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38회
작업실로 들어선 강수와 주하를 고원철과 서혁중이 반갑게 맞았다.
“형수님, 선배님. 어서 오세요.”
“앗, 형수님도 왔네요.”
“안녕하세요.”
서혁중이 김주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덥석 받아들고 기대에 차서 물었다.
“마침 출출했는데 제때 간식 가져왔네요. 어? 뭐가 이렇게 가벼워? 빵인가?”
“어머, 간식을 안 사 왔네. 호호. 간식 안 사 온 대신 다음에 맛있는 저녁 살게요.”
“앗, 감사합니다. 그럼 이게 뭐죠?”
서혁중이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았다.
“선물이네요? 누구 주는 건가요?”
“혁중아, 이리 와 꺼내 봐라.”
“네, 선배님.”
서혁중이 쇼핑백에 든 선물을 탁자 위에 꺼냈다. 똑같이 포장된 작은 크기의 선물이었다.
강수가 선물 상자를 하나씩 고원철과 서혁중에게 주었다.
“감사합니다. 근데 웬 선물이죠?”
“내 개인전에서 초상화 그리느라 둘 다 고생했잖아. 그래서 준비한 거야. 내 딴에는 괜찮은 걸로 골라봤는데 마음에 안 들어도 대충 써야 한다.”
“하하. 아무리 작은 선물도 받는 사람은 기분 좋죠.”
김주하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호호. 글쎄요? 얼른 풀어 봐요.”
고원철과 서혁중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포장을 풀었다.
“앗! 테그호이어다!”
서혁중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포장 안에는 꽤 고급스러런 검정색 박스에 테그호이어 로고가 찍혀 있었다.
박스를 열어 재낀 서혁중이 눈부시게 빛나는 시계를 들고 감격에 겨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칼리버 파이브 데이데이트! 선배님! 감사합니다.”
서혁중이 차렷 자세에서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했다.
고원철은 칼리버 파이브 데이데이트의 은은한 명품 분위기에 흠칫 놀라고는 얼른 고마움을 표시했다.
“감사합니다. 시계가 무척 고급스럽네요? 꽤 비싼 시계 같네요?”
서혁중이 깬다는 표정으로 고원철을 바라보더니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갈겼다.
빡!
“앗! 뭐냐 너?”
“짜샤, 선배님이 이백만 원 넘는 명품 시계를 선물해 주셨는데 그것도 몰라본 죗값이다.”
“헉! 이백만 원이 넘어?”
뒤통수를 긁던 고원철이 놀란 눈으로 시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나는 시계 잘 몰라. 주하가 추천해 준 거야. 진짜 명품은 천만 원이 넘는 것 같은데 그런 것에 비교할 순 없지만, 디자인이 맘에 들어서 고른 거다.”
서혁중이 팔을 크게 휘저었다.
“아닙니다, 선배님. 테그호이어가 금수저에는 하품일지 몰라도 우리 같은 서민에겐 명품이라고요. 사실 칼리버 파이브 데이데이트는 제가 눈독 들이고 있던 시계인데 선배님이 제 마음을 어떻게 알고 딱 샀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강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내가 네 마음을 어떻게 아냐? 하여튼 맘에 들었으면 됐다. 원철이도 맘에 드냐?”
고원철이 멋쩍은 듯이 웃었다.
“저도 명품 시계 같은 거 잘 모릅니다. 이렇게 비싼 시계는 처음 보는데 확실히 비싼 만큼 고급스럽네요. 마음에 쏙 듭니다. 다만 옷하고 어울리지 않게 시계만 이런 거 차고 다녀도 될지 모르겠어요?”
서혁중이 고원철의 어깨를 툭 치며 한마디 했다.
“이참에 고품격 시계하고 어울리는 브랜드 옷 사 입으면 되지. 선배님 덕분에 그 정도 쓸 돈은 벌었잖냐?”
“그럴까?”
