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32회
임해영은 처음에 이동석이 초능력자인지 궁금해서 만났다.
몇 번 만나서 테스트하며 주의 깊게 관찰해보았지만, 이동석에게서 초능력의 기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나중에는 둘 사이를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동석을 만났다. 그렇다고 둘의 만남이 깊은 관계는 아니었고, 썸을 타는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이동석은 한 달 전에 보았을 때보다 살이 빠지고 조금 핼쑥해 보였다. 당분간 작품에 매진한다고 했는데 핼쑥한 모습이 왠지 안쓰러워 보였다.
‘휴우. 한데 어쩜 이렇게 차이 날 수 있지?’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그림을 그려도 한 명은 밤하늘을 가르는 혜성처럼 빛나고, 한 명은 수풀에서 헤매는 반딧불이처럼 존재가 희미하다.
미술가로서 둘의 위치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만약 동석 씨가 평생 무명화가로 살아도 순수하게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많은 남자가 자기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대시했지만 냉정하게 거절했다. 이동석을 만나기 전까지 남자와 사귀지 않았다. 남자와 사귄 적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남자의 사회적 지위와 조건을 따질 일조차도 없었다.
이동석과 만나는 지금 이동석과 함께할지도 모르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동석의 맹목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마음은 잘 안다. 하지만 결혼은 두 사람의 결합만이 다가 아니다. 집안과 집안, 같은 공간에서의 생활, 아이의 양육 등 현실적인 문제를 헤쳐나가야 한다. 임해영은 그런 모든 것이 두렵고 자신 없었기 때문에 이동석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김주하의 목소리에 임해영이 상념을 멈췄다.
“동석오빠, 이제 보니 살 빠졌나 봐요? 수척해 보여요.”
김종대가 이동석의 어깨를 툭 쳤다.
“살 빠질 수밖에요. 동석이가 두 달 전부터 작품 한다고 밥 먹듯이 날밤 새우거든요.”
“어머, 그래요? 작품도 좋지만, 건강도 생각해야죠.”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작가마다 다르겠지만 작품이란 게 붓 들고 캔버스에 물감칠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 그렇겠죠?”
“창작 의욕이 타오를 때가 흔치 않거든요. 그래서 작품 아이디어가 샘솟듯 솟아날 때 날밤 새우면서 작품에 매진하는 거죠.”
“예술가는 다 그렇게 작업 하나요?”
“하하. 그건 작가마다 성향이나 기질에 따라 천차만별이죠. 직장인처럼 작업실에 출퇴근하는 작가도 있으니까요. 한데 강수는 슬럼프도 안 타나 봐요. 브레이크 없는 차처럼 질주하는데요?”
이동석이 옆에서 맞장구쳤다.
“이 자식은 그림 그리는 기계야. 첫 개인전 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두 번째 개인전을 여냐? 게다가 두 달 뒤에는 단체전에 참가 한다고 하는데 이건 창작 기계라니까. 주하 씨, 어때요? 강수 기계 인간같지 않아요?”
이동석의 너스레에 주하가 빽 소리 질렀다.
“기계라뇨? 전혀요. 강수오빠가 얼마나 부드러운 남자인데요.”
“하하. 주하 씨가 강수한테 단단히 빠졌네.”
“강수오빠 지금도 바빠요?”
“그럼요. 대학 동창에 선후배, 관람객에 컬렉터한테 둘러싸여 인사하느라 정신없어요.”
“그렇구나. 종대오빠. 오빠가 보기에 이번 전시 작품 어때요? 난 작품 하나하나 색감이 특이해서 무지 좋은데요.”
“두말하면 잔소리죠. 이건 무슨 색의 마법사가 칠한 것처럼 색채 감각이 너무 뛰어나요. 똑같은 그림을 다른 회화 작품처럼 칠해놨잖아요.”
이동석이 투덜댔다.
“그거참 이상해.”
“뭐가요?”
