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34화 (134/197)

# 134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34회

강수는 강승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는 세 번 만에 끊기고 반가움이 묻어 있는 강승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작가님, 강승호입니다. 무슨 일인지요?]

“시리즈물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시리즈물 기획서와 자료 살펴보고 싶은데요, 메일로 받아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지금 당장 보내드리겠습니다. 오분쯤 후에 확인해 보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책상에 앉은 강수가 컴퓨터를 켰다.

부팅 화면이 뜨고, 초기화면이 나왔다. 약간 뜸을 들인 강수는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강승호 팀장이 보내준 자료를 내려받아 프린팅했다.

위잉-

프린터가 돌아가며 자료를 토해냈다.

강수를 지켜보던 서혁중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무슨 자룝니까?”

“후후, 너희들이 원하는 일감이지.”

서혁중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그렇습니까?”

강수가 프린팅된 자료를 훑어본 후 서혁중과 고원철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멸종 동물을 지켜라!’ 그림동화책 시리즈물 기획서와 자료다.”

“멸종 동물을 지켜라요?”

“그래. 이게 무슨 기획인가 하면....”

강수는 무지개출판사와 그림동화책 시리즈물 내기로 한 사정을 얘기해주었다. 강수 얘기를 들으며 기획서를 살핀 서혁중과 고원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너희가 이 시리즈물을 맡아서 하면 고맙겠다. 프린트 물을 보면 알겠지만 자료가 충실해서 이야기 짜는데 어렵지 않을 거다.”

서혁중과 고원철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전 동화를 써 본 적이 없는데요.”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나도 작년에 동화란 걸 처음 써 봤거든. 안 써봤다고 못 쓰는 건 아니더라. 무지개출판사 편집기획팀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내 힘으로 동화를 썼어.”

강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 앞으로 가서 책 두 권을 꺼냈다.

“너희보고 완성된 이야기를 쓰라는 거 아냐. 초고를 써서 무지개출판사 편집기획팀에 보내면 편집기획팀에서 검토해서 줄거리나 대사, 캐릭터 성격 등 전반적으로 조언해 준다. 나도 편집기획팀이 도와줘서 작년에 처음 동화라는 걸 써 본 거야. 그래서 베스트셀러가 됐잖아.”

강수가 서혁중과 고원철에게 한 권씩 나눠 주었다.

“순수 문학 소설도 아니고 어린이들이 읽는 그림동화책이라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이건 내가 쓴 ‘벙어리 황구 죽돌이’와 ‘공주를 구해줘!’ 그림동화책이다. 이런 느낌으로 쓰면 돼. 한번 읽어봐라.”

곤혹스러운 눈길을 주고받은 서혁중과 고원철이 그림동화책을 받아 훑어보기 시작했다.

강수는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두시군.’

3시에는 작업실을 나서야 선암갤러리에 4시 전에 도착한다.

어제는 관람객 위주로 캐리커처 사인회를 진행해서 줄이 길지 않아 손쉽게 행사를 끝낼 수 있었다. 폐문하는 오후 7시까지 캐리커처를 진행했고 60여 명을 그렸다. 캐리커처를 넘어선 초상화 수준의 그림이기 때문에 관람객은 좋아했지만, 60여 명이 한계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잠시 후 그림동화책을 읽은 서혁중과 고원철이 고개를 들었다. 둘의 얼굴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고 있는 듯한 고뇌의 빛이 어려 있었다.

서혁중이 볼멘소리를 했다.

“선배님, 이거 장난 아니잖아요?”

“뭐가?”

“벙어리 황구 죽돌이처럼 감동적인 글을 어떻게 쓰라고요? 공주를 구해줘는 교훈적인 내용에 스릴 넘치는 모험 이야기고요.”

고원철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두 권 다 베스트셀러였지. 책을 잘못 줬네.’

두 권은 지금도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비록 어린이가 보는 그림동화책이지만 베스트셀러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림도 훌륭해야겠지만 이야기 속에 마음을 울리는 감동과 재미, 지혜나 교훈 같은 내용이 없으면 어떤 책이든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는다.

강수가 얼른 해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내 동화책은 그냥 참고만 하라는 거야. 그리고 그 그림동화책은 무지개출판사 편집기획팀에서 몇 차례에 걸쳐서 수정, 보완해준 거다. 그보다 멸종 동물을 지켜라 시리즈물은 컨셉이 달라. 너희 만화 천자문 같은 학습 만화 본 적 있냐?”

“있죠. ‘만화 한국사’, ‘한국의 위인 33인’ 같은 학습 만화는 초등학교 다닐 때 많이 봤죠.”

“바로 그거야. 멸종 동물을 지켜라 시리즈물은 그런 학습 만화 컨셉이라고 보면 돼. 단지 멸종 동물을 소재로 삼고, 그림동화 형식을 빌린 것이 차이일 뿐이지. 기획서 보면 시리즈물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풀어놨잖아. 그 방향성을 토대로 이야기 뼈대를 세우고, 서너 가지 에피소드를 구성해서 이야기를 꾸미면 될 거다. 어때? 해볼 만하지 않겠냐?”