고원철이 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1억 넘는 러닝개런티 받으면 수십만 원짜리 옷은 사 입을 여유는 되지만, 과연 그런 옷을 사 입을지 자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강수는 고원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도 작년까지 주로 실용적인 저가 브랜드 옷을 사 입었으니 고원철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원룸 월세 살면서 외제차 끌고 다니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 자기 처지에 맞게 소비할 수밖에 없다. 부모에게 물려받을 재산이 풍족하지 않은 이상 300만 원 내외 월급 받아서 20, 30만 원대 바지, 셔츠, 40, 50만 원대 가디건 같은 옷을 입는 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세 아닐까?
하지만 삶에 정답은 없다. 요즘은 수입에 걸맞지 않는 소비를 해도 허세가 아니라 자기만족이고, 스스로 당당할 수 있는 확고한 가치관을 세우고 살면 그만이니까.
“전시회도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시리즈물 해야겠지? 스토리 진척은 좀 있냐?”
강수는 멸종 동물을 지켜라 시리즈물을 강승호의 제안대로 두 후배와 공동작업하기로 했다. 고원철과 서혁중도 강수와 하는 공동작업을 쌍수 들고 반겼다. 시리즈물은 한국 편, 세계 편으로 나누었고, 한국 편에서 다루는 멸종 위기 동물은 수달, 반달가슴곰, 사향노루, 여우, 스라소니, 산양 등 10권까지 기획되었다.
고원철, 서혁중이 각각 5권씩 맡았다.
인세는 고원철과 서혁중이 각각 50%, 강수가 25%, 무지개출판사 편집기획팀이 25%다. 편집기획팀이 기획하고, 자료,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스토리 방향까지 준비해주었기 때문에 강수는 편집기획팀에 25%의 인세를 배분했다.
서혁중이 머리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네. ‘수달’ 편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원철이는?”
“저도 2권 ‘반달가슴곰’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좋아.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스토리 짠 거 가져와라. 내가 검토, 수정해서 편집기획팀에 보낼 테니까.”
기쁨과 흥분으로 들떠 있던 서혁중과 고원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뇌가 깃든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띠링, 띠링, 띠리리~
이때, 인터폰에서 경쾌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어? 누가 왔지? 진구 선배인가요?”
“그래. 진구일 거야. 네 시에 온다고 했거든.”
고원철이 재빨리 일어나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진구 선배님. 어서 오세요.”
“그래, 반갑다.”
“어서 와라. 진구야.”
검은색 가방 든 염진구가 소파로 걸어왔다. 염진구는 얼마 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 논문에 매진한 탓인지 얼굴에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았다.
“진구오빠, 안녕하세요?”
몇 번 만난 김주하가 오빠라고 애교스럽게 부르는 말에 적응 안 됐는지 염진구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지었다.
“하하. 주하 씨도 있었네요. 반갑습니다. 강수야, 전시회 대박 난 거 축하한다. 동문도 많이 왔었지?”
“응. 이번엔 몇 명 빼고 거의 다 왔지? 선후배도 꽤 왔고.”
“실시간 검색어에도 오르고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으니 궁금해서라도 네 전시회에 안 갈 수 없었겠지. 그런데 나한테 ‘희망을 던져라’ 단체전 문의 전화가 꽤 오더라? 네가 ‘희망을 던져라’ 전에 참여한다고 밝힌 게 관심 끄는 거 같다. 네 개인전 이슈를 잘 살려서 홍보하면 성공적인 단체전이 될지도 모르겠다.”
서혁중이 대뜸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이번 단체전이 보통 단체전도 아니고 신예 청년 예술가 백이십오 명이나 참여하는 대규모 전시회잖아요. 대대적으로 홍보해서 우리 전시회도 선배님 전시 못지않은 성공적인 전시를 열어보죠?”
고원철이 회의적인 표정으로 대꾸했다.
“전시가 홍보한다고 성공하냐? 그럼 성공 못 하는 전시가 없게?”
“그러니까 강수 선배를 홍보 모델로 내세우자는 거 아니냐. 아, 맞아.”
딱!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서혁중이 손가락을 튕겼다.