“강수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색채 감각이 형편없었거든요. 그래서 맨날 채색 어떻냐고 물어봐서 내가 이것저것 가르쳐주면서 면박주고 그랬는데 말이죠. 어느 날 갑자기 각성했는지 색깔의 마스터가 됐단 말이야?”
“네? 에이, 거짓말이죠?”
“진짜라니까요. 종대가 나보다 더 잘 알 걸요. 그렇지 종대야?”
“하하. 동석이 말이 맞긴 해요. 학교 다닐 때는 색채 감각이 평범했어요. 그래서 강수도 회화 포기하고 일찌감치 일러스트로 방향을 튼 거죠.”
주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색채 감각 같은 특이한 재능은 타고나는 건데 색채 감각이 어느 날 갑자기 좋아질 수 있는 건가요?”
김종대와 이동석이 서로 마주 보았다. 주하의 말이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둘의 얼굴에 의문의 빛이 어렸다.
이동석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
“드물지만 그런 경우가 없진 않아요. 마크 로스코는 회화를 전공하지 않은 미술가인데 나중에 오직 몇 가지 색깔만으로 수백 호짜리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추상표현주의 대가가 되었으니까요. 마크 로스코처럼 사람의 재능이 언제 어떻게 발현될지는 알 수 없죠. 강수 같은 경우 작년에 실연하고 나서 그림이 확 변한 것 같은데. 종대야, 그렇지 않냐?”
이동석의 아무 생각 없는 폭탄 발언에 종대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임해영이 속으로 피식 실소했다.
이동석의 저런 솔직한 성품이 마음에 들어서 만나고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감정이나 생각을 배려심으로 포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점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것이 엉뚱하고, 분위기 망치고, 민폐일지 몰라도 말이다.
임해영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진실이 불편하고 불쾌하다는 이유로 감추고 숨기는 행위를 싫어했다. 그것에 가려져 있는 사람의 추악한 내면을 혐오했다.
“글쎄, 시기적으로 보면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다른 계기가 있을 수도 있겠지?”
김종대의 난감한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동석이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이 맞을 거야. 사람이 변할 땐 어떤 동인이 필요하지. 그때 실연당한 충격이 결정적인 계기가 돼서 미적 감각에 눈뜬 게 틀림없어.”
김종대는 눈치 없이 말하는 동석이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주하 앞이라 그럴 수 없었다. 오히려 강수 실연 얘기를 듣고도 김주하의 반응이 없어서 의아했지만, 다행이라고 여기며 김종대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근데 무슨 전시장 둘러보니까 빨간 스티커가 절반 넘게 붙어 있어. 이제 오픈한 지 한 시간 지났잖아? 이거 오늘 완판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이동석이 고개를 저었다.
“나중엔 완판되겠지만 오늘 완판되기엔 전시 작품이 너무 많지 않냐? 무려 75점이나 되잖아. 절반 넘게 팔렸어도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하긴 보통 개인전 출품작 수의 세 배나 되는 작품 수라 오늘 완판되긴 쉽지 않겠다. 나도 한 작품 구매하고 싶긴 한데 그림값이 이천만 원이나 하니 엄두가 나지 않네.”
“강수 그림이 탐나면 나중에 작업실 가면 한 점 달라고 해. 너도 네 그림 한 점 주면 되지.”
김종대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작년이면 몰라도 지금은 워낙 그림값이 벌어져서 그럴 수가 있어야지.”
“친구끼리 무슨 그런 걸 따져? 사실 그동안 별생각 없었는데 다음에 강수 작업실 가면 내 그림 주고 강수 꺼 한 점 달라고 할 거다. 마음에 드는 걸로 가져와야지.”
김종대가 이동석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염치가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할 뿐이지 그림 한 점 맞바꾸자고 하면 강수 성격에 싫다고 할 리 없었다.
“하하, 그것참. 돈 주고 사기엔 너무 비싸고, 나도 그래야 할까 보다.”
