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39회
실내에 느닷없이 목을 움츠리게 하는 삭풍이 불었다.
분위기가 서늘해지자 강수가 재빨리 말했다.
“제가 사귄 사람은 한 명입니다.”
“한 명?”
최경화가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강수를 꿰뚫듯이 보았고, 주하는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얼굴에는 기쁨의 빛이 스쳤다. 강수가 사귄 한 명은 자기도 알고 있는 민설희이고, 그녀 외에는 사귄 여자가 없다는 사실이 은근히 기뻤다.
“한 명 사궜다는 말, 믿어도 되는 건가?”
최경화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묻자 강수가 보충하듯 스스럼없이 학창시절을 얘기했다.
“저는 양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홍우대에 입학했습니다. 대학 1, 2학년 때는 자취했는데 부모님이 농사지어서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셨기 때문에 서울에서 생활하는 것조차 빠듯했죠. 그때는 서울이 낯설고 생활에 여유도 없어서 누굴 사귀면서 지낼 수 있는 한가한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했고, 제대 후에 3학년에 복학했습니다. 복학해서 우연히 한 사람을 만나 사귀었고, 작년 3월에 헤어졌습니다. 연애는 그게 답니다.”
강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확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경화의 눈빛에서 의심의 빛이 옅어졌다.
“생각보다 오래 사귀었네? 그렇게 깊게 사귀면 헤어지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무슨 이유로 헤어졌는지 궁금하군.”
최경화의 끈질긴 질문에 주하가 끼어들었다.
“엄마, 강수오빠가 헤어진 이유는 내가 다 알고 있어요. 이제 그 얘긴 그만 해요.”
주하가 강수의 전 애인을 알고 있다는 말에 최경화가 흠칫했다.
“뭐? 네가 그걸 안다고?”
“그래요. 누구랑 사귀었고, 왜 헤어졌는지 강수오빠가 다 얘기해 줬다고요. 간단히 말하면 여자가 강수오빠 떠난 거니까 엄마가 헤어진 이유까지 세세하게 알 필요 없어요. 지나간 일을 왜 자꾸 들춰내려고 그러세요?”
“그렇다면 더 얘기하지 않으마. 내가 경우 없게 자네 연애사를 물어본 건 자네가 너무 잘났기 때문일세. 남자는 돈이 너무 많아도 탈이 나고, 너무 잘나도 문제거든. 가만 보니 자네가 딱 그런 타입이야. 그러니 부모로서 걱정 안 할 수가 있나. 자네가 이해하고 우리 주하 사랑해주게나.”
강수가 신념에 가득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어머님. 제 목숨처럼 주하를 사랑하겠습니다. 제 부모님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오신 것처럼 주하와 함께 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주하와 평생 같이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강수의 맑고 깊은 눈을 마주 본 최경화는 내심 마음이 울컥했다. 그녀는 이강수의 깨끗한 눈빛에서 이상하게 이강수의 진실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 허락하지. 허락하고말고. 자네를 믿겠네. 부디 평생 그 마음 변치 말고 주하와 행복해야 한다네.”
“예. 어머님.”
진실이 뚝뚝 떨어지는 강수의 열의에 가득한 말에 주하는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주하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너무 기쁜 나머지 엄마, 걱정하지 말라고, 지금도 너무 행복하다고 목청껏 소리치고 싶어 목이 근질거렸지만 입을 꼭 다물고 참았다.
주체하기 힘든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주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감정을 다스렸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해야겠다고 느낀 최경화가 호출 버튼을 눌렀다.
“이제 음식 시키고 천천히 식사하면서 얘기하세. 셰프 특선 괜찮지?”
“네.”
감정을 미처 다스리지 못한 주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디너 정식 셰프 특선 코스는 이 레스토랑의 가장 비싼 정식이었다.
주하와 비싼 음식 서너 번 먹어보았지만, 강수는 한 끼에 수십만 원하는 음식이 아직도 친숙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작년 초만 해도 계란 후라이 해서 김치에 한 끼 때웠다. 원가 이천 원짜리 밥을 먹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강남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접하는 최고급 음식이 친숙할 리 없다.
곧 웨이터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사모님, 주문하시겠습니까?”
“셰프 특선으로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웨이터가 문을 닫고 물러가자 최경화가 처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11월에 전시회가 또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무슨 전시회지?”
“그건... ‘한국 청년 예술가들이여, 희망을 던져라’ 전입니다. 한국의 재능 넘치는 청년 예술가 백이십오 명이 모여 예술의 전당 1, 2, 3층에서 여는 대규모 전시입니다. 저도 그 단체전에 참여합니다.”
