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37화 (137/197)

# 13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37회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오자 강수와 유성길이 아르바이트 청년에게 고개를 돌렸다.

“와아!”

짝짝짝짝!

캐리커처 행사가 시작되었는지 줄을 서 있던 관람객이 환호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다가온 청년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 나누는데 죄송합니다만 이강수 작가님, 사인회 시작해야 합니다. 인터뷰 계속할 건지요?”

“아뇨. 유 기자님. 전 이만 캐리커처 그리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일어나도 되겠지요?”

유성길의 얼굴에 살짝 기분 나쁜 기색이 떠올랐다.

‘지 전시회 기사 내주겠다는데 일어나겠다고? 뭐가 중요한지 모르는 한심한 친구네.’

“질문이 몇 가지 남았는데 마저 끝냈으면 좋겠는데요? 웬만하면 조금만 더 하죠?

유성길의 불편한 속마음이 목소리에도 묻어났다.

강수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약속은 지키라고 하는 것이죠? 캐리커처 행사가 끝나면 시간 됩니다. 나머지는 그때 하죠.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가볍게 묵례한 강수는 유성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기 책상으로 걸어갔다.

“아니. 잠깐.”

유성길의 얼굴이 휴짓조각처럼 구겨졌다.

‘뭐야, 저거? 언론에서 주목하니까 지가 무슨 스타 작가라도 된 줄 아나?’

유성길이 황당한 표정으로 자기 할 말만 하고 자리를 뜬 강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웃기는군. 인터뷰가 싫다면야 더 할 것 없지. 사진이나 찍고 퇴근하자.’

편집장에게 취재 업무를 하달받고 퇴근도 못 한 채 부리나케 달려온 전시장이었다. 캐리커처 행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니? 성공에 취해 앞뒤 분간 못 하는 친구가 아닌가?

인터뷰는 적당히 했기 때문에 더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유성길은 카메라 가방에 꽂아 놓은 녹음기를 끄고 사진 몇 컷 찍기 위해 카메라를 꺼냈다.

시간에 쫓겨 인터뷰부터 하느라 작품은 살펴보지 못했다. 관람객 틈에 끼여 1층에 전시된 군마와 DNA남녀를 살펴본 유성길은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 인터뷰 내용이 떠오르며 똑같은 그림이 각각 다른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유성길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젠장, 실력은 확실하잖아? 뜨는 이유가 있긴 하네.”

편집장의 지시를 받고 취재하기 전 이강수의 경력을 검색해 보았다.

이강수는 2018년 홍우대를 졸업한 새파란 신인이었다. 회화 작업을 꾸준히 해온 것도 아니고 일러스트를 하다 올해 초 첫 개인전을 열었다. 특이한 경력이 있긴 했는데 작년 아트페어 상하이에 작품을 출품했고, 이강수가 그린 핑크티티 초상화가 네티즌 사이에서 관심을 끌었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두 번째 개인전에 관한 기사와 SNS 등에 올라온 글을 읽어보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일천한 경력의 신인화가에 불과한 이강수에 대한 언론의 과도한 주목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또한 전시 작품이 완판되었다는 언급과 함께 이강수 그림에 대한 호평 일색의 평가는 내심 거부감마저 들기까지 했다. 그는 캐리커처 행사와 박해나, 김이연 같은 인지도 있는 여성 화가와 김종대, 박보람 등 활발한 작품 활동하는 화가로 인해 이슈가 된 전시회로 평가절하하고 있었다.

한데 두 눈으로 직접 그림을 확인하고 나니 실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월에 단체전, 12월에 세 번째 개인전을 연다고 했지? 그때 작품은 어떤지 두고 보겠어.’

갑자기 등장한 이강수의 폭발적인 인기몰이에 위화감을 느낀 유성길은 속으로 냉소하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우웅! 우웅!

카메라 가방 속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유성길은 짜증스러운 손짓으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편집장이군. 좀 기다리지. 성질 하곤.’

유성길이 혀를 차고 통화를 터치했다.

“유성길입니다.”

[성길아, 어떻게 됐어? 인터뷰 땄냐?]

“예. 당연히 땄죠.”

[잘했다. 오늘 중으로 아니, 빨리 올리게 일곱 시까지 인터뷰 기사 보내라.]