주하가 김종대와 이동석의 대화를 들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오늘 완판이죠. 여섯 시에 남은 작품은 내가 다 구매할 텐데.’
뭔가 생각났는지 김종대가 주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참, 주하 씨, 오늘 방송국에서 촬영하러 오는 거 알아요?”
방송국이란 단어에 놀란 주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금시초문인데요. 누가 그래요?”
“장 선배님이 얘기해 줬는데 방영은 미정이지만 DBC 한 주간 문화계 소식에서 강수 전시 촬영하러 온대요. 한 주간 문화계 소식에 전시회가 소개되면 정말 대박인데 말이죠.”
“왜 촬영만 하고 방영은 미정이에요?”
“원래 한 주간 문화계 소식에서는 공익성 성격의 미술관 전시 위주로 소개하지 개인전 소개는 잘 안 해요. 사실 강수가 널리 알려진 중견작가도 아닌데 왜 강수 개인전을 촬영하는지 의문이긴 해요.”
“그렇구나. 헤헤. 기왕이면 TV에 방영되면 좋겠다. 해영언니, 우리 1층으로 내려가 봐요.”
“그럴까요.”
들뜬 얼굴의 주하를 필두로 네 사람은 1층으로 내려갔다.
*
강수의 작품은 빠른 속도로 팔려나가고 있었다.
장영봉은 자기의 책상 앞 소파에 앉아서 다양한 컬렉터와 구매계약서를 작성했다.
작품 한 점을 구매한 40대 여성 컬렉터와 구매계약서 작성을 끝낸 장영봉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사모님, 작품 구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호. 나도 멋진 작품을 소장하게 되어 기분 좋네요. 이강수라는 작가. 아주 기대가 커요. 장 부장님이 신경 써서 키우셔야 해요.”
“물론이죠. 내년엔 해외 전시를 통해서 글로벌 미술계에 알릴 계획입니다. 내년에 보시면 알겠지만 이강수 작품 구매하신 걸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호호. 장 부장님만 믿어요. 그럼 수고하세요.”
“예. 들어가십시오.”
사무실을 나가는 중년 여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로써 47점째 판매되었구나. 전시 작품이 75점이라 엄청나게 팔렸어도 28점이나 남다니. 허허. 웃음밖에 안 나오네.’
책상으로 가려던 장영봉은 사무실로 들어선 사람에게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바라보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박윤재 관장이 무슨 일로?’
갤러리윤 박윤재 관장이 김이라 큐레이터와 사무실에 들어온 것이다.
박윤재는 한국 최고 갤러리의 한 곳인 갤러리윤의 오너이자 한국 2대 예술품 경매회사의 하나인 와이옥션의 소유주였다. 조 관장과는 서로 아는 사이이고 미술계에서는 선의의 경쟁을 하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장영봉이 얼른 앞으로 나가 박윤재를 맞이했다.
“관장님, 어서 오십시오. 이쪽으로 오시죠.”
장영봉이 소파를 가리켰다.
장영봉은 두 사람을 모시고 온 여직원에게 음료수를 부탁했다.
“그래. 장 부장, 오랜만이지?”
“예. 관장님. 한데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셨네요? 조창석 관장님 만나러 오셨는지요?”
“여기 온 김에 만나보긴 하겠지만 미리 연락하진 않았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온 건 아니고 이강수 작가 ‘열다섯 개의 시선’ 전시회 관람하러 왔다네.”
“아, 그러셨군요. 작품은 살펴보셨는지요?”
“봤지. 작품은 역시 기대한 대로 훌륭하더군. 이강수 작가 첫 번째 개인전은 오프닝 날 완판됐었지?”
“예. 그렇습니다.”
“이번 전시회 작품도 둘러보니 절반 이상 팔렸더군. 이거 놀라운 일 아닌가?”