서혁중과 고원철이 서로 쳐다보았다.

“원철아, 할 수 있겠냐?”

“글쎄, 출판사에서 도와준다니까 할 수는 있겠지?”

“그럴까?”

“하하. 잘 생각했다. 참, 출판사하고 계약할 땐 매절로 하지 말고 인세로 계약해라.”

강수의 말에 고원철이 의문을 제기했다.

“근데 출판사에서 기획하고 자료까지 전부 준비했는데 일러스트와 관련 없는 우리한테 일을 줄까요?”

“맞아. 출판사에서 우리와 계약할까요? 원래 선배님과 계약하려고 한 거 아닙니까?”

“그건....”

강수도 거기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강승호에게 두 후배를 추천하겠지만 결정은 출판사에서 할 것이다.

“내가 출판사하고 얘기해서 알려줄 테니까 연습한다고 생각하고 한 권씩 스토리 짜 봐. 난 전시장에 가봐야겠다.”

“알겠습니다.”

“예, 선배님. 수고하십시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 강수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켰다. 스마트폰을 핸즈프리에 올려놓고 강승호에게 전화했다.

차의 스피커에서 강승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 작가님, 보낸 자료는 보았습니까?]

“네. 그것 때문에 팀장님과 상의할 것이 있어 전화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오픈식 날 제 작품을 도와준 고원철과 서혁중이라는 두 후배를 소개했었는데 기억나는지요?”

[예. 기억납니다. 한데 두 후배는 무슨 일로?]

“강 팀장님, 제가 요즘 회화 작업이 많아서 좀 바쁩니다. 그래서 멸종 동물을 지켜라 시리즈물을 두 후배가 맡아서 하면 어떨까 싶어요. 두 후배의 그림 실력은 저 못지않다는 건 보증하죠.”

[아, 그게....]

가벼운 탄식과 함께 강승호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지하주차장에서 빠져나와 도로에 접어든 강수는 강승호가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잠자코 기다리며 운전했다.

잠시 침묵한 강승호가 생각을 정리했는지 스피커에서 그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 작가님 작품을 도와줄 정도면 일러스트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요. 다만 그림동화책은 그림 못지않게 이야기도 중요합니다. 또한 네임 벨류도 어느 정도 판매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검증되지 않은 작가와 시리즈물 하는 건 조금 무리 같습니다.]

“음, 그런가요?”

실망스러운 강수의 어조에 강승호가 재빨리 이어 말했다.

[이 작가님이 회화 작업 때문에 바쁘면 공동 창작하는 건 어떨까요?]

“공동 창작이요?”

[두 후배와 이 작가님이 함께 작업하는 것이죠. 예를 들면 두 후배가 작업한 결과물을 이 작가님이 마지막으로 검토, 보완하는 거죠. 출판도 공동 저자로 나가고요.]

“공동 저자요? 만약에 제가 보완할 내용이 없어도 공동 저자로 나갑니까?”

[이 작가님이 최종적으로 검토하기 때문에 공동 저자로 나가죠.]

강수는 강승호의 의도를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강승호는 네임 벨류가 필요한 것이다. 강승호의 의도를 떠나서 자기 이름이 그림동화책의 공동 저자로 나가면 그림동화책에 책임을 져야 한다. 공동 저자로서 자기도 무책임할 수 없다.

“알겠습니다. 후배들과 얘기해보고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강수는 강승호의 입장을 이해했다. 편집기획팀에서 머리를 맞대고 짜낸 기획이고, 시간을 들여 준비한 자료다. 무명 작화가에게 섣불리 맡길 수는 없을 것이다.

‘별수 없네. 강 팀장 말대로 혁중이와 원철이에게 맡기고 난 최종 검토만 해야겠다.’

차를 몰아 인사동 인근 유료주차장에 차를 댄 강수는 주차장 밖으로 나와 선암갤러리를 향해 걸어갔다.

낙원상가를 지나가던 강수는 위에서 들리는 떠들썩한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네 명의 청소년이 웃고 떠들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반팔 티에 진이나 독특한 스타일의 셔츠와 팬츠를 입었고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들인지 기타를 맨 학생도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도 잘생긴 아이들이라 아이돌 지망생일지도 몰랐다.

‘음악 하나? 생김새를 보면 아이돌 해도 되긴 하겠다. 저 녀석은 위험하게. 앞을 보고 내려오지.’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양식을 본뜬 디자인의 티셔츠를 입은 아이가 뒤를 보고 내려오고 있었다. 일정한 패턴으로 내려오는 계단이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조금 위험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강수가 그 자리에 서서 학생들이 계단을 다 내려올 때까지 지켜보았다.

뒤를 돌아본 학생이 친구들에게 말했다.

“참, 얘들아. 바로 옆이 인사동인데 선암갤러리 가지 않을래?”

“선암갤러리는 왜? 거기 가 봐야 따분한 그림밖에 더 봐?”