“네? 편집장님, 일곱 시까지는 너무 빡빡한데요? 오늘까지 보내면 안 될까요?”

[얌마. 인터뷰 땄으면 기사 만드는데 두 시간이면 됐지 뭘 오늘까지 보낸다고 그래. 어영부영하지 말고 당장 써서 보내.]

딸깍!

편집장이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은지 바로 전화가 끊겼다.

“윽! 이 미....”

유성길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꿀꺽 삼키고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젠장. 특종도 아닌데 기사는 왜 이렇게 빨리 달라는 거야? 이 전시회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유성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월급은 얼마 주지도 않으면서 더럽게 부려먹네.’

자기가 받는 월급을 떠올리니 새삼 그림값이 눈에 대문짝만하게 부각되었다.

‘한 점에 이천. 75점이면 십오억. 이번 전시로 칠억 오천을 번 거네? 이거 장난 아니잖아? 대체 어떻게 75점이 완판된 거야? 인맥이 아무리 넓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신인화가의 개인전은 보통 인맥에 의해 작품이 판매된다. 몇 년간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며 신인 티가 벗어나야 컬렉터가 관심을 갖고 구매를 고려하기 마련이다.

눈앞에서 빨간 스티커가 붙어 있는, 한 점에 2천만 원 하는 그림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위축되었다.

7억 5천이면 자기 연봉의 열 배가 넘는 거금이었다.

언론에서 ‘열다섯 개의 시선’ 전을 다루기 전, 오프닝 날 전시 작품이 완판됐다는 글을 읽었다. 언론 기사와는 상관없이 이미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친구였다. 인터뷰 하자면 감지덕지하는 무명작가가 아니라 인터넷 기사에 연연할 이유가 없는 존재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이강수의 건방진 태도에 기분 상했던 유성길은 엄청난 그림값과 작금의 상황을 따져보고 이강수의 태도가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 있었다는 글이 있지만, 이강수야말로 그런 친구잖아? 11월, 12월에 전시가 있다고 했으니까 그때도 지금처럼 성공할지 궁금하군.’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한 유성길은 긴 한숨을 내쉬고 카메라를 들었다.

유성길과 인터뷰를 끝내고 책상에 앉은 강수는 접이 의자에 앉아 있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학생, 이름이 뭐지?”

“안녕하세요? 전 김다린이에요.”

김다린은 팔꿈치를 가리는 라운드 반팔티에 대님 바지를 입었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질끈 묶어 머리 뒤로 넘겼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고 귀여운 외모의 여학생이었다.

“다린 학생? 만나서 반가워.”

‘전 아저씨 팬이에요. 아저씨 그림이 너무 좋은 거 같아요.’

김다린은 목청껏 팬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속으로 외쳤다.

김다린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강수의 얼굴을 살며시 쳐다보았다.

‘와, 잘생겼다! 키도 크고. 그림 그리는 화가 맞아?’

화판에 도화지를 끼운 강수는 김다린을 마주 보며 얼굴의 특징을 캐치하고, 머릿속에서 김다린의 초상화를 형상화했다.

강수와 눈이 마주친 김다린이 몸에서 전기가 한 줄기 꿰뚫고 흐른 것만 같아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콩닥콩닥 뛰었다. 김다린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김다린을 가만히 지켜보며 머릿속에서 형상화 작업을 끝낸 강수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 색연필을 집었다.

김다린은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강수의 손을 바라보았다.

동영상에서 이강수의 손은 마치 프로그래밍 된 기계손처럼 환상적인 속도로 움직였다. 어떤 댓글은 편집 영상이라고 했지만 자기가 관찰한 바로는 편집 영상이 아니라 실제로 빠른 손놀림이었다.

어쨌든 그 논란이 판명나는 순간이었다.

스윽, 스윽!

천천히 움직이던 강수의 손이 점차 빨라졌다.

스스스슥, 스스스슥!

‘아!’

김다린이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이강수의 손이 동영상에서 본 것처럼 환상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색연필이 지나간 자리에는 색깔이 찬란하게 빛나는 꽃처럼 피어났다. 김다린은 넋을 놓고 도화지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꽃 같은 그림을 바라보았다.

