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33화 (133/197)

# 133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33회

장영봉은 책상에 앉아 있는 사원 김윤경에게 다가가 새롭게 팔린 작품과 박윤재의 구매리스트를 주었다.

“윤경 씨, 이것도 부탁해.”

잠시 휴식하고 있던 김윤경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또요?”

“그래.”

“와, 이게 무슨 일이래?”

김윤경의 푸념 섞인 탄성에 실소를 지은 장영봉은 강수를 만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강수는 김주하, 김종대, 이동석, 서혁중 등과 함께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전시가 이렇게 성공했으니 즐겁지 않을 수 없지.’

이강수 개인전의 작품 판매는 선암갤러리에 경제적으로 엄청난 도움이 되었고, 자기 역시 인센티브로 강수의 작품을 구매할 수 있었다. 이강수를 보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걸렸다.

‘더구나 12월에 세 번째 개인전이 남아있지. 만약 10월 홍콩 경매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면 세 번째 개인전은 이번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겠지?’

세 번째 개인전에서는 100점이 넘는 작품을 출품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다수 작품이 30호 이하의 소품이라고 했지만, 호당 가격이 아니라 작품당 가격을 책정할 계획이었다. 박윤재의 컬렉팅으로 이강수 그림값을 최소 1.5배는 높게 책정할 수 있을 것이다. 10호 작품도 사오백만 원에 정할 수 있는 것이다.

흥겨운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은 장영봉이 강수 일행에게 다가갔다.

“여러분, 잠깐 실례합니다.”

“장 선배님? 어서 오세요.”

“이 작가 잠시 빌려도 될까요?”

주하가 상큼하게 웃었다.

“호호, 물론이죠.”

“이 작가. 잠깐 볼까?”

“네. 선배님.”

강수와 전시장 한쪽으로 간 장영봉이 물었다.

“자네 박윤재 관장 아나?”

“만나본 적은 없지만 들어서 알죠. 유명한 갤러리윤 관장님이잖아요?”

“맞아. 박 관장이 자네 그림을 10월에 열리는 와이옥션 홍콩에 출품하자는 제안을 해왔어.”

강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제 그림을 홍콩에서 경매에 올린다고요?”

“그래.”

“홍콩 경매에 제 작품이 출품되면 저야 좋지만, 박 관장님이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제 그림이 홍콩 컬렉터에게 어필할까요?”

“박 관장이 자네 작품을 홍콩 경매에 출품하려는 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네. 자네를 그만큼 높게 평가한 것이지. 하지만 박 관장이 자기 소속 화가도 아닌 무명에 가까운 자네를 선택한 건 사실 뜻밖의 일이긴 해.”

“저도 그 점이 믿기지 않네요.”

“아마 상하이에 출품한 작품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장영봉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트페어 상하이 출품 작품을 갤러리윤에 보낸 후 김이라의 전속작가 제의를 받았다. 김이라가 박윤재의 허락 없이 전속작가 제의를 할 리 없지 않은가?

“실은 홍콩 경매가 아니더라도 내년부터는 해외 유명 갤러리나 아트바젤 같은 아트페어에 자네 작품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진출하려고 했네. 홍콩 경매로 인해 해외 진출 시기가 조금 당겨진 것뿐이지.”

“어? 그랬나요?”

“그래. 박 관장도 언급했지만 자네 그림은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특별한 힘이 있어. 자네를 모르는 상하이 컬렉터가 자네 작품을 구매한 것도 그런 회화의 힘 때문이겠지.”

장영봉의 칭찬에 강수가 가볍게 웃었다.

“하하. 저는 잘 모르겠는데 과하게 평가해주시네요.”

“과한 평가 아니네. 자네 그림에 그런 힘이 없으면 지금처럼 죄다 팔릴 수 없었겠지.”

“아, 제 그림이 몇 점이나 팔렸죠?”

“지금까지 63점. 거의 다 팔려나갔어.”

“네? 벌써 63점이나 팔렸어요?”

“그렇긴 한데 약간 맹점이 있어. 서준홍 회장이 군마 15점, 이필성 사장이 각각 4점씩 16점, 박윤재 관장이 마찬가지로 16점. 결국 세 사람이 산 작품만 47점이야. 이 세 사람 빼면....”

나머지 구매자를 세어본 장영봉이 말했다.

“자네 작품을 산 다른 컬렉터는 12명이야.”

장영봉의 정확하게 구매자 수를 알려주자 강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될 수 있으면 많은 분이 제 작품을 소장할 수 있게 일부러 실크스크린 인쇄해서 한 작품을 15점씩 그렸는데 세 분이 3분지 2나 구매해버렸네요? 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는데요.”