“청년 예술가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인들인가?”
“예, 맞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예술계는 상당히 척박합니다. 무엇보다 신인 예술가들이 자비를 들여 개인전을 꾸준하게 열면서 성장해 나가기 무척 어렵죠. 이번 단체전이 청년 예술가에게 희망을 주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획한 전시입니다.”
“뜻깊은 전시로군. 이런 전시를 주최한 곳은 무슨 단체인가?”
“강하아트인데 제가 주최자입니다.”
“자네가 주최자라고?”
최경화가 놀란 얼굴로 강수를 쳐다보았다.
“제가 자금을 대고, 구체적인 전시 기획과 전시 총감독은 학교 동기인 염진구란 친구가 맡아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강하아트는 제가 만든 개인사업자 상호입니다.”
최경화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시나 도, 규모가 큰 단체에서 대규모 아트페어를 개최해도 성공하기 쉽지 않다고 들었네. 한데 신인 예술가만 모인 단체전이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까? 결국 작품이 안 팔리면 전시회는 실패하는 것 아닌가?”
“작품 판매로 성공과 실패를 규정한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저는 청년 예술가가 대거 참여해서 일반 대중과 만나고, 작업실에 쌓여 있는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인다는 데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전시 준비하는데 필요한 자금이 대관료, 홍보물 제작, 홍보비, 행사진행비 등인데 그 비용이 의외로 적습니다. 전시회가 성공하면 좋겠지만, 실패해도 금전적인 손해는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시를 통해 청년 예술가들에게 창작에 대한 동기부여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죠.”
최경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
이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웨이터가 작은 그릇에 산뜻한 내음 나는 수프를 가져왔다.
그 뒤로 코스요리가 차례차례 나오기 시작했고, 강수와 두 모녀는 단체전 전시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
9월 23일 목요일.
뽀로롱, 뽀로롱!
사각, 사각!
고요한 산중에 간혹 노래하는 산새 소리가 잔잔하게 적막함을 깨뜨렸고, 한 줄기 바람이 나뭇잎을 희롱하며 지나갔다. 한여름의 더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계절의 흐름을 좇아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는 서늘한 기운이 차지했다.
태양은 중천에 떠올라 따가운 햇볕을 대지에 뿌렸다.
두 번째 개인전이 끝나고 벌써 9일이 흘렀다. 강수는 북한산 수련 장소에서 눈을 감고 쿠션 방석에 앉아 있었다.
하나의 석상처럼 앉아 있던 강수가 눈을 떴다.
“완충했다.”
강수는 가볍게 스트레칭하고 천천히 일어났다.
일주일 전에 인챈트마법을 캐스팅했으나 실패하고 일주일 동안 매일 오전에 마나회로를 수련했다. 수련 일주일 만에 텅 빈 마나하트에 마나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3서클 마나하트를 완성하고 나서 주하에게 줄 반지에 실드 인챈트를 11번 시도했으나 전부 실패했다. 성공할 확률이 0.1%이긴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나니 12번째 시도는 조금 여유를 두고 할 생각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수는 배낭을 챙기고 산에서 내려갔다.
아파트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곧장 작업실로 차를 몰았다. 전시회가 끝난 후에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멸종 동물을 지켜라 시리즈물과 와이옥션 홍콩 경매에 출품할 작품의 작업에 매달렸다. 강수가 시간에 쫓긴 이유는 일주인 전, 실드 인챈트 실패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덕분에 새벽부터 정오까지 마나회로 수련에 꼬박 붙잡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강수가 작업실로 들어서자 고원철과 서혁중이 하던 작업을 멈추고 다가와 깍듯이 인사했다. 둘의 왼손 손목에는 강수가 선물한 시계가 빛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늘도 등산 하고 오시네요? 나도 운동해서 살 좀 빼야 하는데 말이죠.”
“헬스장 가서 하면 되지. 그게 어려워?”
“그게 별것 아닌 것 같은데요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게 쉽지 않아서요.”
“헬스장부터 끊어. 그래야 돈이 아까워서라도 가지. 스케치는 할 만해?”
서혁중이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선배님, 이거 말이죠, 이야기 짜면서 영상을 수없이 상상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스케치가 쉽게 나오는데요? 원래 그런 건가요?”
“그래. 스스로 이야기를 짜면 완성된 이야기를 작가에게 받는 것보다 주요 장면 뽑아내는 건 어렵지 않지. 다만 이야기를 돋보이게 해주는 가장 좋은 장면을 뽑아내는 것이 관건이야. 스케치 끝나면 나한테 줘. 검토해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서혁중이 맡은 1권 수달과 고원철이 맡은 2권 반달가슴곰의 스토리는 어제 수정, 보완 작업을 끝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스케치 작업에 돌입한 상태였다.
