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35회
장영봉은 6시에 30명까지 순번표를 나눠주고 줄 선 100여 명의 관람객에게 양해를 구했다. 캐리커처 받으려고 줄 섰으나 순번표를 받지 못한 관람객은 아쉬운 표정으로 흩어졌다.
선암갤러리는 규정대로 폐문 30분 전, 6시 30분에 관람객 입장을 통제했고, 7시에 클로즈 표지판을 걸었다.
캐리커처 사인회가 끝난 후, 강수가 스마트폰을 조작하고 있는 김종대에게 다가가 고마움을 전했다.
“종대야, 수고했다. 힘들었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은 종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야 뭐 쉬엄쉬엄 그렸지만 넌 아주 미친 듯이 그리더라. 그렇게 무리하다 팔목 나가는 수 있어. 조심해라.”
강수는 1시간에 한 번씩 회복마법을 캐스팅해 손목이 무리 가지 않게 치유했다.
강수가 팔을 가볍게 흔들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 정도는 괜찮아. 내일도 도와주면 좋겠는데 시간 되냐?”
“프리랜서가 시간 되지 안 되겠냐? 내일은 동석이도 데리고 올 테니까 좀 천천히 그려라.”
“알았다. 한데 동석인 요즘 작품 한다고 바쁘던데 시간 날까?”
“그 녀석이 너한테 신세진 게 얼만데 바빠도 와서 도와야지.”
“동석이가 나한테 신세 진 게 뭐가 있다고. 행여나 동석이 앞에서 그런 소리 마라. 서운해 한다.”
“크- 그런 말로 서운해할 놈이 아니니까 신경 쓸 것 없어.”
장영봉이 환한 얼굴로 강수에게 다가왔다.
“둘 다 밥도 못 먹고 캐리커처 행사하느라 고생했어. 약속 없으면 식사하러 가자.”
“아, 주하하고 지연 씨가 곧 올 텐데 같이 가시죠?”
“주하 씨, 지연 씨가 오는군. 좋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출입문을 열고 두 미녀, 화사한 원피를 입은 주하와 투피스 정장 차림의 임해영이 들어왔다.
“강수오빠!”
강수에게 안길 듯이 달려온 주하가 아쉬운 표정으로 강수 앞에서 멈춰 섰다.
항상 쾌활하고 얼굴에 구김이 없는 주하를 보며 장영봉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예쁜 얼굴에 성격도 밝고. 강수와 잘 어울리네.’
주하가 장영봉과 김종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지연언니는 아직 안 왔나 봐요?”
“네. 근처에 왔다고 문자 왔어요. 식당 가서 알려주면 그리로 곧장 올 겁니다.”
“그럼 우리 나가요. 식당은 제가 알아 놨어요. 월미정이라고 한정식 맛있게 한대요. 거기로 가요.”
“월미정?”
장영봉이 월미정을 아는지 흠칫 놀라서 중얼거렸다. 월미정은 고급 한정식집으로 음식값이 1인당 15만 원이나 한다. 평범한 월급쟁이는 법인카드 쓰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음식점이었다.
‘내가 안 내면 주하 씨가 내겠지?’
김주하 집안이 부자인 것은 짐작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장 나이어린 김주하가 음식값을 내게 할 수는 없었다.
‘회사 카드 써야겠군.’
20대 중후반의 젊은 직원 둘이 장영봉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장 부장님, 전시장 정리 끝났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퇴근해.”
“예, 내일 뵙겠습니다.”
“이 작가. 나는 당직자보고 갈 테니까 먼저 출발해. 그리고 오늘 저녁은 법인카드로 살 테니까 먹고 싶은 거 부담 없이 시키도록 해.”
“와아, 감사합니다.”
김주하가 손뼉 치며 폴짝폴짝 뛰었다.
“선배님, 빨리 오십시오. 주문해 놓겠습니다.”
“알았어. 금방 가겠네.”
강수 일행이 전시장 밖으로 나갔다.
*
이강수의 ‘열다섯 개의 시선’전에서 캐리커처 사인회 행사가 열리고 있다는 소문은 SNS와 인터넷 각종 매체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림이 몇 개의 선으로 그린 단순한 캐리커처였으면 네티즌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각종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온 인증샷의 캐리커처는 초상화나 다름없는 멋진 그림이었다. 그리고 이날 밤 유튜브에 게시된 ‘인간 아닌 안드로이드 손?’이라는 동영상이 논란을 일으키며 조회 수가 급증했다.
‘인간 아닌 안드로이드 손?’은 강수의 캐리커처 사인회 행사를 찍은 동영상이었다.
강수가 캐리커처 그리는 모습을 담고 있는 그 영상에서 강수의 빠른 손놀림은 언뜻 보면 3, 4배속 동영상으로 보인다.
동영상에 댓글이 줄줄이 달리기 시작했다.