“세 분은 일반 컬렉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예리한 안목을 가진 슈퍼 컬렉터라고 할 수 있네. 작품이 좋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투자하는 분들이지. 그만큼 자네 작품 수준이 높다는 방증이라네. 더구나 박윤재 관장의 컬렉팅으로 인해 자네 그림값이 크게 오를 것이네.”

“그러겠죠?”

고개를 끄덕이며 강수가 수긍했다. 박윤재 관장은 슈퍼 컬렉터다. 그의 컬렉션 대상 작가는 그림값이 높아진다는 것을 강수도 잘 알고 있다.

“참, 박 관장이 홍콩 경매에 3점을 준비해 달라고 하더군. 어때? 출품할 수 있나?”

잠시 염두를 굴린 강수가 대답했다.

“예. 출품할 수 있습니다. 한데 작품 제출은 언제까지죠?”

“경매는 10월 중순쯤이야. 정확한 날짜는 다시 알려줄 테니 3주 내로 제출할 수 있도록 준비하면 될 거야.”

이때, 장영봉의 스마트폰에서 컬러링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장영봉이 말했다.

“사무실에서 찾는군. 그럼 나는 사무실로 올라가 보겠네. 수고하게.”

“예. 선배님.”

장영봉이 떠난 뒤 강수는 자기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번 작품은 실크스크린 인쇄만 했을 뿐 채색을 달리해서 복제화도 아니고 개별 회화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평범한 일반 대중이 부담 없는 가격으로 자기 그림을 구매하려면 판화처럼 500점이나 1,000점씩 에디션 작품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에디션 작품은 당장 급한 것은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보자.’

강수는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금요일 밤 11시.

DBC 방송의 한 주간 문화계 소식이 방영되었다.

장영봉에게 방영 사실을 연락받은 강수는 아파트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미모의 여성 진행자가 다음 코너를 소개했다.

“이어서 나미연 리포터가 미리 보는 전시, 공연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나미연 리포터 나와 주세요.”

화면에 블루톤의 투피스 정장을 입은 나미연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DBC 방송 나미연 리포터입니다.”

“이번 주말에 가볼 만 한 전시, 공연은 무엇이 있을까요?”

“얼마 전 처서가 지났는데 아직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죠? 오늘은 잠시 더위를 잊고 예술의 향기를 느끼실 수 있는 전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나미연을 비추던 화면이 인사동 거리의 한 건물로 향했다.

“인사동 갤러리에서는 매주 다양한 전시가 새롭게 열리고 있는데요 이번 주에는 문화의 거리 인사동에서 독특한 미술의 세계를 감상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먼저 중견작가 황영태의 ‘관찰’ 전은 갤러리윤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미 십여 차례의 개인전을 통해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단단히 구축하고 있는 황영태 작가는 ‘관찰’전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하게 지나치며 놓치는 사소한 이미지를 화폭에 옮겨 놓았습니다. ‘출근길 신호등’, ‘회사원의 점심’ 등 그의 그림을 통해서 매일 의미 없이 지나는 것 같은 하루하루의 삶과 시간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화면이 새로운 전시를 보여주었다.

“설치미술가 성정수의 ‘머나먼 기억’ 전은 민화랑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는 70년대 서울 풍경을 7개의 미니어처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서울의 산동네 사당동 골목길 풍경, 동대문 평화시장, 청계천 봉제공장 미싱사 등 70년대 고난스러웠던 우리네 삶의 모습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리 먼 과거도 아니지만, 이제 서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시절, 그 풍경을 아득한 추억으로 재생해 놓았습니다.”

서울의 70년대 풍경을 비추던 화면이 선암갤러리 벽에 걸려 있는 이강수 개인전 현수막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젊은 화가의 전시회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걸그룹 핑크티티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로 널리 알려진 이강수 화가의 두 번째 개인전인데요, 선암갤러리서 ‘열다섯 개의 시선’ 전이 지난 수요일에 오픈식을 가졌습니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간 화면이 앞으로 나가며 15개의 군마가 차례차례 나타났다.

‘열다섯 개의 시선’ 전은 열다섯 개의 똑같은 그림을 각기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로 인해 파생된 다른 의미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똑같은 그림이 다른 시각을 통해 어떤 의미로 변화하는지 감상하는 것이 관람 포인트입니다. 참고로 이강수 화가가 전시 기간에 캐리커처 사인회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화면이 첫 번째 개인전 때 진행했던 캐리커처 사인회 장면을 보여주었다. 빠른 손놀림과 함께 도화지에서 꽃이 피듯 초상화가 그려지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전시 관람도 하고 운이 좋으면 화면에서 나오듯이 이강수 화가의 멋진 캐리커처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상 인사동에서 전시 소식을 알려드렸습니다.”