“바쁘다. 작업하자.”
“네.”
고원철과 서혁중은 작업하던 회의용 책상에 앉아 자기 그림책을 스케치했고, 강수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이젤 앞으로 갔다.
홍콩 경매에 출품할 세 작품은 50호나 60호 사이즈로 그린다. 세 작품의 스케치는 끝내놓았다. 스케치해 놓은 세 작품은 각각 졸업반 아이들, 팔랑리 마을의 봄, 산골 마을의 만추다.
‘졸업반 아이들’은 팔랑리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16명의 아이들이 구김 없이 웃고 있는 얼굴을 그린 작품이고, ‘팔랑리 마을의 봄’은 유년 시절 언덕 위에서 보았던 농번기 때, 논과 밭에서 마을 사람과 아이들이 농사일하는 마을 풍경화이다.
‘산골 마을의 만추’는 대학 다닐 때 친구들과 갔던 무등산에서 하산하며 들린 마을이 소재였다. 십여 호의 초가집과 기와집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산골 마을인데 초가집과 돌담, 사다리를 놓고 감을 따는 사람, 밭에서 콩을 터는 농부,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그렸다.
‘산골 마을의 만추’는 포트폴리오에 있던 작품의 하나이기도 한데 한국 전통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산골 마을이라서 학부 시절 작품화했었다. 이 작품은 30호로 그렸는데 이번에는 60호로 사이즈를 키우고, 가을빛으로 물든 산골 마을 만추 풍경을 색과 색이 충돌하며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이미지가 분출할 수 있게 강렬한 원색으로 표현할 계획이었다.
‘졸업반 아이들부터 그리자.’
강수는 주문해 놓은 가로가 긴 변형 50호(120*75) 캔버스를 이젤에 걸고 연필을 집었다. 스케치북에 스케치 해 놓은 그림을 잠시 뇌리에 담은 강수는 캔버스에 16명의 아이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
9월 30일.
갤러리윤 출입문 앞으로 1톤 탑차가 달려와 섰다.
캐주얼한 복장에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단화를 신은 김이라가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고, 그녀 뒤를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두 남자 직원이 따랐다.
탑차에서 얼굴 피부가 거무스름하게 탄 40대 초반의 운전사가 내려 김이라에게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좀 전에 통화한 김이라요?”
“네. 내가 김이라 에요.”
“이강수가 당신에게 그림 세 개를 보냈수다. 맞소?”
“맞아요.”
대답을 들은 중년의 운전사는 탑차 뒷문을 열고 위로 올라가 포장된 물건을 꺼내 다가온 갤러리윤의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김이라가 두 직원에게 지시했다.
“김 대리, 작업장으로 가져가서 포장 벗겨 놔.”
“예, 실장님.”
김이라는 사내가 내민 인수인계서에 사인하고 관장 박윤재에게 전화했다.
컬러링은 바로 끊겼다.
“관장님, 김 실장입니다.”
[아, 김 실장. 무슨 일인가?]
“이강수 작가의 홍콩 출품 작품이 도착해서 작업장으로 가져갔습니다. 살펴보실 건지요?”
[다행히 프리뷰 전시에 늦지 않았군. 지금 작업장으로 내려가지.]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김이라는 창고와 작업장이 있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작업장에서 김 대리와 인턴 김 군이 강수의 작품에서 포장을 제거하고 있었다. 포장이 제거되자 아이들 얼굴이 화폭 가득 채워져 있는 캔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졸업반 아이들이구나.’
익살스럽게 웃는 아이, 짓궂은 미소를 날리는 아이, 잔잔하게 미소 짓는 아이, 예쁘장하게 웃는 여자아이, 윙크하는 아이, 혀를 쏙 내민 아이, 입이 찢어져라 웃는 아이 등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고, 이유 없이 세상이 밝아질 것만 같았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고,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후훗, 그저 인생이 행복하기만 한 개구쟁이들을 그렸구나. 괜히 나까지 행복해지려고 하네.’
이강수의 작품 소개글에서 ‘졸업반 아이들’은 팔랑리 초등학교 35회 졸업 앨범에 실린 사진 가운데 한 장을 소재로 해서 그렸다고 했다. 소재는 졸업 앨범의 사진이지만 사진 속 아이들 얼굴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실재와 다르게 약간씩 변형했다. 그래서 그런지 웃는 아이들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행복하고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