“너 그림에 관심 있냐?”

“주연이한테 들었는데 이강수란 화가가 캐리커처 그려주는 행사한대. 근데 캐리커처가 그냥 캐리커처가 아니고 초상화 수준이야. 화가가 공짜로 초상화 그려준다는데 받으면 좋지 않겠냐?”

“이강수? 이강수가 누군데?”

“야,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한 무명화가가 그려주는 초상화가 무슨 가치 있겠냐? 어차피 나중에 쓰레기통으로 사라질 텐데 그거 받아서 뭐해.”

듣고 있던 강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명화가. 뭐, 틀린 말 아니지.’

예술이나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조차 자기를 알아볼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학생이 자기를 알 리 없다.

하지만 무명화가 그림을 무시하는 녀석의 말은 괘씸했다. 알려지지 않고, 누군가의 선택을 받지 못했을 뿐 무명화가의 그림이라고 무가치하지 않다.

“무명화가 아니야, 임마. 이강수 요즘 뜨는 화가야. 너희들 핑크티티 초상화 본 적 있지?”

“봤지. 난 티도 하나 있는데.”

“핑크티티 초상화 그린 화가가 이강수야. 주연이가 이강수 화가가 그렸다는 자기 초상화 보내줘서 봤는데 그림에 느낌 있어. 뭔가 독특하더라.”

“그래? 핑크티티 초상화 그린 화가였어? 그 화가인 줄은 몰랐네.”

“딱히 할 것도 없는데 한번 가보자. 그림도 보고.”

“그럴까?”

키 크고 날렵한 체격의 아이들이 인사동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강수는 아이들 뒤를 따라가며 피식 실소를 지었다.

‘핑크티티가 잘나가는구나. 덕분에 초상화 그린 나까지 관심받는군.’

선암갤러리에 도착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강수는 전시장을 가득 메운 북적이는 인파에 살짝 놀랐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입구에서 서성이던 장영봉이 복잡한 표정으로 강수를 맞이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이 작가, 어서 오게.”

“관람객이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네요? 방송 여파인가요?”

“그러겠지. 오전에는 덜 했는데 갈수록 관람객이 몰려드네. 게다가 벌써 캐리커처 행사 언제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태반이야. 캐리커처 행사 시작하면 사람이 몰릴 것 같은데 좀 걱정이네. 캐리커처 행사한다고 방송에 내보낸 것이 실수 같아.”

순수 관람객으로 보기 힘든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전시장을 가득 매웠다. 역시 방송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빠른 손놀림으로 캐리커처 그리는 장면이 시청자의 눈길을 끈 것이 틀림없었다.

“어쩔 수 없죠. 여섯 시에 인원 점검해서 20명만 남겨 놓고 양해를 구해야죠. 선배님, 사인회 진행할까요?”

“알겠네. 행사 준비하지.”

장영봉은 직원을 시켜 1층 전시장 한쪽에 캐리커처 행사용 책상과 접이 의자, 화구를 준비했다. 전시장 한쪽에 책상이 놓이자 관람객이 술렁였다.

“야, 캐리커처 시작하려나 보다. 줄 서자.”

“사람 디게 많네. 얼른 서자.”

행동이 재빠른 젊은 친구들 위주로 책상 앞에 줄을 섰다. 줄은 그림 감상에 방해되지 않게 출입구 방향으로 만들어졌다. 몇몇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보고 줄서기에 동참했다. 줄은 빠르게 늘어났다.

줄 선 사람을 대충 세어본 강수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시작도 안 했는데 50명이네. 벌써 50명이면 어떡하라는 거야?’

뒤에 줄 선 사람은 자기 순서가 될 때까지 1시간, 길게는 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아마도 줄은 갈수록 길어질 것이다.

‘안 되겠다. 나 혼자 감당할 수 없겠어. 동석이는 학원 때문에 안 될 테고 종대라도 불러보자.’

강수는 스마트폰을 꺼내 종대에게 전화했다.

[나다. 무슨 일이냐?]

“종대야, 시간 있냐? 시간 있으면 나 좀 도와줘야겠다.”

느닷없이 종대의 호쾌한 웃음이 강수의 귓전을 때렸다.

[하하하. 캐리커처 때문이지?]

“윽! 정확하네. 네 말대로 사람 엄청나게 몰렸다. 혼자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겠어.”

[알았다. 택시 타고 갈 테니까 기다려라.]

“고맙다.”

전화를 끊은 강수는 장영봉에게 다가가 종대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실을 말했다. 그늘이 져 있던 장영봉의 표정이 밝아졌다.

“종대가 도와준다니 다행이다. 책상 하나 더 준비할 테니까 사인회 시작하자.”

“예, 선배님.”

강수가 책상에 앉았고, 장영봉이 줄을 선 사람들에게 캐리커처 사인회의 시작을 알렸다.

이날 캐리커처 사인회는 훈훈하고 부드러운 미풍처럼 소수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미풍이 돌풍으로 변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각종 미디어 매체와 SNS를 장식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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