“나미연 리포터 전시 소식 잘 보았고요, 가볼 만 한 공연과 축제는 무엇이 있을까요? 마저 알려주시죠.”

“예. 서울 돈화문 국악당에서 전통 국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천년의 울림’ 공연이 열리고 있습니다....”

한 주간 문화계 소식은 매주 금요일 밤 방영되는 프로그램이다.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예술에 관심 있는 소수의 사람이 시청하는 프로여서 시청률은 2%대에 불과한 교양프로지만 전국 방송이다. 2%대의 시청률도 시청자 수로 계산하면 수십만 명이다. 비록 강수의 전시회 소개 시간은 1분 정도에 불과했지만, 전국 방송의 파급력은 무시할 수 없다.

우웅! 우웅!

미리 보는 전시, 공연 코너가 끝나자 강수의 스마트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종대군.’

이색지대 탐방 때처럼 수십 통의 축하 전화를 예상할 수 있었다.

[강수야, 네 개인전 소개한 DBC 문화계 소식에 봤냐?]

“나야 미리 연락을 받아서 본방 사수했지.”

[하하. 그랬구나. 방영될지 안 될지 모른다더니 방영 됐네. 그런데 캐리커처 사인회 한다고 나오더라. TV에서 그렇게 때리면 감당되겠냐?]

“오늘은 여유 있었는데 내일은 어떨지 모르겠다. 행사는 4시부터 하는데 어차피 폐문할 때까지 그릴 각오는 하고 있다.”

[참, 너도 사서 고생한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짧은 시간에 수많은 사람의 개성적인 얼굴 그리는 작업이 의외로 얻는 게 많더라. 너도 개인전 때 캐리커처 사인회 해봐라. 도움 될 거다.”

[그래? 도움이 된단 말이지? 생각해보지.]

“밤도 늦었는데 들어가라. 전화 계속 온다.”

[알았다. 전화 받는 것도 일이겠다. 고생해라.]

김종대와 통화를 끝낸 강수는 이후 수십 통의 전화를 받은 후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

마나회로 수련을 하고 작업실에 도착한 강수는 고원철과 서혁중의 환대를 받았다.

“어서 오세요, 선배님. TV에 나온 거 축하합니다.”

“선배님, 벌써 두 번이나 TV에 나온 거죠?”

“축하는 무슨. 지나가듯 소개해서 1분도 안 나왔구만.”

“시간이 뭐 중요한가요? 방송 탔다는 사실이 중요하죠.”

“맞아. 미리 보는 전시, 연극 코너에서 소개됐다는 건 보통 일 아니라고요. 선배님은 비주얼도 받쳐주겠다 이러다 방송국에서 패널로 초대하는 거 아닙니까?”

“방송국에서 날 왜 초대해? 불러도 안 가지만 황당한 소리 하지 마라.”

“방송 타면 좋죠. 백진원 보세요. 방송에서 뜨더니 재벌급 프랜차이즈 회사 회장님이 됐잖아요. 선배님도 그렇게 되지 말란 법 없지 않습니까?”

“방송 나온다고 전부 회장 되든. 그 기회를 살리고 성공하는 건 다 자기 능력 아니냐?”

서혁중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렇긴 하죠. 저기, 선배님.”

서혁중의 은근한 부름에 강수가 의아한 얼굴로 서혁중을 보았다.

“어? 왜?”

“저희 어떤 작업 하죠? 작업할 수 있게 일감을 주셔야죠?”

“일감?”

“네. 어제는 화구 정리하고, 작업실 청소했지만 오늘부터는 무슨 일을 할까요?”

“오늘부터? 가만, 오늘 토요일인데 너희 왜 나왔냐?”

헛기침한 서혁중이 능청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선배님 텔레비전 나온 거 축하하고 월요일부터 무슨 일 할지 물어보러 왔죠. 무슨 일을 하는지 미리 알아 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음....”

강수는 전시장에서 만났던 무지개출판사 강승호 팀장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두 번째 개인전이 끝나면 편집기획팀에서 기획한 멸종 동물을 지켜라! 시리즈물을 작업하기로 했다. 회화 그리는 데 바빠서 그림동화책 작업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차마 약속을 어기지 못했다.

‘마침 잘됐군. 개인전 끝날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원철이 하고 혁중이가 이야기도 짜고, 그림도 그리면 되겠어. 나는 마지막에 검토해서 수정하면 되고.’

강수가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고원철과 서혁중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일감 있지. 있고말고. 잠깐 기다려라. 전화 한 통 하고 얘기하자.”

강수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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