-설까치: 4배속으로 돌린 거 아님?
-hawk: 당근 4배속이네. 안드로이드 손은 무슨? 어그로도 어지간하다.
┗Ylike @hawk 잘 보면 모델하고 화가 움직임은 정상인데 손만 빠르게 움직이잖아. 눈 좀 크게 뜨고 봐라.
┗skypack: 손만 빠르게 움직인다? 그럼 편집 영상이잖아?
┗Itbub @hawk: 모델 움직임은 정상 아닌가? 편집 영상 아닌 것 같다.
-LioLX: 행사장에서 직접 본 내가 진실을 말해주지. 한마디로 위 영상은 4배속 편집 맞음. 인간이 저렇게 그릴 수 없는 건 상식 아니냐?
┗seyeon @LioLX: 행사장에서 봤다고 하면 누가 믿을 줄 아나 보지? ㅂㅅ꼴깞하네.
┗taeilkim @LioLX: 이번 주 ‘한 주간 문화계 소식’ 봐봐. 거기서도 똑같은 속도로 그리니까. 검색하면 나와.
┗페이퍼왕: 헬조선에서 상식은 오래전에 해외로 출장 갔다.
┗바그라: 크크. 맞아, 맞아. 이 땅에서 상식은 실종됐지. 부정할 수가 없네.
-dayMAC: 행사는 내일도 한다고 하더라. 댓글로 헛소리 말고, 궁금하면 직접 가서 확인해라.
-seaHa씨하: 와, 이건 캐리커처가 아니라 초상화인데. 퀄리티 장난 아니다. 내일 가서 나도 받아야지.
-Amyjo: 캐리커처? 노노. 완전 초상화네. 근데 초상화가 신박하다?
-호그TUBE: 그림이 왜 이리 좋아? 나도 초상화 받고 싶다. 일 끝나고 가봐야겠슴.
-구심우: 이게 조작 영상 아니면 현실적으로 저렇게 빨리 그릴 수 있는 사람 있나요?
┗고승혁 @구심우: 빨리 그릴 수는 있겠지. 다만 영상 속 수준의 그림은 불가능에 가까울 듯.
-RiRiRi: 시바, 그림의 신이네. 아니 캐리커처의 신인가?
┗beargram: 미래 진화 인간의 손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음.
-gaegufil: 전시장에 갔다 온 1인이다. 캐리커처 그리는 화가는 둘이야. 근데 줄서 있느라 그리는 건 못 봤다.
┗pullup @gaegufil: 뭔 소리? 님, 바보?
┗SC공신: 화가가 두 명이라고요? 이강수 화가 개인 전시회 아닌가요?
┗gaegufil @SC공신: 이강수 전시회 맞고요, 캐리커처 행사는 이강수 화가와 친구로 보이는 화가가 한 명 더 있어요. 그래도 줄이 너무 길어서 캐리커처는 못 받고 말았죠.
┗SC공신 @geagufil: 대체 줄이 얼마나 길기에 그래요?
┗gaegufil @SC공신: 100명이 넘음. 캐리커처 받으려면 4시까지는 가야해요.
┗SC공신 @geagufil: 감사요~
-hutgaeBi: 쓰잘 데 없는 댓글 집어치우고 밑으로 다 버로우해.
┗메테오: 이건 뭐야?
┗haelangdal: 관종이잖여.
다음 날 일요일.
이강수의 ‘열다섯 개의 시선’ 전시 나흘째다.
이른 아침부터 선암갤러리에 관람객이 찾아왔다. 작품은 오프닝 날 완판됐지만 관람객의 전시장 방문은 작가의 인기를 대변하는 잣대나 다름없다. 관람객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작가의 명성과 인기가 높아진다.
오후 들어 관람객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1, 2층 전시장이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전시장을 둘러보던 장영봉이 미간을 좁혔다.
‘오늘은 상황 봐서 관람객 입장을 통제해야 하나?’
관람객 입장을 통제하는 사태가 일어나리라곤 상상해 본 적이 없거니와 다른 갤러리 전시회에서도 관람객을 통제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인류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화가의 전시는 줄 서서 전시장에 입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데 신인화가의 전시에 줄 서서 입장하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장영봉은 관람객이 몰려들면 통제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오늘은 이동석까지 캐리커처 행사에 참석한다고 했지?’
장영봉은 스마트폰을 꺼내 전시 담당 직원에게 전화했다.
[예, 부장님. 말씀하세요.]
“명철아, 캐리커처 행사 준비해라. 그리고 행사장에 책상 하나 더 갖다 놔라. 오늘은 화가가 한 명 더 온다.”
[그럼 책상, 의자 3조네요?]
“맞아. 화구까지 지금 설치해.”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북적거리는 전시장을 돌아보던 장영봉은 뜻밖의 인물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박해나, 김이연?’