-나팔꽃을 닮은 김다린 학생에게-이강수 2021. 9. 11

도화지 왼쪽 아래 공간에 한 줄 멘트와 사인을 한 강수가 초상화를 김다린에게 내밀었다.

“다린 학생, 수고했어.”

“예? 아. 가, 감사합니다.”

접이 의자에서 발딱 일어선 김다린이 넙죽 인사하고 강수가 내민 초상화를 받았다. 김다린이 강수를 힐끔 쳐다보곤 안타까운 얼굴로 뒤에 줄 서있는 사람을 위해 자리에서 떠났다.

전시장 밖으로 나온 김다린은 즉시 근처 화방으로 달려갔다.

“아저씨, 이 초상화 넣을 액자 있어요?”

50대의 화방 주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허허. 지금부터 또 시작이구나. 거기 샘플 보렴. 어떤 거로 줄까?”

“액자 사러 많이 와요?”

“그럼. 선암갤러리에서 캐리커처 행사하는 날에는 수십 명도 넘게 오지. 화요일에 행사가 끝난다고 하는데 좀 아쉽구나.”

“헤헤. 그렇구나.”

화방 주인이 가리키는 곳에는 초상화 크기에 맞는 샘플 액자 10여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김다린은 그 가운데 프레임 테두리가 좁고. 깊이가 있어 입체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심플한 원목 액자를 택했다.

“이 액자에 넣어 주세요. 얼마예요?”

“그건 팔만 원이란다.”

“예? 파, 팔만 원이요? 저기, 제가 학생이라 조금 깎아주시면 안 돼요?”

팔팔하던 김다린이 갑자기 죄를 지은 것처럼 기어들어 가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화방 주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학생이란 말이지. 할 수 없지. 육만 원만 내거라.”

“와아, 감사합니다.”

화방 주인이 액자에 초상화를 능숙하게 맞춰 넣은 후 박스에 포장해서 김다린에게 주었다. 액자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온 김다린은 선암갤러리 입구에 늘어서 있는 캐리커처 행사 줄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절로 웃음이 걸렸다.

“일찍 와서 대기하길 잘했다. 한 시간만 늦었어도 이 멋진 초상화를 못 받을 뻔했잖아. 이제 집에 가서 이강수 아저씨한테 초상화 받았다고 글 올려야지.”

액자를 옆구리에 낀 김다린은 종각역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

9월 14일.

인터넷상에서 뜨거운 관심을 모은 이강수의 ‘열다섯 개의 시선’ 전이 끝났다.

캐리커처 사인회로 촉발된 이강수의 전시회 소문은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었고, 숫한 화제를 뿌렸다.

전시회 오프닝 날 전시 작품의 완판, 75점의 그림값 15억, 해왕식품 서준홍 회장의 군마 15점 구매, 박윤재 관장의 컬렉팅, 박해나, 김이연, 김종대 등 신진화가의 캐리커처 행사 참여, 2주간 3만여 명에 이르는 관람객의 방문 등 연일 인터넷을 달구었고,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도 두 차례나 등장했다.

전시 작품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져 수많은 네티즌이 찍은 작품 사진이 인터넷 카페와 SNS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비록 공중파 방송이나 종편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열다섯 개의 시선’ 전은 네티즌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고,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또한 ‘열다섯 개의 시선’ 전은 선암갤러리 개관 이래 가장 많은 관람객을 맞이한 전시회로 기록되었다.

이날, 전시회가 끝난 오후 7시에 세 대의 탑차가 선암갤러리 앞에 섰다.

탑차 한 대는 군마 15점을 실었고, 다른 탑차 한 대는 박윤재가 컬렉팅한 16점을 싣고 떠났다. 마지막 탑차는 이필성이 구매한 16점을 싣고 떠났다.

선암갤러리에서 배송하기도 전에 전시회가 끝나자마자 구매자가 즉시 구매한 작품을 수거해 간 것이다.

세 대의 탑차가 떠난 뒤, 선암갤러리 1층, 2층 전시장은 밤늦도록 불이 밝혀 있었다.

조창석 관장을 비롯해 선암갤러리 전체 직원이 명일 구매자에게 작품을 발송하기 위해 작품을 포장한 것이다.

이렇게 조용하게 시작된 강수의 두 번째 개인전은 마치 흥겨운 한마당 축제처럼 화려하게 타오른 후 막을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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