“전시 작품이 너무 빨리 팔려서 저도 놀라고 있습니다. 이강수가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 대중적인 주목을 받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작품이 묘하게 사람을 끄는 마력이 있어. 아마도 편안한 구도와 섬세한 묘사, 색채의 절묘한 조화와 균형이 그런 마력을 뿜어내는 것 같아.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그 마력에 끌려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일으킨단 말이지. 그래서 그림 몇 점 구매해야겠네.”
“예? 관장님이요?”
장영봉이 놀란 눈으로 박윤재를 바라보았다.
작가의 그림 가치를 형성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국공립 미술관의 작품 소장 여부와 미술계에 영향력 있는 사람의 컬렉션 여부는 그림 가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박윤재 관장의 컬렉션이 바로 그런 경우다. 박윤재 관장이 이강수 그림을 구매했다는 소문이 돌면 이강수 그림값은 수직 상승한다.
장영봉이 놀란 이유였다.
박윤재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장영봉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관장님, 어떤 작품을 구매하실 건지요?”
“김 실장, 리스트 줘.”
“네.”
김이라가 수첩의 종이를 찢어 장영봉에게 내밀었다.
작품리스트를 살핀 장영봉이 속으로 다시 한번 놀랐다.
종이에 적힌 작품은 제목당 4점씩 모두 16점이나 됐다.
“이걸 다 구매하신다고요?”
박윤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네 점을 붙여놓으면 한 작품 같지 않은가? 겸사겸사 넉 점씩 구매한 것이야. ‘마지막 시선으로부터’는 딱 넉 점 남아 있더군. 아슬아슬했어.”
‘이필성 사장처럼 16점 구매하는구나. 그리고 보면 이 사장 안목도 보통은 아니야.’
“알겠습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장영봉은 판매리스트와 박윤재의 구매리스트를 대조했다. 다행히 중복된 작품은 없었다.
“전부 구매할 수 있습니다.”
장영봉이 책상에서 구매계약서를 가져와 김이라에게 건네주었다.
김이라가 서류 작성을 끝낸 뒤 박윤재가 사인했다.
“아, 그리고 작품 감상하다 든 생각이네만 10월에 여는 와이옥션 홍콩 경매에 이강수의 그림 석 점쯤 출품해 보는 건 어떤가? 물론 조 관장에게 물어보겠지만, 자네는 이강수에게 작품을 출품할 수 있는지 알아보게.”
장영봉은 박윤재의 등장으로 여러 번 놀랐다.
이강수의 해외 진출은 내년부터 추진하려고 계획했지만 10월로 앞당겨질 가능성이 커졌다. 박윤재 관장이 자기 갤러리 전속이 아닌 이강수에게 어째서 관심을 쏟는지 의문이 들었다. 박윤재 관장이 이강수에게 전속 화가 제안한 사실을 모르는 장영봉이 의문을 품은 건 당연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김 실장.”
“예, 관장님.”
“난 조 관장 만나보고 들어갈 테니까 먼저 사무실로 돌아가. 경리 부장한테 연락해서 계약금 부치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그럼 박 부장, 수고하게. 먼저 일어나겠네.”
“예, 저는 이 작가에게 작품 출품 여부 알아보겠습니다.”
박윤재가 관장실로 가고 나서 장영봉이 김이라에게 물었다.
“김 실장님. 홍콩 경매라니? 갑자기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죠?”
“왜요? 싫어요?”
“그럴 리가요. 다만 이강수는 해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화가잖아요. 홍콩 경매에서 해외 컬렉터들이 외면할지도 몰라서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강수 작품을 관장님이 높게 평가하셨어요. 박 관장님은 작품만 좋으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김동유, 강형구, 최소영 작가처럼 좋은 성과를 낼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요.”
장영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년부터 이강수의 해외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10월에 홍콩 경매에 출품하면 이 작가 해외 진출이 한결 쉽긴 하겠네요.”
“홍콩 경매부터 포문을 열어봐요. 사무실로 들어가야 해서 저도 일어날게요.”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김이라는 총총히 사무실을 나갔다.