한국 미술계의 신진작가 가운데 선두에 있는 두 명의 기대주 박해나와 김이연이 관람객 사이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긴 팔 셔츠에 바지를 입은 마른 몸매의 박해나는 갤러리윤 전속화가고, 고급스러운 투피스 차림의 김이연은 이오갤러리 전속화가다.
고등학교 동창인 두 사람은 한마디로 절친이었다.
장영봉이 둘에게 다가갔다.
“박해나 작가, 김이연 작가!”
박해나와 김이연이 고개를 돌려 장영봉을 보고 동시에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보네. 반가워."
김이연이 주변을 둘러보며 경탄했다.
“와, 전시장에 북적이는 관람객보고 깜짝 놀랐어요. 75점이나 되는 그림도 완판되고, 전시회 대성공인데요.”
“첫 번째 개인전도 완판됐다고 들었는데 두 번째 개인전도 완판이네요? 축하드려요, 장 부장님.”
“하하. 고마워.”
“이강수 씨, 그림 좋은데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림이 말을 거는 것 같아요. 진즉에 왔으면 한 점 구매할 걸 너무 늦게 왔어요. 아쉽다.”
김이연은 작년 선암갤러리에서 이강수의 그림을 보고 꽤 놀랐었다. 무엇보다 ‘눈물’이라는 작품에 시선을 뺏겼는데 그림의 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흑인 아이의 신비롭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과 삶에 대한 긍정과 희망을 꿈꾸는 표정이 뇌리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 이후로 해외 전시 때문에 바쁘게 작업하느라 이강수에 대해 잊고 있다가 이번에 박해나의 연락받고 관람 오게 되었다.
전시된 작품을 살펴본 김이연은 신선한 충격에 몸을 떨었다.
똑같은 그림을 채색만 다르게 해서 열다섯 개나 그릴 수 있다니!
이런 작업을 못 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작가는 실패가 두려워서 하지 못한다. 이강수의 과감한 시도에 놀랐고, 각각의 그림이 독특한 채색과 붓터치에 의해 다른 생명체처럼 살아있음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일란성 쌍둥이가 생김새는 같아도 영혼의 빛깔이 다른 것처럼 각각의 그림이 자기만의 색깔로 형상화되어 있었다.
“해나 씨가 보기에도 괜찮아?”
얼음 미녀처럼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박해나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훌륭해요. 국내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좀 아깝네요.”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올해까지는 국내 전시가 꽉 차 있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할 예정이야.”
“그래요. 빨리 해외로 나가는 것이 강수 씨한테 나을 거예요.”
김이연이 궁금한 점이 있는지 장영봉을 불렀다.
“참, 장 부장님. 오늘 캐리커처 사인회 있다는 얘기 들었는데 몇 시에 행사 시작해요?”
“네 시에 저기에서 시작해. 직원이 행사 준비하고 있네.”
장영봉이 가리키는 곳에는 선암갤러리 직원 둘이 책상을 나르고 있었다.
“근데요 강수 씨 캐리커처 그리는 영상 봤거든요. 손놀림이 너무 빨라서 놀랐어요. 캐리커처도 단순한 캐리커처가 아니라 꽤 정밀한 초상화더라구요?”
박해나도 질문을 던졌다.
“캐리커처 받으려는 사람 많지 않아요? 영상 보면 줄을 길게 섰던데요?”
“많지. 그래서 오늘은 김종대, 이동석도 캐리커처 그려준다고 했어. 한데 김이연 씨 말처럼 캐리커처가 아니라 초상화 수준이라 그려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박해나가 불쑥 말했다.
“그럼 저도 도와줄까요?”
뜻밖의 제안에 장영봉이 흠칫 놀라 박해나를 바라보았다.
“응? 해나 씨가? 물론 도와주면 고맙지.”
박해나의 돌발적인 제안에 김이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나야, 뜬금없이 무슨 초상화 그린다고 그러니?”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사람 얼굴 안 그려본 지 3년은 된 것 같거든? 오랜만에 너도 초상화 그려봐. 아예 작품에 물건만 넣지 말고 두상도 넣어보는 건 어때?”
김이연은 풍경화에 문명의 이기를 절묘하게 매치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그녀는 근래 들어 회화에서 설치미술로 작품 세계를 확장하고 있었다.
“두상을 넣으라고?”
무심코 던진 박해나의 한 마디가 김이연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녀의 뇌리에서 풍경화 속에 사람 두상이 들어간 형상이 그려졌다.
“음.... 그거 괜찮네? 장 부장님, 저도 초상화 그려도 되나요?”
“어? 그, 그야 물론 김이연 씨가 초상화 그려주면 정말 고맙지.”
“좋아요. 그럼 저도 그리겠어요. 제 자리도 마련해 주세요.”
“알았어. 당장 책상 더 준비하라고 할게.”
장영봉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지체 없이 작업하고 있는 직원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