“진구 선배님, 아예 강수 선배님을 모델로 단체전 홍보 동영상 찍어서 유튜브에도 올리고, 각종 커뮤니티에 올려보는 건 어떨까요? 한 주간 문화계 소식 영상이나 네티즌이 찍은 동영상 있으니까 편집해서 홍보 영상 만드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
주하가 눈을 반짝이며 까르르 웃었다.
“호호. 강수오빠가 홍보 모델로 나오면 멋있겠다. 그렇지 않아요?”
“그럼요. TV보면 강수 선배님 카메라빨 잘 받더라고요. 홍보 모델 해도 손색없죠.”
“영상 홍보물이라.... 음, 그거 괜찮은데?”
염진구가 홍보 영상물 찍으면 어떻냐는 얼굴로 강수를 보았다.
강수가 피식 실소하고 말했다.
“기존 영상으로 홍보 영상물 만드는 건 상관없는데 날 모델로 새로 찍자는 말은 하지 마라. 날 찍을 바에야 차라리 백 명이 넘는 다른 참가자를 찍어. 여기도 있잖아.”
강수가 서혁중과 고원철을 가리켰다.
고원철과 서혁중이 펄쩍 뛰면서 팔을 내저었다.
“선배님! 우리가 홍보 영상에 나가면 전시회에 누가 오겠어요. 모델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요.”
“너희가 뭐 어때서? 하여튼 전시 디렉터는 진구니까 네가 알아서 홍보물 만들고 필요한 곳에 홍보해라. 홍보비는 쓴 대로 줄 테니까.”
“알았다. 영상 전문가하고 얘기해 본 후에 연락하지.”
염진구가 가방에서 A4를 3단으로 접은 리플릿과 24P짜리 팸플릿을 꺼내 강수에게 건네주었다.
“샘플로 만든 홍보물이다. 한번 살펴봐라.”
‘한국 청년 예술가여, 희망을 던져라’ 단체전이 10월 11일 목요일에 개막한다. 전시회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인터넷의 각종 매체를 비롯해 언론사에 서서히 홍보할 때가 된 것이다.
“어디 보자.”
강수가 팸플릿을 받아 살폈고, 서혁중이 리플릿을 냉큼 집어 들었다.
팸플릿 표지는 강수의 ‘잠자리와 소년’이란 작품에서 잠자리와 소년의 얼굴만 클로즈업해 놓은 바탕에 전시 제목과 장소, 전시 기간, 하단에는 주최 측 강하아트가 찍혀 있었다. 표지 뒷장에는 전시디렉터 염진구의 ‘단체전에 부쳐’라는 글이, 속지에는 이강수를 비롯한 참여 작가 125인의 대표작 2점씩 소개했다.
뒤표지에는 전시회 참가자 125명의 이름이 전부 인쇄되어 있었다.
팸플릿을 훑어본 강수가 팸플릿을 고원철에게 주었다.
“난 괜찮은데?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진구야, 난 약속 있어서 나가봐야 하는데 먼저 일어나도 되겠냐?”
“그래. 약속 있으면 가봐야지.”
“참, 혼자서 힘들게 일하지 말고 사람 필요하면 얼마든지 채용해서 일해라. 알았지?”
진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지금은 알바 쓸 일이 없고, 단체전 개막 한 달 전쯤엔 생각해보마.”
“필요한 운영비는 미리미리 청구해라. 그리고.”
강수가 고원철과 서혁중에게 고개를 돌렸다.
“원철이하고 혁중이가 진구 좀 도와주고.”
“예, 선배님. 걱정 붙들어 매세요. 우리 전시회인데 발 벗고 도와야죠.”
“그럼 수고해라.”
“네, 들어가세요.”
작업실을 나온 강수와 주하는 지상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랜드로버에 올라탔다.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임해영이 곧장 강남으로 차를 몰았다.
강수 옆에 붙은 주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강수를 불렀다.
“강수오빠.”
“응? 왜?”
주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엄마가 조금 까칠하거든요. 엄마가 무슨 말을 하든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엄마는 그저 하나뿐인 딸 걱정해서 하는 말일 뿐이니까요. 알았죠?”
