 꽤 됩니다. 그 가운데 방송에 나간 분량은 겨우 50초 남짓에 불과합니다. 방송에 나가지 않은 부분을 쓰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원본을 보내줄 테니 방송 나간 부분만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디로 보내줄까요?]

“예, 고맙습니다. 이메일 주소 문자로 보내겠습니다. 거기로 부탁합니다.”

[그러죠.]

전화를 끊은 김도진이 느닷없이 책상 위에 쌓여 있는 홍보물 더미를 뒤적였다.

“희망을 던져라 홍보물 봤는데.... 이거군.”

혼잣말로 중얼거린 김도진은 홍보물 더미에서 팸플릿과 리플릿을 골라냈다.

‘한국 청년 예술가들이여, 희망을 던져라’ 전시회 홍보물이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11월 10일 수요일에 개막하는군.’

처음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기획사에서 개최하는 무명 예술가들의 대규모 단체전으로만 여기고 치워놨던 홍보물이었다. 이강수가 참여한다는 사실만으로 전시회에 흥미가 생겼다.

김도진은 잠자리와 소년이 마주 보고 있는 팸플릿 표지부터 속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이강수 작품은 팸플릿의 중간쯤에 나왔고, 잠자리와 소년이 거기 있었다.

‘표지가 이강수 그림이었구나.’

과거나 현대, 동서양을 불문하고 몇몇 천재적인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예술가의 삶은 가난에 시달리고 창작에 고뇌하는, 형극 같은 가시밭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꺼이 예술가의 삶을 선택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일반인에게 없는 예술이라는 여섯 번째 감각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잠자리와 소년은 시골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의미 없이 스치는 장면이다. 그 흔한 장면을 캔버스에 옮겼을 뿐인데 그림은 자연과 생명의 존재, 생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만 같았다.

‘참나, 이강수가 그렸다는 걸 알고 보니 그림의 의미가 달라져 보이네. 이래서 네임 밸류가 존재하는 거지.’

팸플릿을 내려놓은 김도진은 리플릿을 다시 훑었다. 5일간의 전시 기간 동안 작가와의 대화, 관람객이 참여하는 미술, 사진가가 찍어주는 한 컷의 사진, 캐리커처 사인회, 조각가와 만들어보는 지점토 등 10가지나 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한국 청년 예술가들이여, 희망을 던져라’ 전은 관람객과 무명 예술가들이 어우러지는 대규모 페스티벌이었다. 주최자는 이름 없는 기획사였지만 관람객과 호흡하려는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의 문턱을 낮추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프로그램만 보면 내용도 충실할 것 같았다.

‘이 정도 행사를 차질 없이 진행하면 방송에서 소개해도 될 만한데..., 관계자를 만나볼까?’

전시 총감독은 염진구란 인물이였다.

강하아트란 기획사와 마찬가지로 예술계에서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무명 기획사가 어떻게 이런 대규모 전시회를 진행하는 거지? 실패하면 손해가 꽤 클 텐데?’

주최자가 국.공립 기관이거나 기업, 협회가 아닌 이상 ‘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무명의 청년 예술가를 대중에게 알린다는 좋은 취지를 내세운 전시회를 기획한 점은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전시회가 실패하면 그 의미마저 퇴색한다.

김도진은 강하아트란 곳에서 무슨 의도로 단체전을 기획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후원사조차 없고 경제 논리를 따지지 않는 이런 공익 성향이 강한 전시회는 성공할 수 있게 도와줘도 되는데 일단 관계자를 만나서 기획 의도를 알아보고 판단해야겠다.’

책상 위의 전화기를 집은 김도진은 리플릿에 나온 주최 측 전화번호를 눌렀다.

*

김도진에게 이메일 주소를 보낸 강수가 염진구에게 말했다.

“영상 보내준단다. 받는 대로 보낼 테니까 민찬웅이란 친구 이메일 어떻게 되냐?”

“어, 이메일 톡으로 보내줄게.”

“그리고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한 주간 문화계 소식에 나간 영상은 저작권에 걸릴 수 있으니까 쓰지 말고 다른 장면 써야 한다.”

염진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렇게 전해주지.”

동영상 얘기가 마무리되자 서혁중이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염진구를 불렀다.

“진구 선배님.”

“어, 왜?”

“강수 선배 작품 석 점 와이옥션 홍콩경매에 출품된 거 아세요?”

염진구가 피식 웃었다.

“나야 진즉에 알고 있었지. 넌 이제 안 거냐?”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서혁중이 김빠진 맥주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 그게 말이죠. 며칠 전에 작품 세 점 포장해서 갤러리윤에 보냈는데 강수 선배가 어디 출품하는 건지 얘길 안 해서 몰랐죠. 그러다 오늘 기사 보고 알았다니까요.”

“나라고 강수가 얘기해서 안 줄 아냐? 나도 기사 보고 알았어.”

시간강사이자 예술비평가로서 미술계 동향에 관심을 쏟고 있는 염진구는 예술 관련 기사는 매일 찾아 읽었고, 웬만한 전시는 찾아다니며 관람하고 비평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린다.

서혁중이 싱겁게 웃었다.

“하하. 그랬나요? 우린 전시장 가볼 건데 선배님도 같이 갈래요?”

“난 갔다 왔다. 또 가도 되지만 강의 자료 만들어야 하고, 전시회 준비로 바빠서 못 갈 거 같다.”

서혁중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선배님 바쁘군요. 어쨌든 한가한 것보단 바쁘게 움직이는 게 좋죠.”

우웅! 우웅!

이때, 염진구의 가방에서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스마트폰을 꺼낸 염진구는 통화를 연결했다.

“염진구입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시간 됩니다.... 물론이죠. 제가 찾아뵈야죠. 지금 출발하면 한 시간 반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예. 방송국에 도착해서 연락하겠습니다. 가서 뵙겠습니다.”

염진구의 통화를 들은 서혁중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선배님, 방송국에서 연락 온 거예요?”

“그래. 김도진이라고 한 주간 문화계 소식 담당 피디라는데. 강수야, 네가 좀 전에 김도진 피디하고 통화하지 않았냐?”

“맞아. 김도진 피디하고 통화했지. 그 사람이 너한테 왜 전화 했지?”

“글쎄? 우리가 준비하는 단체전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고 하더라.”

서혁중이 재빨리 말했다.

“한 주간 문화계 소식에서 강수 선배님 개인전 소개했잖아요? 설마 우리 전시회 소개하려는 건가요?”

“뭘 물어보겠다는 건지 몰라도 심심해서 보자고 한 건 아닐 테니까 얘기 잘 되면 그럴 가능성도 있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서혁중이 환호성을 질렸다.

“우와, 우리 전시회 전국 방송 타는 겁니까? 그러면 완전 대박이잖아요.”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라. 가능성이 있는 거지 아직 확정된 게 아니야. 강수야, 난 DBC 방송국 가야겠다. 결과는 전화로 알려줄게.”

“그래, 고생해라.”

“선배님,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화이팅!”

“수고하세요, 선배님.”

서혁중이 우렁차게 외친 화이팅 소리에 염진구가 쓴웃음을 지으며 작업실을 나갔다.

염진구는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며 강수의 높아진 위상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김도진 피디가 전화한 게 우연이 아니야. 강수가 ’희망을 던져라‘ 전에 쓸 홍보물 만든다고 한 얘길 듣고 나한테 연락한 게 틀림없어. 강수 영향력이 김도진을 움직일 정도란 말인가?’

염진구는 강수의 네임 밸류가 신인작가 레벨을 한참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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