“까칠하다고?”
“아빠 때문에 좀 그래요. 제가 중학교 다닐 때부터 아빠가 밖으로 돌았으니까요.”
“그래. 알았어.”
강수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주하에게 몸을 돌렸다. 두 손으로 주하의 볼을 쓰다듬던 강수가 양 볼을 귀 쪽으로 잡아 올렸다.
“이렇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 보기 좋잖아.”
“옵빠!”
“하하.”
“아휴, 정말.”
주하가 두 팔로 강수 목을 휘감았다. 강수는 주하를 힘주어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껴안고 서로의 체온을 교감했다.
임해영이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서초동의 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임해영은 주차장에서 대기했고, 강수와 주하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출입문 입구에서 웨이터가 미소 띤 얼굴로 공손하게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하셨나요?”
“네. 최경화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웨이터는 강수와 주하를 귀빈실로 안내하고 물러갔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장식된 룸 안에는 미모의 중년 여인이 앉아 있었다. 김주하의 생모인 최경화 여사였다. 그녀의 실제 나이는 52세지만 4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최경화는 주하와 함께 들어선 강수를 보더니 미간이 좁아지고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강수의 위아래를 매서운 눈으로 훑었다.
“엄마, 먼저 와 있었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가까운 데 있으니까 금방 왔지.”
최경화의 목소리는 어딘가 퉁명스러웠다.
강수가 허리 숙여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진작에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강수입니다.”
“거기 앉게.”
“예.”
최경화가 앞에 앉은 강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강수의 얼굴을 잠시 살펴본 최경화가 입을 열었다.
“자네 얘기는 주하에게 많이 들었어. 이번에 두 번째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마쳤더군. 늦었지만 축하하네.”
“예. 감사합니다.”
“주하가 보내준 자네 전시회 사진하고 동영상 봤네. 사람도 많고 그림도 다 팔렸더군. 내가 그림에 관심 있는 친구들에게 자넬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화가도 있냐고 하더군. 그래서 전시회 얘길 해주고 박윤재 관장이 자네 그림 16점을 구매했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다음 자네 개인전에 꼭 찾아가겠다는군.”
듣고 있던 주하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엄지를 세웠다.
“호호. 엄마가 강수오빠 피알해 줬네. 우리 엄마 최고.”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친구들하고 잡담 나눈 것뿐이야. 우리 집안 얘기는 주하한테 들어서 알 테니 더 할 얘기 없고, 부모님은 양구에 계신다고?”
“예. 양구 팔랑리에서 텃밭 일구며 생활하십니다.”
“농사는 짓지 않고?”
“부모님은 작년까지 평생 농사를 지었습니다. 아버지는 올해도 농사지으려고 했지만, 제가 반대했습니다. 농사짓지 말라고 제가 생활비를 넉넉하게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잠시 뜸을 들인 최경화가 툭 질문을 던졌다.
“주하랑 만나기 전에 사귄 사람은 있었나?”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적인 질문에 실내는 침묵이 흘렀다.
주하는 멀뚱한 눈으로 최경화를 바라보다 질문을 요지를 깨닫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엄마. 그런 질문이 어딨어.”
“죽을죄 지은 걸 묻는 것도 아닌데 뭐가 어때서?”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는데 실례잖아요. 날 만나기 전에 누굴 사궜는지 중요하지도 않고요.”
“중요한지 안 중요한지는 내가 판단할 일이야. 넌 잠자코 있어.”
이때, 강수가 담담한 얼굴로 침착하게 말했다.
“사귄 적 있습니다.”
주하가 당황한 표정으로 강수를 보았다.
“오, 오빠.”
당황스러워 하는 주하와는 반대로 최경화의 표정은 냉엄해졌다.
“사귄 사람이 없으면 그게 이상하지. 그럼 몇 명이나 사귀었나?”
연속된 폭탄 질문에 크게 놀란 주하가 고개를 홱 돌려 최경화를 사납게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엄마, 왜이래? 그딴 황당한 질문이 어딨어. 자꾸 그러면 나 화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